구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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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
具本雄 | Ku Pon-ung


파일:1805_528_1.jpg

출생
1906년 3월 7일
한성부
사망
1952년 2월 2일 (향년 4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자택
국적
[[대한제국|

대한제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제국"
행정구
]]
→ [[일본 제국|

일본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일본 제국"
행정구
]]
→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사영(士英)
아호
서산(西山)
직업
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학력
신명학교
경신고등보통학교
가와바타 미술학교
니혼대학 전문부 (미학)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배우자
강임[1](1908~1970.9.27.)

1. 개요
2. 생애
3. 작품
3.1. 여인
3.2. 친구의 초상
4. 친일 행적
5. 참고 자료
6. 여담



1. 개요[편집]


일제 강점기대한민국의 서양화가, 조각가, 미술평론가.

야수파표현주의적 화풍을 국내 화단에 처음 소개한 화가이다. 대표작으로 〈친구의 초상(우인상), 1935〉, 〈여인〉 등이 있다.


2. 생애[편집]


1906년 3월 7일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具滋爀)이고, 숙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어머니가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2살 무렵,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서 평생을 등이 굽은 꼽추로 살았다고..[2]

신명학교, 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미술에 입문하여 고려미술회의 고희동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고려미술원에서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조각을 배운 뒤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가 불편한 구본웅에게 조소는 쉬운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했으며,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1928년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1928년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재학 중인 1930년 그는 당시 도쿄에서 열린 전통적인 미술 경향의 일과전(一科展)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과회(二科會) 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당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과전에서 입선되었다고 보도되었으며 1930년에는 이과전 출신자 중 야수파 성향의 미술가들이 모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독립미술가협회 전람회를 열었고 야수파적인 성향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3년에 귀국하였다. 그 직후에는 서화협회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듬해 1934년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 1935년 백만회 등의 진취적인 성향의 미술단체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에는 《청색지》를 창간해 약 2년 동안 발행했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는 이상, 이육사 등의 작품이 실린 수준 높은 잡지였다. 그런 한편 정판사(精版社)를 경영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4]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주장했다.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40년),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을 그린 〈우인상 (한국명: 친구의 초상)〉(1935년) 등이 있다.[5]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를 통한 강한 주관성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도 불린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언론계에도 종사하여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몸이 쇠약했던 구본웅은 휴전을 앞둔 1952년 2월 2일 오후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후손에 따르면, 죽기 한 해 전부터 몸져 누웠다고 한다. 사인은 “영양실조에 의한 노쇠”로 설명되어 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1번지에 있으며, 부인 강임(姜姙)과 합장하였다. 1954년 유작전이 열렸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더불어 시화첩 《허둔기》가 출간되었다.


3. 작품[편집]



3.1. 여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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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2. 친구의 초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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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 친일 행적[편집]


1939년 18회 《조선미술전람회》를 평하면서 “내선일체의 현하에 있어 조선미전[8]을 일 변방의 사실로만 둘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중앙화단의 연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 6. 13~16)

이듬해 1940년 7월 일본 제국의 신동아 건설론에 고무받아 쓴 「사변과 미술인」에서 “(…) 미술인은 또한 뜻과 기技를 다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여 온 것은 말할 바 없으며, 혹은 종군화가로서 성전을 채취彩取하며, 혹은 시국을 말하는 화건畵巾을 지움으로써 뚜렷한 성전聖戰 미술을 날게까지 되어 온 것이 금일의 미술계이며 3년간의 미술 동향이었다. (…) 금일의 전쟁은 선전전이 큰 역할을 하는 터이라 (…) 미술이 가진 바 수단이 곧 일종의 무기화하는 감까지 있음은 미술인으로서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미술인이여!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가진 바 기능을 다하여 군국(軍國)에 보(報)할 것이다”라 외치며 일본 제국의 침략 전쟁에 참전할 것을 권했다.

8.15 광복 이후 41세이던 해에 구본웅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참회한다. 하지만 이 글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은 구본웅의 1945년 미발표 유고로써, 공식적인 발표는 1975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내 나이 41, 생활의 대부분과 미술생활의 전부가 왜정의 그물 속에서 지냈다. 나의 미술적 수학 내지 수업이 왜정의 손끝에서 되었다. 고고히 나의 미술이 왜적倭的 감념感念이 없다고 그 어찌 선뜻 말하겠는가? … 나는 솔직히 말하노니, 나의 뇌수를 청소시키지 않고는 참다운 나를 찾지 못할 것이며, 그 청소는 쉽사리 일조일석에 완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미에 대한 관점을 왜정식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왜정적 코스에서의 관념과 방법을 청산하자는 것이 나의 논조이다.”

구본웅,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


5. 참고 자료[편집]




6. 여담[편집]


  • 발레리나 강수진의 외조부가 구본웅이다.

  • 그가 남긴 그림들은 6.25 전쟁폭격을 맞아 대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구본웅의 자식들은 아버지의 작품들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거의 찾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과천시국립현대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에서 그의 그림을 찾을 수 있지만 고작 10점이 안 된다. 다행히 구본웅 스스로가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놓았는데, 그것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그의 그림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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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참수(姜參秀)의 딸.[2] 의학적으로는 다쳐서 꼽추가 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척추만곡이 심했던 것으로 보아 선천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3] 「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4] 「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5] 초등학교 시절 다른 학생들은 구본웅을 곱추라고 놀렸지만, 이상은 끝까지 존댓말을 써가며 그를 형으로서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장애 때문에 학교를 늦게 들어갔기 때문.[6] 파일:kubonung1.jpg
왼쪽은 사토미 가즈오(里見勝蔵)의 1936년작 '여자', 오른쪽은 구본웅의 1940년작 '여인'. 구도와 색채가 비슷한 것으로 일본 미술사조의 영향력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7] 하얀 색으로 이마와 코를 칠한 것은 위의 모작 '여인'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감과 구도,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야수파의 양식이 구본웅 스스로의 것으로 체득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친구의 초상'은 구본웅의 절친한 단짝 친구였던 시인 이상을 그린 것으로, 하얀 색 물감으로 덮혀진 이상의 얼굴과 뒤의 어두운 배경이 대비되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또한 이상이 실제로 폐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과 야수파의 기괴하고 강렬한 느낌이 겹쳐져 묘한 리얼리티를 만들어 내고 있다.[8] 조선미술전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