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본웅 (문단 편집) == 생애 == 1906년 3월 7일 [[한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출판사인 창문사(彰文社)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기업인 구자혁(具滋爀)이고, 숙부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기독교]] 계열의 유력 인사 구자옥이다. 어머니가 구본웅을 낳고 일찍 사망한 뒤 2살 무렵, 돌보는 사람의 실수로 척추를 심하게 다쳐서 평생을 등이 굽은 꼽추로 살았다고..[* 의학적으로는 다쳐서 꼽추가 된 것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척추측만증|척추만곡]]이 심했던 것으로 보아 선천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신명학교, [[경신고등학교(서울)|경신고등보통학교]]를 다녔고, 경신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미술에 입문하여 고려미술회의 [[고희동]]에게서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고려미술원에서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여 조각을 배운 뒤 화가이면서도 조각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가 불편한 구본웅에게 조소는 쉬운 분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1년]] 조각 부문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얼굴습작〉으로 특선으로 입상했으며,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뒤 1928년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에서는 1928년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를 거쳐 1929년 [[니혼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전문부 미학과에서 수학하고,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하는 등 다채로운 교육을 받았다. 다이헤이요 미술학교 재학 중인 1930년 그는 당시 도쿄에서 열린 전통적인 미술 경향의 일과전(一科展)에는 관심이 없었고 이과회(二科會) 미술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입선했다. 당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과전에서 입선되었다고 보도되었으며 1930년에는 이과전 출신자 중 [[야수파]] 성향의 미술가들이 모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독립미술가협회 전람회를 열었고 야수파적인 성향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1933년]]에 귀국하였다. 그 직후에는 서화협회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듬해 1934년 서양화가 단체인 목일회, 1935년 백만회 등의 진취적인 성향의 미술단체 창립에 참여했고 미술비평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에는 《청색지》를 창간해 약 2년 동안 발행했다. 종합문예지인 《청색지》는 [[이상(작가)|이상]], [[이육사]] 등의 작품이 실린 수준 높은 잡지였다. 그런 한편 정판사(精版社)를 경영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 화단의 '일본 화단화'를 주장하는 글[* 「조선미전 양화참견기」, 『조선일보』 1939.6.13] 및 '신회화 제작은 화가의 보국'임을 주장하는 글[* 「조선화적 특이성」, 『동아일보』 1940.5.1~2] 등을 썼다. 특히 「사변과 미술인」(『매일신보』 1940.7.9)에서는 미술인들의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주장했다. 구본웅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다양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나, 색채가 강렬하고 붓질이 거칠어 [[야수파]] 계열로 분류된다. 대표작으로 여성의 신체를 과장되게 묘사한 〈여인〉(1940년), 초등학교 동창인 작가 [[이상(작가)|이상]]을 그린 〈우인상 (한국명: 친구의 초상)〉(1935년) 등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다른 학생들은 구본웅을 곱추라고 놀렸지만, 이상은 끝까지 존댓말을 써가며 그를 형으로서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구본웅은 장애 때문에 학교를 늦게 들어갔기 때문.] 형태의 왜곡과 어두운 색조를 통한 강한 주관성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일찍부터 표현주의적 경향을 받아들여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도 불린다. 해방 이후인 1946년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서 미술과목 편수사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언론계에도 종사하여 서울신문사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서울신문]]》 제작에 참여한 것이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몸이 쇠약했던 구본웅은 휴전을 앞둔 1952년 2월 2일 오후 4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후손에 따르면, 죽기 한 해 전부터 몸져 누웠다고 한다. 사인은 “영양실조에 의한 노쇠”로 설명되어 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고양)|효자동]] 1번지에 있으며, 부인 강임(姜姙)과 합장하였다. 1954년 유작전이 열렸고, 1974년에는 유작전과 더불어 시화첩 《허둔기》가 출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