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공자 (문단 편집) == 제자 == 3,000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여[* 다만 최술은 수사고신록에서 이는 후세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의 제자는 70명이라고 한 이야기를 더 신봉한것], 이후 전국시대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받은 72명의 제자가 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주의화시킨 인물이고,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은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나라에 세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이고, [[한비자]]나 이사 등은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자공]], [[자로]] 등의 주요 인물만 대단한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이후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유랑생활 할 때도 공자의 제자들은 수시로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소개로 공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공자가 10여년 동안 유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벌이었던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 공자가 마냥 가난했다고만 생각하는 건 착각. 군주나 고위관료들과 교류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은 있어야 된다.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도 공자는 집에 마굿간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 몇 대는 굴렸다는 뜻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확고하게 굳어진 신분제도가 없었다. 물론 [[노비]]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신분적으로 규정된 노비가 아니다. 공자는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도 들에서 살던 양아치였다. 공자 본인도 산골에서 태어난 천한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어릴 때 천하다며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아버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나라 재상(大宰, 태재)이 공자를 보고 "정말 성인이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니."라고 재주가 많음을 비꼬았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말했다. '''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잔재주가 많을 뿐이다. 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 꼭 그렇진 않은 법이다.'''[* [[논어]] 자한편에서: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