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영환 (문단 편집) == 기타 == *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이 그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공부하였음에도 외국어를 참 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홍삼 열뿌리를 선물해주기도 하였으며, 김영남 외교부장에게도 "국내에서 공부했는데도 이리 외국어를 잘하는데 뭣 때문에 자꾸 외교관들 유학 보내달라면서 달러를 달라고 하느냐?"면서 핀잔도 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때 김영남한테 내리갈굼을 당할 줄 알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고 하였다. * 1등 서기관 근무 중 [[소련]]의 개혁과 개방,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김일성을 매우 존경한 인물이었다.]의 총살, [[독일]]의 통일을 보며 많은 충격을 느끼고 가치관의 혼란이 온 것이 망명의 첫 번째 이유였다. 이 혼란 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말들[* 이들 중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공관에 나와 있던 국가보위부 파견관이 "김일성 주석님도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될 수 있다"로 곡해해서 평양 본부에 전달했다고 한다.]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에 들었다. 곧이어 보위부의 체포조가 [[자이르]]로 도착하기 1시간 전 제3국으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 탈북 과정에서 고영환은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배우기로는 해외에 나와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다 중앙정보부 특무인 줄로만 알았기에 눈만 마주쳐도 몸을 벌벌 떨면서 달아났고, 입국 직후에도 정보기관에서는 자신의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부터 시작하리라 여겼다. 이한영의 경우에는 실제로 자기가 김정일 처조카라고 주장했다가 안기부에서 어디서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고 한동안 고문을 당했다.[* 국내 정보기관에선 오래전부터 신원이 불분명한 탈북자는 일단 간첩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고문으로 조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런 악습은 1998년 김대중 집권과 함께 사라졌다. 고영환은 이미 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정부도 신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을 피한 것이며, 이한영은 그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라 당시 관행상 고문을 당한 것이다.] * 탈북 과정에서 북한 외무부와 대사관 외교 문서 원본을 들고 왔는데, 안기부에서 당시까지 김정일의 친필 사인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고영환이 들고 온 문서에 암호와 친필이 들어 있어 상당액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둘 중의 하나만으로도 북한 대사는 정치범 수용소를 면치 못 했을 것이라고 한다. * 의외의 정보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실제로 군을 통솔하는 조직이 아니라 총참모부의 일개 부서라는 것을 알려줬다. 이는 당시 정보 당국에서도 놀랄 정도였다. 당시까지 최고사령부가 어디 있는지 어떤 규모의 조직인지를 수십년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이북에 있을 가족들의 신변 때문에 처음에는 언론공개를 꺼렸으나 [[안기부]] 요원의 설득으로 공개 활동에 나서게 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큰 충격으로 와닿았는데, [[김정일]]이 가장 총애했던 사람이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분노하여 고 씨의 가족과 친척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수용소에 붙잡혀 가던 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밤새워 오열했다고 한다. * 북한에서 겪었던, 들었던 이야기와 외교관으로써의 술회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탈북하기 까지의 과정을 담은 저서인 '평양25시'라는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 같은 탈북 외교관인 [[태영호]] 공사와 자주 통화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태영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청원과 태영호의 신변을 보호해달라는 청원이 같이 올라오는 것에 대해 태영호가 어리둥절해하자, 여러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며 돌려보내기를 바라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도 그 이상으로 있으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김일성]]의 프랑스어 통역관을 지냈다. 어느 날 마침 담당 통역관이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대타]]로 나섰다가 김일성에 눈에 띄었던 것. 그는 프랑스어권에서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프랑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국산]]이라고 더욱 칭찬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외국어 인재들을 유학 보내던 [[김영남]]이 그 자리에서 한 소리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말은 김일성의 육성으로 이루어진 발언이었기에 '''김일성 교시'''로 취급되어, 고영환의 인사문건 맨 앞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고영환은 이때 "비동맹국 흡수와 관련한 정책 제의서"를 적었고 이를 대견하게 본 [[김정일]]에게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 프랑스어 통역을 맡으면서 같이 김일성의 지하 벙커에도 들어가보고 김일성의 비행기, 특급 열차, 요트 같은 것을 모두 타 보았다고 한다. * 외교관으로서 80여개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북한만큼 폐쇄적인 나라는 없다고 평한 바 있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에서 활동할 당시 자이르의 외교관으로부터 "'''우리나라도 독재국가이지만 당신네 나라는 괴물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자이르의 대통령이던 [[모부투 세세 세코]]도 당대 아프리카 독재자들 중 유난히 악명이 높던 인물이었다. 특히 부패와 무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모부투가 얼마나 부패한 인물이었냐면 그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이 '''자이르 GDP와 맞먹는 수준이었던 데다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받던 총 원조액의 '''절반 가량을''' 자이르 혼자서 받을 정도였음에도 32년간 집권하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4%'''도 안 되었을 정도였다. 모부투는 대외적으로 반공을 내세웠음에도 [[1974년]]에 방북했을 때에 북한에 감명을 받아 TV 뉴스를 [[https://www.reddit.com/r/PropagandaPosters/comments/u3ucns/zairescongo_state_news_would_start_its_broadcast/|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하는 등의(...) [[우상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그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며 '모 아저씨'(Uncle Mo)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런 독재자 치하에서 살아온 사람마저 '괴물'이라고 평했을 정도였으면 북한의 독재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만하다. * 비슷한 일화도 함께 전했는데 한 번은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이 방북했을 때의 일이다. 김정일은 시아누크를 환영하기 위해 온갖 외설적인 복장으로 치장한 [[기쁨조]]의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인 시아누크 입장에선 이는 오히려 불경한 일로 보였고 자동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동승하던 북한 외교관들이 시아누크를 말리다가 결국 '''자동차의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세를 취하자'''([[북한/인권|‘당신은 도청당하고 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던 시아누크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 여러모로 북한 세뇌교육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본인은 [[김일성]]이 진짜 하느님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자기가 처음에 김일성 곁에서 통역을 수행하러 주석궁에 갔을 때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통역을 못해서 죽을까 엄청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김일성을 가까이서 보자 배도 나오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목 뒤에 있는 혹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걸 봤는데 그게 좀 깼는지 그때부터 김일성도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 처음에 한국에 올 때 [[한강의 기적]]을 보고 대단히 감동하면서도 자신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하면 아직도 냉전시대 사고에 젖어 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서 이 부분은 실망했다고 한다. * 인생에서 죽을 뻔한 적이 총 3번 있었다. 첫번째,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든 액자의 먼지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액자를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유리만 깨지고 사진 자체는 멀쩡해서 살아남았다. 두번째는 [[조선로동당]] 주관 정신교육시간때 있었다. 이 당시 "남조선에는 600만의 매춘부와 60만의 에이즈 환자가 존재한다."는 간부의 말에 한 동료가 "아니, 1,800만 여성 중에 600만이 매춘부이고 60만이 에이즈에 걸렸는데 어떻게 그런 곳이 아직까지 존속을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고영환은 이 말을 듣고도 당에 보고하지 않아 수용소로 갈 뻔하다 15일 동안 온갖 반성문을 쓰면서 [[자아비판]]을 한 끝에 용서를 받았다. 이때 동료가 말한 것 중 김씨 부자에 관한 얘기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김씨 부자 얘기가 나왔었다면 그 자리에서 끝났을 거라고 한다. 3번째로 망명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해서 죽을 뻔했다. * 한국에도 이름이 낯익은 [[김영남]], [[강석주(1939)|강석주]]를 북한 외교부 근무 시절 상관으로 모신 얘기를 많이 한다. 훗날 외무부 제1부상 [[김계관]]은 아내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프랑스어 통역을 한 경력으로 찍혀 80년대 후반에도 자기 10년 선배이면서도 자기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근무 당시 김정일의 지령으로 1982년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조에 안내조로 들어가 합류했다고 한다. 작전 개시 직전 김일성의 중지 지시로 무산되었는데 가봉이 친 북한국가인데다가 아프리카에서 테러를 하면 40여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북한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다음해 버마에서 테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버마에서 공작원이 자기가 가봉에서 본 공작원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일본 여권을 쓰고 장발을 하고 다녀서 한국어를 못 알아 듣는줄 알고 몇 주 동안 실컷 욕을 했다고 한다. * 영화 [[모가디슈(영화)|모가디슈]](2021) 리뷰를 했다. 재밌고 감명 깊게 보았지만 영화와 실제는 조금 차이가 난다고 했다. 고영환은 소말리아 정부에게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라고 선전하기 위해 이미 모가디슈를 방문한 적이 있다. 90년대는 이미 남북 국력 차이가 기울어져서 더 이상 외교전을 벌이던 시기가 아니고 90년대는 북한 외교의 중심이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서 대미외교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3세계 외교전이 종식된 것은 의외로 박정희 시대로, 남북한 모두 유엔 총회에서 더 많은 지지표를 얻기 위한 똥꼬쇼에 매달렸는데 1974년에 남북한 지지결의안이 죄다 통과되면서 이를 병림픽이란 것을 깨닫고 돈낭비를 중단했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견제는 어느 정도 했고 친북국가들과의 수교를 위한 투자외교는 이어졌으나 90년대 들어서는 순전히 북한 견제를 위해서 어거지로 설치했던 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을 철수하는 등 3세계에 대한 투자를 더 줄여버렸다. *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평가를 내렸다. 임기가 3달도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북 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밝혔는데, 대북 관계를 지나치게 순진하게 접근했다는 것이 주요 비판 사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