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유정난 (문단 편집) == 영향 == 계유정난과 [[세조(조선)|세조]]의 집권 과정에서 조선 전기에 문무를 상징하던 기관인 [[집현전]]과 [[총통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정난을 이끈 공신들에 의해 [[관학파]]가 [[훈구파]]로 변질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며 조선의 정치계에 혼란을 일으키자 세조의 손자인 [[성종(조선)|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려고 [[사림파]]를 등용하게 된다. 왕권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계유정난을 평가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장손 왕위 계승이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42명이나 되는 공신들의 세력이 생겨났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왕권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나마 비슷한 사례로 비교되는 [[숙종(고려)|고려 숙종]]의 사례는 최소한 [[헌종(고려)|조카]]가 워낙 병약하다보니 후계자도 숙종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던데다 [[이자의]]가 선공을 가했다는 명분을 제시했으며, 실제로 헌종은 양위 이후에도 내내 자리보전만 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사망했음에도 별 의혹이 제기되지 않아 숙종은 이후 정통성에 대한 큰 시비 없이 의욕적으로 국정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계유정난은 그런 게 하나도 없이 [[실록]]에서조차 그냥 __수양대군이 대신들이 맘에 안든다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선공을 가했음__을 부인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한창 팔팔하고 건강한 왕(15세)이 윗세대(39세)에게 양위하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했다.''' 심지어 공신 세력들이 왕권을 등에 업고 반대 세력들 축출에 앞장서는 등 부정부패와 전횡으로 인해 세조가 여러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은 오히려 나빠졌다. 게다가 세조 본인이 신하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것과는 별개로 공신들의 전횡에 손을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결과적으로 관료들의 전횡이 심각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세조가 왕권이 강한 것처럼 보인 건 세조를 지지한 공신들의 기반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세조는 자신에게 대놓고 반항한 이들 정도를 제외하면 공신들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건 처벌하지 않았다. 시각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못 했다고 봐야 하는 게 옳을 것이다.[* 단, 실제로 쿠데타를 수행한 세력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치지 않는게 훨씬 일반적이다. 태종이 특이한것 처럼 보이지만, 태종 또한, 진짜 문제성있는 본인 아내 집안과, 이숙번 같은 왕권에 진짜 위협될만한 존재들만 쳤을 뿐 그외 나머지 쿠데타를 실행한 자들은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멀리 갈 것 없이 박정희, 전두환 사례만 봐도, 공신들을 내치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그렇게 고려를 멸망시키고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까지 없애고자 했던 권문세족들의 특권이 다시 훈구파들이 득세하면서 부활하게 되었고, 이는 조선의 왕권 그리고 재정에 계속해서 해악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후 조선의 왕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왕 자리가 찬탈당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자신의 보호막 역할을 할 공신들을 많이 세우게 되었는데, 이 공신들과 반대편 대신들 그리고 공신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이들 간의 갈등은 [[사화|조선 전체의 정국]][[이괄의 난|을]] [[정묘호란|뒤흔드는]] [[병자호란|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__왕실어른의 부재로 인해__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성공이 가능했던 정난이었기 때문에 후대 자손들인 조선 왕들은 이를 교훈 삼아서 왕비가 죽으면 무조건 [[계비]]를 맞게 되었다. 사실 정비가 죽고나서 계비를 맞이하는건 전통적으로 대부분 왕조 국가에서는 이상한 게 아니었고 한편으로는 문종과 세종처럼 정비가 죽고나서 계비를 안 맞아들이는 사례도 의외로 흔했다. 단지, 조선 뿐만 아니라 왕실의 권위 및 위계질서가 중요한 다른 국가들도 계유정난 같이 왕실어른의 부재로 인해 어린 왕이 왕위를 찬탈 당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조선에서는 15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고 백성들의 입이나 사림파들의 입을 모두 막을 수 없었으므로 세조의 후손들도 조상인 세조의 찬탈과정이나 배경을 알게모르게 배웠을 것이므로 자기 자손들도 단종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계비를 맞이하여 더욱 왕실의 중심을 세우게 된 것이다.[* 사실 문종처럼 오히려 아내가 없는 경우가 다른 의미로 안 좋은데 조선에서 왕비란 단순히 왕의 아내의 위치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 궁중 여인들의 품계의 총칭인 내명부의 수장이라는 위치에도 있기 때문이다. 즉 왕비가 없다는건 내명부의 수장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세자빈의 사후부터 왕실에 줄초상이 났는데 1441년 현덕왕후(당시엔 세자빈) 사망을 시작으로 3년 뒤에 광평대군(1444년 12월 7일)이, 불과 한 달 뒤에는 평원대군(1445년 1월 16일)이 사망했고, 또 1년 뒤에는 소헌왕후가 사망했으며 4년 뒤에는 세종대왕이 사망했다. 문종이 재혼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이 전혀 조성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장례기간 같은 경우에는 당연히 제외이며 부모의 장례는 보통 삼년상이므로 소헌왕후가 사망한 이후나 세종대왕이 사망한 후는 당연히 안 되며 심지어 장례 치르느라 몸이 상했다. 기회라고 한다면 1441년(현덕왕후 사망)과 1444년 광평대군이 죽기 전 사이의 시간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보통 정부인이 죽으면 상기 자체는 기년(1년)이지만 몇 년 정도 재혼하지 않는게 원칙이었던터라 하필이면 현덕왕후의 탈상과 광평대군의 사망은 3년정도 밖에 차이가 안 나서 애매했다. 그 다음 기회로는 평원대군 사망과 소헌왕후 사망 사이 기간(약 14개월)를 들 수 있겠으나 세자빈 간택 절차가 통상 6개월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절차를 밟다가 중단되고 말았을 것이다. 재혼할 생각이 없었는지 재혼하려고 했는데 운이 나빴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양쪽 다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서양조차도 왕이 죽기 전에 왕비 자리가 비어있는건 그리 좋지 않았는데 왕비란 자리는 왕의 유고시 및 대비가 될시 동서고금 막론하고 종친, 즉, 왕족들의 최고 웃어른이기도 해서 왕위 다툼을 방지하거나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