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유정난 (문단 편집) == 경과 ==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 김종서,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인, 조극관[* 김종서와 황보인 이상으로 집안이 큰 피해를 보았다. 훗날 [[경종실록]]에는 조극관의 자손을 김종서와 황보인의 자손처럼 후히 대우하자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조극관의 아들 조정서는 귀양 가서 죽고 동생 조수량도 사사되었다. 본인의 후손은 끊어져서 없고 조수량의 후손만 있다.], 민신, 이양 등의 신료들은 함께 역모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수|효시]]되었고 이후 형제인 [[안평대군]]마저 역모로 몰아서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키고 [[공신#s-1.2.4|공신]]이 된 이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눠주는''' 비정한 행보가 이어졌다. 사실, 이러한 작업들은 조선이 아닌 어느 나라 왕조 시대에도 초기 정변이나 반란이 일어난 이후에 전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장면이다. 또한, 수양대군은 __정난 공신 1등__ 자리에 '''[[셀프훈장|수양대군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임명했고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사돈 관계)이었던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스스로 __[[영의정부사]]__, __[[이조판서]]__, __[[병조판서]]__, __내외 병마 도통사__ 등 '''온갖 직위를 모두 겸직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로서 수양대군은 사실상 단종을 따르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데 성공하면서 실질적인 왕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일파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으며 [[집현전]]에 자신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게 하는 등[* 이 시기까지 집현전 같은 소장 세력들은 황보인보다는 세조 측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을 추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이 이탈하는 것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직접 즉위하는 시기부터이다.] 단종을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행보를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 2년만에 숙부의 힘과 야욕을 견디지 못한 어린 조카가 숙부에게 양위를 함으로써 끝끝내 권좌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결국, 단종은 강제로 권좌에서 끌려내려오게 되었고 실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왕]]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기서, 정난 공신으로 책봉된 42명[* [[훈구파]]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세조의 즉위 이후 책봉된 소수의 [[공신#s-1.2.5|좌익 공신]]들이다. [[성삼문]]이 포함되었다가 [[사육신]] 문제로 제외되는 것 역시 좌익 공신 이야기.]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실제로 이후 단종 복위 운동에 뛰어드는 집현전 학자들이나 왕실의 인물 등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는데, 단순히 포섭용으로 보기에는 그 지위가 상당히 높고 실권을 포함한 직책들이 분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난 공신과 세조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임명한 좌익 공신을 비교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계유정난의 참여 세력에 대한 이견도 나타나고 있다. 계유정난의 파장은 상당해서 [[김종서(조선)|김종서]]의 측근인 [[이징옥]]이 후일 난을 일으키는 등 민심이 매우 혼란해졌으며, 난이 평정되면서 또 다른 공신을 만드는 바람에 [[훈구파]]의 세력으로 [[신권]]이 강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이 시절의 전설이나 야사를 살펴보면 민심이 [[단종(조선)|단종]]에게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수 있다. 동시에 세조 측에 [[보은 속리 정이품송|정2품송]]이 세조를 위해 가지를 들어주었다거나 [[문수보살]]이 세조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설화도 존재해서 상당히 이중적이다. 세조 정권이 정통성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기 때문에 조정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여러가지 미담을 퍼뜨렸을 수도 있다.[*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이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세조의 [[인면수심]] 이미지를 매우 확실하게 심어준 사건이기도 하고. 다만, 지금 남아 있는 이야기들의 경우는 후대에 더해진 경우가 상당해서 어디까지가 당시의 관점이고 어디까지가 후대에 더해졌는지 알기는 어렵다. 단적으로 숙주나물 드립은 [[신숙주]] 문서에서 알 수 있지만 명백히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당대에는 없던 단어였고, [[사육신]]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남효온]][* [[생육신]]의 일인이지만, 사육신 사건 때는 5세였기 때문에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애초에 단종 폐위 때 3세였던 남효온을 생육신에 포함하는 것도 논란이 많다. 이와 관련해서는 남효온이 김장생, 김굉필 등 초기 사림 관련 인물로 사화 때 타격을 입은 것 때문에 포함되었다는 평도 존재한다.]의 육신전은 '''전기 소설'''이며, 순수하게 평가하기에는 남효온이 김종직의 직전 제자라서 초기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 과정이 상당부분 걸린다. 단적으로 [[무오사화]]의 단초가 된 것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남효온과 사형제인 김굉필이 실록에 넣은 것이기 때문에, 이후 조선 중반 이후를 지배하는 사림은 이 문제를 상당히 강조했던 것도 있다. 때문에 후대에 민간 설화가 가필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므로 여러모로 어려운 문제이다.[* 단적으로 조선 초기의 일화인 [[함흥차사]]나 [[황희(조선)|황희]]와 연결되는 두문동 72현, [[문익점]]과 목화씨 드립 등은 모조리 후대의 가필이다. 당대에 없는 일화가 후대에 가필되고, 이게 민간 설화처럼 퍼지는 경우는 너무나도 흔하다.] 한때 성삼문이 정난 공신에 포함되고,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훗날의 단종 근왕파들이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싫어한 소장파들이 권신을 몰아낸 계유정난은 찬성했지만 훗날 단종을 아예 몰아내는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반대했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성삼문을 비롯한 소장파들은 계유정난을 축소하고 정난 공신을 최대한 줄이려고 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이 사건으로 죽은 이들은 이후 [[숙종(조선)|숙종]] 대에 다시 복권되었고, [[장릉배식록]] 명단에 포함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