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유정난 (문단 편집) == 당시 상황 == 단종의 즉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은 책사 [[한명회]] 등의 조언을 받아서 후일 왕권을 찬탈하기 위한 사전 쿠데타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시작은 명나라에 [[사신(외교)|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원래 [[안평대군]]이 [[이현로]]의 조언으로 사신으로 가겠다고 자청을 했던 상황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때의 실록에 보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갔을 때 [[코끼리]]가 수양대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절을 했다거나 중국인들이 수양대군을 부처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수양대군은 [[석보상절]]을 편찬하고 특히 간경도감에서 우리 글로 된 [[불경]]을 상당량 간행하는 등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이렇게 수양대군을 대놓고 지지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게 당시의 실록이니, 특히 이 부분은 실록 중에서 원문 그대로 읽고 덥석 믿어버리면 안 되는 몇 대목 중의 하나이다. 이 사행길을 통해서 수양대군은 상국인 명나라에 자신이 조선의 유력한 [[왕자]]임을 알리고 인맥을 얻었으며, 후일 사후 승인 등에 도움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점에서는 할아버지 [[태종(조선)|태종]]의 왕자 시절 사신 행보와 비슷하다. 그러나 태종은 [[홍무제]]가 왜구들이 자신들은 조선인이라 거짓자백하여 외교적 불화가 생기자 너희 왕자 한 명이 와서 해명하라 하였을 때 그 왕자 중에서 능력이 가장 뛰어나던 당시 정안군이던 태종이 파견되어 외교적 불화를 해결했던 것이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주변을 방심시켜서 명나라로 간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하고는 다르다. 또한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어느 정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수하 세력들과 함께 방해가 되는 반대파 조정 중신들을 싹쓸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한명회의 '''[[살생부]]'''이다. 이 [[살생부]]의 첫머리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반대파의 거두였던 좌의정 '''[[김종서(조선)|김종서]]였다.'''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수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이미 준비하고 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경복궁]]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자신은 직접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마침 이 날 단종은 궁을 나와 누나 [[경혜공주]]의 사저에서 묵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궁의 경비 상태는 평소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느슨해져 있어서 이 날을 쿠데타의 거사일로 결정한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날 거병을 준비하면서 수하들을 통해 소집시킨 무인들 앞에서 정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듣자마자 '''역모'''라고 판단, 기겁하여 대열에서 이탈, 북문으로 도주한 이들이 꽤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하들 앞에서 수양대군은 "혼자라도 결행한다"며 몇몇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사실, 이미 알아채고 쿠데타의 계획에 이탈한 자들이 있는 상황이라 쿠데타 계획이 유출되는 건 시간 문제였으니 [[기호지세|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주사위는 던져졌다|결과적으로는 잘 지른 셈이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수양대군파인 [[신숙주]], [[최항(조선)|최항]]의 방문을 연이어 받았고[* 최항은 신숙주의 후임이자 2인자였을 뿐 이 시점에서 수양대군파라고 보기에는 조금 미묘한 상태였다.] 계유정난 당시 '''거사 당일엔''' 아예 핵심 세력인 권람의 방문을 받았지만 설마하니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왕자]]의 신분인 수양대군을 공손히 대접하려 하였으나,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면서 편지 한 통을 김종서에게 전달할 뿐이었다. 그리고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양정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조선)|김승규]]와 주변 사람들을 칼로 내리치면서 정변의 막이 올랐다. 이후 수양대군은 서둘러 단종이 머무르고 있던 [[경혜공주]] 저택을 비롯한 도성 4대문과 주요 군 시설, 요충지를 확보한 뒤 이미 장악 당한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궁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동부승지[* [[승지]] 중 최하위직이며 공조에 대응된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경제 수석 정도다. 하지만 동부승지도 [[승정원]] 소속인지라 왕실과 관련된 사안을 다루고 대소 신료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하긴 했었다.] [[최항(조선)|최항]]이며,수양대군은 최항에게 단종의 접견을 요청한다. 최항의 위치가 위치이니 만큼 국왕의 접견을 불허하거나 최소한 시간만 끌어줬다면 계유정난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겠지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는 법이다. 수양대군으로서는 신숙주의 후임인 최항을 당연히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겠지만, 최항은 스스로를 수양대군파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엄연한 [[쿠데타]]로 인식했다. 수양대군은 최항에게 조정 신료들의 리스트를 내놓으라고 했다. 최항은 처음에 말을 돌리며 넘기기를 주저했지만, 수양대군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명부를 넘기고 만다. 그리고 이 명부는 [[살생부]]가 되면서 [[데스노트|바로 빨간 줄이 그어지고]] [[대숙청|반대파들은...]] 수양대군은 국왕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하였으며 한명회와 홍윤성, 홍달손을 시켜서 [[경복궁 광화문|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하도록 명령한다. 이제 정난의 최종 단계에서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하였고 당시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공조 판서 [[정인지]], 참판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히 살아남으면서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 병조 판서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몸이 으스러진 채 죽게되었다. 또한 심한 부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살아서 며느리의 친정으로 피신한 이후 다시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김종서도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리는 등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심지어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현릉에서 참살하고[* 사실, 누군가의 묘소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동은 현대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것과 훗날 [[사육신]]의 난이 있었을 때 문종의 무덤을 파내어 합장된 [[현덕왕후]]의 관을 파낸 사건 등으로 짐작해볼 때 수양대군이 친형 문종에게 열등감이 심해서 패륜 행위를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문종의 고명 대신인 우의정 [[정분]]은 일단 유배시켰다가 그의 처남인 [[정인지]]를 통한 회유가 먹히지 않자 결국 교형에 처했다. 이로써 세종과 문종의 유지를 이어받아 정사를 주도하던 세력은 모조리 살해되면서 세종이 꿈꾸던 조선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