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유정난 (문단 편집) == 계기 == 일단, 비극은 1차적으로는 [[문종(조선)|문종]]이 미처 뜻을 다 펼치기도 전에 '''39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단종(조선)|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사실에 있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할 경우 보통 대왕대비 또는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통해 왕이 장성하기 전까지 정치적인 보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예외적으로 [[숙종(조선)|숙종]]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쪽도 본인이 수렴청정을 거부해서 그렇지, 증조모 [[장렬왕후]]와 어머니 [[명성왕후]]가 살아있었다.] 그런데 짧은 명줄부터 해서 온갖 운이 전부 없던 듯한 문종은 아내복도 없었는지 세 명의 세자빈을 들였지만 모두 이혼하거나 죽어버렸다. 즉,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왕후 자체가 없었다. 그 외에도 세종의 비이자 단종의 조모인 [[소헌왕후]]는 [[세종(조선)|세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는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어린 단종을 돌봐주었으나, 그녀는 안타깝게도 정실이 아닌 후궁이라서 [[수렴청정]]의 자격이 없었다. 단종과 비슷한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던 [[성종(조선)|성종]]의 사례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문종이 배우자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 아들의 왕권을 지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 되었을 수도 있다. 문종은 재위 시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왕이다. 유난히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여복이 없었던 왕이었다. 그 유명한 '[[레즈비언]]' 세자빈 [[순빈 봉씨]]가 둘째 세자빈. 그러나 왕 스스로가 여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세자빈들의 운명이 불행해진 면도 있다. 한편 세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하였다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소헌왕후가 세종의 재위기간에 사망하지 않고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손자에 대한 [[수렴청정]]을 했더라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가설도 있다. [[패륜|친모에게 칼을 겨누었다가는]] 부모와 자녀간의 효를 중요시하던 유교 성리학이 강성했던 조선이었으니 당연히 온 나라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먼 훗날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끝장날 때의 가장 큰 명분 중 하나가 바로 당시 대비인 [[인목왕후]]의 폐위라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더구나 인목왕후는 법적 모친이었을 뿐, 친모도 아니었고 나이도 광해군보다 어렸는데도 저런 반발이 일어났는데, 친모에게 칼을 겨눈다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수렴청정을 해줄 왕실의 어른도 없는 상태에서 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문종은 대신들과 신료들에게 어린 단종을 보필해 줄 것을 많이 부탁했다고 한다. 심지어 [[세종(조선)|세종]]이 [[집현전]] 학사 [[성삼문]]과 [[신숙주]]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말도 알려져 있다.[* 다만, 세종이 단종을 부탁했다는 일화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세종 승하 당시 문종은 만 36세의 한창인 나이였고 [[왕세자]]의 보좌를 부탁하면 모를까 손자를 부탁할 리는 없다. 손자는 현 왕세자이자 차대 왕 문종이 아비로써 얼연히 돌볼 일. 살아있는 세자를 건너뛰고 세손을 언급한다는 것은 예법에도 어긋나고 불길한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성삼문과 신숙주라는 2명의 변절을 대비시키기 위해, 특히 신숙주가 고명대신임에도 성삼문과는 다르게 세종의 정통성을 이은 단종을 배반한 배신자라는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해 극적대비를 노린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정말 그랬다면 재밌긴 했겠지만.] 특히 [[문종(조선)|문종]]은 재위 시에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병으로 사직했기 때문에 참극을 피했다.], [[우의정]] [[김종서(조선)|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다른 말로 '[[고명#s-3.2|고명]] 대신'][* 세 사람 중 남지는 얼마 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유지를 받들게 된다.] 결국 단종 초기에는 의정부와 군권을 장악한 당시 좌의정 [[김종서(조선)|김종서]][* [[병조판서]]도 역임했었다.]를 중심으로 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 등이 권력을 쥐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노신들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필 왕의 숙부들은 [[세조(조선)|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능력있고 야심만만한 왕자들이었으며 부왕의 통치기에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않게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종의 적차남 [[세조(조선)|수양대군]]과 적삼남 [[안평대군]]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서, 사실상 왕실은 두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종 치세 후반기에 의정부 서사제 등을 실시하여 대신들과 신료들의 권력이 강해진 상황에서도 태종이 다진 왕실의 권위는 여전히 강력하였으며, 수양대군은 대신들이 국정을 맡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실록 같은 매체에서는 [[권신]] 김종서 등을 처단한 '구국의 결단' 비슷하게 기록을 해놓았는데, 이들이 전왕 세종과 문종의 [[충신]]들임을 생각하면 승자의 입맛대로 가공되었을 공산이 농후하다. 이런 분위기에 김종서나 황보인, 정분 같은 고명 대신들은 강력한 종친의 존재가 자칫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을 했는지, 일단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포섭한다. 하지만, 사실 이 또한 여러 매체에서 다뤄지듯 강력하게 수양을 견제했다기보다는 [[이이제이]]의 수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종 즉위에 대한 [[명나라]]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수양대군을 명나라로 보내는데 사실 교통 수단이 발달한 지금에야 하루에도 중국을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중국을 간다는 것은 왕가의 일원이었던 수양대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이나, 따라가는 노비나 [[역관]], 의관들에게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수양대군의 세력이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에 얼마나 털려먹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종서나 황보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갔다올 만큼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나 황보인에게 있던 권력이라면 아마 수양대군이 여러 매체에서 보여준 모습을 본 순간 [[숙청]]해버렸을 정도의 힘이었다. 물론 수양대군이라고 이런 사태를 가만히 넋놓고 지켜볼 리가 만무했다. 최대한 조용히 그는 수하에 [[권람]], [[한명회]] 같은 재능이 있으나 과거 급제를 하고도 출세길이 험난한 혹은 과거 급제도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두뇌가 되어줄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신들의 권력 강화에 불만을 느끼고 있고 수양대군과도 세종 치세 한글 관련 문화 사업 등으로 친하게 지내던 집현전 학사 출신 소장 관료인 [[신숙주]] 등[* 위에 언급한 명나라 사절단을 갔다오면서 신숙주를 얻을 수 있었다.]이나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은 [[황희(조선)|황희]] 정승의 아들 [[황수신]], 그리고 실제 충돌이 발생했을 때 수족이 되어 줄 [[홍윤성]], 홍달손, [[양정(조선)|양정]], 이징규, 이징석[* 아이러니하게도 이징규, 이징석은 김종서의 측근 무관이자 후에 세조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킨 [[이징옥]]의 형제들이다. 훗날 이징옥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정난의 일로 이미 형제가 의절한 상황이었고 이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목숨을 부지 했다고.] 등의 무관 등을 끌어모아 세력을 키웠고 심지어 [[천민]] 출신인 임자번까지도 끌어들였다. 수양대군의 측근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숙주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앞길이 훤한 사람이 없다. 그나마 권람은 과거에 장원 급제했음에도 사교력이 부족해 생각만큼 출세 가도를 달리지 못했고 한명회는 과거 급제조차 못한 학사였다. 그외 나머지 인사들도 과거에 급제했으나 변변치 못한 [[한직]]을 전전하거나 급제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던 형편이었다. 출세길이 막혀있으나 야심은 가득해 현행 문종-단종 체계에 불만을 갖고 있는 언더독 계층을 수양대군이 얼마나 포섭하려고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정은 왕을 보필하는 전통적인 유명 대신들과 이들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젊고 급진적인 수양대군 세력으로 양분된다.[*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의 부재가 계유정난의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상황을 막지 못하거나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왕실최고어른인 [[대비]]가 있었다면 이러한 정국을 중재하여 국정의 중심을 잡아 균형을 이룰수 있고, 설사 대비 본인이 그런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동서고금 살아있는 왕대비(태후)의 권위 자체는 무시할수 없기 때문에 그런 대비의 친정인 소위 [[외척]]이 제 3세력으로 등장하여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어린 국왕과 외척의 가장 큰 공동 정적인 종친을 견제할수 있었을 것이다.] 종친 중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과 수양대군의 동생인 [[임영대군]], [[영응대군]], [[신빈 김씨]][*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아 세종의 막내 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을 맡았다.]의 아들 [[계양군]] 등도 수양대군을 지지했다. 그 외에 세종의 차녀 [[정의공주]]의 남편인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도 계유정난에 참여했다. [[종로구]]의 법정동인 재동(가회동 지역의 일부)의 이름이 이 사건에서 기인한다는 설화가 있다. 재동의 옛 이름은 '잿골'인데, 계유정난 때 많은 사람이 살해당해서 길거리에 피가 흥건하자, 백성들이 재를 뿌려서 핏자국을 지웠고 이 때문에 잿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