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유정난 (문단 편집) == 개요 == > "지금 [[세조(조선)|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만일 고집하여 사기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좌의정 [[김종서(조선)|간]] 영의정 [[황보인|흉]]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 >단종 실록 8권,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 계사 1번째 기사[* 종사니, 사직이니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왕이 되어 권력을 잡고''' 싶다는 말임에 유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조선)|세종]]과 [[문종(조선)|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조선)|단종]]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장자 승계 원칙을 무시한 채 정통성과 능력도 부족하고 업적도 없는 막내 아들 [[의안대군(이방석)|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게 문제였던지라 어느 정도 반란을 일으킬 명분은 있었던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권좌에서 몰아내야 된다는 아주 확실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던 [[중종반정]], 집권 이후는 막장이지만 적어도 반정 당시에는 [[인목왕후|폐모]][[영창대군|살제]]와 실정을 일삼은 [[광해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던 [[인조반정]]과는 달리, 계유정난은 [[단종(조선)|단종]]이 정통성과 능력도 완벽하고 폭정이나 실정을 일삼은 적도 없었는데다가 어쨌든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조선)|단종]]도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 나중에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인조]]가 한때 앙숙이었지만 폐위된 [[광해군]]을 끝까지 보호해준 이유가 이런 점을 감안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의 압박과 연이은 반역 시도에 제주도로 보내기도 했지만 끝내 죽이지는 않았다.] 때문에 '''반정을 정당화할 명분이 없었다.''' 애초에 명분이 있었다면 '''세조반정'''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는 조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고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후였기 때문에 많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세조(조선)|세조]]의 정통성은 이후 조선의 기득권을 잡게 되는 [[사림]] 세력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걸린 [[조의제문]]도 결국 이 문제에서 파생되었다. '정난'은 政亂(정계의 혼란)이 아닌 靖難(난리를 안정시킴)인데, 일단 [[김종서(조선)|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수양대군이 [[친위 쿠데타|역쿠데타로 수습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더 확실한 의미와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수양대군의 명분이 없는 쿠데타'''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돌이켜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이라고까지 미화되지 않은 것은, 중종반정 직전의 [[연산군]]과 인조반정 직전의 [[광해군]]이 곧바로 끌어내려진 것과는 달리 단종은 후일 [[사육신]]의 실패로 인해 노산군으로 강봉되기는 하였어도 쿠데타 직후에는 끌어내려지지 않고 임금으로서 수양대군에게 양위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