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조파 (문단 편집) === 장왕합작 === 왕징웨이는 기존 개조파의 주장대로 당과 정부, 군대의 통수권을 분리하기보단 장제스의 세력에 편승하는 모습을 취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쯤 되면 여유롭게 이념다툼을 할 여력이 안되었다. 그가 행정원장에 취임할 동안은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일본과의 무모한 싸움을 피히고자 하였고 화평을 주장했다. 그의 취임기 동안 [[송호정전협정]], [[화북분리공작]], [[하매 협정]], [[진토 협정]] 등이 이루어졌다. 1933년에는 이런 일본 퍼주기식 외교에 외교부장 뤄원간은 외교부장직을 사직하게 되고 왕징웨이는 외교부장직까지 겸임하며 화평 외교를 직접 주도했다. 감찰원은 심지어 송호정전협정이 입법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며 우회적으로 개조파의 친일 외교를 비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징웨이는 이런 반대파의 비판을 무시하는 한편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나치즘]] 사상에 감회되면서 기존의 좌익적인 성향에서 제대로 삐뚤어져 극우로 정치적 성향이 변하였다. 제한된 권력이나마 가지고 있던 합작은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나며 종결된다. 여기서 왕징웨이는 볼과 등에 총알을 맞고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며 사임한다. 왕징웨이, [[천비쥔]] 부부는 이 저격에 장제스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며 장제스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왕징웨이는 단골 레파토리인 외유를 떠난다. 1936년 [[시안 사건]]이 발발하며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복귀한다. 장제스는 화평파의 거두인 왕징웨이를 다시불러 마지막 장왕합작인 제4차 장왕합작을 진행한다. 4차 장왕합작 내내 장제스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며 개조파의 행정원 장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장제스는 시안 사건 이후 항일 노선으로 갈아탄 반면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일본과의 화평과 반공을 주장하며 지난 합작보다 더욱 갈등을 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