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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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활동
2.1. 반장전쟁 이전
2.4. 장왕합작
2.5. 와해
3. 소속 인물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개요[편집]


국민혁명이 완수되며 장제스 정권이 완성된 1929년부터 왕징웨이일본의 괴뢰국 수장이 된 1938년까지 활동한 반장제스 파벌이다. 장제스가 장악한 국민당을 다시 쑨원 시절의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려는 목적을 갖고 활동했다.

2. 활동[편집]



2.1. 반장전쟁 이전[편집]


영한합작과 북벌로 국민당 좌파, 국민당 우파, 서산회의파의 갈등은 일단락되고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국민정부를 주도하고 있던 세력은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였다. 이 상황에서 독자적인 중앙위원회를 유지하고 있던 서산회의파는 가장 적극적으로 반장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왕징웨이 또한 서산회의파와 사이가 안 좋았으나 영한합작이 실질적으로 난징 정부의 우한 국민정부에 대한 일방적 흡수가 되고 국민당 좌파에게 아무 실권도 받지 못하자 장제스와 후한민의 광둥파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분공 결정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국민당 좌파 그중에서도 왕징웨이 일파들은 새로운 이념적 모습을 가지기로 했다.[1]

2.2. 반장전쟁[편집]


장제스는 1929년 편견회의를 개최해서 군벌들의 세력을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겉으로는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던 군벌들은 장제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펑위샹2차례의 장풍전쟁을, 리쭝런장계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에 더해 장제스의 동맹이던 장쉐량마저 중동로 사건에서 소련군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리며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천궁보 등 1929년 10월 국민당 개조동지회를 설립하고 당 중앙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개조위원회는 외유를 떠나있던 왕징웨이를 돌아오길 촉구하였다. 왕징웨이는 마지못해 청을 들어주는 척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장전쟁의 최절정이라 할 수 있는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개조파는 옌시산베이핑 국민정부에 합류한다.

2.3. 1차 양광사변부터 영월합작까지[편집]


반장전쟁이 장쉐량의 개입으로 망하지만 곧 다시 반장파에 기회가 찾아온다. 장제스의 동맹이던 후한민은 장제스가 자신과 같은 우익 당권파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 화북의 3당 세력후스 등 리버럴 세력의 요구인 헌법 복구를 서두르자 이것에 항의했는데 장제스 탕산에 온 후한민을 감금하는 이른바 탕산 사건을 감행한다. 이에 광둥파는 장제스의 하야와 후한민의 석방을 요구하며 광저우 국민정부를 설립한다. 그러자 장제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산회의파, 계계군벌, 상계군벌 등 살아남은 반장 세력이 총집합한다. 개조파도 서둘러 광저우로 향했는데 광둥성을 지배하고 있던 천밍수는 개조파가 광저우로 입성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다른 우익 반장파도 개조파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같은 반장파 중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신새였다. 어쨌든 부유한 광둥마저 반장으로 돌아갔으니 상황은 개조파에게 완전히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하야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것이 영월합작이다. 1932년 1월 1일 쑨커 내각이 개각되고 국민정부 주석에는 서산회의파의 린썬이 선출된다. 여기서마저 개조파는 제대로 된 자리 하나를 받지를 못했다. 왕징웨이는 빡칠대로 빡치며 영월합작에서 이탈한다. 한편 쑨커는 중화민국이 건국 이래로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정확보에 실패하고 같은 해 1월 28일 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며 쑨커는 하야하게 된다.[2] 그리고 후임 행정원장으로 왕징웨이가 화려하게 복귀하며 제3차 장왕합작이 수립된다.

2.4. 장왕합작[편집]


왕징웨이는 기존 개조파의 주장대로 당과 정부, 군대의 통수권을 분리하기보단 장제스의 세력에 편승하는 모습을 취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쯤 되면 여유롭게 이념다툼을 할 여력이 안되었다. 그가 행정원장에 취임할 동안은 일본의 대륙 침공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일본과의 무모한 싸움을 피히고자 하였고 화평을 주장했다. 그의 취임기 동안 송호정전협정, 화북분리공작, 하매 협정, 진토 협정 등이 이루어졌다. 1933년에는 이런 일본 퍼주기식 외교에 외교부장 뤄원간은 외교부장직을 사직하게 되고 왕징웨이는 외교부장직까지 겸임하며 화평 외교를 직접 주도했다. 감찰원은 심지어 송호정전협정이 입법원의 승인을 거치지 않았다며 우회적으로 개조파의 친일 외교를 비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징웨이는 이런 반대파의 비판을 무시하는 한편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 나치즘 사상에 감회되면서 기존의 좌익적인 성향에서 제대로 삐뚤어져 극우로 정치적 성향이 변하였다. 제한된 권력이나마 가지고 있던 합작은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나며 종결된다. 여기서 왕징웨이는 볼과 등에 총알을 맞고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며 사임한다.

왕징웨이, 천비쥔 부부는 이 저격에 장제스가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며 장제스를 불신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왕징웨이는 단골 레파토리인 외유를 떠난다. 1936년 시안 사건이 발발하며 왕징웨이는 중국으로 복귀한다. 장제스는 화평파의 거두인 왕징웨이를 다시불러 마지막 장왕합작인 제4차 장왕합작을 진행한다. 4차 장왕합작 내내 장제스는 비협조적으로 나오며 개조파의 행정원 장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장제스는 시안 사건 이후 항일 노선으로 갈아탄 반면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일본과의 화평과 반공을 주장하며 지난 합작보다 더욱 갈등을 보였다.

2.5. 와해[편집]



3. 소속 인물[편집]



4. 참고문헌[편집]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5.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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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쑹칭링덩옌다는 국민당을 버리고 제3당 운동을 일으키며 국민당을 이탈했다.[2] 이후 그 누구도 다시는 장제스 축출을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장제스는 본인의 일기에서 반대파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자신을 쫓아내기만 급급하며 정작 자신이 하야하면 아무것도 하질 못해 다시 모셔오려고 사정한다면서 울분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