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조파 (문단 편집) === [[1차 양광사변]]부터 [[영월합작]]까지 === 반장전쟁이 장쉐량의 개입으로 망하지만 곧 다시 반장파에 기회가 찾아온다. 장제스의 동맹이던 [[후한민]]은 장제스가 자신과 같은 우익 당권파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 [[중국 청년당|화북의]] [[진보당(중국)|3당 세력]]과 [[후스]] 등 리버럴 세력의 요구인 헌법 복구를 서두르자 이것에 항의했는데 장제스 탕산에 온 후한민을 감금하는 이른바 [[탕산 사건]]을 감행한다. 이에 광둥파는 장제스의 하야와 후한민의 석방을 요구하며 광저우 국민정부를 설립한다. 그러자 장제스의 행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서산회의파]], [[계계군벌]], [[상계군벌]] 등 살아남은 반장 세력이 총집합한다. 개조파도 서둘러 광저우로 향했는데 광둥성을 지배하고 있던 [[천밍수]]는 개조파가 광저우로 입성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다른 우익 반장파도 개조파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같은 반장파 중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신새였다. 어쨌든 부유한 광둥마저 반장으로 돌아갔으니 상황은 개조파에게 완전히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장제스가 모든 공직에서 하야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것이 영월합작이다. 1932년 1월 1일 쑨커 내각이 개각되고 국민정부 주석에는 서산회의파의 [[린썬]]이 선출된다. 여기서마저 개조파는 제대로 된 자리 하나를 받지를 못했다. 왕징웨이는 빡칠대로 빡치며 영월합작에서 이탈한다. 한편 쑨커는 중화민국이 건국 이래로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정확보에 실패하고 같은 해 1월 28일 [[1차 상하이 사변]]이 터지며 쑨커는 하야하게 된다.[* 이후 그 누구도 다시는 장제스 축출을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장제스는 본인의 일기에서 반대파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자신을 쫓아내기만 급급하며 정작 자신이 하야하면 아무것도 하질 못해 다시 모셔오려고 사정한다면서 울분을 토로했다.] 그리고 후임 행정원장으로 왕징웨이가 화려하게 복귀하며 제3차 [[장왕합작]]이 수립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