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가족관계 (문단 편집) == [[효성인황후]] 소생 == ||황후 ||||||||||||'''[[효성인황후|효성인황후 혁사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1674'''[* 순치제가 후사를 당부한 정황기 출신 보정대신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의 첫째 아들의 딸, 즉 손녀이며 강희제 연간 권신이었던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의 조카이다. 청나라에서도 손에 꼽는 명문가이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자매보다는 딸려서 반대가 심했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태황태후였던 효장문황후가 밀어붙여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보정대신 중 하나였던 [[구왈기야 오보이]]를 견제하기 위하여서 황후로 세웠을 수도 있다. 황후 본인은 윤잉을 낳고 사망했지만, 윤잉의 존재로 인해 송고투를 중심으로 황태자당이 결성되어 권력다툼의 중심에 섰다.]|| ||<|164>자녀 ||<#8ED365>차남 ||이름 ||||||||__'''승호(承祜)'''__ 1669~1672 || ||<|19><#8ED365>7남(황2자) ||이름 ||||||||__'''[[아이신기오로 인청|이밀친왕 윤잉]](理密親王 胤礽)[* 강희제를 죽을 때까지 속썩인 그 망나니 황태자. 강희제가 자손들의 돌림자 계승 규칙을 세우기 전 유아기에는 보성이라는 초명을 썼는데, 이 때문에 황장자당의 두목 밍주의 큰아들이자 문인으로 잘 알려진 ~~청나라의 보헤미안~~ 납란성덕(나라 승더, 納蘭性德)이 성덕(成德)이라는 초명을 개명해야 했다. 강희제가 유언으로 윤잉의 일가를 부탁하며 큰아들을 친왕에 봉하며 잘 챙겨주라 당부했기 때문에 [[옹정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윤잉을 유폐에서 풀어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자녀들만큼은 많이 챙겨주며 제법 잘 키워줬다. 윤잉의 6녀(화석숙신공주)와 7남(이각군왕 홍위)를 양녀와 양자로 삼았고, 화석숙신공주의 경우 몽골 과이심부 박이제길특 관음보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때 혼수가 다른 공주들에 비해서 더 많았다고 한다. 장남인 이혁이친왕 홍석의 경우 1730년 [[이현친왕 윤상]]의 작위와 함께 세습망체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허나 강희제의 당부는 손자 홍력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홍석은 1739년 건륭제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작위를 추탈당하고 유폐되어 생을 마쳤으며, 작위는 앞에서 말한 이각군왕 홍위에게 간다. 그러나 화석숙신공주는 잘 대접받으며 그녀의 딸은 [[건륭제]]의 셋째 아들인 순군왕 영장과 결혼한다.]'''__ 1674~1724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