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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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선대 가계
6. 효공인황후(강희 4비) 소생
10. 온희귀비 소생
11. 순의밀비 소생
12. 순유근비 소생
13. 혜비(강희 4비) 소생
14. 의비 (강희 4비) 소생
15. 영비(강희 4비) 소생
16. 정비 소생
17. 성비 소생
18. 양비 소생
19. 양빈 소생
20. 희빈 소생
21. 목빈 소생


1. 개요[편집]


강희제의 가족관계에 대해 서술한 문서.

강희제는 황후 4명[1]을 비롯하여 수십명의 후궁을 두었으나, 황후들은 모두 요절하여 강희제는 30대 중반 이후 황후 없이 생활해야 했다. 황후 대신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각혜황귀비를 귀비로 삼아 6궁을 통솔하게 하였다.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는데, 강희제의 자녀 항렬부터 여느 한인들처럼 이름에다 돌림자를 쓰기 시작했다. 원래는 첫 아들부터 '승(承)'자 돌림을 썼지만 그렇게 이름을 지은 첫 세 아들이 모조리 요절해버리는게 마음에 걸렸는지 작위를 받은 황장자 인티(胤禔 允禔, 윤제)부터의 윤(胤)자 돌림을 쓰기 시작했다. 이 돌림자는 옹정제가 즉위한 후 싹다 동음이자인 允으로 바뀌었다.[2] 그래도 옹정제는 자기 기준에서 이현친왕 인샹(胤祥, 윤상)같은 착한 형제들 중, 극히 일부에게 특명으로 사후에나마 胤자를 돌려주기도 했다.


2. 선대 가계[편집]



3. 효성인황후 소생[편집]


황후
효성인황후 혁사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1653~1674[3]
자녀
차남
이름
승호(承祜) 1669~1672
7남(황2자)
이름
이밀친왕 윤잉(理密親王 胤礽)[4] 1674~1724


4. 효소인황후 소생[편집]


계황후
효소인황후 뉴호록씨(孝昭仁皇后 鈕祜祿氏), 1653~1678
온희귀비의 언니이다. 효성인황후가 살아 있을때는 비였고 효성인황후 사후 황후가 되었지만 6개월 후에 죽었으며 자식은 없다.

5. 효의인황후 소생[편집]


2계황후
효의인황후 동가씨(孝懿仁皇后 佟佳氏), 1656~1689 [5]
자녀
8녀
이름
이름 불명[6] 1683


6. 효공인황후(강희 4비) 소생[편집]


추존황후
효공인황후 우야씨(孝恭仁皇后 烏雅氏), 1660~1723[7]
자녀
11남(황4자)
이름
세종 옹정헌황제 윤진(世宗雍正憲皇帝) 1678~1735
황후
효성헌황후 니오후루씨(孝聖憲皇后 鈕祜祿氏) 1692~1777
자녀
장남
이름
고종 건륭순황제 홍력(高宗乾隆純皇帝) 1711~1799
14남(황6자)
이름
고산패자(固山貝子)[8]윤조(允祚) 1680~1685
23남(황14자)
이름
순근군왕 윤제(恂勤郡王 允禵)[9] 1688~1755
7녀
이름
이름 불명 1682
9녀
이름
고륜온헌공주(固倫溫憲公主)[10] 1683~1702
12녀
이름
이름 불명 1686~1697

7. 각혜황귀비 소생[편집]


효의인황후의 여동생으로 슬하에 자녀는 없으며 항목 참조.

온희귀비 사후 내명부를 관리하며 황후 역할을 했다. 강희제 중기까지 청나라의 후궁품계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정식으로 책봉받지 못한 후궁들이 있었는데 각혜황귀비도 그 중 한명이었다. 1701년 귀비가 되었으며[11] 강희제 사후 옹정제가 아버지의 후궁을 높인다는 의미로 황고황귀비로 승급하였으며 이후 건륭제 대에 황조수기황귀태비로 존숭하였다.

8. 돈이황귀비 소생[편집]


2황귀비
돈이황귀비 과이가씨(敦怡皇貴妃 瓜爾佳氏)[12], 1683~1768
자녀
18녀
이름
이름 불명 1701


9. 경민황귀비 소생[편집]


3황귀비
경민황귀비 장가씨(敬敏皇貴妃 章佳氏), 17세기~1699[13]
자녀
22남(황13자)
이름
이현친왕 윤상(怡賢親王 胤祥) 1686~1730
13녀
이름
화석온각공주(和碩溫恪公主)[14] 1687~1709
15녀
이름
화석돈각공주(和碩敦恪公主) 1691~1709[15]


10. 온희귀비 소생[편집]



온희귀비 뉴호록씨(溫喜貴妃 紐祜祿氏), 1661~1694 [16]
자녀
18남(황10자)
이름
이혁돈군왕->패자품급 윤아(貝子品級 允䄉)[17] 1683~1740
11녀
이름
이름 불명 1685~1686

11. 순의밀비 소생[편집]



순의밀비 왕씨(順懿密妃 王氏), 17세기~1744
자녀
25남(황15자)
이름
유각군왕 윤우(愉恪郡王 允禑)[18] 1693~1731
26남(황16자)
이름
장각친왕 윤록(莊恪親王 允祿)[19][20] 1695 ~1767
28남(황18자)
이름
윤개(允祄) 1701~1708


12. 순유근비 소생[편집]



순유근비 진씨(純裕勤妃 陳氏), 17세기~1753
자녀
27남(황17자)
이름
과의친왕 윤례(果毅親王 允禮)[21] 1697~1738

13. 혜비(강희 4비) 소생[편집]



혜비 납라씨(惠妃 納喇氏), 17세기~1732[22][23]
자녀
3남
이름
승경(承慶) 1670~1671
5남(황장자)
이름
이혁직친왕->고산패자품급 윤제(固山貝子品級 胤禔) 1672~1735


14. 의비 (강희 4비) 소생[편집]



의비 곽락라씨(宜妃 郭絡羅氏), 17세기~1733
자녀
13남(황5자)
이름
항온친왕 윤기(恒溫親王 允祺)[24] 1679~1732
17남(황9자)
이름
이혁[25]혁군왕 윤당(允禟)[26][27] 1683~1726
20남(황11자)
이름
윤자(允禌) 1685~1696


15. 영비(강희 4비) 소생[편집]



영비 마가씨(榮妃 馬佳氏), 17세기~1727
자녀
장남
이름
승서(承瑞) 1667~1670
4남
이름
새음찰혼(塞音察渾) 1671~1674
3녀
이름
고륜영헌공주(固倫榮憲公主)[28] 1673~1728
6남
이름
장화(長華) 1674
8남
이름
장생(長生) 1675~1677
10남(황3자)
이름
성은군왕 윤지(誠隱郡王 允祉)[29] 1677~1732


16. 정비 소생[편집]



정비 만류합씨(定妃 萬琉哈氏), 1661~1757
자녀
21남(황12자)
이름
이의친왕 윤도(履懿親王 胤祹)[30] 1685~1764

17. 성비 소생[편집]



성비 대가씨(成妃 戴佳氏), 17세기~1740
자녀
15남(황7자)
이름
순도친왕 윤우(淳度親王 胤祐) 1680~1730


18. 양비 소생[편집]



양비 위씨(良妃 衛氏), 1662~1711[31]
자녀
16남(황8자)
이름
이혁[32]염친왕 윤사(廉親王 允禩)[* 황위를 두고 황4자당과 크게 대립했고 옹정제 즉위 이후엔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황9자 윤당과 함께 아기나(阿其那)로 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 강희제의 아들 중 위에서 서술된 9황자 윤당과 더불어 옹정제에게 가장 가혹하게 숙청당한 황자. 애초에 강희제도 윤사와 황8자당인 윤당, 윤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자신의 아들들이 당파 싸움을 하지않고 우애있게 지내기를 바랐지만, 윤사와 그를 지지하는 황8자당은 큰형 윤잉의 폐위를 주장하고 나섰으니 싫어할 만했다. 게다가 당시 같은 궁녀 출신의 포의였지만 공신들을 여럿 배출한 가문 출신인 옹정제의 어머니인 효공인황후 우야씨와는 달리, 윤사의 어머니 양비는 만주족이긴 했지만 고관이 없는 평범한 가문 출신의 여인에 불과해 윤사 역시 그렇게 좋은 신분은 아니었다. 실제로 강희제가 윤사를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모계 혈통이 빈약하다는 점도 있었다. 그래도 성격은 좋아서 대신들과 친하게 지냈고, 몇몇 대신들도 나름 윤사를 지지했다. 이때 '팔현왕'이라는 별칭도 얻은 듯. 강희제 사후 즉위한 후 옹정제는 일단 윤사의 세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윤사에게 염친왕 작위를 부여하고, 이현친왕 윤상과 함께 군기대신 중 한 명(나머지는 시린기오로 오르타이, 장정옥, 푸차 마치, 퉁기야 롱코도, 전문경)으로 임명했다. 이때 윤사는 아내가 친왕 책봉을 축하하자 "에휴, 친왕 작위 받으면 뭐해. 뒷끝 하나는 장난 아닌 넷째 형에게 숙청될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이후 옹정제는 각종 트집을 잡으며 윤사를 압박하다 1725년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윤사를 숙청한다. 또한 아들인 홍왕(1708-1763) 역시 아버지처럼 족보에서 제명된 후 연금되지만, 이후 사촌 동생에 의해 다시 족보에 올라간다. 거기에 옹정 즉위 후에는 삼번의 난 당시 진압군 사령관 안화친왕 요로(단중친왕 보로의 동생으로, 의순공주가 두번이나 과부가 되자 의순공주를 보살핀 인물이기도 하다.)은 윤사의 처외조부라는 이유만으로 공적과 작위를 사후 추탈당한 후 요로의 후손은 서인이 된다. 참고로 윤사의 증손자인 면삼은 함풍제 때 황실 종친으로 대접받으며 이부상서, 태자소보 등을 지냈다.] 1681~1726

19. 양빈 소생[편집]



양빈 고씨(襄嬪 高氏), 17세기~1746[33]
자녀
29남(황19자)
이름
윤직(胤禝)[34] 1702~1704
19녀
이름
이름 불명 1703~1705
30남(황20자)
이름
간정패륵 윤의(簡靖貝勒 胤禕) 1709~1731

20. 희빈 소생[편집]



희빈 진씨(熙嬪 陳氏), 1690~1737[35]
자녀
31남(황21자)
이름
신정군왕 윤희(愼靖郡王 胤禧) 1711~1758[36]


21. 목빈 소생[편집]



목빈 진씨(穆嬪 陳氏), 17세기~1724
자녀
34남(황24자)
이름
함각친왕 윤비(諴恪親王 胤祕)[37] [38] 1716~1773
35남
이름
윤원(胤禐)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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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는 강희제 생전에 혼인하여 정식 책봉된 황후이지만, 효공인황후는 후궁으로 강희제 사후 친아들인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성모황태후로 승급하여 황후로 추존되었다.[2] 允의 중국어 발음은 다른데 한국 한자음으로는 胤과 마찬가지로 '윤'으로 읽힌다. 또한 일부 형제들은 돌림자 외의 두번째 글자도 인전과 비슷하게 읽혀서 두 글자를 모두 개명하기도 했다.[3] 순치제가 후사를 당부한 정황기 출신 보정대신 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의 첫째 아들의 딸, 즉 손녀이며 강희제 연간 권신이었던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의 조카이다. 청나라에서도 손에 꼽는 명문가이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자매보다는 딸려서 반대가 심했지만 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태황태후였던 효장문황후가 밀어붙여 황후가 되었다고 한다. 혹은 보정대신 중 하나였던 구왈기야 오보이를 견제하기 위하여서 황후로 세웠을 수도 있다. 황후 본인은 윤잉을 낳고 사망했지만, 윤잉의 존재로 인해 송고투를 중심으로 황태자당이 결성되어 권력다툼의 중심에 섰다.[4] 강희제를 죽을 때까지 속썩인 그 망나니 황태자. 강희제가 자손들의 돌림자 계승 규칙을 세우기 전 유아기에는 보성이라는 초명을 썼는데, 이 때문에 황장자당의 두목 밍주의 큰아들이자 문인으로 잘 알려진 청나라의 보헤미안 납란성덕(나라 승더, 納蘭性德)이 성덕(成德)이라는 초명을 개명해야 했다. 강희제가 유언으로 윤잉의 일가를 부탁하며 큰아들을 친왕에 봉하며 잘 챙겨주라 당부했기 때문에 옹정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윤잉을 유폐에서 풀어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자녀들만큼은 많이 챙겨주며 제법 잘 키워줬다. 윤잉의 6녀(화석숙신공주)와 7남(이각군왕 홍위)를 양녀와 양자로 삼았고, 화석숙신공주의 경우 몽골 과이심부 박이제길특 관음보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때 혼수가 다른 공주들에 비해서 더 많았다고 한다. 장남인 이혁이친왕 홍석의 경우 1730년 이현친왕 윤상의 작위와 함께 세습망체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허나 강희제의 당부는 손자 홍력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홍석은 1739년 건륭제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작위를 추탈당하고 유폐되어 생을 마쳤으며, 작위는 앞에서 말한 이각군왕 홍위에게 간다. 그러나 화석숙신공주는 잘 대접받으며 그녀의 딸은 건륭제의 셋째 아들인 순군왕 영장과 결혼한다.[5] 효소인황후가 죽은 후 내명부의 수장이 되어 강희제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황후가 아닌 황귀비의 지위에 있었으나, 위독해지자 사망 하루 전에 강희제가 황후로 승급시켜준다. 원래 강희제의 사촌이지만 고모 따라 조카가 시집가는 청나라의 관습을 따라 후궁이 되었다.[6] 유일한 딸이었으나 생후 1달만에 요절하고 이후 자식을 낳지 못하자, 높은 위치의 후비가 황자녀를 키워주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강희제가 어린 옹정제를 효의인황후에게 키우도록 했다. 효의인황후 본인도 양자인 옹정제를 지극정성으로 키우며 강희제의 눈에 들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본인은 옹정제가 12살이 되던 해에 죽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효의인황후의 가문은 그녀가 키운 옹정제를 황제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후 황제로 즉위한 옹정제는 키워준 공이 낳아준 공보다 더 크다며 효의인황후를 생모보다 더 높게 추존했지만, 효의인황후의 남동생인 퉁기야 롱코도에게는 가차없었다.[7] 장남인 옹정제와 차남인 14황자와의 차별로 유명하다. 그러나 장남인 옹정제를 낳았을때 귀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양육권이 없었고 옹정제는 효의인황후가 키우게 된다. 덕비로 승급하여 효의인황후 사후 옹정제를 키울수 있게 되지만 그때 옹정제는 10살이었고 황자들이 보통 12-13세에 혼인하여 출궁하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로 옹정제를 키운 기간은 짧은 편이다. 게다가 자신의 친정보다 훨씬 급이 높은 효의인황후의 친정과 옹정제는 효의인황후 사후에도 매우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어머니라도 아들인 옹정제를 쉽게 대할 수 없었을거라는 추측도 가능하다.[8] 어릴때 죽었으나 황6자로 인정됨[9] 초명은 윤정(胤禎)이었고 다른 형제들처럼 옹정 연간에 피휘를 위해 개명했으나, 돌림자만 개명한 형제들과 달리 뒷글자 발음도 비슷했기 때문에 두 글자를 모두 개명해야 했다. 그 결과 옹정제 대신 황1자 윤제와 같은 발음이 되어버렸지만 황1자는 강희 시절부터 사고쳐서 연금상태로 있다 사망했으니 별 문제는 안 된 듯. 옹정제의 친동생임에도 옹정제가 아니라 황8자당의 윤사를 지지하였다. 이후 황8자당과도 거리를 두고 독자 노선을 걸으며 1720년의 원정 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허나 1722년 친형의 즉위 후 형과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만큼 옹정제는 윤제를 방계 황족의 능참봉으로 보내 사실상 유폐시킨다. 이후 옹정제가 죽고 조카인 건륭제가 즉위한 후 연금에서 풀려나고 순군왕 작위도 회복한다. 아이훈 조약에서 실무자로 활동한 혁산이 윤제의 현손이다. [10] 강희제가 가장 총애한 딸로 보통 공주들은 몽고 왕족과 결혼을 하지만 이 딸만큼은 만주 귀족과 결혼을 시켰다. 1698년 화석액부 동가 순안안에게 하가. 참고로 순안안은 융과다의 조카로 원래는 윤사를 지지했지만 이후 백부인 융과다와 함께 옹정제를 지지하였다. 1723년 옹정제 즉위후 1품 무관인 영시위내대신에 오르고 작위 역시 화석액부에서 고륜액부로 업그레이드된다. 1724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백부인 융과다가 1726년에 연갱요와 쌍으로 숙청당한 것을 생각하면 때를 잘 골라 간 셈이다. 참고로 순안안의 아들(서자인데 적자가 없는 관계로 공작 작위를 계승함)인 동가 원방은 장친왕 윤록의 딸과 결혼하여 공작 겸 화석액부가 된다. [11] 온희귀비 사후 6년간 귀비 자리가 공석이었는데 이 6년동안은 강희 4비(혜비, 의비, 덕비, 영비)가 내명부를 통솔했다.[12] 원래는 빈으로 입궁하고 1718년 비로 승급하였다. 돈이황귀비는 건륭제가 태어난 직후 효성헌황후 대신 건륭제의 양육을 맡았는데 건륭제는 즉위 후 키워준 은혜를 잊지 않고 돈이황귀비의 지위를 빈에서 황귀비로 올려준다.[13] 살아있을때는 각혜황귀비처럼 품계를 받지 못한 비공식 후궁이었다. 그러나 사후 민비로 추존된걸로 미루어보아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던 듯. 옹정제 즉위 후 경민황귀비로 더 높게 추존되었고 옹정제가 후궁으로는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와 합장시켰다. 또한 옹정제는 장가씨를 포의에서 양황기 만주 기분니루로 대기시켰다. 이렇게 사후에 옹정제에게 엄청나게 큰 특혜를 받은 이유는, 친아들이 옹정제가 가장 아낀 형제였던 윤상이였기 때문인 듯하다.[14] 1705년에 몽골 우오특부 찰살극 두릉군왕 박이제길특 범진에게 하가. 참고로 남편은 1727년에 준가르와 차 밀무역을 하다 걸려서 옹정제에게 작위를 추탈당한다. 같은 화석액부인 책릉이 준가르를 무찔러 패자에서 초용친왕 작위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15] 1708년에 몽골 과이심 태길 박이제길특씨 다이제에게 하가. 참고로 남편은 1719년에 죄를 지어 작위를 추탈당하고 1720년에 죽는다. 여담이지만 이 사이에서 나온 딸이 강희제의 딸 고륜순각공주의 액부인 초용친왕 책릉의 아들 성찬간포와 결혼했다고 하는데, 족내혼을 금지하는 청나라에서 이게 가능한지는 의문이다.[16] 언니인 효소인황후와 함께 청나라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다. 무려 강희제의 보정대신이고 누르하치의 외손자이기도한 어빌룬의 딸이었다. 하지만 어빌룬은 같은 보정대신이자 권신이었던 구왈기야 오보이와 같은 기(旗)인이다보니 견제를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허서리 소닌의 손녀가 황후가 되었다. 얼마나 명문가 출신이었냐면 온희귀비 소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다음대 황제는 맡겨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들인 10황자는 다음대 황제로 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 최고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를 둔 황자로서는 정말 드물게도 사서에 공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7] 돈군왕(敦郡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옹정제 즉위 후 박탈당하였다가 건륭제 즉위 후 복권되었다. 옹정제가 증오해 마지 않는 8황자당이지만 옹정제의 양이모와 친이모가 10황자의 외숙모였기 때문에 작위박탈에 그쳤다. 이 옹정제의 이모이자 윤아의 외숙모가 낳은 딸이 아래 서술된 과친왕의 적복진이기도 하다.[18] 적복진인 과이가씨는 도통 석문병의 딸로 위의 이밀친왕 윤잉의 처제이기도 하다. 즉 윤잉과는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 이렇듯 황태자-황4자당과도 관련이 깊은데 정작 친동생이나 그 바로 아랫 동생인 윤례와는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손녀들 중 하나는 부찰 복강안의 제수이다.[19] 옹정제 즉위 후 승택유친왕의 아들 쇼서의 장자인 장정친왕 복고다(莊靖親王 博果鐸)가 후사 없이 죽자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때 승택유친왕의 차남 이혁혜군왕 보옹고로의 후손들이 반발하였으나 보옹고로 역시 작위를 박탈당한 지위였기에 하자가 있었고, 옹정제와 윤록이 보옹고로의 후손들을 잘 타이르고 여러 혜택을 챙겨주며 넘어갔다. 윤록은 옹정제의 심복임은 물론 건륭제에게도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나, 장친왕의 세자인 홍보(1713-1743)가 이밀친왕 윤잉의 장자인 홍석과 친하게 지내다가 같이 숙청당하느라 아버지 윤록 역시 죄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도 건륭제가 홍보의 죄를 아버지와 아들들에게까지 연좌시키지는 않아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인 영상(1738~1788)에게 장친왕작이 계승되었고, 홍보 역시 훗날 장친왕으로 추봉되어 철모자왕작을 공인받는다. 또한 영상 역시 5촌 아저씨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녀인 화석단유공주(1713-1753)은 옹정제의 양녀로 몽골 과이심부 자사그 보두얼러거타이 군왕(승격림심의 작위 맞다)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와 결혼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작위는 동생이 계승하는데 동생의 양손자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당시의 장군인 승격림심이다.[20] 여담이지만 도광제 때 윤록의 고손자인 이혁장친왕 혁매는 아편을 피다가 1838년(하필 아편전쟁 나기 직전에 눈치도 없이...) 도광제와 임칙서에 의해 작위를 추탈당한다. 이로 인해 작위는 윤록의 차남의 증손인 면호가 장친왕작을 계승하는데 면호의 손자인 재훈(효정현황후의 이종조카다. 즉 동치제와도 사촌지간.)은 의화단의 난에 단군왕 재의, 육현 등과 함께 가담하여 신축조약후 사실상 서태후의 책임회피 차원에서 자결을 명받고 1901년 자살한다.[21] 후궁견환전의 과군왕이다. 1727년 과친왕에 책봉되었으며 적복진인 뉴호록씨는 강희제의 보정대신 중 하나인 뉴호록 알필륭의 적자인 아령아의 딸이다. 원래 아령아는 황8자당 소속으로 윤사를 지지하여 사후 옹정제에 의해 작위를 추탈당한다. 그런데 아령아의 첫 번째 부인인 동가 씨(동국유의 딸로 옹정제의 양어머니 효의인황후의 여동생)과 두번째 부인인 우야씨(옹정제의 친어머니 효공인황후의 여동생)가 모두 옹정제의 이모였기에, 옹정제에겐 이종사촌여동생이 되는 아령아의 딸을 과친왕과 결혼시켜 심복으로 삼은 듯하다. 참고로 위에서 서술된 10황자 윤아와도 처고종사촌 형제간이다.(...) 이후 적복진과 측복진 사이에 후사가 없어 옹정의 막내아들인 홍염이 양자가 된다. 옹정제의 아들 홍염은 이복형 건륭제의 치세에서 이런저런 사고를 많이 쳤으나, 건륭제는 다른 이복동생인 홍주에게 그랬듯이 몇 안남은 동생 홍염도 은근히 봐줬다.[22] 예허나라씨인지 울아나라씨인지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예허나라씨일 경우 효성인황후와 마찬가지로 정황기 출신이다. 강희제시기 허서리 송고투와 함께 권력을 다투던 나라 밍주(納蘭明珠, 납란명주)와는 사촌관계로, 가문으로만 따지면 강희제의 세 황후 다음으로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허나 울아나라씨일 경우 만군기 정황기 출신이지만 포의(예속 귀족) 출신이고 부친의 관직도 낮아 그리 영향력이 크지 않은 집안이었다. 현재 바이두에서는 혜비를 울아나라씨라고 적고 있다.[23] 혜비는 강희제의 비빈으로서 받은 대우가 상당히 특이한 편이었다. 강희 4비 중 가장 먼저 배위를 받았으며, 온희귀비 사후 각혜황귀비가 귀비가 될 때까지 강희 4비가 육궁을 통솔했을 때 영비와 함께 태후로부터 최종 권한을 받았다. 허나 동시에 후궁 중에서도 형편이 나쁘기로 유명한 연희궁에서 거주했으며, 만약 강희제의 세 황후 바로 다음으로 좋은 가문 출신이었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았을 텐데 1677년 정식으로 빈에 책봉될 때까지 귀비 동씨(책봉 전까지 비의 대우를 받음), 평비 허서리씨(효성인황후의 여동생으로 마찬가지로 비의 대우를 받음) 등과 달리 일개 서복진의 대우를 빋았다. 이 때문에 성씨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이다.[24] 윤기는 친동생인 윤당과는 달리 권력투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가 윤기를 키웠는데, 효혜장황후는 윤기가 권력투쟁에 희생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참고로 윤기의 아들인 홍승(1697-1750)은 위에 서술된 윤잉의 아들인 이혁이친왕 홍석(1694-1740), 이현친왕 윤상의 아들인 영군왕 홍교, 장각친왕 윤록의 아들인 홍보(1713-1743) 등과 함께 건륭제 폐위 역모에 연루되지만 작위 박탈로 처벌이 끝난다. 이후 항친왕 작위는 동생인 홍경에게 간다.[25] 작위의 추탈을 의미한다.[26] 강희제 시기에 8황자당 소속으로 윤사를 지지했으나, 그 보복으로 옹정제 즉위 후 윤사와 함께 새사흑(塞思黑)으로 개명당하고 대동보에서 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 이 과정에서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에 의해 천주교로 개종하고, 만주 문자를 라틴 문자로 전사한 서찰을 통해 윤사와 내통했다가 걸리면서 옹정제의 큰 분노를 산다. 애초에 청나라 역시 유교를 중시하는데 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로 개종했으니 옹정제가 더욱 분노했을 듯. 강희제의 아들 중 아래에 서술된 8황자 윤사와 더불어 옹정제에게 가장 가혹하게 숙청당한 황자.[27] 한편 이때 윤당과 엮인 가톨릭 신자들도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유형을 떠나거나 순교를 해야 했다. 이로 인해 윤당은 클레멘스 11세와 강희제 시절인 1715년부터 이어진 청나라의 가톨릭 포교, 제사 문제에 관한 다툼인 전례 문제를 더 악화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옹정제는 윤당의 친가톨릭적 행보와 그를 이용해 시도한 역모로 인해 엄청나게 분노했고,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을 마카오로 추방하기 시작하고 포교를 금지하며 가톨릭 탄압을 강화한다. 물론 이후에도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캬흐타 조약 통역관들을 비롯한 일부 예수회 신부들이 계속 활동을 하긴 했지만, 이들은 중국에 올 때의 목적이었던 선교활동은 제대로 시도조차 못한채 그 재주만을 착취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몇몇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닝구타 같은 변방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으며, 심지어 누르하치의 장자 추영의 아들 두두에게서 이어진 누르하치 장손 종갓집의 종주였던 수누조차도 자식들 중 교인이 있다며 일가족째로 유형에 처해졌다. 옹정제의 재상이자 총신인 이현친왕 윤상 역시도 비슷한 생각으로 가톨릭 탄압을 지지했고, 이는 아들인 건륭제와 손자인 가경제, 증손자인 도광제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140년 후인 1860년에 고손자 함풍제제2차 아편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북경에서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비로소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다.[28] 1691년 몽골 파림부 찰살극 군왕 박이제길특 오이곤에게 하가. 여담이지만 아들이 옹정제 시절에 궁궐 시위였는데 불이 났는데도 술만 마시고 있어서(...) 분노한 외삼촌에게 크게 혼나고 가택연금을 당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 사이에서 나온 딸은 현친왕 연황에게 시집을 간다. 참고로 현친왕이라는 작위에서 알 수 있듯이 연황은 청태종의 서장자이자 도르곤과의 후계경쟁에서 밀려 숙청당한 숙무친왕 호격의 고손자다.[29] 성친왕(誠親王)까지 진봉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강등당하였고, 강희제 말년 유폐된 윤제와 윤잉 대신 장자 역할을 하였으나 옹정제 즉위 후 옹정제의 우군인 이현친왕 윤상의 장례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폐되어 사망하였다. 사실 윤상의 어머니인 경민황귀비 장가씨가 죽었을 때에도 예를 다하지 않아 아버지 강희제에게 질책을 당했고 옹정제 시대에도 뇌물을 받거나 옹정제의 후비인 돈숙황귀비가 죽었을 때에도 늦게 왔다고 한다. 또한 윤지는 큰형 윤잉의 지지자였지만 큰아들 홍성이 황8자당인 관계로 아들은 유폐당한다. 이후 건륭제 시기에 건륭제는 셋째 큰아버지의 작위를 회복시키고 죄를 벗겨준다.문무를 모두 갖추지는 못해 차기 대권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래도 시독 진몽뢰를 시켜 고금도서집성 편찬을 후원하며 文에서만큼은 형제들 중 돋보이는 족적을 남겼다. 여담이지만 5대손인 재령은 도광제의 황후인 효정성황후 박이제길특씨의 형부로 함풍제, 공친왕에게는 조카뻘(...)이자 이모부였기에 괜찮은 대접을 받는다. [30] 원래는 옹정제와 윤상과 친한 사이었지만, 옹정제 즉위 후 중과실로 인해 패륵->패자로 2단계 연속 강등을 당한다. 이후 조카인 건륭제 즉위 후 이친왕으로 작위가 높여진다. 늦둥이 자식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일찍 죽은 이유로 건륭제의 황4자 영성이 양손으로 입적된다. 참고로 복진은 의정대신 부찰 마제의 딸로 마제는 효현순황후부항의 백부이니 건륭제와도 처사촌 동서간이다.[31] 내무부 포의 출신으로 궁녀로 들어와서 높은 품계는 받지 못했고, 황8자가 결혼까지 한 이후에 빈으로 책봉되었다. 1707년까지 양빈으로 기록되어 있어 1707년 이후에 비로 승급한 듯하다.[32] 작위의 추탈을 의미한다[33] 민인 출신으로, 현직 시절엔 품계가 없다가 옹정제 때 귀인으로, 건륭제 때 양빈으로 추존되었다. [34] 어릴 때 죽었으나 황19자로 인정되었다.[35] 후궁은 커녕 궁녀도 될 수 없는 민인 출신이었으나 미인이 많은 강남 지방을 순행하던 강희제에 의해 입궁했다. 민인 출신들은 빈 이상 올라갈 수 없었기에 후궁 시절 품계도 없었으나 옹정에 의해 귀인으로, 건륭에 의해 희빈으로 추존된다. [36] 후궁견환전의 견환의 동복 여동생 작은 옥요(玉嬈)와 혼인하는 그 신패륵 윤희. 건륭 연간 초기에 활동했지만 건륭제와 동갑이지만 숙부라는 항렬 때문에 노안으로 묘사되는 일이 많다. 강희제가 자식이 좀 많아놔야지 자식이 없어 동갑인 건륭제의 황6자 영용이 양자, 아니 양'손'으로 입적되었고 질(質)친왕으로 봉작이 업그레이드되었다.참고로 딸인 다라격격은 몽골 할하부 지용친왕 박이제길특 상재다이재(1731~1778)와 결혼했는데 상재다이재는 윤희의 형인 이현친왕 윤상의 딸이자 옹정제의 양녀인 화석화혜공주(1714~1731)의 아들이다. 즉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사촌간. 참고로 상재다이재의 작위는 아버지 다이제새포등이 죄를 짓는 바람에 친왕에서 군왕으로 강등되었다가(다이제새포등은 화혜공주가 1731년에 죽은 지 2년 후인 1733년에 죽는다. 상재다이재가 준가르 정벌전에서 초용친왕 고륜액부 책릉과 강희제의 10녀인 고륜순각공주의 아들인 성찬간포와 공을 세움에 따라 친왕으로 올라간다.[37] 나이 차이만 40살에 가깝게 차이나는 옹정제의 막내동생으로, 시대적 특성상 아버지를 넘어 할아버지뻘에 가까운 넷째 형이 즉위할 당시엔 7살의 꼬맹이였다. 이때 당파싸움을 벌이던 형제들은 옹정제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부황 강희제의 유조에 승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냉각된 분위기 속에서 순진한 어린아이였던 윤비가 가장 먼저 만세삼창을 한 덕분에 옹정제는 차기 황제로 공표된 첫 순간부터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이를 들은 옹정제는 윤비를 기특하게 여겨 친왕에 봉했다.[38] 어린애라 눈치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