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가족관계 (문단 편집) == [[양비 위씨|양비]] 소생 == || ||||||||||||'''[[양비 위씨|양비 위씨(良妃 衛氏)]], 1662~1711'''[* 내무부 포의 출신으로 궁녀로 들어와서 높은 품계는 받지 못했고, 황8자가 결혼까지 한 이후에 빈으로 책봉되었다. 1707년까지 양빈으로 기록되어 있어 1707년 이후에 비로 승급한 듯하다.]|| ||<|164>자녀 ||<#8ED365>16남(황8자) ||이름 ||||||||__'''이혁[* 작위의 추탈을 의미한다][[아이신기오로 윤스|염친왕 윤사(廉親王 允禩)]][* 황위를 두고 황4자당과 크게 대립했고 옹정제 즉위 이후엔 보복을 정통으로 맞아 황9자 윤당과 함께 아기나(阿其那)로 개명되어 유폐된 채 죽었다. 강희제의 아들 중 위에서 서술된 9황자 윤당과 더불어 옹정제에게 가장 가혹하게 숙청당한 황자. 애초에 강희제도 윤사와 황8자당인 윤당, 윤아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희제는 자신의 아들들이 당파 싸움을 하지않고 우애있게 지내기를 바랐지만, 윤사와 그를 지지하는 황8자당은 큰형 윤잉의 폐위를 주장하고 나섰으니 싫어할 만했다. 게다가 당시 같은 궁녀 출신의 포의였지만 공신들을 여럿 배출한 가문 출신인 [[옹정제]]의 어머니인 [[효공인황후]] 우야씨와는 달리, 윤사의 어머니 양비는 만주족이긴 했지만 고관이 없는 평범한 가문 출신의 여인에 불과해 윤사 역시 그렇게 좋은 신분은 아니었다. 실제로 강희제가 윤사를 후계로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모계 혈통이 빈약하다는 점도 있었다. 그래도 성격은 좋아서 대신들과 친하게 지냈고, 몇몇 대신들도 나름 윤사를 지지했다. 이때 '[[팔현왕]]'이라는 별칭도 얻은 듯. 강희제 사후 즉위한 후 옹정제는 일단 윤사의 세력을 안심시키기 위해 윤사에게 염친왕 작위를 부여하고, [[이현친왕 윤상]]과 함께 군기대신 중 한 명(나머지는 시린기오로 오르타이, 장정옥, 푸차 마치, 퉁기야 롱코도, 전문경)으로 임명했다. 이때 윤사는 아내가 친왕 책봉을 축하하자 '''"에휴, 친왕 작위 받으면 뭐해. 뒷끝 하나는 장난 아닌 넷째 형에게 숙청될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이후 옹정제는 각종 트집을 잡으며 윤사를 압박하다 1725년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윤사를 숙청한다. 또한 아들인 홍왕(1708-1763) 역시 아버지처럼 족보에서 제명된 후 연금되지만, 이후 [[건륭제|사촌 동생]]에 의해 다시 족보에 올라간다. 거기에 옹정 즉위 후에는 [[삼번의 난]] 당시 진압군 사령관 안화친왕 요로(단중친왕 보로의 동생으로, [[의순공주]]가 두번이나 과부가 되자 의순공주를 보살핀 인물이기도 하다.)은 윤사의 처외조부라는 이유만으로 공적과 작위를 사후 추탈당한 후 요로의 후손은 서인이 된다. 참고로 윤사의 증손자인 면삼은 [[함풍제]] 때 황실 종친으로 대접받으며 이부상서, 태자소보 등을 지냈다.] '''__ 1681~1726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