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희제/가족관계 (문단 편집) == 순의밀비 소생 == || ||||||||||||'''순의밀비 왕씨(順懿密妃 王氏), 17세기~1744''' || ||<|164>자녀 ||<#8ED365>25남(황15자) ||이름 ||||||||__'''유각군왕 윤우(愉恪郡王 允禑)'''[* 적복진인 과이가씨는 도통 석문병의 딸로 위의 이밀친왕 윤잉의 처제이기도 하다. 즉 윤잉과는 형제인 동시에 동서지간. 이렇듯 황태자-황4자당과도 관련이 깊은데 정작 친동생이나 그 바로 아랫 동생인 윤례와는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손녀들 중 하나는 [[부찰 복강안]]의 제수이다.]__ 1693~1731 || ||<|1><#8ED365>26남(황16자) ||이름 ||||||||__'''[[아이신기오로 윤루|장각친왕 윤록]](莊恪親王 允祿)[* 옹정제 즉위 후 승택유친왕의 아들 쇼서의 장자인 장정친왕 복고다(莊靖親王 博果鐸)가 후사 없이 죽자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때 승택유친왕의 차남 이혁혜군왕 보옹고로의 후손들이 반발하였으나 보옹고로 역시 작위를 박탈당한 지위였기에 하자가 있었고, 옹정제와 윤록이 보옹고로의 후손들을 잘 타이르고 여러 혜택을 챙겨주며 넘어갔다. 윤록은 옹정제의 심복임은 물론 건륭제에게도 스승과 같은 존재였으나, 장친왕의 세자인 홍보(1713-1743)가 이밀친왕 윤잉의 장자인 홍석과 친하게 지내다가 같이 숙청당하느라 아버지 윤록 역시 죄를 면하지 못했다. 그래도 건륭제가 홍보의 죄를 아버지와 아들들에게까지 연좌시키지는 않아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인 영상(1738~1788)에게 장친왕작이 계승되었고, 홍보 역시 훗날 장친왕으로 추봉되어 철모자왕작을 공인받는다. 또한 영상 역시 5촌 아저씨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장녀인 화석단유공주(1713-1753)은 옹정제의 양녀로 몽골 과이심부 자사그 보두얼러거타이 군왕([[승격림심]]의 작위 맞다)박이제길특 제묵특다이제와 결혼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어 작위는 동생이 계승하는데 동생의 양손자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당시의 장군인 [[승격림심]]이다.][* 여담이지만 [[도광제]] 때 윤록의 고손자인 이혁장친왕 혁매는 아편을 피다가 1838년(하필 [[아편전쟁]] 나기 직전에 눈치도 없이...) 도광제와 [[임칙서]]에 의해 작위를 추탈당한다. 이로 인해 작위는 윤록의 차남의 증손인 면호가 장친왕작을 계승하는데 면호의 손자인 재훈([[효정현황후]]의 이종조카다. 즉 [[동치제]]와도 사촌지간.)은 [[의화단의 난]]에 단군왕 재의, 육현 등과 함께 가담하여 [[신축조약]]후 사실상 서태후의 책임회피 차원에서 자결을 명받고 1901년 자살한다.]'''__ 1695 ~1767 || ||<|1><#8ED365>28남(황18자) ||이름 ||||||||__'''윤개(允祄)'''__ 1701~1708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