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우규 (문단 편집) === 초기 === 1855년 7월 14일(음력 6월 1일) [[평안도]] [[덕천시|덕천군]] 무릉방 제남리(현 [[평안남도]] [[덕천시]] 제남동)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강재장(姜齋長)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누나 집에서 성장하였고, 친형에게 한학과 [[한의학]]을 익혀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지만, 전통적 학문으로는 개항 이후 점증하는 사회의 [[근대화]] 요구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점차 개화 사상으로 기울어졌고, [[개신교]] [[장로회]]에도 입교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집안 어른들과의 갈등도 생겨 1883년 [[함경도]] [[홍원군|홍원현]](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주하였으며, 홍원현 읍내 남문 앞 중심지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읍내에 [[사립학교]]와 [[교회]]를 세워 신학문을 전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한다.[* 이는 "우리 집에서도 몇 차례 [[이동휘]] 선생을 모셨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는 손녀의 기억에도 드러나듯이, 당시 [[평안도|관서]]와 [[함경도|관북]] 지방민들의 존경을 받던 이동휘의 영향이 컸다.] 이후 홍원군 용원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910년 8월 강우규는 [[경술국치]]로 인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했고, 1911년 봄 홍원군 용원면을 떠나 [[청나라]] [[길림성]] [[화룡시|화룡현]] 두도구(頭道溝)[*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터우다오진(頭道鎭).]로 [[망명]]하였고 이후 길림성과 동부 [[시베리아]], [[연해주]], [[흑룡강성]] 일대를 방랑하면서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 방도를 모색하여 갔다. 1917년 우수리강 대안의 [[길림성]] 의란도(依蘭道) 요하현(饒河縣)[* 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솽야산시]] 라오허현(饒河縣).]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북만주에 위치한 이 곳은 남만주와 연해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강우규는 이 곳에 한인 [[동포]]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신흥동(新興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 곳에서 [[한민족]]을 새롭게 발흥시키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많이 모은 강우규는 사립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워 [[청소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하였고, 군자금 조달에 주력하기 위해 박은식이 조직한 '노인동맹단'에 가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