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자사화 (문단 편집) == 불길한 징조 == 이렇듯 극적인 야사와는 별개로 연산군에게 뭔가 응어리진 것이 수 년간 묵혀져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다 연산 9년([[1503년]]) [[음력]] [[9월 11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고, [[연산군]]은 연회에 참석해서 신하들에게 술을 받고 답례 술을 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예조판서 [[이세좌]]가 [[연산군]]의 답례 술을 마시다 실수로 반을 흘려 [[연산군]]의 옷을 적셔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궁으로[* 이 때는 경복궁이 정궁(본채)이었고, 창덕궁은 이궁(별채)의 역할을 했다.] 돌아간 [[연산군]]은 즉시 승지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말하고는 이세좌를 국문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세좌는 자신이 실수로 술을 흘린 거라고 해명했지만 [[연산군]]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4일 뒤인 15일에 이세좌를 파직시켜 버렸다. 이 파직에 윤필상 등 대신들이 그날 이세좌가 "내가 술을 못하는데 오늘 [[연산군]]의 답술은 다 마셨다"고 자랑한 증언을 들어가며 단순한 실수였다고 이세좌를 변호했지만, [[연산군]]은 18일에는 정승들에게, 19일에는 대간들에게 이세좌 건을 질책하더니 다음날인 20일에는 이세좌를 유배형에 처했는데, 처음에는 [[전라남도]] [[무안군|무안]]이었다가 이틀 뒤에 [[함경도]] 온성으로 보냈다. 현대처럼 도로가 정비된 것도 아니고 빠른 교통 수단은 더더욱 없었던 시대에 이세좌로 하여금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을 오고 가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당혹해하며 불안감에 휩싸였는데, 이세좌는 20여 년 전 [[폐비 윤씨]]가 마실 [[사약]]을 들고 갔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 뒤인 음력 [[11월 20일]]에 창경궁에서 [[인수대비]]와 [[자순대비]]가 [[연산군]]에게 잔치를 베풀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연산군]]이 자기가 입던 옷과 신발을 신하들에게 나눠주는 술주정을 부리다가 성준의 외손자이던 참의 한형윤을 이조참판으로 승진시켜주는 깜짝 인사를 단행했다. 다음날 신하들이 감사와 그날 있었던 신하들의 [[술주정]]을 사과드리러 왔을 때 [[연산군]]은 이세좌의 경우와 달리, 오히려 자신이 술자리에서 만취한 일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잔치에서 약속했던 선물과 신하들의 승진을 번복하지 않음으로서 신하들을 달랬다.[* 이때 이 자리에 있던 성준, 이극균은 감동하여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일로 눈물을 흘렸을까 하며 이런 모습으로 인해 연산군이 이세좌를 벌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그저 심기를 거슬러 잠시 화가 났던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넉 달 뒤인 연산 10년(1504년) 음력 [[1월 11일]] 연산군은 이세좌도 풀어주었고 다시 두 달 뒤인 음력 [[3월 3일]] 이세좌가 한양으로 올라와서 감사를 표시하자 [[연산군]]은 이세좌에게 술을 올려주며 "이것은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라는 농담까지 건네며 화가 다 풀린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대신들은 연산이 단순히 홧김에 심술을 부린 것으로 해석하여 안심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