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갑자사화 (문단 편집) == 기타 == 갑자사화 후 폐비론에 반대한 [[임사홍(조선)|임사홍]]이 중용되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임사홍을 갑자사화의 실질적 주동자라고 여기기도 했으나.. 이극균하고 친분으로 처벌위기까치 처하는 등 여러가지 정황을 보았을 때 갑자사화의 주동자는 [[연산군]]이며 임사홍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수준이 아니라 이극균과 연좌되어 죽을 뻔한 사람중 하나였다. 여하튼 그는 그렇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결국 [[중종반정]] 때 살해당했다.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후한 평도 들으며, 나름 괜찮은 정치 활동을 하였던 [[연산군]]은 이후 완전 [[폭군]]으로 돌변해서 매우 난잡한 정치를 펼쳤다.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 비뚤어졌다'는 평이 대세이나 일부 동정론 및 재해석도 잔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산군의 폭정을 절대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그런 동정론을 펼치기엔 연산군이 너무 막나간 것도 사실이다. 갑자사화와 이후의 숙청 때 화를 면한 인물 중 허종과 허침 형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갑자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인 윤씨의 폐비 논의가 있을 때, 두 형제는 누이의 충고를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서 논의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갑자사화 때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야사이다. 다만 실제로는 두 형제는 참석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폐비 자체에 반대했었다. 다만 폐비를 최종 결정할 때는 운좋게(?) 두 형제의 할머니의 장례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 [[청계천]]에는 두 형제가 말에서 떨어진 장소라는 종침교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은 형제의 이름에서 따온 것. 형제 중 형 허종은 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인 1494년에 이미 사망했다. 허침은 사화에 휘말리지 않고 벼슬살이를 계속 하다가 1505년에 사망했다. 실록에 있는 허침의 졸기에는 '늘 임금의 음황(淫荒)하고 정사가 문란하되 바로잡아 간하지 못함을 근심하더니, 드디어 고질이 되어 병이 위독해졌으되 약을 들지 않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침이 심적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고, 사관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 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을 보낸 것을 표현한 듯하다. 명나라의 강남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뒤 [[표해록]]을 집필한 [[최부]]도 이 때 목숨을 잃었다. 최부는 [[김종직]]에게 사사하였고 이 때문에 김종직 일파로 몰려서 무오사화 때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갔다가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잔여 세력을 제거하라는 연산군의 명령에 참형을 당했다. [[무오사화]]때와 달리 뒷처리가 꽤 무난하게 끝난다. 사림들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보았고 세조의 정통성 논란때문에 사안이 복잡해진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는 조선의 훈구 공신세력들까지도 폐비 윤씨 사사에 연관되어 있어서 함께 피해를 본 사건이기 때문. 그 원인이야 통설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연산군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발단이 된 사건이라 한국사 강사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고 하여 '''갑자'''사화라는 식으로 암기하게 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