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성씨) (문단 편집) === 회산 감씨 === ||<-2> {{{#!wiki style="margin: -15px -10px" || {{{#!wiki style="margin: -0px -5px" }}} '''{{{#fff,#2d2f34 {{{+1 檜山 甘氏}}}[br]{{{+1 회산 감씨}}}}}}''' ||}}} || || '''{{{#fff 관향}}}''' ||[[경상남도]] [[창원시]] || || '''{{{#fff 시조}}}''' ||감규(甘揆) || || '''{{{#fff 중시조}}}''' ||감철(甘喆) || || '''{{{#fff 집성촌}}}''' ||[[충청북도]] [[충주시]][br][[경상남도]] [[창원시]][br][[경상남도]] [[거창군]][br][[경상남도]] [[창녕군]] || || '''{{{#fff 인구}}}''' ||6,024명^^(2015년)^^ || 회산 감씨(檜山 甘氏)의 시조는 [[원나라]] [[성종(원)|성종]] 때의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 '''감규'''(甘揆)이다.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1351년(충정왕 3년) 원나라에 와 있었던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들어왔다. 이때 감규와 함께 공소(孔紹), 장경(張敬), 황보영(皇甫榮), 독고억(獨孤億), 서문(西門)씨, 남궁(南宮)씨, 변숙(邊肅) 등 7인도 함께 들어와 8학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에 올랐고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함평 이씨]]로 태사 겸 대제학 이흡(李潝)[* 潝은 물 빨리 흐르는 소리 __'''흡'''__, 웅덩이에 빠질__ '''압'''__의 2가지로 읽힌다.]의 딸이다. 감규가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진 후 15세손인 '''감수화'''(甘受和)에 이르기까지 연릉(延陵)[* 황해남도 연안군의 옛 명칭. 고려의 수도가 개경(현재의 개성직할시)이었으므로 중국에서 도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사람들은 개경 인근의 연안, 해주 등을 본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고려의 종2품 상계 문관의 품계이다. 다만 감철이 조선 후기 효종대의 인물이므로 연대상 모순이다.]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회산(檜山)[*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으로 삼게 되었다. 회산 감씨는 시조 감규로부터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세도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으며, 평장사[* 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 '''감흥협'''(甘興鋏)[* 시조 감규의 손자.]을 비롯하여 이부상서[* 고려시대 이부의 상서로 정3품 관직이다. 조선시대 이조판서와 비슷하다.] '''감철의'''(甘鐵懿), 밀직제학[* 밀직사의 제학으로 정3품 관직.]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 '''감진요'''(甘震耀), 이부시랑[* 고려시대 이부의 시랑으로 정4품 관직이다.] '''감침'''(甘鍼)·'''감전형'''(甘全形)등이 유명했다. 조선조에서는 감철의 손자로서 예부승지[*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승지는 각각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예부승지(禮部承旨)는 예방승지(禮房承旨)라고도 하며 예조의 자문을 맡은 우승지를 말한다.]를 지낸 '''감원한'''(甘元漢)과 이조참의에 오른 '''감익한'''(甘益漢) 형제가 뛰어났다. 특히 감익한은 1455년 (단종 3)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봉하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입은 충신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원종공신에 녹훈된 [[내금위]] 정략장군[* 무신 종4품 상계의 품계명.]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0689|'''감경인''']](甘景仁)과 사후 군자감 직장에 추증된 [[http://changwon.grandculture.net/changwon/toc/GC02200958|'''감경륜''']](甘景倫) 형제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하고 품계가 절충장군[*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에 이른 '''감재원'''(甘在元)과 김해부사[* 부사는 정3품 지방관직이다.]를 지낸 '''감기현'''(甘麒鉉) 부자가 있었다. 시조 감규의 묘는 충청도 공모산(功慕山)에 있었고 어제(御製) 신도비가 무곡산(舞谷山)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 향사를 지낸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마산합포구|합포]] 감씨, [[창녕]] 감씨, [[거창]] 감씨, [[충주]] 감씨, [[부령군|부령]] 감씨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창원|회산]] 감씨 단일본이라고 한다. 2015년 기준 국내에 총 6,024명이 있는 희성이다. 발음, 표기에 따라서 강씨, 김씨와 혼동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