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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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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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 )
1.1. 회산 감씨
1.1.1. 항렬표(行列表)
2. 실존 인물
2.1. 역사적 인물
2.2. 한국
2.3. 중국
3. 가상 인물
4. 여담



1. (달 )[편집]


한국과 중국의 성씨.

(夏)나라 초기에 지금의 산시성 후현 남서쪽에 감(甘)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姜)씨 성의 일파로 후에 동쪽에 있던 지금의 허난성 이양으로 이동했다. (商)나라 때에 이르러 감인(甘人)[1]의 수령 감반(甘盤)[2]은 상나라 왕 소을(小乙)의 신하가 되고, 이어서 부열(傅說)과 함께 상나라 고종(高宗) 무정(武丁)의 현신(賢臣)이 되어 무정을 보좌하여 나라의 중흥[3]을 이루었다. 이런즉 북송(北宋)의 <광운>(廣韻)[4]에서 이르길, 감(甘)씨 성은 무정의 신하 감반(甘盤)의 후손이고, 무정 때 상나라가 은(殷)(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 일대)[5]에 도읍한 연고로 이 계통의 감씨는 안양(安陽)에서 나왔다.

다른 계통의 감씨(甘氏)는 희(姬)씨 성에서 기원된 바 춘추시대에 형성되고 뤄양에서 비롯되었으니 (周) 혜왕(惠王) 희랑(姬閬)의 아들 숙대(叔帶)의 후손이다. <사기>(史記) 주나라 본기(周本紀)에 혜후(惠后)[6]가 숙대를 낳고 혜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길, 숙대는 혜왕의 아들이자 양왕의 동생으로 감(甘) 땅에 봉해졌기에 <좌전>(左傳)에서는 감소공(甘昭公)이라고 칭한다. <정의>(正義)에서는 <괄지지>(括地志)를 인용하여 이르길, 감성(甘城)은 뤄주 허난현[7] 남서쪽 25리에 있는데 숙대가 감읍(甘邑)에 봉함을 받아 감소공(甘昭公)이라 불렸고 이후 읍 이름을 성씨로 삼았으니 바로 감(甘)씨이다.

한국의 감씨는 회산, 창원, 합포 등이 있으나 모두 창원을 뜻하는 말로 같은 뿌리이며 회산 단본이다. 감(甘)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024명으로 조사되었다.


1.1. 회산 감씨[편집]


檜山 甘氏
회산 감씨

관향
경상남도 창원시
시조
감규(甘揆)
중시조
감철(甘喆)
집성촌
충청북도 충주시
경상남도 창원시
경상남도 거창군
경상남도 창녕군
인구
6,024명(2015년)
회산 감씨(檜山 甘氏)의 시조는 원나라 성종 때의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 감규(甘揆)이다.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1351년(충정왕 3년) 원나라에 와 있었던 공민왕(恭愍王)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들어왔다. 이때 감규와 함께 공소(孔紹), 장경(張敬), 황보영(皇甫榮), 독고억(獨孤億), 서문(西門)씨, 남궁(南宮)씨, 변숙(邊肅) 등 7인도 함께 들어와 8학사가 되었다. 그는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8]에 올랐고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함평 이씨로 태사 겸 대제학 이흡(李潝)[9]의 딸이다.

감규가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진 후 15세손인 감수화(甘受和)에 이르기까지 연릉(延陵)[10]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후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11]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회산(檜山)[12]으로 삼게 되었다.

회산 감씨는 시조 감규로부터 고려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세도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으며, 평장사[13] 감흥협(甘興鋏)[14]을 비롯하여 이부상서[15] 감철의(甘鐵懿), 밀직제학[16]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 감진요(甘震耀), 이부시랑[17] 감침(甘鍼)·감전형(甘全形)등이 유명했다.

조선조에서는 감철의 손자로서 예부승지[18]를 지낸 감원한(甘元漢)과 이조참의에 오른 감익한(甘益漢) 형제가 뛰어났다. 특히 감익한은 1455년 (단종 3)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봉하자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입은 충신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원종공신에 녹훈된 내금위 정략장군[19] 감경인(甘景仁)과 사후 군자감 직장에 추증된 감경륜(甘景倫) 형제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하고 품계가 절충장군[20]에 이른 감재원(甘在元)과 김해부사[21]를 지낸 감기현(甘麒鉉) 부자가 있었다.

시조 감규의 묘는 충청도 공모산(功慕山)에 있었고 어제(御製) 신도비가 무곡산(舞谷山)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 향사를 지낸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합포 감씨, 창녕 감씨, 거창 감씨, 충주 감씨, 부령 감씨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회산 감씨 단일본이라고 한다.

2015년 기준 국내에 총 6,024명이 있는 희성이다. 발음, 표기에 따라서 강씨, 김씨와 혼동하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한다.


1.1.1. 항렬표(行列表)[편집]


35세
현(鉉), 태(泰)
36세
○영(泳), ○식(植), ○주(柱)
37세
상(相), 경(炅), 병(炳)
38세
○병(炳), ○규(圭), ○은(垠)
39세
동(東)
40세
○희(熙)
41세
채(埰)
42세
○석(錫)
43세
호(浩)
44세
○근(根)
45세
형(炯)


2. 실존 인물[편집]



2.1. 역사적 인물[편집]


  • 감상중(甘尙中) - 본관은 합포(合浦)[22]. 조선 성종 때 교수(敎授)로 재직하던 중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 13위로 급제해 현감[23]에 올랐다.

  • 감경인(甘景仁) -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여도만호(呂島萬戶), 내금위(內禁衛) 정략장군(定略將軍) 등을 역임하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사후 삼렬(三烈)이라는 사호(祠號)를 받고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 감경륜(甘景倫) -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사후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추증되었다. 형 감경인과 함께 삼렬사에 봉안되었다.

  • 감철(甘喆) - 중시조. 시조 감규의 16세손. 북벌의 중지를 간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회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금자광록대부는 1362년(공민왕 11)에 이미 폐지된 바 있고, 북벌은 조선 후기 효종 대의 일이다. 따라서 감철이 금자광록대부에 올랐다는 건 연대상 모순일 수밖에 없다.

  • 감재원(甘在元) : 조선 후기의 무신.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 공으로 용양위 사과(정6품)를 제수받았다. 절충장군[24] 첨지중추부사[25] 겸 의관에 이르렀다. 경술국치창원으로 낙향하여 반룡산에 은거하였다. 대한제국에서 김해부사를 지낸 감기현(甘麒鉉)의 아버지이다.

  • 감기현(甘麒鉉) - 부친은 절충장군[26] 첨지중추부사[27] 겸 의관을 지낸 우우재(友于齋) 감재원(甘在元)이고, 모친은 순흥 안씨 안중금(安中嶔)의 딸이다. 1880년(고종 17) 경상남도 창원군 내동리에서 태어났다. 1899년(광무 3) 20세에 참정 민영환을 만나, 궁내부 주사로 추천되었다. 1902년(광무 6)에 중추원 의관으로 승진되었으며, 1904년(광무 8) 혜민원 참서가 되었다. 1907년(광무 11) 초계현감[28]이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29]가 되었다. 1907년(광무 12) 고종이 퇴위하자, 이에 분개하며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942년 호서의 삼산(三山)으로 이거하여, 구조하(具祖夏), 김기성(金璂成) 등 명사와 교류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김해 청천으로 내려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1964년에 사망했다.


  • 감영생(甘泳生)[30] - 밀양 의열단 소속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김원봉에게 항일자금을 댔고 국내, 일본, 만주 등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증조부 기일 밤인 1950년 7월 24일, 빨갱이로 몰려 1,681명과 함께 마산 괭이바다에서 수장당했다. 지난 2017년 '그것이 알고 싶다 1089회 (도둑골의 붉은 유령 - 여양리 뼈 무덤의 비밀)'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다루면서 관련 내용이 방송되었다. 우측 하단 사진의 오른쪽 인물이다.

  • 감익룡 -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서간도 무관학교(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다만, 친일 행적 의혹도 있다.


2.2. 한국[편집]


  • 감강인 - 前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 댄스 선수.
  • 감강찬 - 前 피겨 스케이팅 페어 선수.
  • 감명아 - 유튜버.
  • 감사용 - 前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 투수
  • 감병훈 - 前 삼성 라이온즈 투수
  • 감상두 - 계몽운동가[31]
  • 감예림 - 걸그룹 MAJORS의 멤버
  • 감우성 - 배우
  • 감익룡 - 독립운동가[32]
  • 감한솔[33] - 축구 선수

2.3. 중국[편집]


  • 감반(甘盘) - (商)나라의 명신(名臣).
  • 감무(甘茂) - (秦)나라의 승상(丞相).
  • 감라(甘羅) - (秦)나라의 상경(上卿)[34]. 감무의 손자.
  • 감영(甘英) - 로마제국에 파견된 후한(後漢)의 대사.
  • 소열황후 감씨(昭烈皇后 甘氏) - 촉한(蜀漢) 초대 황제 유비의 아내. 촉한의 추존황후.
  • 감녕(甘寧) - 손오(孫吳)의 장군. 북송(北宋)의 추증왕[35].
  • 감종구(甘從矩) - 오대십국시대 남오(南吳)의 개강대신(开疆大臣), 정남장군(征南將軍). 풍성(豐城伯). 부성개국백(富城開国伯). 풍성여당 감씨(豐城驪塘甘氏)의 시조.
  • 감영(甘泳) - 초의 시인.



3. 가상 인물[편집]




4. 여담[편집]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나열할 경우 가씨가 없다면 강씨를 제치고 간씨와 함께 높은 확률로 제일 앞자리에 오게 되는 성씨이다.[36] 이에 따라 학교에서 감씨를 가진 사람은 99%의 확률로 출석번호 1번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고려인이나 외국인이 많은 학교는 2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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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라 초기 감(甘) 땅에서 살다 이후 동쪽으로 이동해 온 일족.[2] 상나라 왕 소을(小乙)은 재위 6년에 아들 무정(武丁)을 하(河)에 살게 하고 감반(甘盤)에게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후 무정이 상나라 고종(高宗)으로 즉위하고 부열(傅說)과 함께 감반을 중용하여 중흥을 이루었으니 감반은 고종의 스승이자 신하이다.[3] 무정중흥(武丁中興) 또는 무정성세(武丁盛世)라고 한다.[4] 대송중수광운(大宋重修廣韻)의 약칭이다.[5] 은(殷)으로 도읍을 옮긴 18대 왕 반경(세조)부터 29대 왕 제신(주왕)까지를 만상(晩商)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상나라를 은나라로 칭하기도 한다.[6] 숙대는 후비 혜후의 소생이고 양왕은 정비의 소생으로 이복형제간이다 .[7] 현재의 허난성 뤄양시.[8]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9] 潝은 물 빨리 흐르는 소리 , 웅덩이에 빠질 의 2가지로 읽힌다.[10] 황해남도 연안군의 옛 명칭. 고려의 수도가 개경(현재의 개성직할시)이었으므로 중국에서 도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한 사람들은 개경 인근의 연안, 해주 등을 본관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11] 고려의 종2품 상계 문관의 품계이다. 다만 감철이 조선 후기 효종대의 인물이므로 연대상 모순이다.[12]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13] 중서문하성의 정2품 관직[14] 시조 감규의 손자.[15] 고려시대 이부의 상서로 정3품 관직이다. 조선시대 이조판서와 비슷하다.[16] 밀직사의 제학으로 정3품 관직.[17] 고려시대 이부의 시랑으로 정4품 관직이다.[18]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6승지는 각각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자문을 맡기도 하였다. 예부승지(禮部承旨)는 예방승지(禮房承旨)라고도 하며 예조의 자문을 맡은 우승지를 말한다.[19] 무신 종4품 상계의 품계명.[20]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21] 부사는 정3품 지방관직이다.[22] 현재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일대이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합포 감씨, 창녕 감씨, 거창 감씨, 충주 감씨, 부녕 감씨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회산 감씨 단일본이라고 한다.[23] 종6품의 지방직.[24]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25] 중추부의 첨지사. 정3품 관직.[26]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27] 중추부의 첨지사. 정3품 관직이다.[28] 현감은 종6품 지방관직이다.[29] 부사는 종3품 지방관직이다.[30] 생몰년 1914년~1950년.[31] 일제강점기하 사회주의 단체를 설립해서 활동한 인물로 그의 조직이나 후신 조직에 참여한 인물들 태반이 월북하거나 남한에 남아 남로당을 결성하고 6.25 전쟁을 발발시키는 등 국가를 전복하려고 했기에 추서받을 가능성이 없었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 북한과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들도 일제의 박해를 받아 계몽운동을 했다는 논리로 2020년 계몽운동을 했다고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으나 논란이 많다.[32]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나 친일 행위도 확인되기에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독립기념관에서 동명이인인지 한명인지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고 피력할 정도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친일 행위도 있어 1977년 대통령표창에 그쳤으나 건국훈장이 5등급까지 늘어나면서 종래 대통령표창이나 건국포장을 수여받은 이들도 재심사를 통해 건국훈장이나 건국포장에 추서한다고 법이 바뀌어 그 혜택을 본 케이스이다.[33] 중계 및 기사 등지에서 자주, 아니 거의 '김'한솔로 잘못 불리우며 전반 내내 김한솔로 부르던 중계진이 후반 중계 시작 전에 이를 정정하며 사과한 경우도 있다.[34] 승상(丞相)에 상당하는 재상직. 감라는 불과 12세에 상경이 되었다.[35] 소의무혜유애령현왕(昭毅武惠遺愛靈顯王).[36] 다만 간씨의 인구는 2015년 기준으로 약 2,300명 정도로 감씨보다도 인구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