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각기병 (문단 편집) == 일본의 사정 == 19세기 일본에서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각기병이 횡행했다. 당시 일본은 농업이 발달하여 쌀이 풍부히 유통되자 쌀을 주식으로 삼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때마침 전통적으로 쌀을 도정하던 방식인 물레방아를 대신하여 증기식 도정기계가 도입되고 보편화되자 이전보다 쌀의 껍질을 많이 깎아 하얀 백미를 만들기 쉬워졌다. 잡곡밥이나 도정이 덜 된 현미밥보다 여러 차례 도정한 하얀 백미로 만든 흰 쌀밥이 더 빠르고 맛있게 지어졌기 때문에 백미밥은 대중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그러나 쌀은 도정을 거듭해 껍질을 많이 깎을수록 하얀 속살만 남은 백미가 되어 부드럽고 맛이 좋아지지만, 그만큼 비타민B가 많이 함유된 배아 부분이 제거된다. 동시에 값싼 잡곡을 천시했던 문화, 영양소에 대한 연구의 미비, 값싼 채소 반찬조차 사치로 여겨질만큼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반복했던 서민들의 시대상으로 인해 딱히 반찬도 없이 백미밥에 소금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군]]에서 각기병 특히 환자가 많이 발생했다. [[일본 육군]]이나 [[일본 해군]] 내의 육상 부대에서도 심각했지만, 장거리 항해를 나선 [[해군]] 함선에서 그 빈도가 더욱 높았고, 일본군이나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치료할 방안을 찾지 못해 고생했다. 경험적 지식에서 나온 전통적 처방인 '잡곡을 먹는다'는 방법은 원인규명이 명확하지 않아 서구 과학이 아니라고 무시되었다. 특히 예전부터 [[에도]](현 [[도쿄]]) 지역에서 백미를 많이 먹다 각기병에 걸리는 일이 많아 '''에도병'''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당시 기준으로 약간 살만 해서 삼시세끼 백미는 그럭저럭 먹는데 반찬류가 부실한 식사를 하는, '''재산 수준이 어중간한 도시 사람에게 빈번히 생기는 일종의 사치병으로 여겨졌다.''' 이 대목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20세기 초 열강국가 중에서도 유독 일본에서 이 병이 잦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로 갑자기, 특히 군대에서 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각종 반찬류를 골고루 먹는 상류층은 물론, 돈 없어 싼 잡곡만 먹던 하류층이 되려 이 병에 걸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정작 그 무렵의 에도 지방에서는 각기병이 발병했을 때 초라하더라도 잡곡밥이나 메밀로 만든 [[소바]]를 한 그릇 먹으면 금방 낫더라는 민간요법이 이미 퍼져 있어서 그리 심각하게 유행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유학]]을 다녀온 해군 [[군의관]]인 타카기 카네히로(高木兼寛 1849-1920)가 각기병을 해결하고자 면밀히 조사했다. 당시 군인들 중에서도 장교들은 발병이 드물고 사병들에게 빈번했는데, 타카기는 두 비교집단 간의 결정적인 차이가 '식단'에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일본군에서는 서구권 해군의 급여 제도를 받아들여 기본 식재료인 쌀만 현물로 지급하고 그 외 부식류는 수병 개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해 식사조별로 알아서 조리해 먹는 방식을 채택하여, 병사를 모집할 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삼시세끼 흰쌀밥을 먹여주겠다]]'는 광고문구를 내걸었다. 그리고 실제로 병사들에게 삼시세끼 흰쌀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백미'''만'''을 현물 배급했다. 병사들을 위한 부식비가 추가로 지급되기는 했지만 열악한 환경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던 해군 병사들은 몇푼 되지도 않는 부식비를 정박해 있는 동안 술값이나 화대 비용으로 탕진해버리거나 고향의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정작 항해하는 동안에는 몇 주에서 몇 달을 백미밥만으로 버텼으니 각기병에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육군 병사들도 얼추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장기간 배를 타느라 어떤 식으로든 사식을 섭취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해군에서 특히 문제가 심각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이에 타카기는 각기병 발병 원인이 영양분 결핍으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비타민 B]]가 풍부한 [[보리]]와 잡곡, [[육류]]까지 혼합된, 각기병에 특효약인 식단을 해군에 도입했다. 특히나 [[카레라이스]]가 이 일화로 유명하다. 사실 이 시기는 비타민의 존재가 발견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타카기는 [[단백질]] 등이 모자란 식단이 문제라 판단했고 해군에 [[서양 요리]]를 도입하려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는 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양식에서 먹는 육류나 [[콩]]에 비타민 B군이 풍부했기 때문에 각기병에 특효인 것은 같았다. 그리고 타카기의 주장을 [[해군성]]도 받아들여 병사들의 식단을 직접 관리하는 동시에 부식까지 전부 현물로 지급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수병들이 보리밥이나 잡곡밥보다 흰쌀밥을 선호한 것은 쌀밥이 더 먹기좋고 맛있다는 당연한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로 가난한 하층민들이 잡곡밥을 먹었으므로, 군인들이 비싼 흰쌀밥을 세끼 먹는 것은 군인들이 우대를 받는 일종의 특권이자 힘든 군복무의 위안이었다. 쌀밥을 매일같이 먹으면서 신분이 상승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잡곡밥을 먹는 것을 대우가 떨어졌다고 여겼으므로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비타민 B가 풍부한 [[현미]]로 바꾸었더라면 문제를 해결하고 불만도 덜했겠지만, 당시에 현미는 그냥 값싸고 맛없는 쌀이어서 일부러 찾아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단순히 음식 선호 때문에 잡곡밥이나 보리밥을 거부한 것도 아니다. 보리밥을 예로 들면, 지금이야 압맥이나 할맥처럼 밥 짓기에 편하게 도정된 보리가 시판되지만, 이때는 그냥 통보리 밖에 없었다. 때문에 보리밥을 지으려면 일단 통보리를 하루 정도 물에 충분히 불린 뒤에 한 번 삶고, 다시 식힌 다음에 쌀과 섞어 밥을 해야 했다. 물에 하루 정도 불리지 않거나, 불려도 삶지 않거나, 불리지 않고 그냥 삶기만 하면 제대로 보리가 익지 않아 매우 딱딱해진다. 이런 번거로운 과정탓에 특히 야외 훈련 시에는 보리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1884년 원양 항해에 나선 [[훈련함|연습함]] [[츠쿠바]]에서 빵과 양식을 포함한 식단 개선 실험을 했다. 결과적으로 장기 항해를 했음에도 각기병으로 인한 사망자 및 중증 환자가 1명도 발생하지 않자, 해군은 해당 방법이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고 식단을 혼분식+양식 체계로 개선했다. 이 식단 개선 과정 중에 탄생한 것이 일본식 [[카레]]이다. 카레는 원래 [[인도 음식]]이지만, 인도를 지배한 영국 해군도 일종의 [[스튜]]로 해군의 선상 급식 메뉴로 도입했고, 영국 해군에 유학한 타카기가 이를 일본 해군의 급식에도 도입하였다. 영국 해군의 카레는 빵을 찍어먹는 방식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밥과 같이 먹을 수 있도록 걸쭉한 국물에 잘게 썬 건더기들이 들어가는, 우리가 아는 [[카레라이스]]로 로컬라이징해서 해군에 도입했다. 전후 이것이 일본 민간인들에게도 전파되어 오늘날 일본의 국민 요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카레조차도 보급 초기엔 누렇고 걸쭉한 카레를 처음 본 수병들이 [[어린이]]가 싸 놓은 [[똥 먹는데 카레 얘기하지 마라|설사똥같은 걸 준다]]며 [[단식투쟁|먹기를 거부하는 등]] 저항이 꽤 있었다. 식단 개선은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고, 1884년 이후로 일본 해군에서는 각기병으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물론 현대 이전에는 보리밥이 빈곤, 쌀밥이 부유의 상징이었기에 양식과 빵, [[보리밥]] 혼식에 격심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이들이 나오는 등 문제도 있었다. 츠쿠바의 원양 항해 때도, 서양식 빵식에 적응 못한 수병들 일부가 보급받은 빵을 바다에 버려서, 식사 시간만 되면 주변 바다에 빵들이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그나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내키지 않아도 양식을 먹기 시작하고 군대 특성상 가능한 강제로 먹이는 조치 등을 통해 점차 익숙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츠쿠바에서 발생한 소수의 각기 환자들이 죄다 이런 밥투정꾼들이라는 게 밝혀지며 타카기의 말이 설득력을 얻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이 문제는 자연히 해결됐다. 이 이론을 제시한 타카기가 쌀을 만악의 근원 비슷하게 생각해 매 끼니를 혼식으로 지급하게 한 탓도 있었는데, 사실 비타민은 인체에 극히 소량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하루~이틀에 한 끼만 잡곡을 섞어도 아무 문제가 없으므로 좀 과한 조치이긴 했다. 하지만 카레, [[니쿠쟈가]]처럼 [[일본인]]의 입맛에 맞게 개선한 조리법들이 차츰 등장하며 어떻게든 해결됐다. 현존하는 많은 서양식과 혼합된 일식 메뉴들은 이렇게 대부분 일본군 특히 해군에서 서양식 식단을 로컬라이징해 도입하려는 시도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로, 전후 육해군 전역자들을 통해 민간에도 퍼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는데, 일본 육군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일본군 내부의 해군과 육군간 자존심 문제]]가 있어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해군 놈들'의 방법을 베끼기를 싫어했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영국 해군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일본 육군은 독일 육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독일인 [[로베르트 코흐]]의 세균설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세균설을 강하게 신봉하는 군의관이 많았다. 그래서 당시 [[독일]] 유학파 출신 문학가 겸 육군 군의총감 [[모리 오가이]]가 각기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설을 지지하는 바람에, 육군은 [[러일전쟁]] 때까지 식단 개선이 없었다. 그래서 러일전쟁 당시 수많은 일본 육군 각기병 환자들에게 [[정로환]]을 처방했지만 당연히 효과가 없었고, 결국 전쟁중에 수만 명이나 각기병으로 사망하고서야 자존심을 굽히고 해군식을 받아들여 식단을 개선했다. 참고로 육군 군의총감이었던 [[모리 오가이]]는 훗날 학계에서 비타민B1을 발견해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1 결핍임이 증명된 뒤에도 죽는 날까지 각기병 세균 원인설을 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육군은 그가 죽고 나서야 방침을 바꿨다. 이 때문에 모리 오가이의 군의총감 시절 경력은 [[흑역사]]로 통한다. 각기병은 일본인인 [[스즈키 우메타로]]가 1910년에 비타민 B1을 세계 최초로 발견하고 나서 발병 기전이 해명되었으며, 비타민 B1의 복용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스즈키가 최초로 규명해냈다. 여담이지만 스즈키가 비타민 B1을 발견한 것은 인류가 처음으로 비타민이라는 물질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이었으며, 그의 발견 이후로 다른 종류의 비타민들도 속속들이 기능이 밝혀지면서 생물학계가 수십년 간 비타민 연구 열풍을 겪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