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라유키상 (문단 편집) == 처우 == [[다이쇼 시대|다이쇼 말기]]부터 [[쇼와 시대|쇼와 전기]]까지 가라유키상으로 활동했었던 '기타가와 사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보르네오 섬]]에서는 손님을 받았을 때 받는 돈은 포주와 가라유키상 여성이 수입의 50%를 반반씩 나누어서 차지하고, 여기서 다시 자기(가라유키상) 몫의 50% 중 선불금으로 받은 빚변제가 25%, 나머지 25%의 돈으로 의복과 생활용품, 식비 등의 잡비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 추가로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달에 최소한 20명 이상의 손님들을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즉, 한 달 동안 손님을 20명 이상 받지 못하면 채무 상환과 생필품 구매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뜻이다.) 만일 한달에 100엔쯤을 모으고 싶으면, 120명은 받아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필리핀]]에서는 가라유키상들이 주 1회의 [[임질]]검사와 월 1회의 [[매독]] 검사를 받아야만 했는데, 그 비용은 전부 가라유키상 본인들이 자비로 부담해야만 하였다. 그것도 실금액의 2배로 말이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2970|가라유키상 이야기]]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경우에는 업소에 손님이 넘쳐 하룻밤에 무려 30명의 손님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롱타임(숙박)은 10엔, 숏타임(일만 치르고 가는 것)은 2엔에 주어지는 시간은 길어야 5분이었으며 제한시간을 넘기면 할증요금이 추가로 붙는 그런 구조였다고 한다. 심지어 휴일도 사실상 없는 환경이었기에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쉬었다고 한다. 다만 막상 돈이 별로 없는 현지인은 그리 선호하지 않아 접객거부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실제 당시 가라유키상들이 상대하는 손님들은 대개 부유한 서양인이나 해외로 나온 일본인들이었다고. 가라유키상들이 살았던 해외 각지에는 지금도 그녀들이 묻힌 [[무덤]]과 [[묘비]]가 남아있는데, 그나마 이런 경우는 말년이 그나마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이나 [[성병]], 폐병 등에 걸려 더 이상 매춘을 못하게 되자, 바다나 정글에 버려진 채로 무덤도 없이 죽어간 가라유키상들이 많았다고 한다. 사실 그런 비참한 최후는 가라유키상들만 그랬던 게 아니고, 에도 막부 시절 일본 국내에서 유명했던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했던 유녀(매춘부)들도 [[성병]]에 걸려서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면 쫓겨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고 그 시체들을 대충 멍석에 말아 강가나 절 근처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식으로 방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