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허을 (문서 편집)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명천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건국훈장 애족장]] || 성명 ||허을(許鳦) || || 생몰 ||[[1885년]] [[2월 19일]] ~ ? || ||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지명동 || || 사망지 ||미상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생애 == 허을은 1885년 2월 19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지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5일 [[박승룡]] 등과 함께 명천군 하가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 화개 장터에서 5,000여 명의 군중을 집결시킨 뒤 화가장터로 행진했다. 이후 그들은 면장 면장 동필한(董弼漢)[*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성구동 [[동(성씨)|광천 동씨]] 집성촌 출신. 아래와 같이 구한말부터 지역 유지로 군림하였다. 구한말이던 1907년 10월 23일 함경남도 관찰도주사(觀察道主事)에 임명되었다.[[http://sjw.history.go.kr/id/SJW-L01100230-00200|#]] 이후 1910년 11월 5일 [[조선총독부]] 도서기를 그만두었고 1911년 7월 12일부터 1912년까지 경성군 서기로 근무했고, 1915년 9월 9일에 화태금융조합(花台金融組合)을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 1933년 4월 당시에도 대표로 있었다.[[http://db.history.go.kr/id/hs_002_1933_04_32_6790|#]] 1918년 8월 28일 함경농공은행 주주로서 조선식산은행 창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전후부터 명천군 하가면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된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6&totalCount=6&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8%91%A3%E5%BC%BC%E6%BC%A2&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8%91%A3%E5%BC%BC%E6%BC%A2&searchKeywordConjunction=AND|조선총독부 직원록]]] 을 끌어내어 "너도 조선 사람이니 우리의 대열에 참가하여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그러나 동필한이 "나는 조선총독이 임명한 면장이니 총독의 지시가 없이는 만세를 부를 수 없다."고 하자, 군중들은 격분해 면장에게 침을 뱉고 이리저리 쳤다. 이 일로 체포된 허을은 1919년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허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