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과정 (문서 편집) 鄭瓜亭 [목차] == 개요 == [[고려시대]]의 [[고려가요]]. [[신라]]가 아닌 고려 중기 작품이지만 낙구의 흔적 등 [[향가]]의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향가계 고려가요'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전형적인 향가 형식에서는 약간 변형되었다. 작가는 [[고려]] [[의종(고려)|의종]] 대의 [[문인]] 정서라는 사람인데, 이 작품은 현존하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정확하게 알려진 작품이다.''' 다만 긴 세월 동안 구전되어오다 조선 초에 이르러 한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정과정이 정서가 지은 원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인지 변형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적어도 첫 4개 연은 이제현의 한역시와 내용이 같기에, 고려 시대까지는 원문에 가까운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작연대는 여러 견해가 있다. 《[[악학궤범]]》에 가사가 실려 있으며, 《[[대악후보]]》에서는 가사와 함께 선율까지 확인할 수 있다. == 배경 == === 통설([[동래]] 창작설) === [[고려]] [[의종(고려)|의종]] 때의 척신[* 당시 정서의 직급은 내시랑중으로, [[인종(고려)|인종]] 때부터 왕의 외척과 혼인관계에 있었으므로 중신보다는 척신에 가깝다.] [[정서(고려)|정서]][* [[동래 정씨]] 가문 소속으로 [[왕국모]]의 외손자다.]는 [[개성시|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모함을 당해 1151년 [[동래]]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동래 정씨]]인 정서는 고향이 동래다. 진짜 산간벽지나 섬으로 보내는 본격적인 유배형이 아니라 [[고향]]으로 보내는 [[귀향]]형은 파면+강제적 자숙의 의미 정도로 내리는 벌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의종은 "죄가 없음을 알지만 여론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잠시 내려가서 쉬고 있으면 다시 부를 것이다"라고 안심시켜 정서를 내려보내는데, 이 때 정서는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배산]] 자락에 '''과정(瓜亭)'''이라는 [[정자(건축물)|정자]]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불러 주겠다던 왕의 소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정서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과정의 터는 동래부 남쪽 10리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대에 그 터를 찾을수 없다. 부산시는 그 일대를 망미동으로 추정하여 정과정 유적지를 지었다. === 이설([[거제시|거제]] 창작설) === 한편 거제 창작설도 있다. 정서는 동래 자택에서 5년 10개월을 지내다 1157년에 [[거제도]] [[사등면]] 오량역[* 현 지명 오량리에 있던 역관.] 일대로 옮겨져 13년 8개월을 지내는데 본인 고향으로 보내진 귀향과는 달리 정말 연고도 없는 섬으로 가는 유배형이 되어버린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읊은 노래라는 [[http://www.geojesim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42|학설]]이다. 또 작곡한 지역이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일단 짓고 나서는 많이 불렀을 테니[*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까지 구전되려면 보통 유명세를 탄 게 아니다.] 적어도 유배가 끝날 때까지 지낸 거제에서도 이를 계속 노래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정중부]]에 의해 의종도 1170년 9월 [[거제도]] [[둔덕면]] 둔덕기성에 유배되는데 정서가 복권되는 시점은 1달여가 지난 1170년 10월이므로 두 사람이 거제의 가까운 장소에서 동시에 머물렀던 시간이 있고, 어쩌면 거제에서 재회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의종(고려)|의종]]이 유배된 둔덕기성(폐왕성)은 거제시 [[둔덕면]]과 [[사등면]]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정서가 유배된 오량리가 한눈에 보인다. 오량리는 견내량을 건너 둔덕기성을 오르는 길목으로 둔덕기성과 오량성은 2km 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유배된 고려왕족 ‧ 귀족이 많이 살았으며 의종이 온 뒤 백성들은 견내량[* 거제와 통영 사이 해협. 임진왜란 때 [[한산도 대첩]]이 있던 곳이다.]을 임금이 건넜다 하여 '전하도'(殿下渡)라 불렀다. 그리고 이후 견하도-견내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http://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9988|#]] 이 때 정서가 거제에 의종이 온 사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고 재회했을 가능성도 높다. 19년간 자신을 불러주길 바랬던 심정을 담은 이 노래를 의종이 민중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고 정서에게서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정서는 한달 뒤 복권되어 개성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관직을 맡진 않았다. 의종은 3년동안 이곳에서 지내다 경주로 옮겨간 뒤 [[이의민]]에게 살해된다. 이 두사람의 아련한 사연을 간직한 둔덕기성 입구에 정과정비가 세워져 있다. [[파일:둔덕기성-정과정_(19051602).jpg]] 한편 의종이 계림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둔덕에 남아 있던 왕족과 신민들은 섣달그믐날 의종을 기려 제를 올렸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다 현재는 추모제로 이어지고 있다.[[http://m.newsgn.com/32299|#]] == 내용 == [[파일:external/blog.joins.com/oneplusone1.jpg]] 부산에 있는 정과정 유적지에 위치한 노래비 >내 님믈 그리ᅀᆞ와 우니다니 >山 졉도ᇰ새 난 이슷ᄒᆞ요ᅌᅵ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ᄃᆞᆯ 아으 >殘月曉星이 아ᄅᆞ시리ᅌᅵ다 >넉시라도 니믄 ᄒᆞᆫᄃᆡ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ᅌᅵᆺ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ᅌᅵ다 >ᄆᆞᆯ힛 마리신뎌 >ᄉᆞᆯ읏븐뎌 아으 >니미 나ᄅᆞᆯ ᄒᆞ마 니ᄌᆞ시니ᅌᅵᆺ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으니 >산 접동새와 내 신세가 비슷합니다. >(모함들이 사실이) 아니며 거짓인 줄을 아아 >새벽녘의 달과 별이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과 함께하고 싶구나 아아 >(내가 죄가 있다고) 우기시던 이가 누구셨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슬픈 말이시구나[* 'ᄆᆞᆯ힛 마리신뎌'의 해석은 논란이 많은데, [[법화경언해]](1463)에서 'ᄆᆞᆯ다(슬퍼하다)'가 문증되며 [[월인석보]](1459)와 [[삼강행실도언해]](1481)에서 'ᄆᆞᆲ다(슬프다)'가 문증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ᄆᆞᆯ힛' 역시 '슬픈'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사르고 끊듯 하구나[* 'ᄉᆞᆯ읏븐뎌'의 'ᄉᆞᆯ읏'은 'ᄉᆞᆯ다(불사르다)'와 '긏다(끊다)'의 어간이 결합해 ㄱ 약화가 진행된 것으로, [[월인석보]] 권8에서 단독으로 부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불에 사르고 애를 끊는 듯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 아아 >님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소[* 감탄사로, 현대어에서 멈추라는 의미의 감탄사인 '아서라'와 같은 의미다.] 님이여, 다시 들으사 사랑해 주소서 한 줄로 요약하면 왕에게 '날 잊지 말고 이제 그만 다시 궁으로 불러 주세요' 하고 비는 내용이다. 유배문학/연군가(충신연주지사)의 효시로, 수백 년 뒤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원조격쯤 되는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다. == 여담 == * 정서는 [[무신정변]] 이후 [[명종(고려)|명종]] 시대에 복권되어 개성으로 돌아갔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 창작 배경으로 인해 [[충신연군지사]]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궁중 속악 악장에도 채택되었으며, 사대부들까지도 이 노래를 배워 익혀야 했다. 그래서 현재 전해지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명확하게 남아있다.[* 정과정 외에는 대표적으로 예종의 도이장가가 있지만 도이장가는 8구체 향가의 마지막 형태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어, 명확하게 고려가요(속요)로 분류되는 노래로는 사실상 정과정이 유일하다고 보아도 될 듯.] * 그 후 [[이제현]]이 정과정을 악부체의 한시 형태로 옮겨 적었는데, 《[[고려사]]》 〈악지〉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원문의 첫 4개 연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2 [ruby(憶君無日不霑衣, ruby=억 군 무 일 부 점 의)]}}} 임을 그리워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2 [ruby(政似春山蜀子規, ruby=정 사 춘 산 촉 사 규)]}}} 마치 봄 산의 접동새와 같습니다. >{{{+2 [ruby(爲是爲非人莫問, ruby=위 시 위 비 인 막 문)]}}} 사람들이여, 옳고 그름을 묻지 마시오. >{{{+2 [ruby(只應殘月曉星知, ruby=지 응 잔 월 효 성 지)]}}} 다만 새벽녘의 달과 별만이 알 것입니다. == 정과정 유적지 ==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10316.88001005930i1.jpg]] 주소는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 7-2번지 일원이며,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4호이다. 정과정은 고려시대 문신인 [[정서(고려)|정서]](鄭敍)가 [[유배]]생활을 할 때 [[정자(건축물)|정자]]를 짓고 오이밭을 일구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고려가요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부지(東萊府誌)』 등에 의하면 과정(瓜亭)은 ‘동래부 남쪽 1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자는 없으나 그 터는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정과정의 현재 위치는 [[수영강]]변을 따라 수영하수처리장에서 [[고려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일대 대부분의 지역은 개발 등으로 인해 원 지형을 찾기 어려우며, 수영구 망미동 산 7-2번지 일대만 원 지형을 간직한 녹지로 남아 있다. 이곳에는 경암(鏡巖, 용두곶)이라는 바위가 있고, 보호수 1그루와 1984년 토향회에서 건립한 정과정 시비(詩碑)가 있는 등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과정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오옹건내’를 건너서 오이밭을 일구고, 또한 망산(望山, 망미주공아파트 자리)에 올라가 임금이 계시는 개경(開京, 지금의 개성)을 바라보며 임금께 잔을 바쳤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부산광역시 문화예술과 인용] 본래는 [[배산]]의 동쪽부근에 해당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배산의 골짜기부근[* 현재 토곡으로 불리는 지역일대.]이 개발되고 사라져 분리가 되었고, 현재의 과정은 지금의 배산과는 관련이 사라졌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망미역|망미역교차로]]부터 [[토곡]]사거리를 거쳐 [[연제구]] [[연산동(부산)|연산1동]] 과정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왕복 5~6차로 [[도로]]인 [[과정로]]는 바로 정과정의 명칭을 따온 것이다. === 대중교통 === * 수영강변e편한세상 정류장 : [[부산 버스 수영2]], [[부산 버스 54]], [[부산 버스 115]] * 수영강푸르지오아파트 정류장 : [[부산 버스 100]], [[부산 버스 100-1]], [[부산 버스 307]] [[분류:고려가요]][[분류:부산광역시의 기념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