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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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瓜亭

1. 개요
2. 배경
2.1. 통설(동래 창작설)
2.2. 이설(거제 창작설)
3. 내용
4. 여담
5. 정과정 유적지
5.1. 대중교통


1. 개요[편집]


고려시대고려가요. 신라가 아닌 고려 중기 작품이지만 낙구의 흔적 등 향가의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향가계 고려가요'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전형적인 향가 형식에서는 약간 변형되었다. 작가는 고려 의종 대의 문인 정서라는 사람인데, 이 작품은 현존하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정확하게 알려진 작품이다. 다만 긴 세월 동안 구전되어오다 조선 초에 이르러 한글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정과정이 정서가 지은 원문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인지 변형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1] 제작연대는 여러 견해가 있다.

악학궤범》에 가사가 실려 있으며, 《대악후보》에서는 가사와 함께 선율까지 확인할 수 있다.

2. 배경[편집]



2.1. 통설(동래 창작설)[편집]


고려 의종 때의 척신[2] 정서[3]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모함을 당해 1151년 동래유배되었다. 그런데 동래 정씨인 정서는 고향이 동래다. 진짜 산간벽지나 섬으로 보내는 본격적인 유배형이 아니라 고향으로 보내는 귀향형은 파면+강제적 자숙의 의미 정도로 내리는 벌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의종은 "죄가 없음을 알지만 여론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잠시 내려가서 쉬고 있으면 다시 부를 것이다"라고 안심시켜 정서를 내려보내는데, 이 때 정서는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배산 자락에 과정(瓜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오이를 재배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불러 주겠다던 왕의 소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정서가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과정의 터는 동래부 남쪽 10리에 위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대에 그 터를 찾을수 없다. 부산시는 그 일대를 망미동으로 추정하여 정과정 유적지를 지었다.

2.2. 이설(거제 창작설)[편집]


한편 거제 창작설도 있다. 정서는 동래 자택에서 5년 10개월을 지내다 1157년에 거제도 사등면 오량역[4] 일대로 옮겨져 13년 8개월을 지내는데 본인 고향으로 보내진 귀향과는 달리 정말 연고도 없는 섬으로 가는 유배형이 되어버린 그때의 참담한 심정을 읊은 노래라는 학설이다. 또 작곡한 지역이 어느 곳이라 할지라도 일단 짓고 나서는 많이 불렀을 테니[5] 적어도 유배가 끝날 때까지 지낸 거제에서도 이를 계속 노래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흥미로운 사실은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정중부에 의해 의종도 1170년 9월 거제도 둔덕면 둔덕기성에 유배되는데 정서가 복권되는 시점은 1달여가 지난 1170년 10월이므로 두 사람이 거제의 가까운 장소에서 동시에 머물렀던 시간이 있고, 어쩌면 거제에서 재회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의종이 유배된 둔덕기성(폐왕성)은 거제시 둔덕면사등면 경계에 있는 산성으로 정서가 유배된 오량리가 한눈에 보인다. 오량리는 견내량을 건너 둔덕기성을 오르는 길목으로 둔덕기성과 오량성은 2km 떨어져 있다. 이 일대는 유배된 고려왕족 ‧ 귀족이 많이 살았으며 의종이 온 뒤 백성들은 견내량[6]을 임금이 건넜다 하여 '전하도'(殿下渡)라 불렀다. 그리고 이후 견하도-견내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때 정서가 거제에 의종이 온 사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고 재회했을 가능성도 높다. 19년간 자신을 불러주길 바랬던 심정을 담은 이 노래를 의종이 민중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고 정서에게서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정서는 한달 뒤 복권되어 개성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관직을 맡진 않았다. 의종은 3년동안 이곳에서 지내다 경주로 옮겨간 뒤 이의민에게 살해된다. 이 두사람의 아련한 사연을 간직한 둔덕기성 입구에 정과정비가 세워져 있다.

파일:둔덕기성-정과정_(19051602).jpg

한편 의종이 계림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둔덕에 남아 있던 왕족과 신민들은 섣달그믐날 의종을 기려 제를 올렸으며, 이는 1970년대까지 지속되다 현재는 추모제로 이어지고 있다.#

3. 내용[편집]


파일:external/blog.joins.com/oneplusone1.jpg
부산에 있는 정과정 유적지에 위치한 노래비

내 님믈 그리ᅀᆞ와 우니다니

山 졉도ᇰ새 난 이슷ᄒᆞ요ᅌᅵ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ᄃᆞᆯ 아으

殘月曉星이 아ᄅᆞ시리ᅌᅵ다

넉시라도 니믄 ᄒᆞᆫᄃᆡ 녀져라 아으

벼기더시니 뉘러시니ᅌᅵᆺ가

過도 허믈도 千萬 업소ᅌᅵ다

ᄆᆞᆯ힛 마리신뎌

ᄉᆞᆯ읏븐뎌 아으

니미 나ᄅᆞᆯ ᄒᆞ마 니ᄌᆞ시니ᅌᅵᆺ가

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으니

산 접동새와 내 신세가 비슷합니다.

(모함들이 사실이) 아니며 거짓인 줄을 아아

새벽녘의 달과 별이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과 함께하고 싶구나 아아

(내가 죄가 있다고) 우기시던 이가 누구셨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슬픈 말이시구나[7]

사르고 끊듯 하구나[8]

아아

님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소[9]

님이여, 다시 들으사 사랑해 주소서

한 줄로 요약하면 왕에게 '날 잊지 말고 이제 그만 다시 궁으로 불러 주세요' 하고 비는 내용이다. 유배문학/연군가(충신연주지사)의 효시로, 수백 년 뒤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의 원조격쯤 되는 작품으로 간주할 수 있다.

4. 여담[편집]


  • 정서는 무신정변 이후 명종 시대에 복권되어 개성으로 돌아갔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 창작 배경으로 인해 충신연군지사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궁중 속악 악장에도 채택되었으며, 사대부들까지도 이 노래를 배워 익혀야 했다. 그래서 현재 전해지는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자가 명확하게 남아있다.[10]
  • 그 후 이제현이 정과정을 악부체의 한시 형태로 옮겨 적었는데, 《고려사》 〈악지〉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원문의 첫 4개 연과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憶君無日不霑衣(억 군 무 일 부 점 의 임을 그리워하여 옷을 적시지 않는 날이 없으니
政似春山蜀子規(정 사 춘 산 촉 사 규 마치 봄 산의 접동새와 같습니다.
爲是爲非人莫問(위 시 위 비 인 막 문 사람들이여, 옳고 그름을 묻지 마시오.
只應殘月曉星知(지 응 잔 월 효 성 지 다만 새벽녘의 달과 별만이 알 것입니다.


5. 정과정 유적지[편집]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10316.88001005930i1.jpg

주소는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 7-2번지 일원이며,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54호이다.

정과정은 고려시대 문신인 정서(鄭敍)가 유배생활을 할 때 정자를 짓고 오이밭을 일구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고려가요인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부지(東萊府誌)』 등에 의하면 과정(瓜亭)은 ‘동래부 남쪽 10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자는 없으나 그 터는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 보면 정과정의 현재 위치는 수영강변을 따라 수영하수처리장에서 고려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일대 대부분의 지역은 개발 등으로 인해 원 지형을 찾기 어려우며, 수영구 망미동 산 7-2번지 일대만 원 지형을 간직한 녹지로 남아 있다.

이곳에는 경암(鏡巖, 용두곶)이라는 바위가 있고, 보호수 1그루와 1984년 토향회에서 건립한 정과정 시비(詩碑)가 있는 등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과정은 이곳을 중심으로 하여 ‘오옹건내’를 건너서 오이밭을 일구고, 또한 망산(望山, 망미주공아파트 자리)에 올라가 임금이 계시는 개경(開京, 지금의 개성)을 바라보며 임금께 잔을 바쳤다고 전해지는 곳이다.[11]

본래는 배산의 동쪽부근에 해당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배산의 골짜기부근[12]이 개발되고 사라져 분리가 되었고, 현재의 과정은 지금의 배산과는 관련이 사라졌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망미역교차로부터 토곡사거리를 거쳐 연제구 연산1동 과정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왕복 5~6차로 도로과정로는 바로 정과정의 명칭을 따온 것이다.


5.1. 대중교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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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적어도 첫 4개 연은 이제현의 한역시와 내용이 같기에, 고려 시대까지는 원문에 가까운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 당시 정서의 직급은 내시랑중으로, 인종 때부터 왕의 외척과 혼인관계에 있었으므로 중신보다는 척신에 가깝다.[3] 동래 정씨 가문 소속으로 왕국모의 외손자다.[4] 현 지명 오량리에 있던 역관.[5]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까지 구전되려면 보통 유명세를 탄 게 아니다.[6] 거제와 통영 사이 해협. 임진왜란 때 한산도 대첩이 있던 곳이다.[7] 'ᄆᆞᆯ힛 마리신뎌'의 해석은 논란이 많은데, 법화경언해(1463)에서 'ᄆᆞᆯ다(슬퍼하다)'가 문증되며 월인석보(1459)와 삼강행실도언해(1481)에서 'ᄆᆞᆲ다(슬프다)'가 문증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ᄆᆞᆯ힛' 역시 '슬픈' 정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8] 'ᄉᆞᆯ읏븐뎌'의 'ᄉᆞᆯ읏'은 'ᄉᆞᆯ다(불사르다)'와 '긏다(끊다)'의 어간이 결합해 ㄱ 약화가 진행된 것으로, 월인석보 권8에서 단독으로 부사처럼 쓰이기도 했다. 불에 사르고 애를 끊는 듯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인다.[9] 감탄사로, 현대어에서 멈추라는 의미의 감탄사인 '아서라'와 같은 의미다.[10] 정과정 외에는 대표적으로 예종의 도이장가가 있지만 도이장가는 8구체 향가의 마지막 형태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어, 명확하게 고려가요(속요)로 분류되는 노래로는 사실상 정과정이 유일하다고 보아도 될 듯.[11] 부산광역시 문화예술과 인용[12] 현재 토곡으로 불리는 지역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