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왕직 (문서 편집) [[분류:이왕가]][[분류:조선총독부]] [목차] == 개요 == {{{+1 [[李]][[王]][[職]] (りおうしき)}}}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구 [[대한제국 황실]]([[이왕가]])의 의전 및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 1910년 12월 20일 [[개설]]되었다. 산하기구로는 [[이왕직 아악부]] 등이 있었다. 기존의 대한제국 궁내부에서 이토 통감이 4,400명을 해고 시키고 남은 조직인데 1909년 기준으로 친임관 33명, 주임관 76명, 판임관 229명, 판임대우 3명, 촉탁 33명, 고원 10명외 궁녀와 내시가 대충 4천명 가량 있었다. 다만 법적으로 이왕직 직원들은 조선 총독의 감독하게 있었다. 한일합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직원, 궁녀, 내시 등을 감축 하였다. 해방 이후 1945년 11월 8일에 [[미군정]] 휘하 "구황실재산사무청"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사무청 초대 장관은 [[독립운동가]] 윤홍섭. == 직제 == * 장관 : 이왕직 사무 최고관리자. 대한제국 구황실을 담당하는 자리여서 그런지 웬만하면 조선인만 보(補)했다. || '''대수''' || '''역대 장관''' || '''역임 기간''' || '''비고''' || || 1대 || [[민병석(1858)|민병석]] || 1911~1919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문제를 처리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에 의친왕의 수행원 자격으로 참석한 것도 이때. || || 2대 || [[이재극]] || 1919~1923 ||종친. 이왕직 장관이 종친이었던 경우는 이재극이 유일하다. || || 3대 || [[민영기(조선)|민영기]] || 1923~1927 ||을사조약에 반대했다가 후일 찬동한 사람. || || 4대 || [[한창수]] || 1927~1932 ||찬시, 장시사장 등 이왕직 내부승격 코스를 걸은 사람. [[이우]]가 [[박찬주]]와 결혼하겠다고 할 때, 일본 황족과 결혼해야 한다면서 반대했다. 궁내성까지 개입해서 결혼을 허락하자 여기 반발하며 사퇴했다. || || 5대 || 시노다 지사쿠 || 1932~1940 ||유일한 일본인 장관. 한창수의 사퇴로 직을 승계했다. || || 6대 || [[이항구]] || 1940~1945 ||이완용의 아들. 이왕직에서 의식과장으로 있다가, 시노다 지사쿠가 장관으로 올라가며 차관을 맡았다. 이후 장관으로 승진. || || 7대 || 장헌식 || 1945 5월 ~ 11월 ||일본 유학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 여러 직을 두루 지냈다. 해방 이후에도 이왕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몇 개월을 더 지내고 사퇴했다. 그리고 1946년 이왕직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됐다. || * 차관 : 장관 보좌, 부재 시 직무대리. 웬만하면 일본인만 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