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연총 (문서 편집) [include(틀:고려사)] ---- [목차] 吳延寵 (1055 ~ 1116) == 개요 == 고려의 인물. [[해주시|해주]] 출신이다. 시호는 문양(文襄). == 생애 == === 임관 배경 === 오연총은 오나라 오씨 왕족의 후손으로 공부에 힘써서 글 쓰는 능력을 닦았고 과거에 급제한다. === 숙종 시기 === [[숙종(고려)|숙종]]이 즉위한 뒤로부터 외국에 사절로 많이 파견된다. 숙종 원년(1096) [[요나라]]에 가서 천안절(天安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 2년 뒤 기거랑 병부낭중에 오르고, 그로부터 2년 뒤인 숙종 5년(1100) 상서 [[왕하(고려)|왕하]]와 [[북송]]에 가서 황제 [[휘종(송)|휘종]]의 즉위를 축하한다. 왕하와 오연총 등은 숙종으로부터 송나라에서 『[[태평어람]]』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중간에서 송나라 사람들이 감추고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오연총은 휘종에게 직접 표문을 올려서 간청했고 태평어람 1천여권과 함께 이듬해에 돌아오게 된다. 숙종은 부왕 [[문종(고려)|문종]]때부터 구하려던 책을 훌륭한 사신들 덕분에 이제 얻게 되었음에 기뻐하며 정사 왕하, 부사 오연총과 기타 요좌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는데, 오연총은 이 때 중서사인 관직을 얻는다. 고려에서는 벼슬에 오른 사람은 일정 기간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야 하는 관례가 있다. 당시 숙종은 [[전주시|전주]], [[청주시|청주]], [[광주시|광주]] 세 곳의 수령과 송나라 사신을 대접할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 오연총을 전주목사로 보낸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에 따르면 이는 오연총이 재상이 될 능력이 있음을 알아보고 장차 크게 쓰려고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시험하기 위험이었다. 오연총은 숙종의 기대에 부응해 선정을 베풀었고 인사 고과에서 최고점을 받으니, 숙종 9년(1104) 3월 개경으로 돌아가서 추밀원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 관직을 받고 6월에 다시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로 관직이 옮겨진다. 숙종 말 오연총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1104), 동지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승지(1105)를 역임한 한편, 숙종 9년(1104)의 남경 행차에 호종하기도 한다. [[예종(고려)|예종]]이 즉위한 뒤 지추밀원사 어사대부 한림학사승지에 임명된다. === 여진 정벌 준비 === 예종은 고려 동북면 [[여진족]]들의 동향에 주목한다. 숙종 9년(1104) 국경에서 여진족과의 충돌이 있었다. 숙종은 여진 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편성했다. 부왕의 유지를 잇기 위해 예종은 중신들을 국경에 보낸다. 오연총은 예종 즉위년(1105) 11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고 12월에 동계행영병마사로 관직이 바뀌며, 지병마사 김기감과 병마부사 임신행이 오연총을 보좌한다. 오연총은 예종 원년(1106) 1월 동계행영병마사로서, 별무반 신기군의 징병 기준을 더 높일 것을 제안한다. 오연총의 제안으로 70세 이상 부모를 둔 외동아들은 면제됐고, 한 가구에서 서너명이 종군하는 경우 한 명은 면제됐으며, 재추의 자제는 자원한 것이 아니면 무조건 면제 대상이 됐다. 오연총의 관직은 검교사공 형부상서에 이른다. 예종 원년(1106) 11월, 오연총은 윤관과 함께 개경 숭인문 밖에서 별무반 신기군과 신보군을 사열한다. 둘은 12월에 왕과 평장사 최홍사 등의 앞에서 강론을 하고 이듬해 의대를 하사받는다. 여진 정벌을 망설이는 예종은 평장사 최홍사가 태묘에서 점을 쳐 길한 괘를 얻은 끝에 결심을 굳힌다. 여진 정벌에서 누가 원수가 될 것인가 의논이 오간 끝에 예종 2년(1107) 11월 원수에 윤관, 부원수에 오연총이 결정된다. 그런데 오연총은 윤관이 결심을 굳힌 것과는 반대로 여진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윤관은 오연총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오연총은 잠자코 윤관을 따른다. 12월 서경 위봉루에서 예종은 삼군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두 원수에게 부월을 하사하고 동계로 보낸다. === 서경 [[용덕궁|용언궁]] 창건 논란 === 한편 여진 정벌 준비에 나선 같은 시기에 서경에 궁궐을 세우는 것에 관해 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은 한 술사가 서경 용언(龍堰)에 궁궐을 세우고 자주 순행할 것을 예종에게 권한 일에서 시작한다. 술사의 참언이 그럴듯하다고 여긴 예종은 양부(중서문하성, 상서성)와 장령전(長齡殿) 수교원(讎校員)의 유신들에게 논의하게 하는데, 이들 모두 술사의 말이 옳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추밀원사 오연총이 홀로 반대 의사를 내비친다. >최근에 [[서울|남경]]의 공사가 막 끝났습니다. 백성은 피로하고 재물은 떨어졌습니다. 피로한 백성들을 동원해 새 궁궐을 세우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래도 순행하기를 바라신다면 옛 궁궐만한 것이 없습니다. >近者, 南京之役甫畢. 民勞財匱. 不可役疲民起新宮. 如欲巡御, 不如舊宮. 그러나 예종은 오연총에게 답하지 않는다. 예종 원년(1106) 9월 사천소감, 태사령 등을 서경에 보내 용언의 터를 살피게 한다. 이듬해 예종 2년(1107) 9월 평장사 최홍사가 서경 용언에 궁을 세우고 아예 그곳에서 조회를 받을 것을 제안한다. 오연총은 다시 세 가지 근거를 들며 최홍사의 의견에 반대한다. 1. 전례(문종의 실책) 문종은 현명한 왕이었지만 한 차례 술수에 빠져 서경에 [[좌우궁궐]]을 지은 일이 있었다. 문종은 새 궁궐을 축조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낭비한 것을 후회했고, 순행해봐도 효엄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 끝내 순행조차 하지 않았다. 1. 남경과의 비교 비슷한 이유로 남경을 새로 세운 지 7~8년이 다 됐는데도 길한 일이 일어난 바 없다. 1. 기존 궁궐의 존재 새로 궁궐을 지으려는 서경 용언 근처에는 이미 옛 궁궐이 있다. 그런데도 굳이 새 궁궐을 짓기 위해 민가를 헐면 백성들만 소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예종은 최홍사의 주장을 따랐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긴다. === [[고려의 여진 정벌]] === 여진 정벌 중인 예종 3년(1108)에는 골짜기에서 적습을 당해 포위되고 화살까지 맞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이른 일이 있다. [[척준경]]이라는 녹사가 구원하러 달려오고 원군이 여진군의 포위를 푼 끝에 윤관과 오연총 등이 모두 기적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다. [[동북 9성]]을 쌓고 4월에 협모동덕치원공신(協謀同德致遠功臣)으로 녹훈되며 상서좌복야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웅주(雄州)에서 내구마 1필을 하사받는다. 둘은 9일 개선해 [[개경]]의 동쪽 교외에 이르러 대방후 왕보, 제안후 왕서의 마중을 받고, 연회에 참석한다. 이어 경령전에서 윤관과 함께 받았던 부월을 다시 바친 뒤 문덕전으로 자리를 옮겨 밤늦게까지 변방의 일을 의논한다. 얼마 뒤 23일에 여진족이 다시 웅주를 습격하는데, 이번에는 오연총이 홀로 부월을 받고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구원에 나선다. 오연총은 [[문관(고려)|문관]], 김준, [[왕자지]]와 네 길로 나누어 웅주로 향한다. 여진족은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 꼭대기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데 오연총 등이 산을 올라가서 기습한다. 북쪽으로 도망가서 다시 진을 치고 싸우려는 여진족들을 마저 크게 이기니 적들은 목책을 불사르고 퇴각한다. 오연총은 웅주성에 들어가서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출전한 장수들을 차등 있게 벌하고 8월에 개경으로 개선한다. 오연총에게 양구진국공신 수사도 연영전대학사가 더해진다. 예종 4년(1109) 4월, 오연총은 동계병마부원수로 부임하기 위해 다시 개경을 떠나며 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린다. 웅주성에서 패퇴했던 여진족들은 다시 부족들을 규합해 길주성을 포위했고, 병마부사 이관진과 병마판관 [[허재(고려)|허재]], [[김의원(고려)|김의원]] 등이 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길주를 구원하기 위해 또 부월까지 직접 받고 나선 오연총은, 이번에는 패배의 쓴맛을 본다. 공험진까지 진군한 오연총은 도중에서 여진군과 마주쳐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고 병사들은 모두 각 성으로 흩어진다. 여러 성들이 여진군에 함락되고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다. 오연총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윤관까지 구원에 나선다. 오연총은 스스로를 탄핵하는 장계를 올린 뒤 윤관과 합류해, 여전히 성을 지키고 있는 길주성을 마지막으로 구원하러 나선다. 길주로 향하던 도중에 함주사록 유원서가 말을 타고 달려와서 여진족들이 강화를 청하고 있다고 전한다. 오연총과 윤관은 성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고, 논의가 오간 끝에 9성을 여진에 반환하는 조건으로 전쟁이 끝난다. === 전후 === 여러 대신들이 전쟁에서 진 오연총과 윤관을 탄핵했다. 아직 두 원수가 돌아오기도 전인 6월 평장사 최홍사와 [[김경용(고려)|김경용]], 참지정사 [[임의(고려)|임의]]와 추밀원사 [[이위(고려)|이위]]가 오연총과 윤관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니 예종은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의 부절과 부월을 미리 걷어버린다. 7월에 돌아온 오연총과 윤관은 부절과 부월이 없으니 복명할 수 없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11월에는 간의대부 이재와 김연, 어사대부 최계방 등 간관들이 패전의 죄를 물으라고 간언하는데, 예종이 듣지 않자 각문 밖에서 강하게 간쟁한다. 이듬해 예종 5년(1110) 5월에는 최홍사와 김경용이 대간들과 함께 휴직해가며 처벌을 촉구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아무리 처벌을 요구해도 예종은 공신호를 박탈하는 것 이상의 죄는 묻지 않았다. 이 해 12월 수사도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에 임명되면서 오연총은 복직한다. 오연총은 표문을 올리며 사양했으나 예종은 오연총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주저하며 망설였지만 나중에는 능히 적을 토벌하고 평정했으니, 목을 벤 것과 포로 잡은 것이 많고, 영토를 개척해 성과 해자를 열었다'( 初若遲疑而猶豫, 後能征討以蕩平, 斬馘旣多, 俘虜亦夥, 拓開封境, 築設城池.)고 하여 지위를 복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복직할 것을 요구한다. 예종 7년(1112) 3월 시랑 임언과 함께 진사시를 감독해 정지원 등 28명을 선발한다. 오연총은 이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1112),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1112), 수태위 판예·병부사(1113), 판이부사(1114) 등을 역임한다. 예종 9년(1114) 12월에는 다시 추충공신(推忠功臣)호를 받는다. 예종 10년(1115)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해도 예종은 끝까지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는다. 예종 11년(1116) 3월 수태위에 임명되는데, 이 해 5월 10일에 62세의 나이로 죽는다. == 평가 == >몸을 단정히 하고 행동은 삼가는 것이 분명히 참됐고, 충성과 검소를 자부해 명예를 구하지 않았다. 관직에 있으면서는 당시의 폐단을 없애는 데 힘썼고, 일찍이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에 해가 되도록 하지 않았던 고로 왕이 그를 중하게 여겼다.(飭躬謹行恂恂然, 以忠儉自許, 不干譽. 當官持論務祛時弊, 未嘗以私害公故, 王重之.) == 가족관계 ==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사돈이라는 말은 고려시기 두 장군이 녀진족의 침략을 격퇴하는 과정에 맺어진 우정으로부터 생겨났다.” 북한 주간신문 ‘통일신보’는 최근호(4월 8일)에서 중국에서 친가(親家)라고 하는 사돈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고유한 말이라고 하면서 사돈의 유래에 대해 이같이 정리했다. 신문이 전하는 사돈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기 장군인 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이 서로 자기의 자녀를 결혼시켰다. 이 두 사람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서로가 술 생각이 나서 윤관은 술병을 들고 오연총의 집으로 찾아 나섰고 마침 오연총 역시 술병을 들고 윤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밤사이에 시내물이 불어 서로 건너갈 수 없었다. 이때 윤관이 묘안을 내 이렇게 제안했다. “내가 대감께 술을 권하면 대감은 갖고 계신 술을 내 술로 생각하며 한잔 하고 대감이 내게 술을 권하면 내 술을 대감의 술로 생각하며 한잔 하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나무등걸에 앉아 한사람이 술잔을 권하면 다른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고 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신문은 그리하여 “나무등걸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술을 마시는 관계”라는 의미로 ‘덩걸 사(査)’, ‘조아릴 돈(頓)’을 써서 ‘사돈’(査頓)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신문은 등걸은 큰 나무를 벤 밑둥이인데 ‘덩걸 사’는 등걸이 발음상 변화된 것으로서 ‘사’는 나무등걸이라는 뜻이고 ‘돈’은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끝으로 신문은 속담에 ‘사돈팔촌’이라고 하는 것은 친척도 아니면서 연관관계가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연줄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풍속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분류:고려의 공신]][[분류:고려의 군인]][[분류:해주시 출신 인물]][[분류:해주 오씨]][[분류:1055년 출생]][[분류:1116년 사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