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나카 고이치 (문서 편집) [[분류:일본의 화학자]] [[분류:노벨화학상 수상자]] [[분류:1959년 출생]] [[분류:도야마시 출신 인물]] [[분류:도호쿠대학 출신]] [[분류:도쿄대학 재직]] [[분류:일본 문화공로자]][[분류:일본 문화훈장]] [include(틀: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3> {{{+1 ''' [[노벨상|{{{#cd9f51 노벨}}}]][[노벨화학상|{{{#cd9f51 화학상}}}]] {{{#cd9f51 수상자}}} [br] ''' }}} || ||<-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width=100px]] || ||<-3> [[노벨화학상/수상자#s-2.11|{{{#cd9f51 2002년}}}]] || || 존 펜 || '''다나카 고이치''' || 쿠르트 뷔트리히 || ||<-2> '''{{{#fff {{{+1 다나카 고이치}}}[br]田中 耕一 | Koichi Tanaka}}}'''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tanakakouichi.png|width=100%]]}}} || ||<|2> '''출생''' ||[[1959년]] [[8월 3일]] ([age(1959-08-03)]세)||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시]] || ||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width=24]] [[일본]] || || '''직업''' ||[[연구원]] || || '''학력''' ||[[도호쿠대학]] {{{-2 ([[전자공학]] / [[학사]])}}}[br]도호쿠대학 {{{-2 (명예박사[* 노벨상 수상 후 모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 || '''소속''' ||[[시마즈 제작소|시마즈 제작소]][br][[도쿄대학]][br][[교토대학]]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본]]의 연구원. [[시마즈 제작소]]에 재직하던 중,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와 관련이 없는 민간 연구원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역사상 2번째이자 4명째 사례이며[* 민간 연구원이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사례는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바딘]]과 [[윌리엄 쇼클리]], [[월터|월터 브래튼]] 세 사람이다. 참고로 존 바딘은 나중에 노벨물리학상을 또 받았는데 이때는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이후 사례는 IBM, 잭 킬비(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모든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유일한''' [[학사]] 출신 수상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출생자가 이공계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수상 당시 43세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1949년에 42세의 나이로 자국의 첫 노벨상을 수상했던 [[유카와 히데키]]의 뒤를 잇는 최연소 2위의 기록이다. == 생애 == [[1959년]] [[8월 3일]] 출생([age(1959-08-03)]세). [[도야마현]] [[도야마시]]가 고향. 조금 특별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다. 그가 출생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삼촌]](친부의 동생)이 맡아서 길렀고, 결국 이후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본인은 줄곧 삼촌 부부를 친부모로, 사촌 형들(2명)과 누나(1명)를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위해 발급받은 [[호적]] 초본에 자신이 [[양자(가족)|양자]]로 등재되어 있는 걸 보고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의 충격으로 방황하다가 성적미달로 일 년 정도 유급한 적도 있다. 거의 성인이 될 즈음에야 자신이 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봐서, 삼촌 부부와 사촌 형제들은 그를 친가족과 다름없이 여겼던 것 같다. 다나카 본인 역시 방황한 것은 처음뿐이고, 늘 가족과 사이가 좋았던 듯.[* 노벨상 수상 후 처음으로 친가에 찾아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머니]](혈연상으로는 [[숙모]])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백내장]]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금의환향'을 취재하러 몰려든 기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미친 듯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혹시 어머니의 눈에 안 좋을까봐 손으로 양모의 눈을 가리며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고.] [[도호쿠대학]] 전기공학과에서 [[학사]]를 따고, 1983년 [[시마즈 제작소]](島津製作所)에 입사한 후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1985년,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하였다. 1995년 중매로 같은 고향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뒤, 지금도 같은 회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https://www.shimadzu.co.jp/mass-research/index.html|다나카 고이치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田中耕一記念質量分析研究所)]]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http://www.chem-station.com/en/?p=2272|소개 페이지]] 언론 노출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2014년 혈액에서 [[알츠하이머]]의 원인물질을 찾아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21년 6월 22일 연구가 성과를 거뒀는지 기자회견에 따르면, 세계 최초로 피 한방울로 [[알츠하이머]]를 진단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했다. [[https://www.asahi.com/ajw/articles/14380184|#]] 기기의 판매가격은 약 1억엔이라고. == 연구 업적 ==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대표적 연구 업적인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Soft Laser Desorption/SLD)은 거대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분석기법이다. SLD보다는 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Ionization(MALDI)[* MALDI 기법은 1985년도에 개발되었다.]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이 질량분석법은 대개 [[레이저]]로 분자를 이온화시킨 뒤 자기장 하에서의 비행 궤적을 통해 질량을 계산하는 방식인데, 단백질과 같은 거대분자는 레이저를 쬘 때 결합구조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어 분자 개개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에 다나카는 [[코발트]] 나노입자와 글리세롤의 혼합물 상에서는 레이저를 쪼아도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이온화되는 현상을 발견해 종래의 방법으로 질량분석이 가능케 했다. MALDI 기법으로 이온화시킨 [[단백질]]을 자기장하에서 비행시켜 (Time of Flight(TOF)) 최종적으로 질량을 얻어내는 일련의 분석법을 MALDI/TOF 라고 한다. [[생물학]] 관련 학과에서는 '''학부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만큼 현대 [[생명공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도구라는 얘기. 또한 [[화학공학]] 및 [[고분자공학]]과에서도 다루는데 [[고분자]]의 [[분자량]] 측정법을 배우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기법이다. 덤으로 이걸로 [[노벨상]] 받았으니 너희도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수]]의 훈시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현재 다나카 고이치가 발명한 MALDI-TOF MS는 의학계에서도 매우 주목받는 기술이다. 종래에 중증 감염증 환자가 왔을때 어떤 균에 의한 감염임을 감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MALDI TOF는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신기술이기 때문이다. 중증 감염증의 경우 어떠한 균인지를 파악해서 최대한 그 균에 맞는 항생제를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환자의 생사 및 예후와 깊은 연관이 있다. 문제는 균도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라서 자라고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수 일이 소요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중증 감염을 포함한 모든 감염증은 경험적인 확률에 의존해 항생제를 투약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는 MALDI TOF 기술을 사용한다면, 배양 과정 없이도 입원 직후 분리 및 분석을 통하여 균을 동정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균에 알맞은 항생제를 즉각적으로 투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만약 수 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이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노벨 화학상보다는 오히려 생리의학상에 더 부합할 정도로 훌륭한 업적이 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에디슨]]처럼 matrix 후보로 아무 거나 조합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다나카가 [[코발트]] + [[글리세롤]] 조합을 얻기까지 시도한 횟수는 200여 회가 넘는다.[* 물론 노벨상 받으려면 이런 노력은 당연하다. [[화학]]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콕집어 [[코발트]]와 [[글리세롤]]을 합친 게 정답이라고 단번에 알아차릴 리는 없고 수많은 원소들을 계속 조합해야 했을 것이다.] 본인도 그 많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승진하지 않고 [[연구원]] 주임으로 남았을 만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승진 대상에는 늘 올라 있었으나 본인이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며 고사했다. == [[노벨화학상]] 수상 == 2002년 10월 9일 수요일 오후에 다나카 고이치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테니 받아 주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조금 뒤 외국에서 [[영어]]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통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 설마 [[노벨상]]이 '''그 노벨상'''은 아닐 테고, '노벨'하고 [[이그노벨상|이름이 비슷한 상]]이 또 있던가?' 속으로는 동료들의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상상도 했다. 그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시마즈 제작소]]의 회사 [[전화기]] 50여 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는 '다나카 고이치'라는 [[동명이인]]이 3명이나 있었다. 수상자 발표 직후 회사에 기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회사에서도 문의전화에 '잘못 아신 게 아니냐'라고 되물을 정도였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건 잘됐는데, '''도대체 '다나카 고이치'란 사람이 누구야?''''라며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갸우뚱했을 정도. 가족들은 동명이인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본인임이 확인된 이후에는 말 그대로 '''눈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모교 도호쿠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가 날아들고, 쏟아지는 강연 요청, [[인터뷰]] 요청에 파묻혀 일을 못 하고, [[양복]]이 고작 2벌뿐이라서 새 걸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질 않나,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직장도 덩달아 엄청 유명해지고 주가도 불과 9거래일 만에 261엔에서 475엔으로 수직상승했다.[* 시마즈의 주가는 중간중간 부침은 있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올라 [[10루타]]를 달성하고 2021년에는 5,500엔을 넘기기도 했다. 참고로 신입사원 입사 희망자도 폭증했다 한다.] 덕분에 사장에게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그 대신 회사에서는 바로 다음 해에 상술한 다나카 고이치 기념 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집행임원 대우) 자리에 앉혀버렸다. 이 해에 다나카 외에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가 또 있어서 일본 입장에서는 겹경사였지만[* [[고시바 마사토시]]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분야를 연구한 레이먼드 데이비스 2세(미국), 다른 분야 업적의 리카르도 자코니(이탈리아)와 공동수상.] 이쪽 소식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렸을 정도였다(...) [[파일:external/www.asahi.com/sya110a.jpg|width=300]] 위 사진은 회사에서 마련한 수상자 인터뷰 장면으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본인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정장을 미처 못 챙겼다고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파일:external/www.nobelprize.org/tanaka_prize_photo.jpg|width=300]] 노벨상 시상식에서의 모습. 이때는 물론 예복을 차려입었다. 실제로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으로, [[대학]] 시절에도 그다지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이후 언론에서 그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지만 교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출처: <멋지다 다나카>) == 여담 == * 다나카가 [[노벨상]]을 받게 된 배경에는 학계의 힘싸움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노벨상은 규정상 최대 3명까지만 공동 수상이 가능하고, 당시 노벨화학상 절반을 고분자 질량분석법에 수여하기로 하면서 다나카 고이치와 존 펜[* 전자스프레이 이온화법으로 노벨상 수상]을 각각 1/4 수상자로 결정했다. 다나카가 수상한 레이저를 이용한 고분자 이온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미카엘 카라스(Michael Karas)와 프란츠 힐렌캄프(Franz Hillenkamp)를 수상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유럽계와 비유럽계 사이의 알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돌았던 것.[[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21209000159|참고 기사]][* 카라스와 힐렌캄프의 방식이 훨씬 [[감도]]가 좋고, 현재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다.][* 프란츠 힐렌캄프가 말년에 응한 인터뷰(2010년[[https://www.medizin.uni-muenster.de/fakultaet/news/biophysik-professor-franz-hillenkamp.html|#]], 2012년[[https://digital.sciencehistory.org/works/h128nf59j#tab=ohDownloads|#]])를 보면, 그는 MALDI가 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기에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 자체는 크게 아쉽지는 않지만, MALDI에 상을 주기로 결정했으면서 관련된 연구자 중 자신들이 아니라 다나카를 수상자로 결정한 노벨 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다고 밝힌다. 당시 많은 서구권 학자들이 카라스와 힐렌캄프가 아니라 다나카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불만을 갖고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단 힐렌캄프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다나카의 잘못은 아니며, 다나카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고 우리는 동료 연구자로서 서로를 존중한다고 언급하는 등 생전에 다나카 고이치 개인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는 '''최초 발견'''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벨상]]의 특성이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노벨상은 중대한 과학적인 개념 또는 탐구 방법을 [[최초]]로 생각해내거나 만들어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다.[* 다나카가 발견한 최초의 방식은 요즘에는 쓰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과학기술이란 계속 발전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참신한 최신 기술이라도 나온 지 한 수십~백 년 정도 지나면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보라, 요샌 아무도 [[1906년]]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앙리 무아상]]이 하던 방법대로 [[플루오린]]을 정제하지 않으며, [[1903년]] 수상자인 [[피에르 퀴리]] - [[마리 퀴리]] 부부가 하던 방법대로 [[라듐]]을 분리하지 않는다. --[[피치블렌드]] 10톤정도 다뤄보실??--] * 수상 당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수상 계기가 된 연구는 일본 내에서만 [[일본어]]로 발표하고 [[영어]]로는 발표하지 않았다.[* 다나카 본인이 자신의 발견을 유용하긴 하지만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노벨상]]은 대체로 충분한 검증을 위해 세월을 두고 상을 주는 경향이 있기에, 수상 계기가 된 연구를 신경쓰지 않고 지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 연구는 1985년 '레이저 이온화 질량분석계용 시료 작성 방법'으로 특허가 신청되었는데, 상술한 힐렌캄프와 카라스가 논문 작성 도중 이 연구를 인용했다고 기재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일본어]]로 작성된 [[특허]] 출원을 어떻게 서양 학자들이 인용했는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특허 출원 이후 1987년에 일본 질량분석학회에 보고되어 연례회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즉, 해당 연구는 중간에 과학자와 학회를 거쳤기 때문에 노벨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임을 검증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학회와 학자가 있었기에 최초임을 인정받고 노벨상을 탄 것.] 실제 [[논문]]에도 출처가 이쪽으로 되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