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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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he Nobel Prize.png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
2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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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연도·부문
사유
비고
유카와 히데키
(湯川 秀樹)
1949
물리
중간자의 존재 예측
최초 수상
도모나가 신이치로
(朝永 振一郎)
1965
물리
양자 전기역학의 기초 연구

가와바타 야스나리
(川端 康成)
1968
문학
소설 《설국
문학상 최초 수상
에사키 레오나
(江崎 玲於奈)
1973
물리
반도체와 초전도체의 터널효과 발견

사토 에이사쿠
(佐藤 榮作)
1974
평화
비핵 3원칙 제창
평화상 최초 수상
후쿠이 겐이치
(福井 謙一)
1981
화학
화학 반응의 궤도함수 대칭 해석
화학상 최초 수상
도네가와 스스무
(利根川 進)
1987
생리의학
항체 다양성의 유전학적 원리 해명
생리의학상 최초 수상
오에 겐자부로
(大江 健三郎)
1994
문학
소설 《개인적인 체험》

시라카와 히데키
(白川 英樹)
2000
화학
전도성 고분자 물질 개발

노요리 료지
(野依 良治)
2001
화학
키랄 촉매에 의한 비대칭 반응 연구

고시바 마사토시
(小柴 昌俊)
2002
물리
우주 중성미자 검출과 관련한 선구자적 연구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2002
화학
생체고분자의 질량 분석을 위한 연성 탈착 이온화 방법의 개발
과학분야 학사 출신 최초 수상
고바야시 마코토
(小林 誠)
2008
물리
CP 대칭깨짐 원리 발견

마스카와 도시히데
(益川 敏英)

난부 요이치로
(南部 陽一郎)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시모무라 오사무
(下村 脩)
2008
화학
녹색 형광 단백질 GFP 발견 및 개발

스즈키 아키라
(鈴木 章)
2010
화학
팔라듐 촉매교차결합법(스즈키 커플링 / 네기시 커플링) 개발

네기시 에이이치
(根岸 英一)
히키아게샤
일본 국적.
야마나카 신야
(山中 伸弥)
2012
생리의학
유도만능줄기세포(iPS) 개발

아카사키 이사무
(赤﨑 勇)
2014
물리
청색 LED 발명

아마노 히로시
(天野 浩)

나카무라 슈지
(中村 修二)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오무라 사토시
(大村 智)
2015
생리의학
회충 감염의 새로운 치료법 발견

가지타 다카아키
(梶田 隆章)
2015
물리
중성미자 진동 관측

오스미 요시노리
(大隅 良典)
2016
생리의학
자가포식(오토파지) 매커니즘 연구

가즈오 이시구로
(石黒 一雄)
2017
문학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일본 출생
영국 국적
혼조 다스쿠
(本庶 佑)
2018
생리의학
음성적 면역 조절 억제를 통한 암 치료법 발견

요시노 아키라
(吉野 彰)
2019
화학
리튬 이온 배터리 개발

슈쿠로 마나베
(真鍋 淑郎)
2021
물리
기후 변화에 대한 신뢰성 있는 예측 모델 제시
일본 출생
미국 국적.
일본 국적을 취득한 적이 없는 일본계 외국인 수상자는 포함하지 않은 집계이다. 다만, 리위안저 (1986년 노벨화학상 수상)는 대만일치시기의 일본 국적 출신이지만 편의상 제외.




노벨화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2002년
존 펜
다나카 고이치
쿠르트 뷔트리히

다나카 고이치
田中 耕一 | Koichi Tanaka


파일:tanakakouichi.png

출생
1959년 8월 3일 (64세)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시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연구원
학력
도호쿠대학 (전자공학 / 학사)
도호쿠대학 (명예박사[1])
소속
시마즈 제작소
도쿄대학
교토대학


1. 개요
2. 생애
3. 연구 업적
5.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의 연구원. 시마즈 제작소에 재직하던 중,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한 공로로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학계와 관련이 없는 민간 연구원이 노벨 과학상을 수상한 역사상 2번째이자 4명째 사례이며[2], 모든 노벨 과학상 수상자 중 유일한 학사 출신 수상자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출생자가 이공계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수상 당시 43세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1949년에 42세의 나이로 자국의 첫 노벨상을 수상했던 유카와 히데키의 뒤를 잇는 최연소 2위의 기록이다.


2. 생애[편집]


1959년 8월 3일 출생(64세). 도야마현 도야마시가 고향.

조금 특별한 가정사를 지니고 있다. 그가 출생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서 삼촌(친부의 동생)이 맡아서 길렀고, 결국 이후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본인은 줄곧 삼촌 부부를 친부모로, 사촌 형들(2명)과 누나(1명)를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그러던 중 대학 진학을 위해 발급받은 호적 초본에 자신이 양자로 등재되어 있는 걸 보고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때의 충격으로 방황하다가 성적미달로 일 년 정도 유급한 적도 있다. 거의 성인이 될 즈음에야 자신이 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봐서, 삼촌 부부와 사촌 형제들은 그를 친가족과 다름없이 여겼던 것 같다. 다나카 본인 역시 방황한 것은 처음뿐이고, 늘 가족과 사이가 좋았던 듯.[3]

도호쿠대학 전기공학과에서 학사를 따고, 1983년 시마즈 제작소(島津製作所)에 입사한 후 주임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 1985년,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을 개발하였다.

1995년 중매로 같은 고향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2002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을 수상한 뒤, 지금도 같은 회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다나카 고이치 기념 질량분석 연구소(田中耕一記念質量分析研究所)의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소개 페이지 언론 노출이 많지 않은 편이지만, 2014년 혈액에서 알츠하이머의 원인물질을 찾아내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21년 6월 22일 연구가 성과를 거뒀는지 기자회견에 따르면, 세계 최초로 피 한방울로 알츠하이머를 진단할 수 있는 기기를 개발했다. # 기기의 판매가격은 약 1억엔이라고.


3. 연구 업적[편집]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대표적 연구 업적인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Soft Laser Desorption/SLD)은 거대분자의 질량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분석기법이다. SLD보다는 Matrix-assisted Laser Desorption/Ionization(MALDI)[4]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데, 이 질량분석법은 대개 레이저로 분자를 이온화시킨 뒤 자기장 하에서의 비행 궤적을 통해 질량을 계산하는 방식인데, 단백질과 같은 거대분자는 레이저를 쬘 때 결합구조가 파괴되는 문제가 있어 분자 개개의 질량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에 다나카는 코발트 나노입자와 글리세롤의 혼합물 상에서는 레이저를 쪼아도 단백질이 파괴되지 않고 이온화되는 현상을 발견해 종래의 방법으로 질량분석이 가능케 했다. MALDI 기법으로 이온화시킨 단백질을 자기장하에서 비행시켜 (Time of Flight(TOF)) 최종적으로 질량을 얻어내는 일련의 분석법을 MALDI/TOF 라고 한다.

생물학 관련 학과에서는 학부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만큼 현대 생명공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도구라는 얘기. 또한 화학공학고분자공학과에서도 다루는데 고분자분자량 측정법을 배우면서 반드시 언급되는 기법이다. 덤으로 이걸로 노벨상 받았으니 너희도 놀지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교수의 훈시도 들을 수 있다.

게다가 현재 다나카 고이치가 발명한 MALDI-TOF MS는 의학계에서도 매우 주목받는 기술이다. 종래에 중증 감염증 환자가 왔을때 어떤 균에 의한 감염임을 감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MALDI TOF는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킬 신기술이기 때문이다. 중증 감염증의 경우 어떠한 균인지를 파악해서 최대한 그 균에 맞는 항생제를 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환자의 생사 및 예후와 깊은 연관이 있다. 문제는 균도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라서 자라고 파악하는 데 걸리는 시간만 수 일이 소요된다. 그런 이유로 현재 중증 감염을 포함한 모든 감염증은 경험적인 확률에 의존해 항생제를 투약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는 MALDI TOF 기술을 사용한다면, 배양 과정 없이도 입원 직후 분리 및 분석을 통하여 균을 동정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균에 알맞은 항생제를 즉각적으로 투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만약 수 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이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노벨 화학상보다는 오히려 생리의학상에 더 부합할 정도로 훌륭한 업적이 된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에디슨처럼 matrix 후보로 아무 거나 조합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얻어낸 것이긴 하지만, 다나카가 코발트 + 글리세롤 조합을 얻기까지 시도한 횟수는 200여 회가 넘는다.[5] 본인도 그 많은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승진하지 않고 연구원 주임으로 남았을 만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승진 대상에는 늘 올라 있었으나 본인이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며 고사했다.


4. 노벨화학상 수상[편집]


2002년 10월 9일 수요일 오후에 다나카 고이치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약 15분 뒤에 외국에서 중요한 전화가 걸려올 테니 받아 주세요"라는 전화가 왔다. 조금 뒤 외국에서 영어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통화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되다니 영광이군. 설마 노벨상그 노벨상은 아닐 테고, '노벨'하고 이름이 비슷한 상이 또 있던가?' 속으로는 동료들의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상상도 했다.

그가 통화를 마치자마자 시마즈 제작소의 회사 전화기 50여 대가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 다나카 고이치를 찾는 전화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상황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라며 전화를 끊었다. 회사에는 '다나카 고이치'라는 동명이인이 3명이나 있었다. 수상자 발표 직후 회사에 기자들이 물밀듯이 밀려왔는데 회사에서도 문의전화에 '잘못 아신 게 아니냐'라고 되물을 정도였고,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 건 잘됐는데, 도대체 '다나카 고이치'란 사람이 누구야?'라며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갸우뚱했을 정도. 가족들은 동명이인으로 착각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본인임이 확인된 이후에는 말 그대로 눈 뜨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 모교 도호쿠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가 날아들고, 쏟아지는 강연 요청, 인터뷰 요청에 파묻혀 일을 못 하고, 양복이 고작 2벌뿐이라서 새 걸 사러 갔다가 사람들이 알아보고 사인 요청 공세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질 않나, 그의 노벨상 수상으로 다니던 직장도 덩달아 엄청 유명해지고 주가도 불과 9거래일 만에 261엔에서 475엔으로 수직상승했다.[6] 덕분에 사장에게 당장 이사로 승진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는데 겨우 사양해서 부장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그 대신 회사에서는 바로 다음 해에 상술한 다나카 고이치 기념 연구소를 설립해 소장(집행임원 대우) 자리에 앉혀버렸다. 이 해에 다나카 외에도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가 또 있어서 일본 입장에서는 겹경사였지만[7] 이쪽 소식은 상대적으로 묻혀버렸을 정도였다(...)

파일:external/www.asahi.com/sya110a.jpg
위 사진은 회사에서 마련한 수상자 인터뷰 장면으로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서 화제가 되었는데, 막상 본인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로 정장을 미처 못 챙겼다고 몹시 송구스러워했다.

파일:external/www.nobelprize.org/tanaka_prize_photo.jpg
노벨상 시상식에서의 모습. 이때는 물론 예복을 차려입었다.

실제로 인터뷰 등을 보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으로, 대학 시절에도 그다지 두각을 보이는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이후 언론에서 그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지만 교수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출처: <멋지다 다나카>)


5. 여담[편집]


  • 다나카가 노벨상을 받게 된 배경에는 학계의 힘싸움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노벨상은 규정상 최대 3명까지만 공동 수상이 가능하고, 당시 노벨화학상 절반을 고분자 질량분석법에 수여하기로 하면서 다나카 고이치와 존 펜[8]을 각각 1/4 수상자로 결정했다. 다나카가 수상한 레이저를 이용한 고분자 이온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미카엘 카라스(Michael Karas)와 프란츠 힐렌캄프(Franz Hillenkamp)를 수상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유럽계와 비유럽계 사이의 알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돌았던 것.참고 기사[9][10] 하지만, 이는 최초 발견을 중요하게 여기는 노벨상의 특성이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노벨상은 중대한 과학적인 개념 또는 탐구 방법을 최초로 생각해내거나 만들어낸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다.[11]

  • 수상 당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수상 계기가 된 연구는 일본 내에서만 일본어로 발표하고 영어로는 발표하지 않았다.[12] 이 연구는 1985년 '레이저 이온화 질량분석계용 시료 작성 방법'으로 특허가 신청되었는데, 상술한 힐렌캄프와 카라스가 논문 작성 도중 이 연구를 인용했다고 기재하면서 알려졌다고 한다. 일본어로 작성된 특허 출원을 어떻게 서양 학자들이 인용했는가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특허 출원 이후 1987년에 일본 질량분석학회에 보고되어 연례회의에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13] 실제 논문에도 출처가 이쪽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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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벨상 수상 후 모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2] 민간 연구원이 노벨상을 수상한 첫 번째 사례는 반도체 연구와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1956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바딘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세 사람이다. 참고로 존 바딘은 나중에 노벨물리학상을 또 받았는데 이때는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이후 사례는 IBM, 잭 킬비(텍사스 인스트루먼트).[3] 노벨상 수상 후 처음으로 친가에 찾아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머니(혈연상으로는 숙모)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백내장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금의환향'을 취재하러 몰려든 기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미친 듯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가 혹시 어머니의 눈에 안 좋을까봐 손으로 양모의 눈을 가리며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고.[4] MALDI 기법은 1985년도에 개발되었다.[5] 물론 노벨상 받으려면 이런 노력은 당연하다. 화학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콕집어 코발트글리세롤을 합친 게 정답이라고 단번에 알아차릴 리는 없고 수많은 원소들을 계속 조합해야 했을 것이다.[6] 시마즈의 주가는 중간중간 부침은 있었지만 이후로도 꾸준히 올라 10루타를 달성하고 2021년에는 5,500엔을 넘기기도 했다. 참고로 신입사원 입사 희망자도 폭증했다 한다.[7] 고시바 마사토시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같은 분야를 연구한 레이먼드 데이비스 2세(미국), 다른 분야 업적의 리카르도 자코니(이탈리아)와 공동수상.[8] 전자스프레이 이온화법으로 노벨상 수상[9] 카라스와 힐렌캄프의 방식이 훨씬 감도가 좋고, 현재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긴 하다.[10] 프란츠 힐렌캄프가 말년에 응한 인터뷰(2010년#, 2012년#)를 보면, 그는 MALDI가 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지 않았기에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 자체는 크게 아쉽지는 않지만, MALDI에 상을 주기로 결정했으면서 관련된 연구자 중 자신들이 아니라 다나카를 수상자로 결정한 노벨 위원회의 결정은 여전히 납득가지 않는다고 밝힌다. 당시 많은 서구권 학자들이 카라스와 힐렌캄프가 아니라 다나카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에 불만을 갖고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단 힐렌캄프는 자신이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다나카의 잘못은 아니며, 다나카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고 우리는 동료 연구자로서 서로를 존중한다고 언급하는 등 생전에 다나카 고이치 개인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던 듯하다.[11] 다나카가 발견한 최초의 방식은 요즘에는 쓰이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과학기술이란 계속 발전하고 있으므로 아무리 참신한 최신 기술이라도 나온 지 한 수십~백 년 정도 지나면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보라, 요샌 아무도 1906년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앙리 무아상이 하던 방법대로 플루오린을 정제하지 않으며, 1903년 수상자인 피에르 퀴리 - 마리 퀴리 부부가 하던 방법대로 라듐을 분리하지 않는다. 피치블렌드 10톤정도 다뤄보실??[12] 다나카 본인이 자신의 발견을 유용하긴 하지만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노벨상은 대체로 충분한 검증을 위해 세월을 두고 상을 주는 경향이 있기에, 수상 계기가 된 연구를 신경쓰지 않고 지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13] 즉, 해당 연구는 중간에 과학자와 학회를 거쳤기 때문에 노벨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임을 검증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학회와 학자가 있었기에 최초임을 인정받고 노벨상을 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