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세자 이고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사이에서 두번째로 태어난 아들이자 살아남은 아들 중 장남으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8세 때 중종반정으로 폐세자되었고, 얼마 후 사사되었다.
총명하고 어진 기질을 보여 연산군의 학정에 시달리던 신하들의 기대를 모았었다. 세자 이고는 학구열이 높아서, 마치 할아버지 성종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야사에 따르면 중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이 박원종으로부터 반정에 참여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세자가 총명하니까 기대를 걸어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궁궐을 나와서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승평부대부인 박씨[5] 가 양육했다. 당시 조선에선 왕자를 궁궐 바깥에서 키우는 관습이 있었다. 연산군 본인도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이후 궁 밖에서 살았다. 또한 연산군은 박씨를 상당히 후하게 대했으므로 이런 개인적인 친근감도 작용하였다.
정세명(丁世明)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납징[6] 까지 하였지만 길례 전에 반정이 일어나서 정식 세자빈이 되진 못했다.[7] 다행히, 딱히 '납징까지 했으니 준세자빈과 같다'고 여겨 평생을 수절하게 하거나 혼삿길이 막히지는 않아서 그 후 정세명의 딸은 강희신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에도 삼간택 수절설은커녕, 간택완료되고 세자빈으로 인정받았더라도 가례를 올리고 완전히 부부가 된 게 아니라면 별 흠 없는 처녀취급이었음을 볼 수 있다.
2. 이름의 발음 논란[편집]
이름인 파일:무제63_20230711075504.png의 옳은 발음이 무엇인지 논란이 있다. 조선 왕실에는 정조의 휘인 祘(산, 성), 고종의 휘인 㷗(희, 형), 폐세자 이지의 이름인 祬(질, 지), 덕흥대원군의 이름인 岹(초, 조) 등 발음에 관해 논란이 있었던 이들이 많은데, 이들은 왕족으로서 백성들이 피휘하기 쉽도록 벽자를 이름으로 쓰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는 발음을 '황'으로 표기하였고, 이 독음은 이후의 서적이나 인터넷 등에서도 반영되었으나,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이 글자의 부수가 머리혈(頁)이기에 왼쪽의 皇(황)을 성부로 파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음이 '황'이면서 모양이 비슷한 다른 글자 皝도 있어서 여기에 이끌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43년경 편찬된 《옥편》에 따르면 반절이 公老切(ㄱㅗㅇ+ㄹㅗ)로, 음은 '고'가 된다. 이 문서에서는 이것을 따라 𩔇를 '고'로 읽는다.
공(公)과 로(老)의 반절이다. (뜻은) 넓고 큰 모양이다.
公老切,廣大皃。
한편 《강희자전》 인용 《광운》에 따르면 반절이 盧皓切(ㄹㅗ+ㅎㅗ)로, 본음이 ‘로’이다. 더구나 《오음집운(五音集韻)》은 음이 '고'이며 뜻이 '넓고 큰 모양'인 글자로 𩕍를 소개하면서 파일:무제63_20230711075504.png(皇+頁)가 𩕍(皐+頁)의 와전일 가능성을 지적하였고, 《정자통(正字通)》은 아예 와자라고 못박았다.
【廣韻】盧皓切,音老。廣大貌。【正字通】譌字。◎ 按五音集韻,𩕍,古老切,訓廣大貌,或卽𩕍字之譌。
3. 생애[편집]
야사에서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에게 박원종이 반정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자 신수근은 세자가 총명하니 기다리면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난 이후에 연산군이 폐위될 때 정선으로 유배를 갔다가 살해된다.[8] 항년 8세.
중종반정 다음날 세자는 은둔지에서 먹는 식사에서 평소 자신이 좋아하던 꿩고기가 빠져 있자 상궁에게 꿩고기는 어딨냐고 물었는데 이를 보고는 궁녀들이 "앞으로 피죽도 못 드실 텐데..." 라고 말하며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내려오지만 이 일화는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으며 또한 출처 있는 야사 설화집 등 전해내려 오지 않는 것이므로 후대에 꾸며낸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친동생 창녕대군, 이복동생 양평군, 이돈수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가 같은 전철을 밟았다.
3.1. 중종반정 이후[편집]
아래는 유배를 갈 때의 기사이다.
원래는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반정공신들이 폐주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고 죽일 것을 청하였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고 만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
4. 사망 이후[편집]
중종은 조카들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후하게 장사지내주려 하였는데, 도리상으로는 이쪽이 오히려 올바르다. 죽을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죽인다면 적어도 장례쯤은 후하게 치러주는 게 예의였다. 실제로 진짜 죽을 짓을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칙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희빈 장씨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르게 했다. 그런데도 반정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없으니 관곽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 당시 폐세자 고의 나이가 겨우 8세였음을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이 불안해했고 또 그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박원종을 비롯한 핵심공신 대부분은 연산군의 비호하에서 누릴 것을 다 누렸던 데다, 무엇보다 문치주의 국가인 조선에서 무신이 주축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조선왕조에서 경계하는 역적질의 대명사 무신정변을 떠올리게 만들어 사대부 민심을 잃을까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후에 일어난 인조반정도 비록 계획은 무신들이 했으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문신들을 앞세웠다.
또한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이고보다 한참 더 많았고 광해군은 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나중에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에 결국 죽이긴 하는데, 이건 이유라도 있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9] 이고 역시도 행동이 반듯하고 나이도 더 어렸는데도 사사시킨 걸 보면[10]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이 일로 중종은 박원종에게 원한을 품었는지[11]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12] 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말하기를 "이자가 공신의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매몰차게 거절하였다. 박운은 결국 죽을 때까지 그대로 유배지에서 남은 여생을 다 보내야 했다.
5. 대중매체[편집]
- 이민우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
당시 아역이었던 배우 이민우가 배역을 맡았다. 연산군(임영규 분)이 폐비 윤씨 사사의 배경을 알고 난 후 광폭한 행동을 보이자 이를 세자가 볼까 염려한 중전 신씨(한애경 분)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엄유신 분)에게 부탁해 잠시 박씨 부인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
이민우는 이후 10여 년 뒤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 이고의 아버지인 연산군을 연기하였다.
-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아버지 무종 이융이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궁중 암투가 벌어지는데, 결국 무종의 신하들이 승리하면서 만 5세의 나이로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한다. 후일 묘호는 인종을 거쳐 인조가 된다.
[1] 율리우스력 1월 10일.[A] A B 율리우스력 10월 15일.[2] 율리우스력 10월 10일.[3] 3년 11개월 3일, 1,434일.[4] 율리우스력 9월 18일.[5] 월산대군의 부인[6] 주대(周代) 혼례의 육례(六禮) 가운데 4번째 절차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어 혼약(婚約)의 성립을 증거하는 예식이다.[7] 하지만 대간들은 정씨를 폐세자빈으로 칭하는 것을 보아 당대에는 연산군이 직접 세자빈으로 지목했고 납징까지 간 정씨를 세자빈으로 보았던 것 같다.[8] 흔히 '사사됐다'라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사라기보다는 처형에 가깝다. 당시 법으로는 연좌를 하더라도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여성은 처형하거나 사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의 형식을 취했더라도 법적으로는 사사가 아니라 처형에 해당한다.[9]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10]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받은 게 거의 전부다.[11] 정쟁을 떠나서 결국 자신의 조카들을 다 죽인 것이니...[12]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23:24:24에 나무위키 폐세자 이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