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환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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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창경궁의 정자이다. 현재는 없으며 통명전 북쪽에 있었다.
2. 이름[편집]
'환취(環翠)' 뜻은 '푸른 기운(翠)이 감돈다(環)'이다. '취'는 '비취'란 뜻인데 여기서는 의미가 넓어져 비취색, 즉 푸른색을 나타낸다. 환취정 주변에 나무 숲이 우거져있기에 숲의 푸름이 정자를 둘러 아름다움을 자아낸다는 의미인 듯 하다.
3. 역사 및 용도[편집]
1483년(성종 14년) 옛날 태종이 머물던 수강궁 자리에 대비들을 위해 창경궁을 창건할 때 함께 지었다. 이름은 성종이 직접 지었으며 당시 좌부승지였던 김종직에게 기문을 짓게 했다.#환취정기
딱히 용도를 정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성종은 환취정에서 종친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고 활쏘기 구경을 했으며#, 명종은 이곳에서 유생 7명을 데려다 읽은 글을 강하게 했다.#
임금이 병에 걸렸을 때 안정을 취하기 위한 공간으로도 쓰였다. 경종과 순조가 그랬는데, 특히 경종은 이곳에 머물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 때 환취정 옆에 혜경궁 홍씨의 처소 자경전을 지으면서 이후 환취정은 자경전에서 의례를 행할 때 준비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례로 1827년(순조 27년)에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진연을 열 때 환취정을 자경전과 더불어 의례 장소 중 한 곳으로 사용했다.#
1830년(순조 30년)에 창경궁 주요부에 불이 났다. 당시 사망했던 효명세자의 재실[2] 을 안치한 환경전 역시 화마에 휩쓸리자 재실을 급히 빼내어 임시로 환취정에 안치했다.#
1856년(철종 7년) 6월 17일 자 《승정원일기》에 실린, 철종이 환취정에서 신하들을 만났다는 기사가 환취정에 대한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종 연간에 제작한 〈동궐도형〉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 이전이나 그 무렵에 사라진 듯 하며 자경전과 함께 창경궁의 장기 복원계획에 포함되었지만 언제 복원될지는 미지수이다.
4. 구조[편집]
※ 현재 없는 건물이기 때문에, 〈동궐도〉 모습을 토대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