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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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범도[1]
洪範圖 | Хон Бом До | Hong Beom-do


파일:홍범도.png

출생
1868년 8월 27일
평안도 평양부 인흥부 융흥방 무열사동
(現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 만수대예술극장 인근)
사망
1943년 10월 25일 (향년 75세)
소련 카자흐 SSR 크즐오르다 주 크즐오르다
(現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주 크즐오르다)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917호[2]
본관
남양 홍씨 당홍계

여천(汝千)
서명
파일:홍범도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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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홍윤식
배우자
이옥구, 이인복
자녀
아들 홍양순, 홍용환, 세 딸
친인척
외손녀 김알라[1]
종교
대종교
신장
190cm[2]
국적
(2022, 사후 부여)[3]
정당
[4]
소속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단
직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서훈
건국공로훈장 복장[5] 추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2021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항일 활동에 투신하다
2.3. 전성기: 봉오동과 청산리
2.4. 소련 합류
2.4.1. 자유시 참변
2.4.2. 그 후
2.5. 말년
3. 사후
3.1. 봉환 과정
3.2. 유해 봉환
3.3. 독립군 학살 누명
3.4. 유해 봉환에 대한 박노자의 문제 제기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1868년 8월 27일 출생 1943년 10월 25일 사망(앞면)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10월 25일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뒷면)

-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의 홍범도장군묘에 세워진 철비에 새겨진 문구. 홍범도 장군 사망 8주기인 1951년 10월 25일 분묘 봉분이 내려앉아, 크즐오르다시의 고려인 인사들과 옛날 홍범도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전우들이 '홍범도장군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해 2천 루블의 성금을 모아 철벽과 함께 세운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68년 평안남도 평양부 서문(보통문) 내에 위치한 무열사[3] 앞마을의 양반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생지가 평안남도 양덕군,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것 때문에 당시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졌다. 10대 중반이었던 1883년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상관을 살해하고 탈영했다.#[4] 이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홍범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때서야 신계사에서 글을 깨치고 한국사에 대해 배우게 되었는데 이순신도 이 때 알았다고 한다. 홍범도가 출가할 때 상좌였던 승려 지담(止潭)이 수원 사람으로 이순신 가문인 덕수 이씨였다(홍범도일지). 덕수 이씨가 조상의 이름값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대로 무반을 배출하게 된 사연이 있는데 덕수 이씨인 지담이 조상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는 것. 지담에 대해서는 1880년 승려 의성과 함께 신계사 유리전(瑠璃殿)을 중수한 기록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승려 신분으로 비구니였던 이옥구를 임신시킨 뒤 함께 환속하여 신계사를 떠나 오갈 데가 없게 되어 처가가 있는 북청으로 가던 길에 건달패들을 만나 헤어졌다가 이후 다시 아내와 자식을 다시 만났으며 두 아들과 북청에서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북청에서는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으나 1886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해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2.2. 항일 활동에 투신하다[편집]


총을 잘 쏘기로 유명했다.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히는 사격 실력을 보유했다고. 현대 총기로도 이 정도 사격 실력은 쉽지만은 않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당시 총기의 성능을 고려해 보면 더욱 놀라운 실력. 이 실력으로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어 대장이 되었다.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회양군에서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의병 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였는데 동료들을 먼저 가라고 한 뒤에 홀로 경기도강원도, 함경도를 연결하는 철령에서 매복하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했다. 야사에 따르면 '수십 명을 쏴 죽이고 돌아왔다'는 말도 있다.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대와 연계하여 일본군과 3차례의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해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1905년 대한제국을사늑약 체결 시점에는 딱히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시기에 정미의병이 시작되고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남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했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대대장) 주로 함경도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속 수백 리를 축지법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때 민중들에 의해 '나는(날- + -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 머슴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머슴살이를 했기에 엄청난 힘과 체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도 우람했으며 근육량도 엄청났다고 한다. 포수 생활을 하면서 산을 자유자재로 넘었던 원동력인 셈.

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일본 육군 정규부대를 상대로 크고 작은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일제에 붙잡힌 아내 이옥구(이옥녀)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한다. 남편에게 귀순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협박에 "계집이나 사내, 영웅호걸이라도 실낱 같은 목숨 없어지면 그뿐이고, 내가 그런 글을 쓰더라도 영웅호걸인 그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나더러 시킬 것이 아니라 너희 맘대로 해라. 나는 죽어도 안 쓴다."라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1달 후 장남 홍양순도 6월의 함경남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싸우다가 전사했다. 2021년 3.1절 기념식 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해군잠수함사령부 홍범도함에서 근무하던 여명훈 중위가 대신 받았다. 영상. 홍양순은 원래 어머니와 함께 일제의 회유 협박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가서 너희 아버지더러 투항하라고 해라"며 그를 홍범도에게 보냈지만, 의병부대를 찾아간 홍양순은 도리어 아버지를 따라 의병대원이 되었다고 한다. 홍양순이 홍범도에게 "이제 그만 투항하시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홍범도는 그 자리에서 아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면서 "네가 지금 왜놈들 앞잡이가 돼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러 왔느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차남 홍용환도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1910년 결국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시기 국내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1911년 연해주로 망명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무장독립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동시에,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는데, 홍범도와 소련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2.3. 전성기: 봉오동과 청산리[편집]


이후 함경북도로 수차례 진출해 1919년 10월 함경남도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활약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좌진우파 인사이고 말년에 현지 한인들에게 인심을 잃었던 탓에 중국한인 사회에서는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홍범도가 현지 주민들에게 민심을 얻고 있었던 것은 당시 일본군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당대(當隊)가 폭도[5]

의 풍모를 가장하고 행동했더니 촌민은 이를 매우 환영하고 자진하여 주식(酒食)을 향응하려고 하였다. 때문에 일반(주민)의 의향을 측정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

1908년 10월 13일 제3순사대 경부(警部) 와타나베 마사카쓰(波邊正勝)의 보고서


10월 하순 이도구·어랑촌 및 봉밀구 방면에서 일본 군대에 대하여 완강히 저항한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라 칭하는 홍범도가 인솔한 부대였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 김좌진과 같은 재질이 있는 인물이 아닌 듯하고 앞서 홍범도가 간도 방면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일반 조선인, 특히 그 배하(配下)에 있는 자로부터 신(神)과 같은 숭배를 받고

이도구·어랑촌·봉밀구 부근의 전투에 당면하여 일본군의 포위 중에 빠진 것 같이 그의 전술이 졸렬한 것을 빈정대는 것보다도 몸을 던져 부하를 독려하고 일본군에게 일시(一矢)[6]

를 보복하려는 것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이 지당할 것이며, 그는 지금 한쪽 다리에 관통 총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다 하는데 그에 대한 일면을 판단할 수 있다.…

-

1921년 조선총독부 간행「간도 출병 후의 불령선인 단체 상황」


반면 거꾸로 대한민국에서는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운동을 하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죽었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


2.4. 소련 합류[편집]


그런데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에 탄압받던 소수민족과 연대하던 소련 정부의 방침은 당연히 매력적인 선택지였고 곧 홍범도는 레닌과 트로츠키와 독대해 마우저 권총을 선물받을 정도로 소련 내 한국계의 거물로 성장했다.


2.4.1. 자유시 참변[편집]


1921년 연해주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독립군단 부총재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되는데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홍범도 측 부대는 이미 자유시에서 무장해제를 한 상태였기에 사상자는 없었다.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소식을 전해듣고 장교들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논문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포로로 잡힌 대한의용군 독립군에 대한 군사재판에서 홍범도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우익들이 홍범도를 공산주의자이고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인데, 당시 상해파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대해 홍범도를 배신자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고려혁명군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홍범도가 자신을 선임한 이들에게 이용당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홍범도는 재판에서 병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고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위원으로 참가했다고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위원을 맡은 일은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요컨대 자유시참변 전후 홍범도의 행적이 일부의 비판처럼 동족에 대한 배신, 반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후 그의 활동이 다분히 소련 공산주의 소속의 일원 정도로 후퇴, 축소되었다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당시 항일 독립진영의 독자적 세력이 일본보다 워낙 열세였고, 때문에 일본에 맞설 타국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현실론을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홍범도를 비롯한 사회주의계 인사들에게는 그 대상이 소련이었고, 이승만 등은 외교독립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이끌어들이는 것을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훗날 임시정부의 광복군도 중화민국 정부와 공조하였고, 김홍일이나 최용덕 등은 중화민국군의 일원으로 싸우기도 했다.


2.4.2. 그 후[편집]


1921년 3월,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가 당시 주도권을 쥔 대한의용군 중심의 독립군 통합에 찬성했다가 이후 주도권이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가자 1921년 5월 기존 태도를 바꿔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에 힘을 실은 것도 홍범도로써는 하루라도 빨리 통합이 마무리되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홍범도에게는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그 어느 쪽과도 이해관계가 없었다고한다.#

이후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항일무장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당 측 독립군은 무장해제되었다. 다른 동료들은 상하이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거나 다른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으며 이때 2번째 부인 이인복과 재혼했다.

파일:홍범도장군 입국신고서.png
홍범도의 소련 입국신고서. '직업' 항목에 의병, '목적과 희망' 항목에 고려독립이라고 쓴 것이 인상적이다.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민족대회(극동피압박인민대회 혹은 원동약소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갔다. 여기서 블라디미르 레닌트로츠키를 통해 홍범도를 따로 불러 단독 면담을 한 다음 금화와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은제 마우저 C96을 선물해 주었다. 독립군 중 트로츠키나 레닌과 단독 면담을 한 것은 홍범도가 유일하며 이때 레닌에게 받은 권총은 현존하지 않지만 권총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권총집

파일:khonbomdo_avtobiografiya.jpg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부대 출신 독립운동가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자유시참변으로 동료들을 죽게 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홍범도는 블라디미르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고한다.


2.5. 말년[편집]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를 비롯한 지역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1명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했으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카자흐스탄 SSR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고려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는데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36년 기준,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150 ~ 200 루블, 연금은 25 ~ 50 루블이었다. 1달 수입이 130 루블이면 당시의 평균 임금보다 꽤 낮은 편이지만 부양가족이 없었고 수위 자리도 홍범도에게 생활비 챙겨 주려고 일부러 마련한 자리라 편했기에 생활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고,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으며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겸연쩍어했다고 한다. #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 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 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 이오시프 김이 쓴 <소련한인극단>에 의하면 홍범도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소련 정규군에 지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한인예술가 전창화에 의하면 자원입대를 거절당한 홍범도는 자신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사격장에 사람을 불러모은 뒤 2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작은 동전을 총을 쏴 명중시키는 사격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고려극장이 카자흐 SSR 동부 우슈토베(Үштөбе / Üştöbe)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독립군들은 교전 중 사살당하거나 투옥 중 고문 후유증으로 젊었을 때 사망한 경우가 많다. 홍범도와 똑같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의 한 명인 김경천은 홍범도가 죽기 1년 전인 1942년 1월 2일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알려졌다고 쓴 이유는 김경천 항목 참조.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 대다수가 일본군에 의해 사살당하거나 좌우 갈등에 희생당하거나 가난에 시달리고 망명 국가에서 암살당하는 등의 고생을 겪으면서 천수를 누리지 못 해 죽고 말았는데 홍범도는 보기 드물게 천수를 누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만리타국에서 쓴 입국신고서에서 소원을 묻는 질문에 "고려 독립"이라고 쓸 정도로 죽는 순간까지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그가 결국 전쟁이 끝나는 것조차 보지 못했으니 어떤 심경으로 눈을 감았을지는 본인만이 알 것이다.


3. 사후[편집]



3.1. 봉환 과정[편집]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는데 현재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유해 송환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남북한 대사관 간에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홍범도의 유해 송환을 추진한 것은 남한보다도 북한이 앞서서, 이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북한은 카자흐스탄 정부에 대해 홍범도의 유해를 북한으로 송환하겠다고 했지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사회에서 나서서 이를 거부했다.

전 주영북한 공사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뒤 북한은 카자흐스탄에 학교도 세우고 교사들도 파견하며 고려인 예술단도 평양에 초청하였으나 전반적인 고려인 사회의 반응은 냉랭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가운데는 광복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한 지역으로 귀환했고 6.25 전쟁에도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이후 김일성의 독재 권력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소련파 항목 참조).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마냥 북한에 우호적인 게 아니라는 것.

거기에 소련이나 친소 성향 위성국들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당시 중립을 지향한 것 때문에 북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진행하면서 고려인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바닥을 쳤는데 북한이 2015년 말 카자흐스탄 수도에 대사관을 개설하겠다고 했으나 2016년 4차 핵실험으로 불허당하고 2017년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이 규탄하면서 카자흐스탄은 북한과의 거의 모든 관계를 동결시켰다. #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남한도 카자흐스탄에 정부 조사단을 보내 묘소 조사와 함께 유해 송환을 협의했는데 북한은 1995년 8월 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 봉환은 (남측의) 사기 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봉환 계획은 쑥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1997년 5월 한국 국가보훈처와 기업은 홍 장군 묘역 정비 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 묘역을 단장했다. 충청남도 홍성군 태생에 아들 김두한, 손녀 김을동가족이 남한에 있었던 김좌진과는 달리 홍범도는 태생이 평양 출생이었던지라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데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이 크즐오르다 묘역을 존치시키자고 해서 유지되었다. #

홍범도의 묘지는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있었고 스탈린 사후 소수민족 탄압이 중지되면서 업적을 인정받고 복권되어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도 생겼다.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어서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묘소를 매우 정성껏 관리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묘지 관리 상태가 매우 우수했다.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도 고려인의 입장을 들어 유해를 대한민국에 봉환하지 말고 카자흐스탄에 그대로 존치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유해를 봉환하면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을 위해서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홍범도 장군 묘역에 정부가 추모 공원을 만들기로 했다. #


3.2. 유해 봉환[편집]


현장 영상
해설 영상

북한의 유해 송환은 한국보다 명분이 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진짜로 추모를 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한 선전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강했기 때문이다. # 이는 북한의 열악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전 주영북한 공사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북한은 애초에 홍범도의 유해를 모셔올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광복 전까지 소련에서 여생을 보냈고 출생지도 평양인지라 북한이 유해를 평양으로 모셔가자면 얼마든지 가능했고 명분도 당연히 북한측이 더 컸다.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자신의 항일 업적만 내세우고 자신을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으로 내세우기 위해[7]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같은 항일무장투쟁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일성이 "홍범도는 공산주의자는 아니다"라고까지 하면서 배척했었다는 소문이 있었고 당연히 이는 김정일 집권기까지 이어졌다.

그러던게 대한민국 정부가 유해 봉환을 추진하자 갑자기 고향인 평양에 안치해야 한다고 나서게 되었다는 것. #

2021년 8월 12일 청와대는 카자흐스탄 대통령 토카예프의 방한과 연계하여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홍범도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8월 14일 국가보훈처장 황기철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하였다.

이 특사단에는 배우 조진웅도 동행했다. 조진웅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보 대사로도 활동 중인데 그동안 영화 <암살>과 영화 <대장 김창수> 등에 출연하면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숭고한 마음이 커졌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송환하는 특사단에 끼게 된 것도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회장인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우원식 의원이 그를 추천한 뒤 소감을 묻는 질문에 "두말할 나위가 있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제가 세상 모든 일은 뒤로 미뤄놓더라도 이 일은 해야죠. 그리고 너무나 기뻤고 감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홍범도 장군님의 귀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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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제11전투비행단 방주원 소령

홍범도의 유해를 실은 군 수송기가 서해방공식별구역에 진입했을 때 봉환용 기체로 KC-330 시그너스 1호기가 투입되었다. 기사. 호위기로는 F-15K, F-4E, F-35A, F-5F, KF-16D, FA-50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가 출격하여 최고의 예우를 했다. 기체 좌측 KF-16D, F-35A, F-15K. 기체 우측 F-4E, F-5F, FA-50 순서로 위치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대열 바깥쪽에 F-15K 1기가 더 동원되었다. 사진 촬영을 위한 F-15K 외에도 봉환 영상이 공군 유튜브에 올라온 것으로 보아 영상 촬영을 위한 KF-16 또는 FA-50 1기가 추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유해 봉환과는 다르게 호위 기체와 봉환 기체가 영공에 진입해 플레어로 예포까지 쏘면서 극진히 예우했다. # # # # #

봉환 후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 유해를 임시 안치하고 국민 분향소를 열어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보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이후 애용하던 신영복의 글씨체(신영복체)를 활용하여 홍범도 장군의 묘비에 글을 새겼다. 2021년 8월 17일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는데 여운형에 이어 2번째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중복 수훈자가 되었으며 훈장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이 대신 받았다. 추서식에는 방한 중인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참석했으며 홍범도 장군의 사망 진단서와 말년에 수위로 일했던 '고려극장'의 사임서 등 2건의 사료를 전달했다. 2021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홍범도의 봉환 이후 한 네티즌이 홍범도 유해 봉환을 기념하여 "1911 - 2021"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올렸다. 1911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망명한 이후 2021년에야 고국에 묻혀 영면을 취할 수 있게 되었음을 표현한 듯. 답글을 살펴보면 '고국에는 돌아오셨는데 고향에 모시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라며 안타까워하는 반응도 있다. 그림에서 홍범도 장군은 비행기 창문을 통해 조국의 찬란한 야경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네티즌은 서울공항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 국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그림을 남겼다.


3.3. 독립군 학살 누명[편집]


복잡하게 얽힌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왜곡된 주장(이념 대립)으로 국민을 오도해서는 안 된다.

반병률 교수


홍 장군의 부대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오히려 참변 당시 홍 장군이 휘하 장교들과 인근 솔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증언만 있다.

윤상원 교수

[팩트체크]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된 '자유시 참변'에 가담?

보수 언론인 <펜앤드마이크>와 <크리스천투데이> 등지에서는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에서 김좌진 장군을 배신하고 김 장군이 이끌던 부대를 학살한 친소괴뢰"라 주장하며 비난한다. 정작 김일성은 "홍범도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하면서 배척했었다고 한다.[8]

자유시 참변에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두 포함하여 수십 명 단위라는 것이 학계의 입장이며 당시 사료에서도 전사자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수백 명이 아닌 36명으로 독립군이 몰살당했다고 표현하기에도 어렵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당시 사건이 일어난 수라세프카에 없었으며 홍범도의 부대는 이미 자유시에서 무장 해제를 하고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해당 사건으로 희생당한 부대는 김좌진이 아닌 허재욱이 이끌던 의군부 부대였다. 사건 이후 김좌진 부대가 무장 해제를 당한 일도 있었으나 이는 북간도로 돌아가면서 중화민국 군대에 의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홍범도가 누명을 쓴 이유는 당시에 사살당한 집단이 어떤 단체인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원인인데 당시 진압당한 군사 단체는 러시아 민간인에 대해 능동적으로 학살, 폭행, 약탈을 일삼은 범죄 단체였다. 니콜라옙스크 사건 문서 참고. 홍범도가 그들과 손절한 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선택이 아니었다. 지금도 전쟁 중 약탈 행위는 군형법에 의한 처벌 대상이다. 군 내부뿐만 아니라 전시 지역 전체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처벌이 엄하며 약탈, 강간 행위는 전시국제법 위반이기도 하다.

참고로 홍범도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처음 수여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2년 10월 25일이고,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유해 송환을 추진하여 문민정부 시기에 유해 송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으며,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손원일잠수함 7번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하는 등의 사례가 있었다.

또한 보수 진영 일부를 중심으로 홍범도의 친 소련 활동을 지적하며 '유해를 북한으로 보내라'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소련은 소수민족의 독립을 지원했다. 기반으로 삼을 나라도 잃은 채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벗어나야 했던 당대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적의 적'에 해당하는 소련을 일시적인 견제자로 끌어들인 것을 무조건 비판만 할 수도 없다. 우파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이승만의 활동 기반도 타국인 중화민국미국에 있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찬드라 보세일본 제국과 손잡았고 소비에트 연방이 주적이었던 발트 3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 심지어 대영제국의 수상인 윈스턴 처칠도 "만약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하원에서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철의 장막' 연설을 하는 등 스탈린과 소련에 적대적인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적어도 히틀러가 더 큰 위협이었을때는 소련과 일시적으로나마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3.4. 유해 봉환에 대한 박노자의 문제 제기[편집]


박노자페이스북으로 "홍범도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기로 한 것은 카자흐스탄 국가 권력자와의 합의인가, 아니면 현지 고려인(까레이스키) 사회 전체와의 합의인가?"라고 물으며 "현지 고려인(까레이스키)들에게 홍범도는 절대적인 존재이고 고려인 전체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유해 봉환 과정에서 고려인 사회 전체의 여론은 반영하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민주주의냐?"라며 '소수자는 무시하고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 정부 들어서도 변한게 없다. 그렇게 홍범도를 존경하고 기리고 싶다면 홍범도 장군 부대원의 후손이 포함된 재한 고려인(까레이스키)에게 간이 귀화의 가능성이라도 열어 주든지 그들에 대한 처우 개선이나 좀 걱정하는 게 어떠냐'고 비판하는 글을 썼다. #

전 주영북한 공사인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또한 “냉전의 대결 구도 속에서 너무나도 오랫동안 중앙아시아에 남아있는 독립군 후손들을 포함한 고려인들이 우리의 관심 밖에 있었다”며 “이제는 그들이 조국인 한국에서 새로운 삶의 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적인 개선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홍범도의 유언(해방되면 꼭 고국으로 데려가라)의 본질일 것이라고 하였다. #

이에 대해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페이스북에 '박노자 교수님께서 문재인 정부가 홍범도 장군님을 모셔오면서 고려인 사회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고 한 말씀 하셨는데 그 고언을 잊지 않고 고려인 영주권 문제 등 고려인과 동질감을 회복하는 제도적 개선책도 끊임없이 모색할 것이며 홍범도기념사업회부터 더욱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가시면서 "내가 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꼭 고국에 데려가라"고 유언을 남기셨는데 해방된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이념적 대립 속에 그 유언을 한 세기가 다 지나서야 지킬 수 있게 됐다며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이미 2년 전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때 그곳 고려인들에게 정성껏 설명드린 바 있다고 해명했다.

동포 500여 명을 초청해 가진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그들을 향해 "고려인 1세대는 애국자이며 독립유공자이며 지금 이 자리의 고려인 모두는 개척 정신, 근면과 성실을 지켜온 영웅이라며 그간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전했다. 우원식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알마티를 대한민국 정상으로서 방문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최초라고 한다. 또한 순방을 통해 계봉우, 황운정 지사 내외분 봉환과 함께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결정에 대해서도 계봉우, 황운정 지사 후손들을 포함한 많은 동포 여러분들께서도 기꺼이 축하해주셨다며 정부의 홍범도 유해 봉환이 졸속적인 결정이 아니라 2년에 걸친 의견 수렴 과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한편 북한을 흡수통일 등 남한 주도로 통일한다면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향인 평양에 옮겨야 하는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3.5. 육군사관학교 및 국방부 앞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육군사관학교 및 국방부 앞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기타[편집]


  • 경력이 경력인지라 종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말이 도는 인물이다. 1941년 6월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하자 지역 한인들과 함께 의용군 편성을 자원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인 1942년 8월 ~ 1943년 2월엔 이미 74 ~ 75세의 노인이었으니 가능성이 낮기는 하나 독소전쟁 자체가 나이를 불문하고 전선에 투입되는 일이 잦았던 전면전이었던 만큼 완전히 가능성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소련 당국이 고려인만의 부대를 창설하는 것은 절대 엄금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인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부 소수민족(예: 체첸인)들은 스탈린의 의심병 때문에 아예 참전을 금지당한 경우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인 참전 금지 사태에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하나, 이는 강제이주 정책에 해당하는 말이다.

  • 늙은이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느냐며 소련군 장교가 조롱하자 공중으로 동전을 던지고 권총으로 명중시켜 입을 다물게 했다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나 이 일화는 고려극장의 배우였던 리함덕의 일화가 각색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극장 배우들은 홍범도가 독립군 대장이었던 것은 알았지만 그정도의 거물인지는 몰랐고 단지 총을 잘 쏜다는걸 듣고 한번 보여달라하자 이를 승낙한 홍범도가 5m쯤 떨어져서 5전짜리 동전을 공중에 던지라고 했고 던지자 마자 총으로 그 동전을 쏘아 맞추었다는 이야기.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90cm에 이르는 장신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립운동가 최진동 장군과 함께 찍은 사진과 영상을 보면 체격 차이가 상당하다. 당시 평균 남성 키가 163-165cm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으로 따지면 2m 이상의 장신이나 마찬가지. 당시 운동선수들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체격이었다. 신장 180대만 되어도 세계적으로도 큰 키에 속하며 게다가 21세기에도 대한민국에서 190대의 장신은 쉽게 보기 힘들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구척장신의 장군’. 뛰어난 사격술을 가졌는데 키도 큰 사람이 말을 탄 상태로 돌격하면 그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을 듯하다.



  • 2020년 10월 22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연구로 유명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반병률이 2018년 한 학술대회에서 이미 공개한 바 있는 1922년 러시아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홍범도의 영상을 KBS 특집 프로그램에서 다시 공개했다. 이 프로그램은 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이하여 홍범도의 일생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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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은 홍범도(洪範道).[2] 사후 유해가 크즐오르다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가 2021년 8월 15일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었고 8월 18일에 정식 안장되었다. 봉환되기 이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무후선열 위패 11호가 봉안되어 있었다.[3] 홍범도의 자서전인 <홍범도일지>에는 문열사로 적혀 있지만 오기로, 무열사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권을 쥔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킨 석성을 기리기 위해 1593년에 세워진 사당이다. 8.15 광복 당시까지 있었다가 6.25 전쟁 와중에 미 공군의 대공습으로 인한 폭격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만수대예술극장이 들어섰다.[4] 홍범도의 입대 불과 1년 전에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당시에 홍범도가 상관을 살해할 정도로 조선군이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당시 일본군은 의병 세력들을 폭도라고 불렀다.[6] 일본어로 잇시(一矢)는 직역하면 '화살 한 발'이라는 뜻이지만, 관용구로서는 '모든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던지는 최후의 일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7] 이승만 역시 자신의 독립운동 전적만을 내세우느라 김구 등 다른 인물들의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배제하려 들었다.[8] 단 이 발언은 김일성이 홍범도를 정치적으로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애초에 홍범도가 김일성과 사이가 좋았으면 강제이주도 안 당했을 것이며, 북한에선 매번 숙청당한 사람은 자본가니 제국주의니 하며 자신들의 사상과 다른 사상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82년 KBS1 기록드라마 <우둥불>에서는 배우 이영이 연기했다.

  • 1995년 MBC 드라마 <까레이스키>에 등장하는 박하치(김동현 분)가 그를 모티브로 한다. 드라마에서는 딱히 그를 홍범도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독립운동을 한 장군이고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부대를 잃었으며 말년에 극장 경비원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홍범도 인증. 다만 실제와는 달리, 극장을 침범한 괴한을 쫓다가 공격받고 사망한다.

  • 2019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는 배우 최민식이 연기했다. 실존 인물의 고향을 반영해 평안도 사투리를 쓴다. 주연은 독립군 병사들이고 잠시 얼굴을 비추는 정도. 다만 실존 인물의 명성과 배우의 포스가 겹치니 등장 분량은 적지만, 등장 순간만은 그야말로 산중대호가 따로 없다. 최민식은 2015년 박훈정 감독의 영화 대호에서도 범을 잡는 포수 천만덕을 맡아 연기했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홍범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에는 그것도 호랑이 전문 포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마냥 웃어 넘길 수만은 없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배우 개그가 된다.

  • 2020년 작가 송은일은 홍범도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나는 홍범도>를 발표했다.

  • 만화 바람의 나라의 작가 김진이 <홍여천 범도>를 그렸다. 한국의 대표만화가들이 33인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를 만화로 그리는 “독립운동가 100인 만화 프로젝트”로 제1차 〈위대한 시민의 역사〉세트(33권) 중 한 권으로 나온 것이다.

  • 2021년 KBS에서 양승동 사장이 광복절 기념 10부작 드라마 제작을 기획한다고 밝혔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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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생애
관련 문서
봉오동 전투 · 청산리 전투 · 대중매체 ·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관련 인물
김좌진 · 지청천 · 이범석 · 나운규
가족
아버지 홍윤식 · 아내 이옥구 · 아들 홍양순 · 아들 홍용환 · 외손녀 김알라
대중매체
봉오동 전투 · 까레이스키 · 우둥불 · 홍여천 범도
관련 단체
대한독립군 · 대한독립군단 · 소련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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