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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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안중근[1]
安重根 | An Jung-geun


파일:安重根.jpg

출생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
(現 황해도 해주시 광석동)
사망
1910년 3월 26일 (향년 30세) (114주기)
일본 제국 관동주 뤼순커우구 뤼순감옥
(現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묘소
효창공원 삼의사묘[2]
본관
순흥 안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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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안태훈[1], 어머니 조마리아
형제자매
동생 안정근, 안공근
여동생 안성녀
배우자
김아려
자녀
장남 안문생, 차남 안준생, 장녀 안현생
친인척
조부 안인수
손자 안웅호
손녀 안연호, 안선호
증손 안도영, 안현민
자부 정옥녀
사위 황일청
외손녀 황은주, 황은실
조카 안진생, 안원생, 안우생, 안미생
조카사위 김인[2]
사촌 안명근, 안홍근, 안봉근
종질 안춘생
사돈 김구[3]
조카 증손 안덕근
조카 내손 안성찬, 안성제
재종증손자 강대혁 [4]
학력
천주교학교 (신학 전공)
돈의학교
종교
유교가톨릭 (세례명: 토마스)
신체
163cm[5]
조직
삼흥학교 (설립자)
동의단지회
서북학회
한인애국단
국채보상기성회
의거
하얼빈역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초호
청계(淸溪)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군사 경력
복무
대한 의군
1907년 ~ 1909년
최종 계급
대한의군 참모 중장
근무
의병참모중장
특파 독립 대장
아령 지구 사령관
참전
동학 농민 혁명 의병단[6]
일본군 경흥군 수비대 기습



파일:안중근 의사의 손.png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4]

1. 개요
2. 생애
2.2.1. 법률적 평가
2.2.2. 전술적 평가
2.3. 사형 선고와 순국
2.4. 유해 발굴 시도
3. 신앙
4. 가족
5. 저작물
5.2. 장부가
5.3.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
5.4. 기타
6. 평가
6.1. 한국에서의 평가
6.1.1. 순종의 평가
6.1.2. 이승만의 평가
6.1.3. 박정희의 평가
6.1.4. 북한의 평가
6.2. 일본의 평가
6.2.1. 이토 긍정파
6.2.2. 2013년 아베 내각의 망언
6.3. 중국의 평가
6.4. 러시아의 평가
6.5. 아시아주의
7. 오늘날의 안중근
7.1.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
7.2. 안중근을 기리는 절
8. 그 외
8.2. 관련 어록
8.3. 루머와 진실: 어머니의 편지?
8.4. 관련 단체
9. 가족, 친인척
10. 관련 사건 사고
11. 대중매체에서
12.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安重根은 以庚戌陽曆三月二十六日上午十時에 立刑場하여 欣然而曰 余爲大韓獨立而死하고 爲東洋平和而死하니 死何憾焉이리오? 遂換着韓服하고 從容就刑하니 年三十有二러라.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5]

한국통사(韓國痛史)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이봉창, 윤봉길, 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장군격인 참모 중장으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義擧)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字)이기도 하다. 자서전에 따르면 가슴과 배에 걸쳐 점 7개가 있었던 까닭에 자를 응칠로 하였다고 한다. 가톨릭 세례명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성 토마스를 종도 성 도마로 음차했기 때문. 현재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도마라고 호칭한다. 한자로는 多默이라고 표기한다.


2. 생애[편집]



2.1. 하얼빈 의거 이전[편집]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6]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 입격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자신의 첫째 남동생 안태건(安泰健, 1868~?)[7]의 이름을 빌려 썼다.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진해현감(行鎭海縣監: 종6품)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兼晉州鎭管兵馬節制使:정3품)를 지냈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는데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인 화승총으로 20보(약 10m)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박영효의 장학생)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과 함께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이주하여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종2품) 정현석(鄭顯奭)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894년, 내 나이 16세에 아내 김아려에게 장가들었다. 현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가로질러 다니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이것이 이후 우리나라를 위태롭게 한 바탕이 됐으며, 일본·청국·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전쟁하게 된 원인이 됐다.

관군은 그들을 진압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청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또 일본 군인들도 건너와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서로 충돌해 마침내 큰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모으고, 격문을 뿌려 의병을 일으켰다. 나아가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모인 정예 병력은 70여 명이 됐으며, 이들은 청계산 속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중략)...

적병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었으나 우리의 의병들은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었다.

우리는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고 만세를 3번 부르며 본래의 마을로 개선해 황해도의 관찰부에 급히 승전 보고했다. 당시 일본 하급 장교인 스즈키란 자가 군대를 이끌고 지나가다 우리가 동학당에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어 축하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이후 적병들은 소문을 듣고 멀리 달아나 다시는 더 싸움이 없었고, 차츰 잠잠해져서 나라 안이 다시 태평해졌다.

안응칠 역사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鄕長) 유만현(柳萬鉉)[8]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 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 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 농민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인 니콜라 빌렘(한국명 홍석구)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안중근은 사도 토마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서 받게 됐다.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 안중근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우덕순과 더불어 의군을 조직하였다.[9] 처음에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몇번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스파이의 거짓 안내와 병력 열세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기에 결국 패배하고 우덕순은 일본군에 잡히고 자신과 몇몇 동료들만 목숨만 건져 가까스로 살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2.2. 이토 히로부미 저격[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안중근장군.jpg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플랫캡을 쓰고 폴로코트로 추정되는 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 의거 당시에도 이 차림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하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안중근이 이토 저격을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조를 나눌때 채가구에 우덕순, 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과 유동하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다. 일단 우덕순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 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를 전했고 우덕순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이였다.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과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10]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 각각 1발씩을 맞췄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한다.)[11]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여기서 이 한 발을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총알 한 발을 남김은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안중근이 외친 "꼬레아 우라"는 보다 정확하게는 "꼬레아 후라"로 러시아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다. 러시아 말이었다는 주장은 공판에 넘어가기 전 검찰관 신문에서 안중근이 "러시아 말로 꼬레이 우라를 삼창하고, 또한 한국어로 대한국 만세를 외칠 때 러시아 국가의 관헌에게 체포됐다."고 한 진술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 검찰진술은 안중근이 조선어 진술을 통역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긴 두 가지 잘못된 오류가 있어 근거로 신뢰하기 어렵다. 검찰신문의 첫째 오류는 처음엔 러시아 말로, 이어서 한국말로 대한국 만세를 외친 것처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러시아 말로 꼬레이 우라 라고 외쳤다 했으나 이 꼬레이는 러시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말로 한국은 '까레야' 다. 안중근의 진술을 통역하고 일본어를 받아 적는 과정에서 들리는대로 받아적은 입회서기의 실수로 "꼬레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어로 기술된 것. 1910년 2월 7일 열린 관동도독부 법정 공판과정에서 판사가 "어느나라 말로 대한국 만세를 외쳤냐"고 물었고 안중근은 이에 대해 "세계에서 보통 널리 쓰이는 언어로 "코레아 후라"라고 외쳤다고 대답했는데, 공판 다음 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안중근이 "세계공통어"로 만세를 불렀다고 보도했고 2월 13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세계통행어"로 만세 불렀다고 보도했으며 2월 15일자 황성신문 역시 세계공통어로 외쳤다는 기사를 내 보냄으로서 에스페란토 임을 확인하였다. 한편 Korea hura!는 에스페란토 이므로 안중근이 외친 대한국 만세는 세계공통어 에스페란토 였음이 확인되었다.

- 참조: 안중근 에스페란토로 '대한국 만세!'를 외치다


"코레아 후라"[13]

(대한 만세![14])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15]

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16]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의 죄.[17]

둘. 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시살한 죄.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18]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19]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

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 통감부 문서 7권[20]

/ 싱가포르 영자신문 기록.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 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아 제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였으나, 아래 법률적 평가 문단에서 나오듯 일제의 압력을 따른 러시아측 행정명령에 따라 러시아 검찰 조사 도중 하얼빈 일본 영사관을 거쳐 뤼순(현재는 다롄의 일부)에 있는 일본 고등법원으로 송치되고 만다.

의거 소식이 들리자 한국인 안병찬은 물론 러시아의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라스, 스페인 변호사, 심지어 일본[21]에서까지 수많은 국제변호사들이 안중근의 변론을 맡겠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선임은 불허되었고, 일제 측의 형식적인 절차로 관선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와 카마타 쇼지가 변론을 맡는다. 재판장은 마나베 주조, 검사는 미조부치 다카오가 각각 맡았다.

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1
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2
안중근 의사 공판 기록 번역 #3

안 의사는 대체로 법정에서 사실관계보다는 제국주의에 근거해 조선의 자주성이나 역사를 완전히 부정, 폄하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는 검사를 상대로 사상적 싸움을 벌이며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고자 했다. 메이지 천황의 존엄성을 고종의 그것과 같이 긍정하고, 아시아 각국에 대해 선진국인 일본이 일정한 수준의 우위를 갖고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인정하되 일방의 착취적 식민지 관계를 부정한 채 어디까지나 각국은 자주 독립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명목상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토가 중간에서 이러한 대의를 왜곡하여 많은 한국인을 살상하고 국가적 존엄과 주권을 박탈하였으며, 특히 굴욕적인 조약들을 강요했다는 취지의 아시아주의에 근거한 주장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2] 특히 상기의 거사 이유 중 책에서 보았다며 항간에 떠도는 고메이 덴노의 시해 설을 언급했을 때는 재판장이 놀라서 방청객을 퇴정시키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문: 일본이 세계에 대해 그렇게 선언(한국 보호는 동양평화를 위함)했는데 그 실(實) 한국을 병합하려고 하면 그것을 열국이 묵인하고 있을 것 같은 일이 있을까.

답: 예를 들어 말하면 여기 한 마을에 3형제가 있는데 은 제일 많은 자산을 가지고 그 다음 형제는 가난하고 또 셋째 아우는 다소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때 그 가난한 형제의 가족이 싸웠던 바, 첫째 형이 와서 제지하였는데 셋째 아우가 와서 제지하고 있는 형이 폭행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마침내 형과 셋째 아우와의 싸움이 된 것을 이웃 사람이 보다 못해 마침내 이를 제지하였다. 그런데 형은 기뻐하여 싸움을 중재해준 사람에게 전지(논밭)을 사례로 주었다. 그것을 셋째 아우가 불만으로 생각하고 즉 자기를 빈정대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마를 사고 몸을 장식하고 사치하였으므로 차재(빚짐)하게 되니 자포자기하여 늘 사람과 싸움을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싸움쟁이라고 말하고, 본인은 대단한 차재를 하여 할 수 없게 된 결과 하나의 간책(간교한 꾀)를 써서 가운데 형의 재산을 횡령하려고 타인에 대해 가운데 형이 나한테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말하니, 타인은 그가 싸움쟁이라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좋겠지' 하고 말했으므로 만족하고 드디어 후견인이 되어 가운데 형의 집으로 들어가 전지를 제멋대로 경작하고 횡포를 멋대로 하며 박해를 가하는지라 가운데 형은 늘 비통해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어 셋째 아우를 징치(징계하여 다스림)해 줄 의논을 하였는데 그 중의 어떤 사람은 셋째 아우를 징치하는 김에 형 두 사람의 재산도 횡령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는데 그 부근 사람은 셋째 아우의 일족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고 그 집의 이토란 놈이 나쁘다고 말했다.

이 3가는 형제라는 것은 분명하므로 동심(한마음)으로 그 사람에 당하면(그 사람들에 맞서면) 3가를 안전히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 동양 각국이 모두 손을 이끌고 힘을 같이 하면 인구가 5억 있으니 어떤 나라도 당할 수 있다. 그런 것을 자기가 주리고 있으므로 남을 먹이로 하여 혼자서 일치를 방해하고 있는 것과 일반이다(같다). 즉 이토의 하는 짓은 위에서 말한 가운데 형을 먹이로 한 셋째의 아우와 동일하여 이토의 정책이 좋지 않았으므로 한국에는 폭도가 일어나고 인민의 거주도 완전하게 할 수 없게 되어 식민정책의 실적이 조금도 오르지 않고 중국까지도 감정을 해쳐 그 나라는 현재 일청전쟁의 원수를 갚으려고 일반으로 기대하고 있음은 내가 중국을 순회하여 분명히 지득한(알게 된) 일이며 또 미국에도 무수히 노동자를 건너 보냈기 때문에 그 나라로부터도 일본은 배척당하고 러시아도 일본에 대해 결코 호의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특히 한국 일반 인민도 한번 일본과 교전하여 금일의 불평을 만회하려고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음은 내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중략)

...일본이 영국과 동맹하고 있다고 말하나 그것은 영국 자국의 이익으로 하고 있으므로 결코 의뢰하기에는(기대기에는) 부족한 일이다. 그리고 미국인 중에는 일본국의 재정만큼은 일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 있으므로 즉 미국, 중국, 러시아가 연합하여 일본으로 향한다면 일본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러한 상태라 열국은 조만간에 일본에 대할(적대할) 각오에서 혹은 묵인하는 태도로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한국도 독립할 수 없다고만 한할 수 없다. 지금도 미국 또는 포르투갈이 드디어 독립할 수 있었던 사실도 있다. 이토의 정책은 크게 그르치고 있다.

2018년 4월 20일에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 문서 보관소 하바로프스크 도서관에서 '한국 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일본군 참모장이었던 아카시 모토지로(1864~1919)가 중국 현지 밀정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로 작성한 이 문서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를 캐내는 데 목적이 있었고, 문서에서는 안중근이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용정에 망명한 것은 당시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던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운동도 안중근이 주도). 보고서에서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 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 등 이상설과 안중근의 사제 관계를 언급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 통감부 촉탁 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중근이 이상설을 두고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고 호평하고 있어, 안중근의 사상에 이상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2.2.1. 법률적 평가[편집]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은 법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중 재판상에서도 문제가 된 안중근과 이토의 신분 여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뤼순 소재 일본 관동 도독부 지방 법원은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교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 우익세력에서는 현재도 안중근 의사에 대해 테러리스트 내지 살인범으로 평가(매도)한다. 다만 일부 양심적 지식인들은, 안중근을 그러한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23][24]

이에 대해 고려대학교 로스쿨 명순구 교수는 첫째, '대한의군 참모 중장'(군인) 신분이었던 안중근은 1907년 발효된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의 "비정규군도 교전 자격이 있다"는 규정에 따라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과 둘째, 이토는 1909년 10월 사망 당시에 이미 조선 통감을 사임했지만, 대신 추밀원 의장을 맡고 있었고 그가 민간인이더라도 하얼빈 방문 자체가 한반도 지배를 포함한 대륙 침략을 목적으로 방문한 침략 행위였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따라서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교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한다.[25]

다만 이 주장이 국제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주장인지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침략 행위와 연관이 있다하더라도, 단순한 방문이 문언적으로 "교전"에 해당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설령 이토 히로부미의 방문이 교전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교전단체에 소속된 자가 교전에 참가한다고 그 자체로 교전자의 자격이 인정되지는 않는다. 당시 적용되었을 헤이그 육전 규칙(1907년) 교전 자격 요건에 의하면 민병이나 의용병단이더라도 부하에 의해 책임지는 자에 의하여 지휘되고, "고착된 표지", 즉 제복(혹은 이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전투원임을 식별할 수 있는 복장)을 갖추고, 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며, 전쟁법을 준수하여야 교전 자격이 인정된다. 군민병이라면 공연한 무기 휴대와 전쟁법 준수만으로도 교전자로서 자격이 인정되나, 안중근 의사를 군민병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시되며[26] 안중근 의사가 군민병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공연한 무기 휴대 요건이 결격 사유가 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권총을 들고 다녔다면 거사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 아닌가.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는 전쟁범죄자가 될 수 있다. 그는 암살당시 덤덤탄을 썼는데 이것은 헤이그 협약 위반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말고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재판 과정이 불법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요소는 많지만, 적어도 안중근 의사가 당시 국제법을 기준으로 교전자로서 포로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차대전기든 지금이든 마찬가지지만 적성국의 민간 위장 스파이는 대부분 사형이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아도 사형인데 암살이라면 서구에서 재판을 받았더라도 사형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재판 관할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일본 검찰 측에서는 "하얼빈은 청국 영토이지만 동청 철도의 부속지로서 모든 나라에 대해 자유 지역이며, 일본국은 조약상 이 곳에 대해서 치외법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으며, "메이지 38년(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일한 보호 협약(을사조약) 제 1조에 의해 국외에 있는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주장에는 을사 조약 체결의 조약상의 문제점(강압적 체결)과 한국인에게 적용될 대한제국의 법률에는 섭외법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상존하고 있었다.[27] 한편 일본 법원은 일본 형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제법 문제와는 별개로 안중근 의사의 재판은 일본 행정부가 사법부의 재판에 개입하여 삼권분립을 해친 재판이었다. 실제 당시 일본정부가 뤼순에 파견한 외무성 직원은 "안중근을 사형할지 말지 지침을 내려달라"라고 전문을 보냈고 이에 일본 정부는 "극형에 처해 징악해야 한다"라고 답신을 보냈다. 이미 일본 정부가 판결을 결정해놓고 사법부에게 판결을 '지시'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민주주의 국가의 원리인 삼권분립을 어긴 것이자 사법농단이라 부를 만한 일이다. 다만 이러한 삼권분립을 어기는 행위는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이 시기 서구 열강 사이에서도 국제법 위반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있고 삼권 분립이 확립되지 않은 국가도 상당수 있긴 했었다.

일본인 변호사인 미즈노 키치타로는 일본인이지만 안 의사의 인격에 감화되어 의외로 매우 성실한 변호를 수행했다. 그는 어차피 불공정한 재판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안 의사의 의거를 막부 말기의 지사와 같은 행동이라고 주장해 메이지 일본인들의 감성에 어필하려고 했고, 가능한한 모든 정상참작과 감경을 해서 그의 형량은 징역 3년이면 충분하다고 변호했다.


2.2.2. 전술적 평가[편집]


대부분의 독립 항일 운동은 치밀한 사전 조사와 계획에 의해 수행되었으나, 안중근 의사만큼이나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치밀하게 작전을 계획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선 그가 준비한 화기부터 범상치 않은데, 당대 최신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소형이어서 여러 정 준비할 수 있었던 벨기에의 헤르스탈 조병창에서 제작한 FN M1900은 .32 ACP탄을 사용하는 자동 권총이다. 기존의 자동 권총들은 대부분이 탄막 형성의 기능에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정확한 조준 및 살상력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FN M1900은 세계 최초로 슬라이드를 권총에 장착함으로서 기존과는 달리 화기의 크기가 매우 작아졌으며 동시에 사격 안정성 및 정확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의거 전 안 의사는 M1900 2정(혹시 모를 불발 및 탄 걸림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과 별도로 S&W M2를 준비하였다. 다행히 1차 공격 시 준비한 화기가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에 준비해 간 다른 화기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경호를 위한 일제 군 병력들이 대응할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고 빠르고 침착하게 요인을 암살한 후 무차별적인 테러로 보이지 않도록 1발을 남길 상황적 판단까지 할 수준이면 그의 전술적 / 법적 전략 지식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3. 사형 선고와 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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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5분 전 사진
1910년 2월 14일에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28] 법정을 자신의 의견을 펼칠 장으로 보고 있던 안중근은 항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를 존경하던 미즈노는 이를 제지하면서 "항소하면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겠느냐"고 했고, 안 의사는 여기에 동의해 항소를 포기했다고 하며, 수감 뒤 서예와 <동양평화론> 집필에 몰두했다. 이후 3월 26일[29] 오전 9시에 정근, 공근과 마지막 면회를 가졌다가 10시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했으나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해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이 때 나이 32세였으며, 조선인들에게는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 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또한 자신을 존경하던 전옥 쿠리하라 사다키치, 변호사 미즈노 키치타로 등 사형에 입회한 사람들에게는 "여러분께서는 앞으로 동양 평화에 진력해 달라"는 말을 남겼고, 이에 미즈노는 안 의사의 사형 직후 "동양 평화를 위해 만세 삼창을 하자"는 요청을 했으나 형무소측에 거부당했다.

그가 순국 후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 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해,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유해는 뤼순 감옥 인근 죄수 묘지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내용의 당시 러시아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2030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20주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2023년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기이다.


2.4. 유해 발굴 시도[편집]


안타깝게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있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국공내전에서 패전, 이후 공산 중국의 성립과 6.25 전쟁, 냉전으로 중국과 교류가 끊기다시피해 한국 측 주도로 찾는 것은 사실상 기대할 수가 없어졌다. 현재 안중근 매장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으론 둥산포, 원보산, 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3곳이며, 특히 원보산은 당시 뤼순감옥 전옥(소장)인 쿠리하라 사다키치의 딸 이마이 후사코의 증언 등을 토대로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공식지목했다.

공산화된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 북한의 경우 안중근을 높게 평한 김일성은 1970년대에 직접 주석 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 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 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하나 둘 다 실패하였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 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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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삼일절 당시 KBS 9시 뉴스 보도에 따르면, 독립기념관이 안중근 의사가 순절한 뤼순감옥 최근 사진을 처음 입수해 공개했고, 1997년 광복절에 MBC 측이 최초로 뤼순감옥을 취재하여 시청자들에게 최초로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곳을 공개하였다. 공개 당시 뤼순감옥은 소재지가 군항지라 군사기밀 보호를 이유로 외국인 방문이 금지돼 있어서 취재 직전까지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당시 MBC가 처음으로 취재 비자를 받아서 뤼순 형무소에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시청자들에게 공개하였다.[30]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여순 형무소에서 안중근 의사 시신 수습에 대해 말하자면

형장에 걸린 밧줄에서 수직으로 2m쯤 아래에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바로 이 상자 안으로 떨어뜨린 뒤 흙으로 덮으면 사형 집행이 모두 끝나는 형식으로 사형이 이뤄졌다. 안 의사의 처형은, 그러나 이곳이 아닌 본관과 교수 형장 사이의 공터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남은 것은 안 의사가 처형된 곳임을 알리는 현판 하나가 전부. 사형을 당한 시신들은 나무 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다. 이 중 어딘가에 안 의사의 유해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찾지를 못했다. 안 의사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 MBC 뉴스데스크 1997년 8월 뤼순 형무소 안중근 의사 순절 현장 취재 내용

2010년 3월 중엽, 정보 통제 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 정보 중 일부가 일반 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를 체포한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는 재판 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 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 정부도 당시 재판 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동년 9월 조선일보가 뤼순감옥 밖 500m 야산이라 주장했고,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 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당시 시사IN은 윤원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해 "이는 새 기념관 건립 모금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광복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31]가묘(假墓, 가짜로 만든 무덤)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이후 2019년 초반 가묘 표지석이 정식 비석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비석 뒤의 무덤은 가묘이다. 혹시나 희박한 확률로 차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이 발견된다면 효창공원의 독립묘역은 "사의사 묘역"으로 이름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다시 해빙무드로 들어선 2018년 8월 14일,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유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북한과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공동 추진하겠다고 입장을 표했다.

2019년 5월에는 기독교 묘지에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옮겼다는 당시 러시아 언론의 기사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수소문끝에 1880년대에 덴마크인이 뤼순에 기독교 묘지를 만들었고 일부가 남았다는 것을 알게되어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생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 충분히 신빙성 높은 이야기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안중근 처형 집행 이전에 당국을 향해 안의 유해를 한국 원적지에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간절히 요청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부득이 규정을 내세워 사형수의 유해는 감옥이 관리하고 있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한다고 답했다. 안중근의 둘째 동생은 곧바로 안중근과 일정한 친분관계가 있는 전옥(典獄)에게 부탁했다. 전옥은 고심 끝에 둘째 동생에게 파격적으로 하얼빈의 소나무로 만든 관으로 유해를 안치하고 조선 풍속에 따라 백포(흰천)를 씌우도록 허락하여 한국의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일반 사형수와는 다른 규정을 적용하여 해당 영구를 감옥 내 교회당에 안치한 다음 우덕순 이하 3명의 죄수들에게 안중근의 영구에 고별식을 갖도록 했다. 우덕순 등 3명의 죄수들은 안중근의 영구 앞에서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고 조선인의 예법에 따라 땅에 꿇어앉아 두 번 절을 했다. (하략)

성경시보

2022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13주년을 맞아 실시한 국가보훈처 브리핑 -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 순국 당시 중국 현지 신문 기사 발굴·공개

위의 기사는 국가보훈처와 주상하이총영사관이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에 필요한 입증자료 수집을 위해 지난 1년여간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발행된 신문 및 간행물 88종' 중 독립운동 관련 기사를 발췌 후 분석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 해당 기사로 안 의사의 유해가 당시 여순감옥 내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한 번 더 뒷받침할 수 있었으며, 안 의사의 유해가 하얼빈 소나무로 제작된 관에 안치됐다는 내용을 여순감옥이 위치한 중국 만주 현지 보도 기사로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1909년에 하얼빈에서 나라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씨는 그 다음 해에 여순 감옥에서 처형됐다. 그의 친동생 등이 그의 유해로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일본 관리들이 그 유해를 강탈하고 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중근의 모친 조씨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둘을 데리고 조국을 떠나 북러시아 영토로 이주하여 십수년의 세월에 걸쳐 꾸준히 애국 사업에 노력했다. 이후 1919년에 한국에서 3·1독립운동이 발생하자 조씨는 두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와 광복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올해 봄에 뜻밖에 병에 걸려 영국 조계지의 덕국의원(德國醫院)에 입원해 몇 개월간 치료받았으나 큰 효과가 없어 7월 15일 오후 11시에 서거하시니 향년 66세였다. 상하이의 한국 교포들도 그녀의 평생 사업을 추모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특별히 사회장을 거행하여 19일에 발인하기로 결정했다.

민국일보, 1927.7.19.

또한 이 기사로 안 의사의 순국 이후 그를 계승하여 러시아와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조마리아 여사와 안 의사 형제들의 삶 또한 조명되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상해 한인교민단 교민장으로 알려졌던 조마리아 여사의 장례식이 그보다 높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다는 점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① - '감옥서의 묘지'가 어딘가?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② - 주목해야 할 '둥산포' 묘지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③ - 최후 형무소장 '타고지로'의 악행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④ - "안중근 의사는 침관에 누워 계신다"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⑤ - "어렵고 힘들다"는 건 국민도 다 압니다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⑥ - 안중근 기념관은 돌아오는데…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⑦ - 사라진 안 의사 가족의 유해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찾기 키워드 ⑧ -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선생 거주지를 찾아냈다
[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⑨ - '하얼빈산 소나무관'이 최선입니까?


3. 신앙[편집]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 가톨릭 성경 지혜서, 3장 1절 - 7절.

안중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그 세례명은 토마스 (舊 도마)이다. 의거 직후 살인자란 이유로 가톨릭 신자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1993년 8월 21일 "그분의 의거는 일제의 무력침략 앞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행위였고 정당방위이며 의거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라며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더 큰 평화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인정한다. 이후 순국 100주년을 맞은 2010년 3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集殿)으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추모미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공인돼 공식적으로 천주교의 품안으로 들여졌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전 천주교 신자로서 죽기 전 마지막으로 7성사 중 하나인 병자성사[32]를 요구했으나 당시 한국천주교회 전체를 관할하는 조선대목구장이었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요구인 고해성사병자성사를 집행할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다행히도 니콜라 빌렘 신부가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듣고 병자성사를 집전해 주었고, 이로 인해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성무 집행의 자격을 정지당했다. 참고로 교구장 주교는 자기 교구의 문제가 있는 신부에게 성무집행을 정지할 권한이 있으나, 뮈텔 주교가 내린 성무집행정지는 본인이 친일 성향에 매몰돼 타당한 이유 없이 내렸기에 문제인 것이다. 빌렘 신부는 이것을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교황청에 문의를 넣었고, 교황청은 뮈텔 주교의 성무집행정지 처분이 잘못됐음을 선언하고 효력을 취소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가톨릭교회 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시성되었듯이, 안중근도 시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의 시복(諡福)을 추진하는 업무에 착수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제10회 가톨릭포럼에서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안드레아 주교는 "안 의사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이라며, 안중근 의사가 "순교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 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증거자"라고 밝혔다. 염수정 주교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 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으며 그분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한다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가 시복되게 하고자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 중에 있는 천주교 신자는 초대 서울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를 비롯해 조선시대 및 한반도 근현대 신앙의 증인 570여 명이며, 여기에는 안중근도 포함되어 있다.관련기사관련기사

안중근의 삶을 이토 히로부미 살인에 한정하게 하지 않고 안중근이 처형되기 전 마지막 시기인 '동양 평화를 목적한 囚人(수인)기'를 조명하면 성인으로 공경할 근거가 있다고 본 것이다.

성경에도 안중근과 비슷한 사례로 구약시대의 유딧이 있다. 유딧은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침략당하자 적진으로 찾아가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신임을 얻고 연회 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장군의 목을 잘라 귀환해 이스라엘을 구한 과부다. 즉 안중근의 저격은, 유딧의 칼부림을 누구도 살인으로 일컫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2016년 10월 22일 충남 홍성군의 홍주 생매장터 순교성지의 14처[33] 봉헌 미사에서, 천주교 대전교구유흥식 라자로 주교는 강론 중에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래 시복 및 시성 추진 관련 업무는 해당 성인의 출신지 교구장이 하는 것이나,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황해도북한에 있다. 따라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이 직무를 맡을 주교 한 사람을 선출하였고, 유흥식 주교가 이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4. 가족[편집]


출처
  • 조부 안인수(安益壽)
    • 백부 태진(泰鎭)
      • 사촌 종근(宗根)
        • 조카 영생(榮生)
      • 사촌 장근(莊根)
        • 조카 봉생(鳳生)
        • 조카 춘생
    • 중부 태현(泰鉉)
      • 사촌 명근
        • 조카 의생(毅生)
        • 조카 양생(陽生)
      • 사촌 홍근(洪根)
    • 아버지 태훈(泰勳)[36], 母 조마리아(趙姓女)[37][38]
      • 중근, 부인 김아려(金亞麗)
        • 딸 현생(賢生)
          • 사위 황일청
          • 외손녀 황은주
        • 아들 문생(文生)[34]
        • 아들 준생
          • 손자 웅호(雄浩)
            • 증손자 보영
          • 손녀 선호(善浩)
          • 손녀 연호(蓮浩)
      • 누이 성녀(姓女)
      • 동생 정근(定根)
        • 조카 원생(原生)
        • 조카 미생(美生), 사위 김인(金仁)[35]
        • 조카 진생(珍生)
      • 동생 공근(恭根)
    • 숙부 태건(泰建)
      • 사촌 봉근(鳳根)
      • 사촌 충근(忠根)
      • 사촌 성근(性根)
    • 숙부 태민(泰敏)
      • 사촌 경근(敬根)
      • 사촌 형근(炯根)
    • 숙부 태순(泰純)

사실 안중근의 집안이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 운동 때문에 일가가 중국·미국·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39]해서 1953년 ~ 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現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40]

이후 안중근의 장남 안문생(안분도)은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그리고 이것 때문인지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이후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伊藤 文吉)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41]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이에 분노한 김구가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安俊生)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고 백범일지에 적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김구가 동학 접주로 활동해 일본군에 쫒길때 보호해준 적이 있고 안중근의 집안 대부분이 독립 운동에 헌신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출범 후에는 김구와 함께 활발한 활동을 폈다.

그런데 안공근은 말년에 김구와 파벌을 달리해 활동하다 1939년에 상해에서 실종되었는데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안공근의 사인은 당시 중국 경찰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안공근이 핵심으로 활동한 한인 애국단이 이봉창의 천황 폭탄 투척, 윤봉길의 상해 의거 등을 주도한데다 당시 상해에서 일제의 간첩 공작이 활발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안공근은 일제 밀정에 의해 언제 암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본에 의한 암살설, 김구의 측근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설이 있는데 아직 확실치는 않다.

또 다른 사촌 안봉근은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 두부 장사를 하며 번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같은 독일 망명자인 이미륵의 정착도 도왔으며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에서 금메달 및 동메달을 각각 땄던 손기정과 남승룡의 파티를 주재한 바 있다. 그러나 2020년 미국의 한국학연구가 프랭크 호프만은 저서 <베를린의 한국인, 사진 속의 한국인>을 통해 안봉근이 나치에 협력했을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나치는 식량 확충을 위해 고기 대체품을 연구하던 중 안봉근을 찍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의혹은 UPI 뉴스에서 단독 보도됐다.


5. 저작물[편집]



5.1. 동양평화론[편집]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 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하여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 했다. 일본이 3국 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중립 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 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 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약속과는 다르게[42] 서문과 첫장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5.2. 장부가[편집]


안중근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장부가〉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우덕순도 〈거의가〉로 답하였다. 〈장부가〉는 안중근의 친필로 된 한시와 우리말 시가 함께 전해진다.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가 셰상에 쳐ᄒᆞᆷ이여 그 ᄯᅳᆺ이 크도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ᄯᆡ가 령웅을 지음이여 령웅이 ᄯᆡᄅᆞᆯ 지으리로다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텬하ᄅᆞᆯ 웅시ᄒᆞᆷ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꼬.)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ᄯᅳ겁도다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분ᄀᆡ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분개히 한 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鼠竊○○兮 豈肯比命 쥐 도젹 ○○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쥐 도적 ○○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꼬.)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ᄅᆞᆯ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어찌 이에 이를 줄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ᄃᆡ업을 이룰지어다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ᄃᆡ한 동포로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원문에서 '○○'으로 복자(숨긴 글자) 처리되어 있는 부분은 맥락상 당연히 '伊藤(이등)', 즉 '이토'다. 거사를 앞둔 상황에서 정보 누설을 막기 위함이었을 듯 싶다.


5.3.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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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한문에 능했을 뿐 아니라 서예 실력이 상당한 대단한 명필이다. 뤼순 옥중에서 많은 글씨를 남기면서 넷째 손가락이 잘린 자신의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낙관 삼아 찍었는데, 이것들 중 몇몇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됐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보물 제569-2호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등이 있다. 해당 문서 참고.


5.4. 기타[편집]


  • 결혼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내에게 미안함과 애정을 표한 편지를 자주 쓰는 등 로맨티시스트로서의 면모도 있었다고 하며 이 편지는 이후에도 보존되고 있다.

  • 2009년 12월 20일자 KBS1 TV쇼 진품명품에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나왔다. 경천(敬天)이라고 쓰인 글씨의 감정가는 6억원으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전시회시에 보험 가격을 내어 6억이라는 가격으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영상 진품명품 방영 이후, 감정가 7억 3천만원의 가격으로 2014년 경매장에 나왔으나 당시 경매에선 유찰되었고, 그 후인 2014년 8월 경에 서울 잠원동 성당이 5억 9천만원에 구입하여 천주교 서울교구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 뤼순감옥에서 작성한 자서전(안응칠 역사, 安應七 歷史)이 있으나 원본은 유실되었고, 일역본과 중역본이 남아 후에 복원할 때 참고하였다고 한다.

  •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청소년기부터 평생 절친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지식인 계열 독립운동가 박은식[43]은 생전 친구 아들인 안중근에 대한 책 "안중근전"을 썼다. 이는 한중수교 전까지 중국에 있다가, 1992년 중국 정부가 흑룡강성에서 보관하던 걸 한국 정부에 직접 돌려주었고, 지금도 매우 중요한 구한말 역사 자료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다.



6. 평가[편집]


대한민국에서 의사(義士)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가운데 거의 첫 번째로 꼽힐 정도로 이름 높은 독립운동가이다. 드높은 애국심을 품고 의거 이후에도 성인(聖人)의 자세를 지켜 마지막까지 일제의 유혹을 뿌리친 진정한 애국자이며,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들 또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안중근의 유묵은 안중근이 전문 서예가로서 유명세를 떨치지 않았음[44]에도, 또한 비교적 최근의 저작물임에도 대한민국 보물 제569호로 지정되어 국가적 관리를 받는 것만 봐도 미뤄 짐작이 가능하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는[45] 견해가 있는데,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권도 박탈하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식민지배의 사전 정지작업인 을사늑약대한제국 군대해산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었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인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어왔으며(대한시설강령 등) 일본의 각의는 1909년 7월에 조선 병합을 이미 가결하고 가쓰라 다로 수상을 필두로 병합을 추진 중이었다. 심지어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이다. 어쨌거나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강제병합 시기를 앞당겼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강제병합이 되진 않았으나, 그를 죽이면서 강경한 병합을 주장하던 세력에게 명분을 줬기 때문이다. 덧붙이면 현대에 비유하자면 만약 현대의 북한이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국군을 모두 해산 시킨 뒤에 내정간섭을 위한 통감부를 설치한다면 한국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 대부분은 북한측의 적화통일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생각할 것이다. 결국 당대에 이토가 행한 일들은 모두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철저한 사전 정지(整地)작업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화주의자, 혹은 친한파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저서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권에선 이토는 한일합방 반대 스탠스를 취한 이유로 한일합방으로 인한 서구 열강들과의 마찰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고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지배 구상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시킨 뒤 실질적으로 지배하겠다는 식이었다.

또한 안중근이 누구를 저격했는가를 떠나, 처음으로 독립을 위해 일본 고관대작을 처단했기에 이후 의열단을 비롯한 독립 운동 단체들이 일본 고관대작 암살과 조선총독부 등의 기관 폭파 등을 통한 독립을 이루고자 한 계기가 되었다.


6.1. 한국에서의 평가[편집]



6.1.1. 순종의 평가[편집]


순종 황제는 이토 히로부미의 사망을 전해 들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칙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이 없는 자'이며, '장춘단에서 이토의 추도식을 성대히 열도록 하라'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에 박제빈(고종의 칙사), 민병석(순종의 칙사), 엄주익(왕실 및 종친의 칙사), 조중응(대한제국 내각의 대표)을 공동 대표로하는 대규모 조문단을 파견했고, 이들은 "안중근은 오(吾, 우리)의 흉수(凶獸, 흉한 짐승)"라는 내용의 순종의 친필 추도문을 지참했다. 다만 순종 황제의 이러한 입장이 본심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본심이라는 근거는 무엇보다도 순종 본인이 안중근에 대한 적개심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여러 차례 드러냈고, 이에 대한 사료가 풍부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당시 정세를 들어 순종이 일본의 압력을 받았다는 반론도 크게 지지 받지 못하는데, 순종은 왕실에서 성장하며 이미 자신의 모든 언행이 기록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한편 순종 황제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즉위 당시에도 정치에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본인에게 매우 친절하고 정중했던 측면만을 보고 그를 평가했을 가능성도 분명이 존재한다. 다만 순종의 이러한 칙문은 순종의 정치적 감각이 0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점을 눈여겨 본 친일파들이 이토의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 후 한일 합방을 해야 한다고 드러내놓고 준동하기 시작한다.

한편 순종 황제의 어머니가 일제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기 때문에 정말로 순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진심으로 가깝게 생각했는지는 검토해야 한다는 반대 의견이 있다. 그리고 당시는 아버지인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되고 나라가 사실상 일제에 의해서 완전히 장악된 상황이라 대외적으로 일제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현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6.1.2. 이승만의 평가[편집]


이승만은 전형적인 외교독립론자로, 개별적인 암살이나 폭탄테러 등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 고문으로 한일 합방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친일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전명운장인환사살했을 때의 미국 여론을 겪어봤던 이승만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은 윤봉길의거에 대해서도 비판한 바 있을 정도로 암살을 사용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중에서.


위의 미국 분위기에 대해 참고할 점은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미국의 정계나 사회가 매우 친일적이고 와패니즈들이 상당했다는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등 정치인들은 일본을 아시아의 백인들처럼 대우했고 뒤의 일이지만 헨리 스팀슨처럼 일본으로 여행가거나 일본 문화에 심취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미국 사회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지몽매한 살인마로만 본 것은 아닌데 앞서 의거를 했던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방면 되었고 장인환은 판사들이 애국심에 의거하여 본 행위라고 판단하여 형량을 10년으로 낮춰줬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를 비롯한 미국 신문들도 '스티븐스는 한국의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더럼 스티븐스 저격 사건을 보도하여 한국에 대한 입장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미일관계에 따른 정치외교적인 부분에 더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복 후에는 그 나름대로 예우를 갖춰 1959년 05월 29일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6.1.3. 박정희의 평가[편집]


파일:박정희 안중근 의사 기념관.jpg
1970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60주년을 맞아 개관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박정희.[46]
박정희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963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53주년 기념식에 참여하기도 했고, 안중근 의사에게 건국훈장을 1962년에 수여했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 설립, 안중근 의사 유묵비 등 각종 기념사업도 지원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爲國獻身軍人本分'을 새긴 바위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 중 하나다.

1972년 1월에는'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 통일 세계 평화)'라는 휘호를 보냈고,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년 9월 2일에는 '민족정기의 전당'[47]이라는 휘호를 내려 기념관을 이순신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즉, 안중근을 '민족정기의 화신'으로 추앙하여 이순신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었다.


6.1.4. 북한의 평가[편집]


항일을 국시로 삼은 북한에서도 당연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70년대에 김일성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임명하여 안중근 유해 발굴단을 보냈으나 실패했다.

1979년에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도 제작되었으며, 극본은 백인준, 연출은 엄길선 감독, 안중근 역은 배우 리인문이 맡았다. 1998년 7월에 문화관광부가 국가안전기획부 등 관계기관의 검토를 받아 수입을 허가했으며, 9월 1일 밤 10시 55분에 북한 영화로는 최초로 SBS에서 방영되었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에도 다시 한 번 방영되었다. 하지만 원작에 등장하는 김일성 찬양은 당연히도 삭제되어 있어서 원래 160분짜리가 2시간으로 줄었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가 순국을 앞두고, 의거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1912년에 태어날 '임'의 출현을 고대하는 장면 등. 어쨌든 남과 북에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류에 기여하는 셈이다.

2009년, 북한은 신문을 통해 "안중근은 민족이 기억하는 애국 열사이며, 어쩔 수 없이 개인 테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풍운아"라 평가하였다.#

그러나 주성하 기자가 블로그에 밝힌 바로는, 2014년 11월 기준으로 북한에서 해당 영화가 더이상 상영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 지도부가 암살 한 번으로 민족의 영웅이 된 안중근 의사를 본받는 사람이 나올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 안중근 의사를 대놓고 띄워주는 일은 이제 없을 듯하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평하며 독립을 위해서는 인민대중이 수령의 영도 아래 조직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라는 교훈을 남겼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조차도 김일성의 우상화와 이로부터 이어지는 북한 정권의 정당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


6.2. 일본의 평가[편집]


일본의 유명 백과사전인 고지엔(広辞苑)이나 다이지린(大辞林)을 비롯한 일부 일본의 매체에서는 안중근을 독립 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고지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 조선의 독립 운동가. 가톨릭 교도이며 학교를 설립. 또한 의병을 조직. 1909년 10월 26일 전(前)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하여 사형. 한국·북한에서 의사로 칭해진다. (1879~1910)

반드시 극우 성향이 아니더라도 그가 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테러리스트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 이토를 저격한 행위는 문자적인(literal) 의미로 테러가 맞기 때문. 게다가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이토는 옛 천 엔 지폐에 실렸을 정도의 위인으로 추앙받던 시절이 있었고 일본의 대중적인 시야는 1990년대까지 한국과 거리가 멀었기에, 그저 '이토 히로부미를 쏜 테러리스트' 정도라는 단순한 인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 증대와 과거사에 대한 일본 좌파들의 각성 촉구를 통해 혁명 지사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에서 안중근 평전과 안중근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도 나온 적이 있다. 1995년에 일본 ABC에서 방영했던 다큐쇼 〈놀라운 20세기: 슬픈 테러리스트의 진실〉. 또한 이 다큐쇼는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 불리게 된 이유와 진실도 다루고 있다.

당시 옥중에 함께 수감된 일본인들 가운데 고귀한 성품, 대의 명분, 인성을 알아 본 이들은 안중근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의 재판에 관련되었던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러했는데, 가령 안 의사의 재판을 맡았던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판사는 그의 책(동양평화론)이 완성되는 것을 보려고 사형 집행을 재판이 끝난 후 몇 달 뒤로 미루려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 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안 의사의 변호인이었던 미즈노 키치타로도 그를 존경하여 안 의사의 의거를 막부 말기의 지사들의 활동과 비교하는 변호를 해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안 의사가 항소하여 항소심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 하자 "조선의 지사가 목숨을 구걸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미즈노는 안 의사의 사형 전 안 의사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현재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대림사(大林寺, 다이린지)라는 사찰에는 안중근을 존경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옥중에서 쓴 유묵〈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이 군인의 본분이라네)〉은 안중근 의사의 경호를 맡았던 일본 헌병 지바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지바 간수가 사망한 이후 그의 부인과 조카딸이 이어 보관하다가 1980년 8월 23일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묵 외에도 총 26점이 일괄하여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지바 도시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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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린지 사찰에 세워진 안중근의 유묵 기념비, 내용은 위와 같이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당시 위와 같은 일본인들의 반응은, 메이지 시대까지만 해도 일본에 아직 사무라이 정신이 남아 스스로 큰 대의를 품고 활동하는 이들을 지사(志士)라 하여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기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걸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비정신·무사도라는 공통의 이해점을 가졌기에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자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한 안중근이 Badass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일본 정부의 왜곡으로 일본 국내에서는 변질된 부분이 많았지만, 당시 한중일이 함께 뭉쳐 서구 세력에게 맞서야 한다는 아시아주의가 유행하기도 했었다. 안중근의 사상은 이 아시아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고, 천황에 대한 적대보다는 간신 이토를 처단했다고 하는 주장이 일본의 지사들에게도 공감을 받았기에 안중근 의사가 이해받고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10년, 도쿄대학의 와다 하루키 명예 교수[48]는 자주 등장하는 교토대학의 동료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의 2009년 글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강제 합병의 첫 단계로 인식되어 큰 저항심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그를 죽였다고 그를 책망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일본의 지식층에서는 안중근을 미화, 신격화하면서 정작 자국민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졸은 행보를 걷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선 대단한 사람이긴 한데, 행실이 하나하나가 문제점이 많아 유신지사 중에서도 주로 비판을 받는 측인점도 한몫 하는데다가, 아내에게 애정의 편지를 보낸 안중근과 달리 여자 문제로 항상 추문이 나돌다가 사살된 후, 일본 내에 난잡한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에 실린 일이 발굴되어 지식층의 접근을 떠나서 그냥 이토 히로부미의 인식 자체가 나빠져버린 일도 있다.[49]

21세기에 들어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일본인에 대한 일본 외의 국가들에서의 평가를 일본인들도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이토 히로부미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이 자국에서 미화되었던 악당들이 계속 재평가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안중근이 "코레야 우라"라고 외친 것을 일본인들이 알게 되면서 마치 임진왜란이 알려지게 된 이후부터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뀐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50] 이토 히로부미도 이것 때문에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6.2.1. 이토 긍정파[편집]


의외로 이토 긍정파 또한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한다. 이토 유키오는 이토 평전에서 (2014년 번역 정발) 이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안중근 의사의 잘못은 없으며, 의사의 독립 운동을 폄훼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게다가 안중근 의사를 알아본 후 인간성에 반하게 됐다고 하였다.


6.2.2. 2013년 아베 내각의 망언[편집]


2013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중국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고, 중국이 이를 수락하여 하얼빈역의 의거 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박근혜는 2013년 11월 18일, 청와대를 방문한 양제츠 국무 위원에게 이에 대한 사의를 표했는데, 이에 일본은 격렬히 반발하며 11월 19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하는가 하면, 관방 부장관까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망언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물론 이 발언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 따지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는데,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것은 사사로운 원한 등이 아니라 이토가 한국 식민 통치에 앞장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처단한 것이다. 또한 재판 자체가 원래 재판이 이뤄져야 할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서 처음부터 불공정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쏙 빼고 명백한 독립투사를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발언은 아시아권의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의 현역 공식 관료가 안중근 의사의 표지석 설치를 반대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 저질렀던 식민 통치와 침탈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일본에게 도발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중국 공산당이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이 없다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취하였고 마루타 같은 망언에 놀아나지 말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2010년부터 731 부대에 대한 내용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중국 측의 행보를 비꼰 것이라, 사실상 일본 측은 안중근 의사를 빌미로 중국 쪽이 추진하고 있는 일을 힐난한 것에 가깝다. 덕분에 국제 정세 전문가들은 "일본이 알아서 도발을 했으니, 중국 공산당은 지침상 적극 대응할 테고 하얼빈역에는 표지석 수준이 아니라 아예 번듯한 기념관이 생길 것이다"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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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1월 20일, 진짜 번듯한 건물로 하얼빈역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생겼으나, 2017년 사드 문제 여파 및 하얼빈역 확장공사로 2년 간 조선민족예술관에 임시로 이전한 바 있었는데, 2019년 공사가 끝나 다시 재개관식을 하여 지금까지 계속 운영하고 있다. 이 기념관의 입구 앞 시계는 움직이지 않는데, 중국 정부가 일부러 안중근이 총을 쏜 시각인 9시 30분에 멈춰 있게 설계해 놓았다.

추가로 이 기념관을 공사할때, 이와 별개로 안중근이 실제로 총을 쏜 기차 승강장 천장 아래에 간판을 달아 "안중근격폐이등박문사건발생지"라고 잘 보이게 한자로 크게 새겨 놓고 1909년 10월 26일이라고 날짜까지 정확히 새겨 놓았다. 사실은 100년간 단순히 바닥 타일로만 표시했던 걸 아예 간판으로까지 바꿔 버린 것. 당시 센카쿠 열도 분쟁 고조 등 중국 정부의 반일감정이 급격히 심해졌던 시기라, 일본 정부가 안중근 기념을 싫어하는 걸 인식하자, 중국 정부가 고의로 한국 정부의 요구보다 훨씬 더 강하게 아예 기념관 건물 건축과 중대형현판으로 안중근을 기념한 것이었다.


6.3. 중국의 평가[편집]


일본에게 공격당했던 일 때문인지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 의사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일본 측 항의를 일축했다. 또 중국 공인일보는 안 의사를 "아시아 제일의 의로운 협객"이라며 높게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했다.


6.4. 러시아의 평가[편집]


러시아 역시 당시 러일전쟁으로 인해 일본과의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으므로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를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당시 러시아 신문들의 평가에 의하면 의거 이후 러시아 지역사회에서는 안 의사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표현하며 하얼빈 의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안중근 의사 순국 110주년을 맞이해 2020년 3월 26일에는 110년전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보도한 러시아 신문이 공개되었다.#


6.5. 아시아주의[편집]


1. 금상천황 폐하아버지인 태황제 폐하를 시살한 죄.[51]

14. 현재 한국인의 곡소리와 한국 일본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안중근 본인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로 제시한 이토의 15가지 죄목중 1번과 14번 죄목 때문에 종종 그가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안중근 의사는 천황을 기만하고 천황의 아버지를 시살한 만고의 역적인 이등박문을 처단한 천황의 충신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해당 죄목은 "이토는 조선의 입장에서 죄인임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천황의 아버지를 시살하고 현 천황을 속여 잇속을 챙긴 역적놈인데, 과연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토가 죄인이 아니느냐?"라는 의미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스스로의 행위가 단순히 자국의 입장에서만 정당화되는 것이 아닌, 한일 양국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을 밝힌 것이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는 1910년 당시 재판과정에서 작성된 공판시말서에서 잘 드러난다.

질문: 그대는 무슨 이유로 이등(이토) 공을 살해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답변: 명치39년(1906년) 이등이 한국에 통감으로 와서부터 5개조의 조약을 만들어 각의에 회부하고 6대신을 강제로 동의케 하였고 특히 외부대신의 부서 같은 것은 당시의 일본인 고문에게 시키고 인민이 동의했다고 황제께 상주했으나 황제는 국민의 여론을 들은 뒤에라고 말씀하시고 청허가 되지 않았지만 이등은 그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가 일본 천황에게 한국민의 희망에 의해 체결하였다고 말하고 세상에 발표하였다. 그것은 즉 한국과 일본의 황제폐하를 속이고 또 한국인민을 기만한 것으로 한국민의 늑적이다. 기타 공작이 통감으로서의 하는 방법은 모두 한국민을 분개케 하였으므로 모두 이등에 대해서는 적의를 품고 있는데 나는 그 5개조의 조약이 성립한 이래 이등을 살해하려는 생각을 일으키고 있었다.

명치43년(1910년) 2월 8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료이치(渡邊 良一)

판관 마나베 주조 (眞鍋 十藏)

전문

안중근은 독립운동가임과 동시에, 아시아가 단결하여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상을 지닌 아시아주의자였다. 또한, 한때 이토 히로부미를 좋게 평가했던 것도 한일 양국이 협력해야 한다는 아시아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그가 진술한 내용이나 감옥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내용으로 보면, 아시아주의가 허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왜곡하여 조선 침략의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주의자로서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의 군주인 일본 천황을 속여 한국과 일본의 진정한 우호 관계 수립을 망쳤다고 여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발상이다. 상술했듯 일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안중근을 매우 높이 평가하게 된 배경에는 순수한 감화도 있지만 이러한 아시아주의자로서의 성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주의가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마냥 좋은 쪽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질문: 그대는 한국의 전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답변: 1905년 러일전쟁에 즈음하여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 의하면 일본은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또 한국의 독립을 기하기 위해 러시아와 싸웠으므로 한국인은 다 감격하여 일본인과 같이 출진하여 활동한 사람도 있다.

또 한국인은 일본의 승리를 마치 자국이 승리한 듯이 기뻐하고 이에 의하여 동양의 평화는 유지되고 한국은 독립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등이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 5개조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것은 전의 선언과 반하여 한국의 불이익이 되었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불복을 칭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1907년 또 7개조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것은 통감이었던 이등이 병력으로 압박을 가하여 체결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국민은 일반으로 크게 분개하여 일본과 싸우더라도 세계에 발표할 것을 기했다. 원래 한국은 무력에 의하지 않고 문필로써 세운 나라이다.

명치43년(1910년) 2월 7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료이치(渡邊 良一)

판관 마나베 쥬조 (眞鍋 十藏)

전문

안중근이 최종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와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동양평화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재판은 마무리된다.

질문: 그러면 기타 그대가 흉행 목적에 관해 본건 심리중에 진술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이번 진술하라.

답변: 그것은 많이 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일본 사천만 한국 이천만 동포를 위해 또는 한국 황제폐하와 일본 천황에 충의를 다하기 위해 이번의 거사로 나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이미 수회 말한 대로 나의 목적은 동양평화문제에 있고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과 같이 한국으로 하여금 독립을 공고케 하는 것은 나의 종생의 목적이며 또 종생의 일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충류라도 일신의 생명 재산의 안고를 빌지 않는 것은 없다. 하물며 인간된 자는 그들을 위해서는 10분 진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등이 통감으로서 하는 짓은 입으로는 평화를 위한다고 말하나 실제는 그것에 반하고 있다. 과연 그 생각이 있었더라면 한일 양국인 사이에는 서로 격하는 곳이 없고 동국인된 관념을 가지도록 진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등은 통감으로서 한국에 온 이래 한국 인민을 죽이고 선제를 폐위시키고 현황제에 대하여는 자기 부하와 같이 압제하고 인민은 파리를 죽이듯 죽여버렸다.

원래 생명을 아끼는 것은 인정이지만 영웅은 늘 신명을 던져 나라에 진충하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등은 멋대로 타국인을 죽이는 것을 영웅이라고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십수만의 인민을 죽였지만 나는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에 있는 것 같이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여 한 · 일 · 청 3국이 동맹하여 평화를 부르짖고 8천만 이하의 국민이 서로 화합하여 점차 개화의 역으로 진보하고 나아가서는 구주와 세계 각국과 더불어 평화에 진력하면 시민은 안도하여 비로소 선전의 조칙에도 부응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등이 있어서는 동양평화의 유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이번 일을 결행하였다.

명치43년(1910년) 2월 9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서기 와타나베 료이치(渡邊 良一)

판관 마나베 쥬조 (眞鍋 十藏)

전문


또한 안중근은 한, 일 양국의 군주를 모두 존중하는 근왕주의자로서의 일면이 있었고 이토가 어디까지나 동양 평화를 주창하는 메이지 천황 밑에서 군주의 눈을 가리고 이득을 취하는 간신이라고 성토했는데, 이러한 측면이 메이지 유신의 근간을 이루는 존황사상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큰 호감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몇 번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황제는 선전조칙에서 한국의 독립을 견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으며[52]

또한 러일협약에도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53] 그런데도 이토 공한국의 군부를 폐하고, 사법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행정권도 넘겨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독립 운운하는 것에 반하는 것이므로 한국 황실의 존엄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말뿐입니다. 러일전쟁에서는 일본 청년 수만의 생명을 잃고, 한일협정 성립 과정에서도 다수의 인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이토 공의 정책이 xx(원문 불명)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악한을 제거했는데, 왜 과대한 처벌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지요. 마치 시쳇말에 '큰 도둑은 놓아주고 작은 도둑은 벌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인 줄로 압니다. 세인은 이토 공을 이십세기의 영웅이라든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면 실로 소인배의 간악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일관계(의 악화)등은 모두 이토 공의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어서, 탄환이 오고 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옛 속담에 "하늘에 따르는 자는 보답을 받고, 하늘에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러일전쟁의 조칙에 한국의 독립을 견고히 한다는 말이 있고, 이는 하늘의 뜻을 받은 것으로, 또한 일본 황제의 성의(聖意)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당시는 그 누구도 일본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승리를 얻었다는 것은, 즉 '하늘에 따라서 보답을 받았다'는 속담에 연원한 것입니다. 이토 공은 일본 황제의 성의에 반하는 정책을 행한 탓으로 이렇게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토 공의 행위는 너무 간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심을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거꾸로 반항심을 성립시킬 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습니다.

옥중 기록인 <청취서> 중 일부


단, 이런 시각은 침략자 일본 지배층의 본성이나 메이지 일본의 당시 형편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볼 수도 있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보수적인 안 의사는 전통적인 유교적 시각에서 양국의 군주를 바라보았고,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해서도 단순한 반란군이나 폭도로밖에 보지 않았다.


7. 오늘날의 안중근[편집]


  • 2009년 12월 1일에 대한민국 해군에 그의 이름을 부여 받은 214급 잠수함 3번함 '안중근함'이 취역했다. 독립운동가로는 2번째로 군함명으로 명명되었다. 첫 번째는 동급함의 네임쉽인 손원일함이다.

  • 인터넷 및 몇몇 책에서 의외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란 말을 안중근이 처음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 사이의 작자 미상의 글인 추구(推句)에도 나온다. 추구는 여러 책에서 좋은 글귀를 뽑아놓은 초학자용 한문 교재로, 원출전은 주지유의 《답야절문(答野節問)》에 수록된 사언구 "三日不讀, 口生荊棘; 三日不彈 手生荊棘" (3일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고 3일간 가야금을 타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다)이다.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 교양을 쌓지 않으면 언행이 거칠어진다(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 2009년 말부터는 삼익악기에서 안중근 기타를 제작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 2010년 3월 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 뉴스에서는 '그의 업적을 잘 모른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어떤 것이냐는 것에 대한 질문에 많은 학생들은 올바른 답을 적어냈으나 일부 학생들은 오답을 적어냈는데, 오답의 내용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54]', '진짜 의사다' 등이었다.

  • 2009년 10월 25일 KBS1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열린음악회'를 개시했으나, 2010년 3월 27일 공연 이후, 4월 4일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1에서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야외 주차장으로 녹화 방영할 예정이던 '열린음악회' 방영 중 콘서트 티켓에 '호암 이병철 100주년 기념'이라는 문구 삽입 논란이 퍼졌기에 네티즌의 부정적 시선이 일었으나 KBS가 그 문제에 대해 편집하려 하였고, 그런데도 그 프로그램이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결방됐다.

  • 2016년 3월 20일에 방영된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 하얼빈 특집에서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전야인 1909년 10월 25일부터 그가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1910년 3월 26일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기획을 방영했다. 치밀한 연출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1박 2일 역대급 에피소드라는 평가가 지배적.


  • 2016년 8월 15일 광복절 연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감옥에서 순국하였다고 잘못 발언하여 논란을 만들었다.# 안 의사가 순국한 감옥은 뤼순 감옥이다. 하얼빈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곳이다.

  • 중국 학자가 쓴 안중근 평전을 2010년 최서면 교수가 발견해서 널리 알렸다.[55]




  • 상술했듯이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 2월 14일인데, 이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2월 14일은 밸런타인 데이가 아니라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글과 기사가 올라오고는 한다. 다만 이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자세한 것은 각 항목 참고.

  • 서거 110주기를 기념으로 2020년에 한 사람이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기 기념 디오라마를 개인제작했다. 디오라마 제작에 쓰인 피규어는 위인 피규어를 제작하는 위세임에서 만든 안중근 의사 피규어라고 한다.

  • 2016년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는 안중근 광장을 조성했으며, 이곳에 유묵비를 세웠다.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팔달로 145에 위치한 풍년제과 본점에 안중근 장군 기념관이 있다. 강동오 대표가 그를 기억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며 전주 한국은행 주변에 세웠다가, 2022년 8월에 현 자리로 옮겼다.


  • 한국의 12인치 피규어 메이커 kumik에서 안중근 의사 피규어를 발매하기도 했다.#

  • 2023년에는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 백과에서 조선족이라고 표기해 논란이 됐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 다만 이는 오해인데 중국어에서 조선족(朝鲜族)은 중국 국적을 가진 한국계 소수 민족 뿐만 아닌 한민족 전체를 지칭하여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다만 안중근 이전에 논란이 되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윤동주 시인의 경우 중국 주도의 역사왜곡이 맞는데 왜냐하면 명확하게 중국 조선족(中国朝鲜族)으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7.1. 안중근 의사 기념 사업[편집]


1963년,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한 시인 이은상과 예비역 육군 중장 김홍일 등 발기인 15명이 '안중근의사숭모회'를 세운 후, 1970년에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4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남산공원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열어 의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과 명언 및 어록, 붓글씨로 된 휘호 등을 전시하게 되었다. 2010년 10월 26일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자리에 신관이 개장되었다. 남산공원의 기념관과는 별개로 중국에도 있는데 원래 표지석 정도만 세우려 했던걸 일본의 역사왜곡과 망언에 단단히 뿔이 나서 아예 하얼빈역에 기념관을 지어버렸으나, 2017년 사드문제 여파와 하얼빈역 확장공사 등을 이유로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옮겨 재개관 때까지 2년간 입주하기도 했다. 숭모회는 한동안 교육부 소관이었다가 1995년부터 국가보훈처로 소관업무가 이관됐다.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삼의사(三義士)의 묘역 안에 안중근 의사를 위한 가묘(假墓)가 따로 있었는데 이 가묘에는 공식 비석이나 유골이 안장되어 있지않은 빈 묘소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어서 국내로 운구될 경우 이 묘역에 공식 안장하게 될 예정이며 명칭도 '사의사(四義士)의 묘' 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는 관할 지역인 중동에 있는 근린 공원의 명칭을 안중근 공원으로 변경하고 공원 내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부천종합터미널 건너편에 있으며, 부천시청역 3번 출구에서 계속 직진하면 나온다. 원래 해당 동상은 2006년에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재중사업가 이진학이 하얼빈시 중양다제에 세웠으나, 중국 정부가 '외국인 동상을 불허한다'며 천으로 감싼 뒤 철거하는 바람에 이진학이 이를 보관했다가 2009년 9월 1일에 안중근평화재단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보내서 서울에 세우려 했으나, 국가보훈처의 반대로 무산되어 동월 3일 국회 헌정기념관 근처에 임시 전시한 뒤 현재 위치에 영구제막된 것이다.

2017년에 경기도 의정부시의정부역 근처의 공원에 안중근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동상은 중국 작가 최우가 만들어 민간단체 차하얼학회가 의정부시 당국에 기증했다. 그러나 부조 부분에 안중근 의사의 넷째 손가락이 멀쩡한 채로 찍히는 등 고증 오류가 상당한 데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동상 제작을 지시했다는 소문이 퍼져 시민단체 '버드나무포럼'이 진위 여부를 추궁했으나, 12월 안병용 시장이 해당 단체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다만 당시 담당공무원의 증언으로 2018년 12월 13일 들어 버드나무포럼 측이 무혐의 처분됐으나, 불법조형물 혐의는 기각됐다.

정작 플래그십 기념사업회인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윤치영, 이은상, 백두진, 정원식 등 역대 이사진들이 친일 혹은 권위주의 정권 부역자라 논란이 되었으며,[56] 총회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데다 도록 <대한민국 안중근> '일본해' 표기 등으로도 말이 많았다. 2000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추천인사 7명이 숭모회 이사로 추천되자 숭모회 측은 민주화운동 투옥경력을 '전과'로 취급하며 거절했다.

2003년 인터넷으로 숭모회에 가입한 회원 515명이 서울지방법원에 총회 소집을 요구하며 고소장을 냈고, '안중근의사숭모회 개혁을 추진하는 모임(개혁모임)'측도 기존 이사진 퇴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 및 안중근의사연구소도 성명서를 냈다.

이에 숭모회 측은 본래 환영했던 문제의 회원 515명을 '정식 회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태도를 바꿨고, 도록 '일본해' 표기도 윤정식 인하대 교수가 편집한 것이며, 당시엔 비용 문제로 개정판을 못 냈다고 해명했다. 총회 관련해서도 회원 부족 및 헌금운영이란 이유를 들어 안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윤치영 등 일부 이사들의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안중근 의사는 이념가가 아니라 평화주의자라 하여 친일 행위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7.2. 안중근을 기리는 절[편집]



7.2.1. 일본 미야기현 대림사[편집]


미야기현 쿠리하라시에 위치한 대림사(大林寺)[57]가 안중근을 기리고 있다. 이 절을 건립하였던 사람은 안중근과 친분이 있는 일본군 헌병이자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이다. 지바는 안중근과 대화하면서 그에게 감화하였고, 사형 불과 2시간 전인 오전 8시에 기상한 안중근은 지바에게 문방사우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서 유명한 글귀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란 글을 써 주었다. 이후 지바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안중근을 기리는 사찰을 세웠고, 본인도 사망한 뒤 유족들이 이 절에 위패를 보관하였다. 안중근의 글은 안중근 탄생 100주년인 1979년에 지바의 유족들이 한국에 반환하였고 대신 이 글을 본뜬 비석을 절 내에 세웠다. 대림사에서는 매년 안중근의 추도식을 여는데 지바의 유족들뿐만 아니라 미야기 민단과 센다이 주재 한국 영사관에서도 참석하고 있다.

찾아가는 방법은 도쿄역이나 센다이역 등지에서 도호쿠 신칸센을 타고 쿠리코마코겐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7.2.2. 전라남도 장흥군 해동사[편집]


한국 전남 장흥군에도 안중근을 모시는 해동사라는 사당이 있다. 1955년에 지어진 사당으로, 안중근 기념시설로는 최초, 사당으로는 전국 유일이다. 2015년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로, 2018년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동사 문서 참조.


8. 그 외[편집]


  • 체포당한 후 일본 법원에서 공판 도중에 자신의 상관으로 김두성을 거론한 적이 있다. 일본은 당연히 눈이 뒤집혀서 이를 잡으려 찾아다녔지만, 결국 누군지 찾지 못했다. 문제는 현재도 그가 누군지,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

  • 20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재판권을 고종이 일본 법정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고 러시아 거류 한인들에게 변호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밀사를 보냈다는 내용의 일본 기밀 문서가 이태진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책임연구원 신운용은 다른 방계 사료로 그런 사실이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 안중근 의거를 병탄의 기회로 노리고 있던 통감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점, 오히려 책을 잡을 구실임에도 일제 외무성이 고종 배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 고종과 황실이 안중근의 의거를 부정적으로 보았다는 점 등에서 성립될 수 없는 가설이라고 반박했다.[58]
  • 망포초등학교 도서관 이름이 안중근관이다.
  • 안중근 의사를 기념한 시그니쳐 일렉기타도 출시되었다. 기타 바디에는 "국가안위 노심초사" 등을 비롯한 명언이 한자로 적혀 있으며 지판에는 손도장 인레이가 자개로 박혀있다.링크

  •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으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2022년에는 전 일본 총리대신 아베 신조야마가미 데쓰야에 의해 사제 총기로 피살당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는데, 이후 야마가미가 사회 부적응자는커녕 모범시민에 가까웠던 점, 오로지 통일교에 대한 복수심으로 저격을 감행한 점 때문에 재평가를 받자 일부 일본,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 반쯤 장난으로 야마가미를 레이와의 안중근으로 부르기도 했다.#[59]

  • 200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시작한 신발 브랜드 그램(Gram)이 훗날 티셔츠를 출시했다. 이 의류의 왼쪽 가슴 부위에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Truth wins over distortion of history)이 찍혔다. 역사 알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 대만의 사진 수집가이자 칼럼니스트 쉬충마오(徐宗懋)가 안중근의 사진(1910년 3월 25일)을 소개했다.


8.1. 장군인가 의사인가, 공식 칭호 논란[편집]


해당 문서 참조. 안중근 의사(義士) / 장군의 호칭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다.

일부 '의사'로 지칭하는 것이 안중근의 업적을 폄하하기 위해 일본이 뒷작업을 한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사실이다. '의사'란 무력(武力)으로써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의사'와 '장군' 모두가 안중근의 업적을 기리는 칭호다.

'장군' 칭호의 유래를 살펴보면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되었을 때 자신의 신분을 '조선 의용군 참모 중장'으로 밝힌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도 안중근은 북간도에서 김두성과 이범윤의 도움을 받아 일으킨 의병 내에서 참모 중장의 직책을 맡았다.

안중근은 일제법정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일관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60] 를 고려하여 장군 칭호를 선택할 필요성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의사'와 '장군'의 호칭 문제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는지에 대한 차이에 불과할 뿐 어느 쪽을 사용하건 안중근의 업적을 결코 폄하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하겠으며, 사실 이 항목 또한 '의사'라는 표현이 격하하는 표현이라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른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어느 한 표현만 맞는 표현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민간에서는 "의사"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는 편이며, 군 내부에서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주로 쓰고 있다.


8.2. 관련 어록[편집]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1910년 3월 유언.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 사형 당일 1910년 3월 26일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 휘호.[61]

이후 대한민국 국군의 슬로건이 된다.


'사군천리(思君千里) 망안욕천(望眼欲穿) 이표촌성(以表寸誠) 행물부정(幸勿負情)'

천리 밖 임금을 걱정하니 바라보는 눈이 허공을 뚫으려 하네. 작은 충성을 표하였으니 저의 충정을 잊지 마소서.

- 1910년 2월에 쓴 유묵 가운데 하나.


平生營事只今畢 /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死地圖生非丈夫 / 죽을 땅에서 살려 하면 장부가 아니리.

身在三韓名萬國 / 몸은 삼한에 있어도 이름은 만국에 떨쳤소.

生無百歲死千秋 / 살아서는 백 년을 못 채워도 죽어 천년을 살리라.

-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8.3. 루머와 진실: 어머니의 편지?[편집]


인터넷 등 미디어를 통하여 안중근 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 여사가 옥중에 있는 아들 안중근에게 보냈다며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이 편지는 심지어 MBC 무한도전 등을 통해서도 소개되며 미디어를 통해 여러 번 반복 인용되고 있으나, 이러한 편지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참고할 만한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는 1994년 일본 다이린지(大林寺, 대림사) 주지스님인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이 펴낸 『わが心の安重根: 千葉十七・合掌の生涯』(내마음의 안중근: 치바 도시치-합장의 생애)라는 책이다. 이 책은 사이토가 안중근 수감 당시 뤼순 감옥의 담당 간수였던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의 전언을 엮어 펴낸 것이다. 즉 안중근 또는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치바가 듣고, 치바의 말을 다시 사이토가 책으로 엮은 것인데, 이 책에서는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다음과 같이 "말"을 전했다고 한다. (아래는 일본어 원문의 한국어 직역이다.)

공소(控訴)[62]

라든가 하지 말고, 바로 복역하는 거예요. 그대는 한국인으로서 조국을 위해서 의거를 행한 것이기에, 공소를 하면 생명은 길어지게 되지만 큰 수치가 됩니다. 만약 그대가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해서 공소하려한다면, 이 어미의 교육은 대체 뭐였는가 라고 웃음거리가 될거요.


위 책에서 위 전언이 어머니의 '편지'라고 한 사실은 없으며, 무한도전 등에 소개된 마지막 두 문장은 있지도 않다. 특히 사형 선고 후의 전언도 아닌 '구형' 후의 전언이라고 하였으며, 조마리아 여사의 말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안중근에게 전달된 것인지는 나타나지 않는다.[63] 만일 치바가 위 말을 들었다면 안중근 또는 그에게 말을 전달한 누군가로부터 다시 듣고 그것을 책의 저자인 사이토 스님이 다시 듣고 펴냈다는 것인데, 그 정확도나 신빙성은 미지수이다.

둘째는 당대의 보도로서의 가치있는 황성신문의 1909년 12월 28일 자 보도다.

安重根(안중근)의 弟(제) 安恭根(안공근) 安定根(안정근) 兩氏(양씨)가 旅順(여순)에 渡去(도거)하얏다 함은 旣報(기보)하얏거니와 獄裡(옥리)의 安重根(안중근)은 兩弟(양제)의 來到(내도)함을 聞(문)하고 平凡(평범)한 言詞(언사)로 「졔가, 나를, 보랴 하면, 뵈이기는, 하려니와, 나는 決(결)코, 보고십지, 아니하다」하더니 及其(급기) 監吏(감리)의 許可(허가)를 得(득)하야 對面(대면)함에 至(지)하야는 安恭根氏(안공근씨)가 先(선)히 失聲哭泣(실성곡읍)함을 見(견)하고 以若(이약) 安重根(안중근)의 肝腸(간장)으로도 心思(심사)를 抑制(억제)치 못하야 颯然(삽연)히 士氣(사기)되며 顔色(안색)에 現(현)하더니 少頃(소경)에 三人(삼인)이 强(강)히 靜穩狀態(정온상태)를 回復(회복)하야 二弟(이제)가 爲先(위선) 母(모)의 所寄(소기)하는 十字架(십자가)를 奉(봉)하야 兄(형)의 頭上(두상)에 置(치)하고 母(모)의 傳言(전언)을 述(술)하야 曰(왈)「母(모)는 現世(현세)에셔 汝(여)와 再會(재회)하기를 期望(기망)치 아니하노니 汝(여)는 今後(금후)에 神妙(신묘)하게 刑(형)에 就(취)하야 速(속)히 現世(현세)의 罪惡(죄악)을 洗(세)한 後(후) 來世(내세)에는 반다시 善良(선량)한 天父(천부)의 子(자)가 되여 再(재)히 出世(출세)하여라, 汝(여)가 受刑(수형)할 際(제)에는 神父(신부)[洗禮(세례)를 授(수)한 外國宣敎師(외국선교사)]가 汝(여)를 爲(위)하야 特(특)히 遠路(원로)에 跋涉(발섭)하야 汝(여)의 代身(대신)으로 懺悔(참회)를 捧(봉)할 터이니 汝(여)는 其時(기시)에 神父(신부)의 手下(수하)에셔 敎式(교식)에 依(의)하야 從容(종용)히 現世(현세)를 去(거)하여라」함에 安重根(안중근)은 「盟誓(맹세)코 敎式(교식)에 依(의)하야 信徒(신도)의 資格(자격)과 臣子(신자)의 道理(도리)에 醜態(추태)를 現(현)치 아니하고 最後(최후)를 遂(수)할 터이니 我母主(아모주)는 安心(안심)하옵소셔 」 答辭(답사)를 陳(진)하고 其後(기후)에 二弟(이제)가 嫂氏(수씨)의 母子(모자)를 帶歸(대귀)할 事(사)에 對(대)하야 意見(의견)을 問(문)하되 安重根(안중근)은 冷然(냉연)히 「區區(구구)한 妻(처자)는 汝等(여등)이 從便處理(종편처리)하라」 答(답)하얏다고 大阪每日報(대판매일보)에 揭(게)하얏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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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 1909년 12월 28일 기사 #


위 기사는 안공근, 안정근 두 동생이 안중근을 면회하면서 안중근의 머리 위에 십자가를 얹고 조마리아 여사의 말을 전달한 상황을 적고 있는데, 해당 부분(위 굵은 글씨 부분)만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아니하노니, 너는 이제로부터 신묘하게 형(刑)을 받아 속히 현세의 죄악을 씻은 후 내세에는 반드시 천주의 착한 자녀가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너라.[64]

네가 형을 받을 때에는 신부님께서 너를 위하여 특히 멀리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가서 너를 대신하여 참회의 기도를 바칠 것이니, 너는 그때에 신부님의 손 아래에서 천주교 예식에 따라 조용히 현세를 떠나거라."


이에 대한 안중근의 답변은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맹세코 천주교 예식에 따라 (천주교) 신도 된 자격과 (임금의) 신하 된 도리에 반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고 최후를 맞이할 것이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옵소서."


위 기사를 보면 사이토 스님의 책과는 정반대로 항소 이야기는 존재하지조차 않는다. 기사 자체가 사형선고를 받기 한참 전인 1909년 12월 자 보도이니 항소 여부와는 관계가 있을 턱이 없다. 조마리아 여사가 안중근의 수의를 지어보낸다는 말 또한 없다. 다만 사형을 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당시부터 포기한 듯,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는다"는 말은 있으나 '천부'라는 단어의 한자표기(天父: 천주교의 하느님 아버지)나 전언의 면면을 보면 천주교적 부활 신앙에 대한 기원과 함께, 신부(니콜라 빌렘)를 보내니 반드시 천주교 예식에 따라 최후를 맞으라는 당부가 있을 뿐이다. 이 전언 또한 어머니의 '편지'가 아니라 안공근, 안정근 두 형제가 직접 가서 어머니의 말을 전했다는 것에 불과하며, 기사 자체에 따르더라도 황성신문 기자가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라 '오사카매일신문'의 보도를 인용했다는 것이므로 그 신빙성과 정확도는 따로 판단되어야 한다.#

결국 미디어에 떠돌고 있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것의 내용은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출처도 완전히 다르고 구체적인 시기와 상황에 큰 차이도 있는 두 가지 소스, 즉 사이토 다이켄의 책에 기재된 '항소'에 관한 전언과, 황성신문에 기재된 '신부를 보내니 천주교 예식에 따라 최후를 맞으라'는 전언을 한데 뒤섞고, 두 가지 전언에는 전혀 없는 '수의'에 관한 언급까지[65] 적당하게 덧붙이는 등 누군가가 그럴 듯하게 각색한 내용이 조금씩 변형되면서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반복 복제되고 있는 것이므로, 해당 내용을 그대로 원용함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2016년 안중근 평화연구원에서는 미디어에 떠돌고 있는 위 편지라는 것은 사료상의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안중근의 법정 변호를 이승만이 거부했다거나,[66] 안중근의 총에 실탄 1발이 남아있었는데 자결용이었다거나 하는 말도 있으나, 전부 낭설이거나 그냥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내용을 복제생산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8.4. 관련 단체[편집]




9. 가족, 친인척[편집]




10. 관련 사건 사고[편집]




11. 대중매체에서[편집]



11.1. 소설[편집]


  • 이문열의 소설 <불멸>이 안중근을 묘사한 바 있다. 다만 소설에서는 안중근이 다소 낮춰진 감이 있다.

  •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데 실패했다. 이후 역사가 바뀌어서 한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일본화가 되었고 현대에서는 소수의 운동가만 독립을 위해 싸울 뿐 계속 일본의 식민지인 걸로 시작된다.

  • 2022년 소설가 김훈이 그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소설 <하얼빈>을 출간했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 첫 등장은 대한민국의 부사관으로 이범윤의 군대에 잠입하는 것으로 나와 후에 이범윤에게 귀순할 것을 종용했다. 후에 주 소련 대사에 올라 부하린과 절친한 관계를 맺지만, 민족주의자로서 공산주의와 자신이 잘 맞지 않음을 체감한다. 모스크바 핵 투발 직전 소련에 경고하고 떠나는 것으로 등장 종료.


11.2. 만화[편집]





11.3. 연극[편집]


  • 1981년 <한만선>에서는 배우 최상설이 연기했다.

  • 1996년 <제국의 광대들>에서는 배우 차기환이 연기했다.

  • 1998년 <대한국인 안중근>에서는 배우 김갑수가 연기했다.

  • 2005년 <안중근과 이등박문>에서는 배우 원석연이 연기했다.

  • 2010년과 2014년 <나는 너다>에서는 배우 송일국[67]이 연기했다.


11.4. 게임[편집]


  • 모바일게임 <영웅>에서는 안중근으로 등장한다.

  • 시드 마이어의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에서는 위대한 스파이(Great spy) 위인으로 출연했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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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드라마[편집]


  • 1979년 KBS 8.15 광복 34주년 특별기획드라마 <대한국인>에서는 배우 김흥기가 연기했다.

  • 1984년 MBC 특별기획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한영수가 연기했다.

  • 1990년 KBS1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배우 안병경이 연기했다.

  •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특별기획드라마 <대원군>에서는 배우 박상원이 연기했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특별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한범희가 연기했다.

  •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서는 배우 이일재가 연기했다.

  • 2004년 일본 드라마 <시공경찰 벡카 시리즈>에서는 에피소드에서 안중근이 등장한다. 시공경찰로 온 주인공이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앞둔 안중근과 대화를 한다. 안중근은 한일병합이 된다는 것에 충격을 먹지만[69] 주인공의 "앞으로 당신의 민족은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한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민족은 다시 일어나 부활합니다."란 위로로[70] 마음이라도 놓고 죽을 수 있게 된다.[71] #


11.6. 영화[편집]




  • 1979년 개봉한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서는 배우 리인문이 연기했다.



  • 2022년 개봉한 영화 <영웅>에서는 배우 정성화가 연기했다. 뮤지컬 <영웅>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 2023년 개봉할 영화 <하얼빈>에서는 배우 현빈이 연기했다.


11.7. 뮤지컬[편집]


  • 안중근 의사의 삶을 토대로 만든 국내 창작 뮤지컬인 <영웅>에서는 정성화, 안재욱, 이지훈, 류정한, 신성록, 양준모, 민영기, 임현수 등이 연기했다. '안중근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2009년 10월 26일 후손들의 참관하에 초연되었다. 해당 뮤지컬은 뛰어난 완성도로[72] 2010년 6월 7일 제4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 창작 뮤지컬상을 수상했고 카리스마있는 연기로 안중근 역을 훌륭히 해낸 주연 정성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2년 영화 <영웅>의 원작이다.

  • 일본에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극이 있다.


11.8. 다큐멘터리[편집]




https://youtu.be/Bar1N0Ip75Y


12.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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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명은 안응칠(安應七), 일명은 안다묵(安多默, 多默은 세례명인 Thomas의 음차이다.)[2] 안타깝게도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해 가묘이다. # 유해는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 참판공파(1파)-서령공파 30세 근(根) 항렬.[4] 단지(斷指)를 하여 약지의 첫 마디가 없이 찍혔다.[5] 세는 나이를 사용해서 32세가 나왔다.[6] 이명 안태훈(安泰勛).[7] 족보명 안태건(安泰建).[8] 1895년(고종 32) 11월 24일 신천군수에 임명되었던 적이 있다.#[9] 여담으로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격파할 당시 일본 포로들을 잡았었는데, 포로들이 자비를 호소하자 안중근은 그들을 기꺼이 풀어주었다고 한다. 당연히 참모들은 그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지만, 안중근은 그런 그들에게 "그렇게 하자면 4천만 일본 국민 모두를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 있냐. 정의의 군대는 정의롭게 싸워야 한다"고 반문하자 아무도 반박을 못하였다고 한다.[10] 유동하 친척의 증언이다.[11] 네이버 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12] 이 총알 한 발을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 의사는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 하면 모순이라는 것.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1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13] "Korea Hooray(Hurrah)!"로 보인다[14] 안중근이 근왕(勤王)주의자인지 공화주의자인지는 아직까지 논쟁거리이다. 즉, 그가 대한 제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 아니면 국체와 상관없이 한국 만세의 의미로 외쳤는지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15] 이 사람은 아래의 15가지를 듣고 그대는 정말 깊은 뜻을 품고 행동했다면서 사형 받는 일은 없게 해 보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번째 심문까지는 점잖았던 태도가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8차 심문부터는 고압적이고 험하게 바뀌었다.[16] 메이지 덴노가 붕어하고 다이쇼 덴노가 즉위한 해는 1912년이므로 의거가 일어난 1909년에는 연호를 붙인 '메이지 덴노'가 아니라 현임 군주라는 의미의 '금상 폐하'로 불렸다. 연호를 붙인 건 죽은 이에게 붙이는 시호에 해당하므로 생존 덴노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원문을 적어놓은 공사관 기록 홈페이지에는 메이지 덴노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17]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고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 사인은 천연두지만, 에도 막부 측의 암살 또는 그가 토막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 측의 암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사주를 받은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메이지 덴노 대역설 문서 참조. 다만 이 음모론은 제법 유명한 카더라이기는 하나 사실로 밝혀진 바는 없는 설이므로 주의.[18]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 주장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한다. 하지만 삼국 화폐 통합은 어디까지나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19]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 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20] 안중근 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21]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맨발의 겐, 왕도의 개의 내용이나 혹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후세 다쓰지, 가네코 후미코, 현재도 있는 일본 공산당처럼 일본 내에서도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주류가 아니었을 뿐이지 언제나 있었다. 실제로 김두봉조선의용대 설립에 있어서 중국국민당 장제스를 설득한 이 역시 국공합작에 참여하고 있었던 일본인이었다. 또 딱히 일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알아두면 좋은 일본사 중 일면은, 메이지유신 당시 유신반대세력(전통유지파, 온건개화파)은 현대의 일본중심지들이 아닌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이 많았고, 그래서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이 개화된 후에도 정부의 뜻을 별로 지지하지 않고 있고, 지금까지도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부분이다.[22] 단, 공판 기록에서 보이는 안 의사의 주장에는 침략국인 일본 자체에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한국에서의 지명도가 높을 뿐인 역적 이토에게 모든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상당히 짙게 배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실제 이토만 죽으면 통감정치가 폐지되고 보호정책이 없어질 거라고 믿냐는 검사의 질문에 안 의사는 그렇다고 대답했으며, (군주인 메이지 천황과 인민들의 눈을 가리는) 이토만 없어지면 일본 인민들이 자각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현실성이 매우 희박한 이야기다.[23] 다만 테러 문서에도 나오듯 사전적 의미의 테러가 맞다. 독립운동가들 본인도 행위로 볼 때, 테러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후대에 테러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면서 정치적 논란이 된 것 뿐이다.[24] 이토 히로부미가 성인 수준으로 찬양받던 당시에는 안중근이 빼도박도 못할 악인으로 취급받았지만, 최근 들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각종 문제와 병폐가 드러나면서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 여론도 생기고 있다. 물론 음 이토 그놈 잘 죽었다 수준은 아니고 안중근은 조선인이니까 죽일 만하긴 했네 수준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것이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 일본은 물론 현대의 일본 정치제도와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별개로 이토 히로부미 또한 조선의 병합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조선인의 반발에 대해서는 일본인들도 인지하고 있기에 할말이 없는 것.[25]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7~161[26] 군민병은 적의 접근으로 민병, 의용병단을 조직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적과 저항하는 주민들을 의미한다. 이때 적의 접근이란 적어도 무기를 들고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적의 공격을 의미하는데, 현실적으로 이토의 방문을 적의 접근이라고 볼 수 있으려면 위의 교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27] 명순구,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접점에 대한 법적 평가 - 일본인이 안중근을 흉한으로 부르기 어려운 법리적 이유", P.153~154[28] 안중근을 도운 '죄'로 우덕순에게는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이날 법정은 300명의 방청인을 받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은 안병찬, 안정근, 안공근뿐이었고 러시아인 조금을 빼면 다 일본인이었다.[29] 원래는 3월 25일 집행 예정이었으나 한국의 의병 항쟁이 거세짐과 동시에 순종 황제의 탄신일이라 하루 늦춰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시 대한 제국이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황제 탄신일 따위는 씹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대한 제국은 외교권, 경찰권, 사법권, 군대를 뺏긴 상태였지,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다. 대한 제국이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된 날은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일이다. 그리고 일제는 일제 강점기에도 구 대한 제국 황가(경술국치 이후는 이왕가)의 권위를 이용하기 위해서 일본 황가에 준하는 고위 귀족의 지위로 인정할 정도였으니 순종의 생일을 챙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망국의 왕족을 후하게 대접해서 내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민중을 어르고 반항을 막는 좋은 방법이었고, 이러한 길일(吉日)에는 보통 사형과 같은 흉(凶)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인류 역사의 관습이었다.[30] 안중근 의사 순절한 중국 여순 형무소 취재[31]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32] 당시에는 '종부성사'로 불리다가 20세기 중후반 이후 병자성사로 병칭. 사제는 죽을 위험에 처한 천주교 신자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고해성사를 먼저 베푼 후 뒤이어 병자성사를 집전한다.[33] 조각가 고영환 토마스 作.[34] 안분도(세례명인 베네딕토를 한자로 음차하면 '분도'다)로도 불린다. 안중근은 사형 직전 장남 분도를 천주교 사제로 키워달라고 부탁했으나, 장남의 돌연한 죽음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35] 김구의 장남[36] 동학군을 이끌다 관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김구를 보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를 계기로 안중근과 김구는 안면이 있었는데, 이 둘은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37] 안중근의 순국 뒤에 많은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에서는 그녀를 독립 운동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렀다. 200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 분의 무덤은 동생 안정근과 함께 프랑스조계 징안쓰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했는데,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터에 구광백화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 백과 참조)[38]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만국공묘는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무참히 파괴되어 푸둥공원에 외국인 묘지를 하나 더 조성해 남은 유해들을 이장했다가 다시 만국공묘로 재이장했다.(문화일보 기사) 안중근 의사는 일제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고, 어머니인 조마리아는 도시 개발과 문혁 등 어수선한 상황으로 묘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한민족 후손들에게 큰 한이다.[39] 주로 중국에서 살았으나 러시아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40] 「일제 시대의 여성 독립 운동가」, 2014년 5월, 국가 보훈처[41] 2014년 MBC의 다큐멘터리 '안중근 -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안준생의 퍼포먼스가 일제에 의해 꾸며진 퍼포먼스였다고 주장했다. 안준생은 이토 분키치에게 영어로 "네 아버지는 잘못했고 우리 아버지는 희생되었다"고 일갈했는데 일제는 안준생이 사죄를 했다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당사자들도 아니고 후대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에 지나지 않으며, 당대에 기록된 사료나 문헌 상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인척 관계였던 김구가 안준생의 발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살해해야 한다고 날뛰었을리가 만무하다.[42] 2016년 3월 23일 방송한 지식채널 E의 '평화사상가 안중근'편에 따르면 1910년 2월 17일, 안중근이 히라이시 뤼순 고등법원장에게 꼭 완성하고 싶은 책이 있으니 형의 집행은 단 한달만 늦춰달라고 요청하자, 법원장은 여러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해주겠다고 하였으나, 처음 계획대로 3월 26일에 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계획대로 집행한 이유는 애초에 약속을 지킬 의향이 없었음과 상부의 압력으로 갈린다.[43]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전에 부친을 잃었던 안중근도 생전 자신의 부친과 친형제처럼 동문수학했던 박은식을 부친처럼 모셨다. [44] 진품명품에서도 나왔듯이 교과서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잘 쓴 글씨는 아니다. 그러나 서예는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 집안이라면 필수 소양이었는데 이는 서예를 일종의 인격수양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히려 글씨가 얼마나 멋들어지게 쓰여졌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어떤 사람이 그 글씨를 썼느냐 하는 부분이다. 이완용이 기교적인 면에서 글씨를 굉장히 잘 썼지만, 지금 그의 작품들은 인사동에서 몇 만원, 몇십만원 선에 겨우 거래되는 수준이다.[45] 이는 온건론자 라는 말을 '병합 반대자'로 왜곡 해석하거나, 혹은 이토가 병합을 반대했다는 왜곡이 불러일으킨 오해이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강경파들에 비해 원칙적인 합병을 주장한 온건파인 것은 사실이다.[46] 기념관 설립도 박정희가 지시했다. 비용은 국민의 모금으로 충당했다.[47] 비석은 1980년 세종상사 조규술 사장이 헌납했다. 그런데 民族精氣가 아닌 '民族正氣'라고 오기돼 있어 논란이 됐다.[48] 하루키는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 과거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개념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국내 신문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인터뷰도 자주 하는 사람.[49] 설상가상 이토 히로부미는 "남자는 배꼽 아래론 인격이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웅호색이란 식의 쉴드질도 불가능하다.[50] 일제시기만 해도 허황되긴 했으나 조선과 중국, 심하게는 인도까지 먹으려고 한 작자였기에 평이 높았지만 정작 목적을 위해 일으킨 전쟁이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인식이 바뀌었다. 풍신수길 사망과 동시에 다이묘들이 초고속 철수를한건 다 이유가 있다.[51] 사실 이토가 고메이 덴노를 시살했다는 것은 루머에 가깝다. 고메이 덴노의 공식적인 사인은 천연두였지만, 이후에도 독살설 루머가 돌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용의자로 지목되는 인물로는 이와쿠라 토모미였으나 조선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로 알려졌다.[52] 조칙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제국의 무게를 한국의 안전에 두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닐지라. 이는 양국 누대의 관계에 의한 것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존망은 실로 제국 안위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니라. 그러한데도 러시아는 그 청국과의 조약 및 열국에 대한 여러 차례의 선언도 무시하고 여전히 만주를 점거하고 갈수록 그 발걸음을 굳건히 하여 드디어 이를 병탄하려 하는지라. 만약 만주를 러시아가 영유케 한다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해도 의미가 없으며, 극동의 평화는 바랄 수가 없게 될 것이라."[53] 단, 포츠머스 협약은 일본이 한국을 사실상 속국화, 병탄하는 것을 패전한 러시아가 묵인하는 협약이지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하는 협약이 아니다. 여기에서 안중근은 다소 논리상의 무리수를 두고 있다.[54] 사실 이것도 틀린 내용이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물통 폭탄이고, 도시락 폭탄은 자살용이었다. 그러나 자살 시도에 실패하고 체포된 것이다.[55] 최서면 교수는 안중근 연구의 1인자로 알려졌으나 실제 권위자는 신운용 박사다.[56] 해당 논란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등 네임드급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들도 겪는다. 해당 기사의 윤봉길기념사업회 측 견해처럼 원칙적으로 독립운동가 출신이 기념사업회를 꾸려야 하지만 재정과 시간, 정치권과의 관계까지 전부 신경써야 해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고, 정치인이 회장을 맡으면 예산 지원을 받고 정부 역점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기도 하다.[57] 일본어 발음으로는 다이린지(だいりんじ).[58] 여기에는 안중근이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자신의 배후로 지목한 대한 의군 총대장 김두성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태진은 김두성을 고종 황제 자신으로 지목했지만 신운용은 이를 반박하고 김두성은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출처: 신운용 「한국의 안중근 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둘)」 《남북문화예술연구》제11호, 2012년). 이보다 한참 전인 1969년에 조동걸 춘천 교육대 교수(현 국민대 명예 교수)는 「안중근 의사 재판 기록상의 인물 김두성고」(《춘천교대 논문집》7, 1969년)에서 김두성은 유인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59] 여담이지만 안중근에게 저격당해 죽은 이토 히로부미도 일본 총리를 지냈었다.[60] 이쪽이 재판에서는 더 유리하고 정당성을 갖는다. 민간인이 통치자를 살해한 것과 군인이 적장을 처치한 것 중에서는 단연 후자가 정당성 면에서는 우월하다.[61]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에게 사형 집행을 알린 간수였는데 소식을 알린 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안중근이 써준 글이 바로 이 글이라고. "나에게 미안해 하지 마라. 당신이 하는 그 행동은 군인으로써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라는 의미라고.(2016년 3월 20일 1박 2일 하얼빈 특집 중 소개) 즉 이 문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대를 이해한다는 계기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다.[62] 항소의 일본법상 용어다.[63] 또한 위 책의 한국어판에서는 일본어 원문을 심히 비틀고 윤색한 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은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 말할 수 있으리 ...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라는 원문에 있지도 않은 문장을 첨가했는데, 이것이 인터넷상에 어머니 편지에 관한 낭설이 만들어지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64] 원문상 '천부'란 '신분이 낮은 사내'를 말하는 '賤夫'가 아니라 '天父'로, 천주교에서 말하는 '하느님 아버지'(삼위일체 중 제1위)를 뜻한다. 즉, 조마리아 여사는 불교적인 윤회사상이 아니라 천주교에서의 부활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65] 일본에서는 형무소장이었던 구리하라 사다키치의 아내가 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66] 이승만이 장인환, 전명운 의사에 대한 재판 당시 통역을 거부한 사건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박사다. 석사학위는 하버드에서 역사, 정치, 경제학을 수강해 받았다. 프린스턴에서 국제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국제법을 전공했을 뿐 체계적으로 법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변호사 자격이 없으니 법정 변론은 할 수가 없었다(미국은 미국 법조인 협회라 불리는 'American Bar Association' 기관이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변호사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67] 친일파 의혹을 받는 인물이자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 1인 2역.[68] 문명4는 시대에 따라 캐릭터들의 옷이 바뀌는데 문제는 이게 일괄 적용이다. 고대, 중세 스파이의 옷이 닌자복이기 때문에 스파이들이 산업 시대에 옷 갈아입기 전까지는 닌자 안중근이라는 괴랄한 조합을 볼 수 있다.[69]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했음에도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가 죽었음에도 병합이 된다는 것에 자신도 모르게 시공경찰의 양팔을 힘을 주며 움켜쥘 정도.[70] 원래 시공경찰들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과거에서 하면 안 되지만 안중근이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일제의 추악함(이 곳 설정은 또 다른 암살자로 일본인이 있었지만 안중근을 잡아 바로 사형시키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 때문에 미래에 있을 진실을 이야기해준 것.[71] 이를 알려준 시공경찰 역시 미래 접촉 금지법을 위반한 것에 처벌을 받아야 했을 터지만, 조직에서 안중근의 처형까지 확인한 후임에도 그들도 그냥 넘어간다.[72] 부실한 완성도를 애국 마케팅으로 커버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무대 연출이나 음악 면에서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주어 당당하게 체면을 지켰다. 한국에서 드물게 성공한 대형 창작 뮤지컬인데 맹목적인 국수주의로 기울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을 추구하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너무 미화한거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