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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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성공회 교구
파일:대한성공회.png
한국관구
서울 · 대전 · 부산
파일:서울교구문장.png
서울교구 산하
북한
{{{-2 {{{#fff ※ 밑줄: 관구장의 교구
※ 윗첨자: 선교교구}}}}}}


파일:대한성공회.png
역대 성공회 한국관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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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성수
시몬
주교
서울교구장
2대
김재헌
분도
주교
부산교구장
3대
정철범
마태
주교
서울교구장
4대
정철범
마태
주교
서울교구장
5대
윤환
바우로
주교
대전교구장
6대
정철범
마태
주교
서울교구장
7대
이대용
요셉
주교
부산교구장
8대
신현삼
안드레
주교
대전교구장
9대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
서울교구장
10대
윤종모
솔로몬
주교
부산교구장
11대
김근상
바우로
주교
서울교구장
12대
김근상
바우로
주교
서울교구장
13대
김근상
바우로
주교
서울교구장
14대
김근상
바우로
주교
서울교구장
15대
박동신
오네시모
주교
부산교구장
16대
유낙준
모세
주교
대전교구장
17대
이경호
베드로
주교
서울교구장


♱ 대한민국의 성공회 교구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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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대한성공회|한국관구]]}}}
파일:대한성공회.png 관구장
파일:서울교구문장.png서울교구장
파일:대한성공회.png 북한선교교구장

파일:대전교구문장.png 대전교구장
파일:부산교구문장.png 부산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유낙준 모세
박동신* 오네시모
{{{-2 {{{#fff ※ *표 친 주교는 가장 먼저 주교품을 받은 선임주교를 뜻한다.
※ 북한선교교구는 정식교구가 아닌 선교교구로서 서울교구에 종속되며, 교구장은 서울교구장이 겸직한다.}}}}}}




대한성공회
大韓聖公會 | Anglican Church of Korea

파일:대한성공회_관구(수정).png
영문명칭
Anglican Church of Korea
한문명칭
大韓聖公會
약칭
성공회[1]
설립연도
1890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주보 성인
성 니콜라
관구장[2]
제17대 이경호 베드로 주교[3]
교무원장
최준기 베드로 사제
성자직원 의장
오동균 키프리안 사제[4]
표어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요한 17:11)

전신
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한국교구[5]
파일:대한성공회_관구(수정).png

1. 개요
2. 특성
3. 역사
3.1. 외국인 선교사 시대(1890~1965)
3.2. 한국인 주교 서품 이후(1965~현재)
4. 한국관구 현황
4.1. 서울교구
4.2. 대전교구
4.3. 부산교구
4.4. 국외 사목
5. 교세
6. 전례
7. 타 교파와의 교류
7.1. 타 교파와의 성찬례 교류 문제
8. 사건사고
9. 여성 성직자
10. 기타
11. 인물
11.1. 성직자
11.2. 일반 신자
12. 관련 링크
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언어별 명칭
한국어
대한성공회 ()
영어
Anglican Church of Korea
중국어
大韩圣公会(dàhánshènggōnghuì
일본어
大韓聖公会(だいかんせいこうかい
대한성공회는 기독교의 일 교파인 세계성공회공동체의 구성 관구이다.[6] 대한성공회도 3개 교구로 구성된 관구로서 다른 관구와 동등하다. 각 관구는 자율성을 가지며 서로 명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회는 약 8,500만 교인의 개신교 주류 교파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오랜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인 수는 매우 적다.[7] 공식 발표상 교인 5만여 명(2011년 2월 기준)[8]과 3개 교구[9]와 136개 성당, 사회복지 및 선교기관 161개가 있다. 서울특별시 시청역 3번 출구 덕수궁 옆에는 서울주교좌성당성가(聖架) 수녀회 본원이 있으며,[10] 구로구 항동에는 성공회대학교가 있다. 이 외에도 성공회대학교 구내에는 특수학교인 성 베드로 학교가 있다.


2. 특성[편집]


대한성공회 신자 다수는 대대로 성공회 신앙을 이어온 사람들이지만, 근 20여 년간 가톨릭이나 다른 개신교 교단에서 전입해온 사람의 비중이 증가했다. 다른 기독교 신앙 경험 없이 대한성공회에서 처음 기독교 신앙을 시작하는 새 신자는 드물다. 이런 경향은 대한성공회가 타 개신교 교단보다 눈에 잘 들지 않기에 더 심하다. 성공회라는 단어가 종교단체인 줄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이기도 하고, 대한성공회 자체가 '사회선교'·문화예술·건축[11] 등의 방법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단순히 유인물이나 휴지 등을 나눠주는 얌전한 길거리 전도도 거의 보기 힘들다. 전국에서 성공회 교인이 그나마 많이 있는 지역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이고 인천 본토와 부천시·광명시·구로구 등지를 비롯한 경기도 서부권과 평택시·충청도 일부[12]도 다른 지역보다는 성공회 성당이 밀집한 편이다.

전례양식은 과거 앵글로-가톨릭[13]주류였기 때문에 현행 바오로 6세 전례와 많이 비슷하다. 특히 서울교구 성당 일부는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성당에 비해 전례상 더 장엄한 느낌을 받기 쉽다. 감사성찬례 시작 전 복사의 십자고상 순행 입당식과 감사성찬례 중 신부의 향 피우기는 상당수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연중 주일에도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성당에서는 부활대축일이나 성탄대축일처럼 정말 중요한 대축일 교중 미사 때에나 한다. 상당수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하는 감사성찬례 중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낭송도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성당에서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로회·감리회 등 주류 개신교 출신의 성직자·평신도가 늘어나고, 천주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영향을 받은 전례·신학 쇄신이 일어나면서 고교회파 영향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즉,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례의 경우 점점 간소화되어 고교회파의 흔적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신학상 광교회파[14]의 성향이 강하다. 과거 대한성공회는 고교회파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서, 1939년과 1965년판 성공회 공도문에 따른 감사성찬례천주교트리엔트 미사와 닮았지만[15], 1939년 혹은 1965년판 대한성공회 공도문에 따른 감사성찬례를 정기적으로 봉헌하는 성당은 현재 없다. 2016년 5월·10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전례 연구 차원에서 1965년판 공도문에 의한 감사성찬례를 봉헌한 바 있지만, 대한성공회의 모든 성당은 일상적 감사성찬례에서 2018년판 공도문을 사용한다[16]. 근래 10여 년 동안에는 개신교처럼 기타를 치고 CCM을 부르며 자유로운 찬양예배를 드리는 성당도 전에 비해 다소 증가했다[17]. 물론 이런 성당도 매주 성찬례를 거행한다.

한국의 개신교 주요 교단은 흔히 대한성공회를 신학·정치·고등교육[18]적으로 진보적인 교단이라 간주한다. 하지만 일부 대한성공회 교인은 이런 시각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대한성공회는 특정 성향에 치우진 교단이 아니라 진보와 보수 성향 모두를 감싸는 포용성이나 유연성을 보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포용성이 대한성공회를 고교회주의·복음주의·자유주의를 모두 아우르며 교회일치운동에도 앞장설 수 있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경호 베드로 서울교구장 주교도 대한성공회가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함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단 지도층과 상당수 신자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교단 내 주류 개신교단 출신 신자의 증가와 신학상 광교회파 영향의 증대로 인하여, 교단 내 진보적인 성직자와 신자의 목소리[19]가 부각되는 현상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성서무오설·창조과학과 같은 근본주의에 대한 거부를 넘어, '고(古) 그리스도론'[20]이라며 그리스도의 육신 부활을 부정하거나 무신론 기독교인임을 자칭하는 해괴한 '신자' 그룹이 존재하는 등 기존 성공회 신자들을 포함한 일부는 교회 개방성에 있어 유연하다 못해 지나치지 않느냐는 안팎에 우려섞인 시선을 보이고 있다.


3. 역사[편집]



3.1. 외국인 선교사 시대(1890~1965)[편집]



이름
임기
비고
초대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한국 이름 고요한)
1889년 11월 1일 ~ 1905년 1월 24일

2대
아서 베리스퍼드 터너(Arthur Beresford Turner, 한국 이름 단아덕)
1905년 1월 25일 ~ 1910년 10월 28일
[21]
3대
마크 네이피어 트롤럽(Mark Napier Trollope, 한국 이름 조마가)
1911년 7월 25일 ~ 1930년 11월 6일

4대
앨프리드 세실 쿠퍼(Alfred Cecil Cooper, 한국 이름 구세실)
1931년 6월 11일 ~ 1956년 1월 16일
[22]
5대
존 찰스 데일리(John Charles Daly, 한국 이름 김요한)
1956년 1월 17일 ~ 1965년 5월 26일
[23]

1890년 9월 29일 영국성공회의 찰스 존 코프 주교신부 5명과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 의사로서 의료선교를 하는 일라이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 이름 남득시)와 함께 입국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인 교인이 한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주교가 선임되고 한 교회가 시작된 것으로, 이는 세계교회사에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 전에 알렉산더 크로프트 쇼(Alexander Croft Shaw)나 존 리처드 울프(John Richard Wolfe) 등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선교를 하거나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었지만, 성공회는 주교제 교단으로서 주교 및 교구가 교회의 기초가 되므로 공식적인 대한성공회의 시작은 1889년 한국 주교로 서품된 코프 주교가 한국에 입국한 1890년 9월 29일로 잡는다. 이때 교단의 이름은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였으나 나중에 조선성공회 및 대한성공회로 이름을 바꾼다.

1891년 오늘날 인천 중구 내동에 첫 성공회 교회인 내동교회를 설립한다.[24] 한국에 진출한 성공회는 대한제국 시기 서구식 근대 교육 보급이 일환으로 충남 천안에 신명학교를 설립했으며, 의료선교를 위해 인천·여주·진천 등지에는 병원을 설립했고, 고아를 돌보기 위해서 경기도 수원·안중 등지에 보육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성공회가 세운 병원들은 1930년대까지 차차 모두 매각되거나 폐원되었고, 학교 및 보육원 또한 해방 후 국가의 공교육 정비 및 원생 감소로 인한 폐원으로 차차 사라졌다.

1900년 강화군 강화읍강화성당을 세웠다. 서구 바실리카 양식과 불교 사찰 양식을 조합해서 세운 이 성당은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 이렇게 성공회는 선교 초기부터 한국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토착화에 힘썼다. 그래서 한국 건축 양식인 한옥으로 건축한 성공회 교회들이 지금도 강화군 강화읍(강화읍교회), 강화군 온수리(온수리성당, 1906년 완공.), 청주시 수동(수동성당, 1935년 완공.) 등에 남아 있다.

1908년 첫 한국어 공동기도문을 발간하였다. 영국 성공회 1662년 공동기도문을 번역했으나 축성경만은 1549년 것을 채택했다.

1914년 강화도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 전신 성 미가엘 신학원을 세웠다.

1915년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고 전도사가 된 김희준(마가[25]) 신부가 최초로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김희준 신부의 집안은 대대로 성공회를 믿으며 오늘날까지 성공회 신부를 배출하고 있다.

1919년 3.1 운동 중 병천교회와 부속학교 신명학교가 태극기 제작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당했다.

1924년 부산 중구 대청동에 대청동성당을 세웠다.[26]

1925년 영국성공회 성 베드로 수녀회의 지원으로 성가(聖架)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1926년 서울 중구 정동에 서울주교좌성당을 세웠다.

1936년 천주교, 감리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과 함께 신사참배를 시작하였다.[27][28]

1940년 일제에 의해 조선성공회 4대 주교 세실 쿠퍼(한국명 구세실)와 영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성 미가엘 신학교가 폐교당했다. 이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영국일본 제국의 적국이었다.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영국인 신부들과 영국성공회 소속 조선성공회를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조선성공회는 일본성공회에 강제로 편입되어, 당시 한국에서 일본인 성공회 신자들을 사목하고 있던 쿠도 요시오(工藤義雄, 요한) 신부가 주교[29]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 서품은 교회법상 불법이므로 쿠도 요시오는 대한성공회의 역대 주교로 인정받지 않는다.[30][31]

1945년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추방당했던 쿠퍼 주교 및 선교사들이 귀국하여 교단 조직과 성 미가엘 신학원이 재건되었다. 대한성공회가 1945년 광복 당시 일본관구 소속이 아니라 영국의 캔터베리관구 소속이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다행히 성당과 기타 교구 재산이 적산가옥으로 취급되어 몰수되는 상황을 비켜갈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정교회 한국교구는 당시 일본정교회 소속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광복 후에 교회 재산이 모두 적산으로 분류되어 몰수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1950년 한국전쟁서울주교좌성당 주임사제이던 윤달용(모이서[32])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 7명이 조선로동당에 의해 순교했다. 희생된 성직자 중 윤달용(모이서) 신부는 자발적으로 독신을 지켰던 사제로 당시 천주교로 교단을 옮길 뜻을 밝히고 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쿠퍼 주교 또한 납북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남한으로 복귀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북한의 교세를 모두 상실하고, 한때 신자 1만여 명에 달하던 교세도 완전히 무너져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때까지 한국에 왔던 성공회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잉글랜드성공회의 고교회파 선교단체인 USPG(United Society Partners in the Gospel) 소속으로 앵글로-가톨릭 성향이 매우 강했기에, 성공회 신부라면 응당 가능한 결혼도 하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윤달용 신부 또한 미혼자였으므로 천주교로의 회심을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대한성공회는 매우 강한 앵글로-가톨릭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까지는 전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천주교와 매우 유사했고, 당시의 천주교나 정교회처럼 성공회 신자는 반드시 성공회 사제에게만 성사를 받을 수 있었고 견진자가 아닌 영세자는 미사 때 말씀의 전례가 끝나면 본당에서 나가야 했다.


3.2. 한국인 주교 서품 이후(1965~현재)[편집]


대한성공회는 한국 성공회의 자립과 관구 독립을 원칙으로 삼은 존 데일리 주교의 사목적 방침 하에서 본국의 잉글랜드성공회, 미국성공회, 캐나다성공회 등의 지원을 받아 다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선교 발전의 결실로 1965년 이천환(바우로[33]) 사제가 최초의 한국인 성공회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또한 이때까지 대한성공회는 전국을 통틀어 단일교구 체제였지만[34] 서울교구대전교구가 분리됨으로서 2개 교구 체제가 되었고, 성공회 한국교구의 마지막 주교인 존 데일리 주교가 신생 교구인 대전교구의 초대 주교를 역임했다.

대한성공회는 잉글랜드성공회 USPG의 앵글로-가톨릭 성향 선교사들의 선교로 인해 1970년대까지 매우 강한 앵글로-가톨릭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존 데일리 주교는 CMS(Church Mission Society) 등 복음주의적 선교단체 뿐만 아니라 미국성공회 및 캐나다성공회 등으로부터 선교사들을 초빙하고, 여러 한국인 신학생들을 미국이나 호주 등 다양한 국가로 유학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저변을 넓혔다. 대한성공회의 유명한 사제인 대천덕 신부도 이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성 미가엘 신학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천환 주교는 재임 시 한국의 에큐메니즘 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1965년 한국 천주교와의 기도모임, 개신교 교단들과의 부활절 연합예배 참여, 루터교와의 축구모임 등 기독교 세계 분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성공회가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에큐메니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천환 주교의 관심과 노력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천환 주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성공회·천주교 재(再)일치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35] 대한성공회는 이천환 주교 재임기에 에큐메니즘의 일환으로 앵글로-가톨릭 일색이었던 법규와 전례를 개정하고, 타 교파 교인들에게 영성체를 베풀기 시작했다.

1974년 대전교구에서 부산교구가 분리되어 3개 교구가 성립되었다. 이로서 대한성공회는 '한국관구'가 성립되는 조건을 갖춘다.[36] 그러나 대한성공회의 관구 성립은 이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에 이루어졌다. 또한 부산교구는 교구 설정 당시 교회 6개에 성직자 8명만을 보유했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고, 현재도 일부 교회에 사제가 없는 등 교세 및 재정에서 열악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편 1974년 대전교구 2대 주교였던 리처드 럿트가 영국으로 귀국하고, 1977년 마지막 선교사였던 부산교구의 앨런 매솜(Alan Messom, 한국 이름 맹범식)이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대한성공회의 선교사 시대는 선교 87년 만에 막을 내렸다.

대한성공회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빈민선교 및 산업선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존 데일리 주교는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구제사업과 선교사업을 하며 한국에서 산업선교의 시초를 닦았고, 한국 도시산업선교의 출발점인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도 미국성공회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사회복지기관인 성공회 나눔의 집과 나눔의 집 교회(나눔교회)는 1980년대 중반부터 빈민선교의 일환으로 설립되기 시작했다. 또한 1970년대부터 부산에서 선원선교사업을 벌였고, 현재도 부산교구에 선원선교센터를 운영한다.[37]

성 미가엘 신학원은 1982년 4년제 천신(天神)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성공회신학교로 개명하고, 1992년 정식 고등교육기관인 성공회신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가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오늘날의 성공회대학교에 이른다.

1974년 지적장애 아동 및 청소년들을 위한 성 베드로 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종교재단 소속으로는 처음 세워진 장애인 특수학교였다. 성 베드로 학교는 현재 성공회대학교 바로 옆에 있다.

1970년대 후반 대한성공회에서는 빈민선교 및 산업선교의 영향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사제 및 신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교회 내에도 교회갱신운동이나 청년신자운동 등 진보적인 목소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혁 덕분인지 1987년 6월 10일 서울주교좌성당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날 오후 6시 삼종 기도 시간을 알리는 서울주교좌성당의 종소리로 6.10 항쟁이 시작되었다. 서울대성당은 공식적으로 6월 민주항쟁의 진원지이다.

1993년 정식으로 한국관구(Province)가 성립되었다. 한국관구로 독립하기 전에는 캔터베리 관구 소속이었기에, 대한성공회는 교회법 개정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최후 승인을 필요로 했다. 물론 지금은 대한성공회가 독립적인 관구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법 개정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승인 절차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원래 서울주교좌성당은 건설 당시 재정난으로 설계도안과 달리 축소 완공된 상태였는데,[38]1992년 원래 설계도안이 영국에서 발견되어 이를 바탕으로 원안대로 성당을 완공시키는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1996년에 확장 완공되었다.

2004년 현행 성공회 기도서가 마련되었다. 대한성공회는 1965년 공도문 출간 후 여러 시험 및 의안 공도문을 제외하면 정식 후속 공도문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2004년 그동안의 신학적 연구와 고찰을 종합하여 완성된 기도서를 내놓은 것이다. 2004년 성공회 기도서는 현재까지 미미한 개정[39]을 거쳐 대한성공회 각 교회의 감사성찬례에서 사용되고 있다.

2012년 천주교·재림교회에 이어 성직자 납세를 하는 3번째 교단이 되었다. 관련 기사

2021년 현재 대한성공회 의장주교는 이경호 베드로 주교이다.


4. 한국관구 현황[편집]


서울교구·대전교구·부산교구 등 총 3개 교구가 있고, 이 교구들이 한국관구를 이룬다. 즉 성공회 한국관구가 대한성공회인 것이다.[40]현재 이경호 서울교구장 주교가 한국관구장을 맡았다.

아래 나열된 교구(Diocese) 산하 교무구(Parish) 관할 구역은 성당이 위치하는 지역으로 한다.


4.1. 서울교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대전교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부산교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4. 국외 사목[편집]


영국, 미국, 호주 등지에 성공회 한인교회가 있다. 이들 교회는 모두 해당국의 성공회 관구가 치리하고 있다. 대한성공회에서 한인교회에 사제를 파송하는 경우가 다수이지만, 현지 성공회 관구에서 서품을 받은 한국인 사제가 한인교회를 사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영국에는 성공회 한인교회가 런던에 하나 있으며, 영국성공회 런던교구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 공동체가 딸려 있다. (http://kaclondon.org/)

미국에는 동부부터 서부까지 통틀어 한인 성공회 교회들이 여럿 있으며, 전체적인 규모는 작아도 교회 수가 꽤 되기 때문에 미국성공회 내에서 따로 협의회(The Korean Convocation of the Episcopal Church)를 구성하고 있다. 미국성공회의 첫 한인 사제는 박상준 요한 신부로 1916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대한성공회 출신인 조광래 신부가 첫 한인 신부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흔하다.) 첫 한국인 사제 김희준 마가 신부를 배출한 대한성공회와 비교해 1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대한성공회 출신 사제가 한인교회를 담당하는 추세이나, 이제는 한인 공동체의 1.5세나 2세 출신 성공회 사제들이 한인교회를 담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천주교처럼 성공회 한인교회는 거의 모두 미국성공회에 속해 있으며, 몇 개의 교회(예: 디사이플즈 교회, https://cafe.naver.com/jjschurch/)는 미국성공회에서 성소수자 문제로 인해 분리된 ANCA(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 속해 있다.

호주에는 성공회 한인 교회가 세 군데 있는데, 특이하게도 전부 저교회파이다. 실제로 이들 교회의 사이트를 보면 성직자가 자신을 목사로 소개하며, 교회를 복음주의 공동체로 정의하고 있고, 예배 양식이 한국의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와 완전히 똑같다.[41] 이들 한인 교회가 속한 호주성공회 시드니교구가 저교회적인 요소를 상당히 지니고 있어 삼성직의 의미가 크게 와해되었고, 제의 착용의 금지를 성공회 공동체 내에서 유일하게 명문화하고 있기도 하며, 성공회 기도서(공도문)대로 예배를 하지 않는 저교회파 교회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한인 교회(한국어 예배 공동체)가 도쿄에 하나 있으며, 일본성공회 도쿄교구 츠키시마교회와 같은 공간을 공유 중이다.(참고: http://www.nskk.org/tokyo/wp-content/uploads/2018/04/korean.html) 또한 일본성공회는 현지인 사제가 매우 부족하여 대한성공회 파송 사제들이 일본성공회 소속 사제로 현지 교회에서 사목하고 있다. 일본성공회 주요 미션스쿨인 릿쿄대학 교목도 한국인 사제다.[42] 월간 《현대종교》 전 발행인 탁명환 소장의 삼남 탁지웅도 성공회 사제로 일본에서 사목하고 있다.[43]

5. 교세[편집]


2011년 공식 발표 상 대한성공회 신자 수는 5만여 명이다. 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공식 통계보다 훨씬 적은 실정이며, 공식 발표 상 신자 수와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의 간극이 꽤 큰 편이다. 냉담자가 많은 상황이다. 그리고 다른 개신교 교단·천주교를 떠나 성공회로 입교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성공회를 떠나 다른 개신교 교단·천주교로 입교하거나, 아예 그리스도교를 떠나든지 무종교인이 되는 사람도 상당하다. 다른 교단으로 옮기는 사람 사이에서는 저교회파 성향이 있는 사람은 개신교로 옮기고 고교회파 성향이 있는 사람은 천주교로 옮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2018년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 각 교구의회에서 보고된 교적수 및 주일 감사성찬례 평균 출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서울교구: 10,718명 / 4,722명
대전교구: 2,673명 / 1,374명
부산교구: 850명 / 387명
총 14,241명 / 6,483명

세 교구 모두 2010년 전까지 외연 확장 추세였다가 2010년을 기점으로 감소나 정체 추세에 있다. 2019년 3개 교구 합쳐 교적수 13,222명, 주일 감사성찬례 평균 출석자 수 6,028명을 기록했다.

다른 한국의 개신교 교단처럼 신자 수는 감소하는데 성직자 수는 증가하는 문제를 겪는 중이다. 2020년 4월 현재 사제 수는 225명에 달하는데, 실제 신자 수는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성공회 교회 다수의 연평균 감사성찬례 출석자 수가 채 50명이 되지 않는 열악한 현실에 처해있는데다가 교회 확장 및 사회 선교 사업에 치중되어 있다 보니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의 신학생 수가 감소 추세[44]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성직자 수는 과잉 상태이다. 신자 감소와 더불어 일부 교회에는 사제가 파송되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 나고 있음에도 적지 않은 사제가 미국, 일본 등 외국 사목을 희망하고 있다.


6. 전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감사성찬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성공회는 1908년에 첫 한국어 공도문을 발간한 이래로, 1912년·1939년(임시통용판)·1965년·2004년·2018년 개정을 하였다. 2004년판 부터는 공동기도문(공도문)이 아니라 성공회 기도서가 공식 명칭이 되었다. 참고로 이전의 공도문들은 폐지되거나 금지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공도문으로도 감사성찬례를 드릴 수 있다. 이는 성공회 성가도 마찬가지이다.

아울러 대한성공회는 공동번역 성서를 교단 차원에서 표준 성서로 채택해서 전례 때 사용하고 있다. 대한성공회 외에 정교회 한국대교구와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소속 민통선평화교회 등에서 공동번역성서를 쓰고 있다. 또한 개신교 중 교회 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개교회들이 공동번역성서를 예배용 성서로 사용하기도 한다.[45]

일반적으로 대한성공회 신자들은 감사성찬례를 드릴 때, 성경·성가집·성공회 기도서 그리고 주보를 앞에 두고 드린다. 또는 성공회 기도서 중에서 감사성찬례 부분만 발췌한 책자를 갖추기도 한다. 성공회 기도서에 감사성찬례의 순서와 형식이 친절하게 적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감사성찬례의 양식이 교회력에 맞추어 바뀌며, 감사성찬례의 성경 본문은 그날의 성서정과(전례독서) 구절이다. 전례독서는 주일 감사성찬례 전례독서(주일에 사용하며 가해, 나해, 다해 3년 주기로 구성)와 주간 감사성찬례 전례독서(짝수 해와 홀수 해 2년 주기로 구성)로 구분된다.

현재 대한성공회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국 천주교처럼 서서 손으로 영성체를 한다.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감사성찬례를 드리는 경우 세례자요한성당(지하성당)에서는 장궤를 하고 손으로 영성체를 한다. 장궤를 하고 영성체를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의 천주교와는 다르게 입으로 영성체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주일마다 장궤를 하고 성체를 영했으며 아직 장궤틀이 남아있다. 또한 대전교구의 몇몇 교회에는 입영성체를 실시하는 사제와 신자가 있다.

몇몇 교회에서는 CCM 등을 사용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2016년 5월·10월, 서울주교좌성당에서 1965년 공도문에 따른 감사성찬례가 봉헌된 적이 있다. 전례 연구 차원의 일이었다.


7. 타 교파와의 교류[편집]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함께 교회일치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교단으로, 다양성을 중시하다 보니 다른 주류 개신교 교단들은 물론 천주교와 정교회와도 적극 교류하며, 타 교단에 대해서 정말 웬만해서는 이단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천주교든 정교회든 다른 개신교든 타 교파에서 성공회로 옮길 때, 해당 기성 기독교 종파에서 세례 받은 것을 다 인정해준다.[46] 반면 그래서 이단에 대해서 취약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47]

2020년 의장주교의 새해 사목교서에는 최근 일부 교회가 이단에게 피해를 입고 있다며 이단을 경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언젠가 강남교회에는 '강남교회 담임목사 귀하' 운운하는 편지가 온 일이 있었는데, 이 편지는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에서 보낸 것으로, 한기총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48]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만 가맹되어 있다. 이는 신천지의 한국 기독교 지형에 대한 무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49]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기독교대한감리회 교단과 활발히 교류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경동교회[50],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의 새문안교회[51],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교회[52] 등과 교환예배를 하기도 한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 경동교회 교환예배 또한 매년 연초에 있는 교회일치 기도회[53]도 주로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개최된다. 단 2010년대 들어서 매년 여러 교회를 돌아가면서 개최된다.

천주교정교회와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성공회는 천주교나 정교회도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보기 때문에 이들과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정교회와의 교류는 꾸준했다. 6.25 전쟁 중에 서울 성당이 파손당한 정교회 신자들이 새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임시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지하 예배당을 빌려 성찬예배를 드리기도 했었다.[54]

물론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는 건 대한성공회만의 특징이 아니라, 세계성공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세계성공회는 '본질적인 것에 일치됨, 비본질적인 것에 다양함'이라는 입장으로, 다른 종파와의 우애·관용·공존을 추구하고 있다.[55] 19세기 이래 천주교과 일치를 위한 대화가 끊긴 적이 없으며, 정교회와의 교류도 꾸준했다. 위트레흐트 연합(Union of Utretch)에 속한 복고 가톨릭교회,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 토마 시리아 교회(Malankara Mar Thoma Syrian Church)와는 완전한 상통·성사 교류[56]를 이루어냈다.#

영국 성공회의 중심지인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행해지는 강론에서도 마더 테레사 수녀나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천주교 성인과 개신교 목회자들이 나란히 신앙의 모범으로 언급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쓰는 것 또한 가능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 킹, 존 웨슬리, 오스카 로메로 등의 세례명을 쓴다. 또한 영국 성공회가 현재 관리하고 있는 (헨리 8세가 해산시키기 이전의) 옛 수도원 건물들에서 정기적인 천주교 미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설립자도 영국 성공회 신부였다.

최근 들어 보편교회 교단들과의 교류가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여성 사제 허용 문제와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제일 큰 갈등 원인이 되고 있다. 성공회가 여성의 사제 서품을 허용함으로 인해서, 성공회의 사도전승을 인정하려 고려했던 정교회가 그 결정을 보류했다.[57][58] 여성 사제 서품은 보편교회에서 매우 강경하게 반대하는 문제로 이 당시 정교회 주교들이 성공회의 이런 결정에 매우 격노했다고 한다. 천주교도 성공회의 여성 사제 서품에 대해 정교회와 비슷한 입장이다.[59][60][61]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는 여성 성직자 서품에 대한 논쟁 만큼이나 복잡한 문제이다.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광교회파 행보로 인해 보편교회들과 보수적 개신교 교단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고, 성공회 내부에서도 분란이 크게 일어났다. 세계성공회공동체에서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보수적인 관구들이 주도해서 동성결혼을 교회법적으로 인정한 미국과 캐나다 관구에게 3년간 관구 자격을 정지시키기도 했다.[62]

한국이나 외국이나 천주교 신부가 성공회로 회심해 사목하는 사례가 있다. 한국에도 구균하(요나로렌스/부산교구), 황인찬(베네딕트/원주교구), 최석진(요셉/의정부교구), 정지원(데오필로/의정부교구) 신부 등 천주교 신부였다가 교리나 결혼을 이유로 회심하여 성공회 신부가 된 사람이 있다. 반대로 한국에도 성공회에서 천주교로 옮기는 경우가 있다. 한국전쟁 직전 윤달용(모이서) 신부가 천주교로 교단을 옮길 뜻을 밝히고 이를 준비 중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희생되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제2대 교구장을 역임한 노대영(리처드 럿트) 주교는 영국으로 귀국한 후 천주교로 개종하고 천주교 신부로 재서품을 받았다. 또한 몇 년 전에는 대한성공회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재학 중인 신학생 전도사 한 명이 천주교로 개종하고 전통 가톨릭 단체인 성 비오 10세회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외국에는 성공회 사제가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 천주교에서는 천주교로 개종한 성공회 성직자는 재서품[63]을 받는다. 단, 성공회에서 주교였지만 기혼자인 사람은 주교로 재서품받지는 못하고 신부로 재서품받는다. 천주교에서는 베네딕토 16세 교황 당시 성공회 출신 천주교 성직자를 위한 성직자치단 설립을 인가한 바 있다.


7.1. 타 교파와의 성찬례 교류 문제[편집]


천주교정교회에서는, 자기네 신자가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참석해서 성체를 영하는 것을 올바른 성체성사를 행했다고 보지 않아서 금지한다. 반대로 성공회의 입장에서는, 천주교 또는 정교회 신자가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 성체를 받아 모셔도(먹어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세례받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성공회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성찬례 교리로는 천주교이나 정교회 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천주교정교회에서는 성찬례를 행할 때, 포도주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화체설)고 믿는데 반해, 성공회는 이에 대한 견해가 자유롭다. 성공회 나름의 공식적인 견해[64]가 있긴 있지만, 천주교와 정교회처럼 성변화를 믿는다고 해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 그러나 천주교와 정교회처럼 성변화를 믿는 사제나 신자들은 소수에 속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참석해 보고 싶은 천주교 신자나 정교회 신자가 있다면, 그냥 체험을 위해 참석해야지 천주교 미사나 정교회 성찬예배에서의 영성체(성체성사)를 대신하러 가면 안 된다. 사실 성공회 측에서 천주교성찬례를 서로 교류하자는 요구를 몇 차례 했었으나, 천주교는 번번이 거절했다.

다른 개신교 교파 신자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성공회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다. 성공회는 다른 기독교 교파의 세례를 모두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성공회 교적 등록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성찬례에 참여할 수 있기에 성찬례 참여 자격이라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국내 개신교 교단 중 거의 유일하게 매 주[65] 성찬례를 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성찬례를 너무 소홀히 하는 느낌이 든다면, 언제라도 가까운 성공회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

성공회 예배인 감사성찬례는 천주교의 미사와 상당히 유사한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찬양예배에 익숙한 개신교인이라면 다소 신기하고 어색할 수 있으나 기독교 예배의 다양한 형식 중 하나라 생각하고 기도서와 주보를 따라가면 된다. 실제로 성공회의 예전적 예배에 대한 호기심으로 참석해보는 개신교인이 의외로 많다.


8. 사건사고[편집]


  • 2010년, 전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대구교회 조영준 주임신부[66]가 에큐메니즘 운동과 종교 간 대화에 적극 참여하는 대한성공회 입장과 배치되는 불교 폄하 활동에 다른 개신교단 목사들과 함께 첨여하여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단순 참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구 지역 목사들과 같이 불교 비하 동영상 제작과 사찰 땅밟기를 주도해서 더 문제가 되었다. 결국 당시 대한성공회 김근상 의장주교가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에게 사과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관련 기사

  • 2014년, 전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교무국장 강민용 시몬 신부가 성폭행 의혹을 받았다. 그는 면직되었다가 복권되었으나, 다시 면직되었다. 그러나 성폭행 피해 호소인인 전 대전교구 직원 또한 횡령 의혹을 받은 바 있어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었다.

  • 2017년, 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김근상 바우로 주교의 횡령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이 문제를 두고 항의 집회가 있었다. 김근상 주교는 의혹이 제기되자 정해진 임기보다 앞서 서울교구장에서 사임했다. 진보 성향 기독교단이라 해서 비리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67].

  • 2018년 2월 20일, 전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대소교회 전병세 프란시스 주임신부가 자신이 관장으로 있던 음성군장애인복지관 여직원 상당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특히 사건이 언론에 폭로된 후 대전교구 사제 몇몇이 인터넷에 사건을 적극적으로 폭로한 사람을 고소하여 더 빈축을 샀다[68]. 대한성공회는 이 사건에 사과의 뜻을 표명하였으며, 전병세 프란시스 신부는 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었다. 진보 성향 기독교단이라 해서 성범죄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사건 관련 기사 1 사건 관련 기사 2

  • 2018년 9월 23일, 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영어회중교회 담당 김호관 크리스핀 신부와 여성 신자 간 갈등으로 실랑이가 벌어져 여성 신자가 부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갈비뼈가 골절하는 등 부상을 입은 여성 신자는 김호관 신부를 상해 혐의로 고발하여 법원에서 벌금 300만 원이 확정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고 김호관 신부는 피해자를 비롯한 4명 신자에게 법원에 예배방해 및 접근 금지 신청을 했으나 기각되었. 관련 영상


9. 여성 성직자[편집]


2001년에는 대한성공회 최초로 여성이 사제 서품을 받았다.[69] 주인공은 부산교구의 민병옥 카타리나. 1978년 성공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나, 당시에는 여성 사제 서품을 실시하지 않아, 줄곧 전도사로만 머무르고 있다가[70] 졸업하고 23년이나 지난 후에야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한성공회 내부에서 부산교구가 다른 교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교회파적이고 개방적이었기에 여성 사제 서품이 가능했다는 평이 있다. 민병옥 가타리나 신부는 이후 10년간 사목한 후 2011년에 은퇴했다.

사실 대한성공회에서 최초로 여성이 부제고시에 합격한 것은 1994년이다. 주인공은 박미현 도미니카이다. 그러나 그는 합격했는데도 곧바로 부제 서품을 받을 수 없었고,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예전보다 발전한 것이었는데, 더 이전에 부제고시를 보았던 유명희 데레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합격 판정 보류'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8년 대전교구에서 이정운 페트라가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부제가 되었고, 기약 없이 기다리던 그들도 부제품과 사제품을 받고, 사목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서울교구에서도, 2004년 김기리 미리암이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서울교구에서는 최초, 대한성공회에서는 5번째 여성 사제다. 그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김문환 명예교수의 1남 1녀 중 둘째로, 본래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에 다니다가 성공회로 옮겼다. 1998년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지만 여성으로서 신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여성의 서품을 가로막는 제도와 싸운 끝에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성공회 성직자는 결혼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데, 위의 민병옥 사제가 독신인 반면 김기리 사제는 기혼이며, 남편 또한 성공회 사제라고 한다.

2007년에는 성가수녀회 오인숙 가타리나 수녀가 사제 서품을 받아,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수도사제가 탄생했다.[71] 한국전쟁 중 인민군에 의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여동생과 함께 성공회 고아원에서 자란 오 수녀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준 수녀들에게 감동을 받아,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성가수녀회에 입회했다. 그리고 수녀원장과 성공회대학교 영문과 교수 등을 지내며 활약하다가 2007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2009년에는 성가수녀회 이양란 엘리사벳 수녀가 사제 서품을 받아, 2번째 여성 수도사제가 탄생하였다. 2020년에는 부산교구에서 성 프란시스 수녀회 유용숙 안나프란시스 수녀가 사제 서품을 받고 사제수녀가 되었다.

위에 기술된 여성 성직자들을 필두로, 대한성공회는 지속적으로 여성들을 성직에 서품하였다. 최근에는 거의 모든 서품식에서 여성 부제/사제가 나오고, 현재 대한성공회에는 여성 성직자 20여 명이 있다.


10. 기타[편집]


  •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를 이루는 같은 성공회 교회라도 각 성당마다 사목적 지향과 교회의 분위기와 정서는 각양각색이다.

  •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기독교대한감리회와 함께 1957년 이래 연세대학교 이사회의 일부를 구성하는 파송 교단 가운데 하나였다.[72] 대한성공회 첫 한국인 주교였던 이천환 주교가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2011년 방우영[73] 이사장에 의해 기장과 함께 파송 교단에서 제외되었다.[74][75]

  • 제사 문제에 대해서는 천주교과 비슷한 입장이다. 제사 자체를 금하지는 않으나 제사에 조상 숭배의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금한다. 개신교 출신 성공회 신자가 상당수라서 그런지 현실적으로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신자는 별로 없는 듯하다.[76]

  • 유럽이나 북미의 성공회 고교회파[77]에서 아주 가끔씩 나오는 천주교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며 통합을 이야기하는 움직임은 국내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천주교가 결혼한 남성 성공회 신부는 몰라도 성공회 여성 사제를 사제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현재 대한성공회 안에서 여성 사제들은 성실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고 교인들도 여성 사제들을 잘 따르고 있는 편이다. 또한 대한성공회 신자 중에는 진보 성향 신학과 진보적 사회 참여를 지지하는 신자가 꽤 많은데, 이 점 역시 천주교와 잘 맞지 않는다. 대한성공회 내에서 우스개로라도 천주교와 통합 이야기가 나오면, "감리회[78]기독교장로회[79]로 가면 갔지 천주교로 왜 가느냐"는 반응이 나오곤 한다. 주로 청년이나 중년층에서 이런 분위기가 강하며, 특히 천주교 교리의 보수성 때문에 성공회로 입교한 신자의 경우가 그렇다. 그렇지만 대를 이어 믿는 성공회 신자나 고교회파적 신앙이 남아있는 나이 지긋한 신자의 분위기는 상당히 다르다.[80] 현재도 대한성공회에서 자신의 신앙 성향에 따라 다른 개신교 교단이나 천주교로 떠나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회의를 느낀 다른 개신교 교단이나 천주교 신자들이 대안을 찾아 대한성공회를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 옆나라 일본은 성공회 신자 수가 5만 정도다. 그러나 일본은 기독교인이 다 해야 95~100만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81] 일본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의 입지는 꽤 큰 듯하다.[82]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교 교세가 작은 가운데 그리스도교 내 입지가 상당한 일본성공회와, 나라 안에서는 그리스도교 교세가 상당하지만 그리스도교 내 입지는 너무 작은 대한성공회의 상황[83]이 대비가 된다. 일본성공회는 대한성공회와 매우 긴밀히 교류하며 양국 간의 우호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성공회의 성직자 뿐 아니라 평신도 사이에서도 한국에 와서 직접 사죄를 하기도 했다.[84]

  • 예수원을 세웠던 대천덕 신부 이후 아직 이렇다 할 걸출한 신학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현재 세계성공회에서는 주로 톰 라이트, C. S. Lewis, 존 스토트, 로완 윌리엄스, 스탠리 하우워어스 등 영미권 신학자들이 대표적인 신학자들이다.

  • 성공회 신부인 민김종훈 자캐오 등 몇몇 사제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할 뿐 아니라 여성 낙태권을 지지하고 메갈리아·워마드 성향의 급진 페미니스트를 두둔·옹호하는 등 페미니즘 운동에도 연대하고 있다. 민김종훈 자캐오 신부는 워마드 성체 훼손 사건 사건 시 본인 페이스북 계정에 쓴 글에서, 급진 페미니스트에게 쏟아지는 비판을 일체 수용하지 않으면서 "설령 이 사건이 사실이라 해도 본인은 페미니즘 운동을 계속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노승훈 요한 신부 또한 열렬한 급진 페미니스트 지지자로 대한성공회 안팎에 나름(?) 유명하다.

  •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는 2017년에 있었던 전국 성공회 청년 연합 수련회에서 "모든 기독교인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라고 발언했다. 성차별은 나쁘지만, 페미니즘은 사랑이나 정의 같은 성경그리스도교의 덕목이 아닌 근대 세속 철학의 수많은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하며, 더욱이 다수 대중이 페미니즘의 논리와 명제에 동의하지 않고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스도교 사제로서 부적절한 언사였다는 의견이 대한성공회 내외에서 나왔다.


  • 한국에서 코로나19가 창궐할 때 천주교와 불교 조계종처럼 관구 차원에서 교회활동을 전면 중단했던 적이 있다. 2월 대유행 뿐만 아니라, 8월 대유행 당시에도 유일하게 교단 차원에서 모든 활동을 전면 중지했다.


11. 인물[편집]



11.1. 성직자[편집]


  • 구균하 요나로렌스 - 천주교 신부였으나 교리에 대한 회의로 사제직을 내려놓고 미국에서 무신론자로 지내다, 개종하고 성공회 신부가 된 경우.
  • 김근상 바우로 - 전 서울교구 교구장 겸 전 한국관구장 주교. 2011년 부터 CBS(기독교방송)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사장으로 선출되어 2017년 7월부터 2년간 재임하게 되었으나 이런저런 논란으로 조기 은퇴하였다. 또 CBS에 파송할 수 있는 이사는 '현임 주교'였기 때문에 이사장직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 김기리 미리암 -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최초의 여성 사제. 원래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출신이다.
  • 김성수 시몬 - 제2대 서울교구 교구장
  • 대천덕 르우벤[85] - 성공회 신부이자, 성공회 수도원예수원[86]의 설립자
  • 민김종훈 자캐오 - 대한성공회 '길찾는교회'의 담당 신부이자, '용산해방촌나눔의집'의 원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목하겠다고 마음먹은 뒤 순복음교회에서 전도사까지 되었다가, 성공회로 옮겼다. 우리나라 교계에서 드물게 성소수자를 위한 사목을 하는 성직자이다.
  • 민병옥 가타리나 - 대한성공회 최초의 여성 사제. 천주교나 정교회에서는 여성에게 사제품을 주지 않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여성 사제이기도 하다.
  • 박동신 오네시모 - 현 부산교구 교구장
  • 오인숙 가타리나 - 성가수녀회 소속 수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수도사제.
  • 유낙준 모세 - 현 대전교구 교구장 주교, 전 한국 관구 관구장 주교
  • 유명희 데레사 - 대한성공회 부산교구 여성 사제. 1989년 성공회신학교와 사목신학연구원을 졸업하고 성직고시에 응시하였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보류되었다. 그 후 전도사로 대전교구 몇몇 교회에서 시무했다. 2002년 부산교구에서 일하게 되었고, 2003년 5월 부제로, 2004년 6월 졸업한지 15년 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2003년 6월 안동교회를 개척하여 6년여 간 있다가, 2009년 5월부로 포항교회를 관할하고 있다. 여성으로서 성직고시에 합격하고도 당시 여성 사제 불인정으로 인하여 사제 서품을 받지 못했었다.
  • 이경호 베드로 - 현 서울교구 교구장 주교(2018~), 현 한국관구 관구장주교(2020~). 학부는 한신대학교 신학과. 김근상 바우로 전 서울교구장 주교의 조기 사임하여 조기 취임하였다. 2019년 성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때 성공회의 정치 중립적 성격을 명확히 언급하는 영향력 있는 발언을 했다. (29:06부터) 본디 성결교 출신이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공회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5학년 때에 검은 수단을 입은 신부님의 모습을 보고 '저런 옷을 입고 싶다.' 하고 생각한 것이 사제를 처음 꿈꾸게 된 계기라고 한다.
  • 이재정 요한 -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성공회 신부로, 참여정부에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고 2014년 6월 4일 경기도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성공회에서는 이럴 경우에 휴직 처리가 된다. 언제든 다시 성공회 사제로 돌아갈 수 있는 것.
  • 주낙현 요셉 - 서울주교좌성당 현 주임신부. 어렸을 적 예장합동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대학 재학 중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민중교회에 참여했다가, 성공회로 옮겨서 성직자가 되었다. 학부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 성공회 신학과 전례학에 관한 글을 쓴다.
  • 최석진 요셉 - 천주교 의정부교구[87] 사제였다가 개종하고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
  • 황인찬 베네딕트 - 천주교 사제였다가 개종하고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88]. 사제이면서 목수로 일하고 있다. 천주교 사제 시절 강원도 평창군의 대화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했다고 한다.


11.2. 일반 신자[편집]




12. 관련 링크[편집]




13.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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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는 성공회 한국관구[2] 성공회 한국관구장 주교[3] 서울교구장 주교[4] 대전교구 교구장 대리. 청주산남성당 관할사제 겸직.[5] 대한성공회가 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휘하에 있을 적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감독을 받았다.[6] '관구(管區, province)'라는 개념이 생소할 수도 있다. 성공회·정교회·가톨릭 등 주교제가 확립된 기독교 교파에서 교회를 지역에 따라 나눌 때 사용하는 가장 큰 단위라고 생각하면 된다. 관구는 최소 3개 이상의 교구로 구성된다. 대한성공회는 서울교구·대전교구·부산교구의 3개 교구로 구성되어 있는 관구이다. 성공회는 전세계에 40개 관구가 있으며, 영국 캔터베리 관구의 관구장 주교가 '평등한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가 되어 성공회를 대표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관구(Province)는 처음에 교회 행정 구역만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나중에는 광역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게 된다.[7] 이단으로 알려진 몰몬교·여호와의 증인·신천지보다도 더 교세가 적다.[8] 공식 발표상으로는 5만 명이지만, 실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1만 명 미만이라고 성공회 안팎에 알려졌다. 통계와 실제 교세와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다른 기독교 교단도 대부분이 통계와 실제 교세 차이가 4-5배 있다지만, 대한성공회는 다른 교단에 비해서도 특별히 통계와 실제 교세 간의 차이가 큰 편이다. 대한성공회 교인 통계에 나온 숫자는 실제 교세의 8-10배 이상이라고 보면 된다.[9]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10] 주한영국대사관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사실 이 주교좌성당과 영국대사관 모두 예전 덕수궁의 원래 권역 안에 위치한다. 덕수궁 건물 중 하나인 양이재 건물은 주교관으로, 현재는 대성당 경내 안에서 사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1] 대표적으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12] 천안시·아산시·청주시·진천군·음성군[13] 고교회파, 고교회주의. 18세기에 존 웨슬리 등을 필두로 경직된 잉글랜드 국교회에 복음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 당시 가톨릭적 전통을 고수하던 부류는 "우리는 고교회(high church)며,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너희들은 저교회(low church)다."라며 만든 용어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국교회 잔류 청교도 계통과 웨슬리의 복음주의나 청교도(조지 휫필드 등)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성공회 신자 중에서 국교회에 남은 부류는 성공회 내 저교회파가 되었으며 성공회를 이탈한 부류는 감리회를 세운다. 감리회의 기원은 존 웨슬리가 안수한 사역자들이다. 이들은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완전한 개혁에 동의하던 주교들이, 국교회에서 받은 서품이 없던 목사들(청교도)을 강사로 임명하던 것과 잇닿아 있다.[14] 성공회 내 현대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류로서 진보적 사회 참여를 강조한다. 성공회는 진리 추구의 세 가지 기준으로 제시하는 전통·성서·이성 셋 중에서 고교회파는 전통을, 저교회파는 성서를, 광교회파는 이성을 조금 더 중요시하는 부류라고 생각하면 된다.[15] 물론 트리엔트 미사와 달리 자국어로 봉헌되었으며 미사 전문(Canon) 등 기도문 내용 일부에 차이가 있었고 트리엔트 미사 후에 있는 레오 교종 기도문이 없었다.[16] 강화성당에서 하는 전례적 동쪽(Ad Orientem) 방향의 감사성찬례 또한 2018년판 공도문으로 봉헌된다.[17] 심지어 방언을 하는 교회도 있다.[18] 성공회대는 종교법인계통 학교임에도, 진보적인 학풍이 두드러진걸로 유명하기 때문.[19] 이른바 진보적인 대한성공회 성직자와 신자 대다수가 주류 개신교 교단이나 천주교 출신이다.[20] 극초기 기독교예수를 그저 도덕적 스승으로 여길 뿐이었고 부활 신앙 같은 것은 없었다는 주장으로, 국내에서는 철학자 도올 김용옥이 소위 '도마복음 강해'를 강의하면서 이 고(古) 그리스도론을 설파한 적이 있다. 참고로 다른 설명 없이 고 그리스도론이라고 말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고(高) 그리스도론을 의미하며, 이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믿어온 그리스도를 육화된 하느님으로 보는 그리스도론을 가리킨다. 이와 반대되는 저(低) 그리스도론이 본문의 고(古) 그리스도론과 통하는 용어.[21] 한국 YMCA(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 3대 회장[22]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석방되기 전까지 보좌주교였던 아서 어니스트 채드웰(Arthur Ernest Chadwell, 한국 이름 차애덕)이 주교직을 대리.[23] 마지막 성공회 한국교구 주교 및 초대 대전교구 주교[24]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동네에 있다.[25] 복음사가 성 마르코를 예전에는 마가 내지 말구라고 불렀다. 개신교에서는 지금도 '마가'라고 부른다.[26] 이후 1974년 부산교구가 대전교구에서 독립하면서, 대청동성당은 부산교구를 치리하는 부산주교좌성당이 된다.[27] 1938년 장로회마저 신사참배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나온 장로회 교인들이 해방 후 예장고신이라는 분파로 나누어졌다. 고신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예수교장로회 수많은 교단 가운데 분리 명분이 가장 마땅하고 옳았던 교단이지 않을까 생각된다.[28]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것은 침례회의 전신인 동아기독교가 유일했다. 동아기독교는 교단이 해산되고 목사 32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29] 정확히는 쿠퍼 주교를 대신하는 관리주교[30] 어차피 이런 꼴을 당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불과 4년 전 하느님 앞에 큰 죄를 지으며 굴욕적으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짓은 안 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악은 차츰 더 큰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31] 이와 관련하여 2015년에는 대한성공회와 일본성공회 간 메시지 교류가 있었다.[32] 모세의 예전 번역명.[33] 성공회에서 세례명은 공동번역성서에 따르지만 예외적으로 바울로(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명)은 흔히 그냥 '바우로' 라고 불린다. ex)김근상(바우로).[34] 성공회 캔터베리관구 한국교구[35] 출처 - https://veritas.kr/news/6927?tag=redirect_sub_re[36] 성공회에서는 역사적/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교구가 3개 이상이어야 한 관구로 독립할 수 있다.[37] 애초에 성공회는 선원선교 영역을 처음으로 개척한 교단으로, 1856년에 영국성공회에서 세운 The Mission to Seafarers(별칭 플라잉엔젤)가 그 기원이다.[38] 좌,우측 익랑이 짧고, 짧은 신랑으로 이루어진 일자형[39] 2018년판 기도서[40] Anglican church of Korea[41] 참고: https://www.andys.org.au/[42] 일본성공회는 일본 기독교계에서 천주교와 일본기독교단 다음가는 교세를 가지고 있다.[43] 종종 월간 《현대종교》에 글도 기고하곤 한다.[44] 현재 재학생 수가 20명이 채 안 된다. 2020년에 대한성공회에서 서품받은 사제는 세 교구 합쳐서 6명이다.[45] 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일부 교회에서 쓰인다. 하지만 향린교회는 2018년부터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바꿔 사용한다.[46] 장로회, 감리회세례명이 없는 개신교 교단 출신이 성공회에서 타 교파 영접식이나 견진성사를 받을 때 세례명을 설정할 수 있다.[47] 요즘 이단들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새로 생긴 이단에 대한 대처가 늦을 수 있는 문제는 있을 수는 있다.[48] 강남교회는 물론이고 많은 성공회 교회에 보내진 것으로 보여진다.[49] 애초에 KNCC 유관 기관인 CBS와 한기총을 엮어서 비난하는 것부터가 무식하다고 밖에...[50] 한국 교회일치운동의 산실이자 기장교단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첫 여성 사제인 김기리 미리암 사제가 성공회로 옮기기 전 다니던 교회라는 인연도 있다. 2019년 현재까지도 매년 1번씩 교환예배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성공회 신자 중에는 경동교회 출신들도 있고 반대로 경동교회 신자들 중에도 서울주교좌성당 출신들이 꽤 있다.[51] 영락교회와 더불어 예장통합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이고, 또한 한국 장로회 역사에서 매우 비중이 큰 교회이기도 하다.[52] 인천내리교회와 함께 한국 감리회에서 역사상 비중이 큰 교회로 꼽힌다.[53]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기타 개신교 연합[54] 사실 그 당시가 지금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 그 때는 성공회 여성 사제 서품이 이뤄지기 전이라서 세계적으로도 성공회와 정교회 간 사이가 상당히 좋았다. 또한 대한성공회는 지금과는 달리 고교회파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55] 성공회 안에 존재하는 여러 갈래의 신앙 태도(churchmanship)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으로 공존하고 있다.[56] '서로의 주교가 상대 교단의 서품식에서 서로 안수하며 서로의 성직자를 교환하여 파송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해당 교단 신자들은 상대방 교단의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57] 한때 정교회에서 성공회를 자신과 같은 보편교회로 인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었으나, 성공회가 여성에게도 사제 서품을 주기로 결정하면서 결국 보류되었다. 정교회는 천주교에서도 인정하는 보편교회로, 만약 계획대로 정교회에서 성공회를 보편교회로 인정했다면 성공회는 보편교회로서 입지가 매우 단단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성공회의 장자 관구인 영국성공회는 정교회가 여성 사제 서품에 절대 반대하고,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준다면 보편교회로 인정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했고, 수많은 사제들과 신자들이 이탈했는데 심지어는 일부 주교들까지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58] 이전 서술에서는 정교회가 성공회의 사도전승 인정을 철회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교류의 중단이지 사도전승의 철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그리스, 불가리아 정교회는 이미 1920년대에 성공회의 사도전승을 인정하였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게 인정되고 있다.[59] 복고 가톨릭교회도 여성 서품으로 더 이상 천주교가 아니라는 비판을 들었다.[60] 천주교와 정교회의 여성 성직자 반대는 21세기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의 가치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안팎으로부터 꾸준히 받는다. 해당 교단 내 진보파에서 여성의 사제 서품 허용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61] 하지만 여성 사제 서품의 문제는 여성인권과 양성평등의 가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과 사도전승 문제등 신학적인 문제도 얽혀져있다. 사도전승은 12사도들과 그 후계자인 주교들로부터 물리적 안수를 통하여 전승되는데, 12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중 여성은 없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리고 역대 주교들이 여성을 사제로 임명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사도전승에 오류가 생기거나 심하면 단절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보편교회들이 조심스러워 하는 것이다.그 12사도들이 전부 원래 유대교신자였던 유대인인건 넘어가자.[62] 이전 버전에서는 동성애자 사제 인정이라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동성결혼 인정 문제가 가장 주된 이유였다. 동성결혼의 교회법적 인정에 반대하는 영국성공회도 정결 서약을 한 동성애자에 한정하여 제한적으로 성소수자 신부 서품을 인정한다.[63] 천주교에서는 성공회 사도전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64] 공식적으로는 성사적 임재설을 채택한다[65] 더 엄밀히 말하면 모든 예배(감사성찬례)[66] 설교·신학적으로는 저교회파·복음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전례적으로는 고교회파 영향이 남아있는 사제. 사실 고교회파·저교회파·광교회파 구분이 상당 부분 무의미해진 현재 대한성공회 상황에서는 복음주의 성향의 사제라고 해도 무방하다. 현재 미국의 저교회파 한인 성공회 성당에 있다.[67] 그동안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온 기독교의 문제는 주로 보수 성향 기독교단 내 문제였고, 대한성공회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적 목소리를 내어왔던 일부 성직자들도 기독교 내 문제를 비판하면서 주로 보수 성향 기독교단의 문제를 주제로 삼아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 내의 문제 하면 일단 보수 성향 기독교를 떠올리는데, 이 사건은 이런 선입견에 반박이 되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68] 전병세 신부 본인 또한 몇 년 전 같은 교구에서 발생한 강민용 시몬 성폭행 의혹 사건 때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한 같은 성공회 신자 고요한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전적이 있다.[69] 영국 성공회에서는 1862년 여성이 첫 부제 서품을 받았다.(참고로 '부제'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사제 서품은 1994년이다.) 영국 성공회와 대한성공회에서의 첫 여성 성직자의 서품 연도가 이렇게 차이 나는 이유는, 성공회에서는 교회 치리에 대한 많은 부분을 세계성공회공동체에 속한 각 지역 성공회 관구의 전통에 맡기기 때문이다.[70] 전도사라는 직책이 성공회에서 흔한 건 아니다. 성직자가 아닌, 즉 부제고시를 준비하는 전업 교역자에게 직책을 줘야 할 때 주고 있다. 타 개신교 교파에서의 전도사의 의미도 목사가 아닌 전업 교역자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신학대학원이나 그에 해당하는 과정을 마친 후 말이다.[71] 수도자수녀가 성직자인 신부를 겸하게 되는 것이다. 천주교정교회는 여성이 성품성사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여성 수도사제도 있을 수 없고, 남성 수도사제만 있다(수사신부, 성직수사).[72]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는 이사 12명 가운데 4명이 이렇게 개신교 교단들에게서 각각 파송을 받아 임명되었다.[73] 조선일보 일가로 알려진 그 방우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실상 주인 없는 연세대 이사회를 사유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카인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이사와 그 가족은 성공회 신자이다. 서울주교좌성당 1996년 증축 완료 당시에는 조선일보 사주 일가에서 성당에 증축 기념비까지 세워줬다. 우연의 일치인지 조선일보 사옥이 서울주교좌성당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다.[74] 현재 연세대 이사회에 참여하는 개신교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기독교대한감리회, 이렇게 둘 뿐이다.[75] 국내의 보수 교단 측에서는 연세대 내에서 진보 교단의 세력이 줄어드는 모양새를 내심 반기는 면도 있어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있으나, 이사장 개인에 의해 기독교 대학으로서의 정체성이 허물어져가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76] 장례식 때에 절을 하는 것도 허용한다. (개신교에서는 장례식 때에 절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대신 묵념을 하게 한다. 그래서 개신교인의 장례식을 찾아가는 문상객은 고인의 영정에 절을 하지 않고 상주와만 맞절하며, 묵념만 하는 것이 사회 예절이다.)[77] 이미 유럽과 북미의 성공회 고교회파의 적지 않은 수가 천주교에 귀의했다.[78] 감리회와 성공회 저교회파는 탄생부터 쌍둥이 같은 관계였다. 함께 태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된 것. 감리회 문서 참조.[79] 진보적인 신학을 중요시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감리회보다 기장에 더 동질감을 느낀다.[80] 대한성공회가 고교회파 일색에서 저교회나 광교회의 요소를 차츰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70-80년대에, 꽤 많은 모태 성공회 신자와 고교회파 성향 성공회 신자가 성공회를 떠나 천주교에 입교하기도 했다.[81] 천주교가 약 45만명, 정교회는 약 1만명, 개신교가 약 50만명으로 집계된다.[82] 도쿄 소재 명문대학 중 하나인 릿쿄대학이 일본성공회 재단이다.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 시절 다녔던 대학으로, 릿쿄대학 유학 당시 교목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83] 실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수는 1만 명 미만[84] 공교롭게도 김종필한일협정을 체결했던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도 일본성공회 교인이었다.[85] Reuben Archer Torrey Ⅲ, 루번 아처 토레이 3세[86] 강원도 태백시 외나무골길 97(하사미동), 대전교구 강원교무구 특수 선교 교회[87] 원래는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되었다가 의정부교구 신설과 동시에 그쪽으로 이적.[88] 다시 가톨릭 사제로 돌아가고 싶어하기도 했으나 결혼 문제가 있었다 한다.[89] 김종철, 김종희, 김종식 등 일가가 신앙을 공유하며 특히 어머니와 아내가 독실한 신자로 유명하다. 김승연 본인도 소년 시절에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참고기사 한화의 공장들에 있는 성당들은 성공회 성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