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4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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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에 기반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와는 색다른 것이다. 그것은 즉, 건강한 인간들로만 세계를 채운다는 것이다."
1938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발언. 정작 괴벨스 본인은 어린 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았다.
Eine nur sechshundertjährige Verhinderung der Zeugungsfähigkeit und Zeugungsmöglichkeit seitens körperlich Degenerierter und geistig Erkrankter würde die Menschheit nicht nur von einem unermeßlichen Unglück befreien, sondern zu einer Gesundung beitragen, die heute kaum faßbar erscheint. Wenn so die bewußte planmäßige Förderung der Fruchtbarkeit der gesündesten Träger des Volkstums verwirklicht wird, so wird das Ergebnis eine Rasse sein, die, zunächst wenigstens, die Keime unseres heutigen körperlichen und damit auch geistigen Verfalls wieder ausgeschieden haben wird.
단 600년 동안만이라도, 육체적으로 퇴화된 자나 정신적으로 병이 든 자의 생식 능력과 번식 가능성을 제거하는 일은 아무리 보아도 막대한 건강 회복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같이 민족 중의 가장 우월한 출산력이 의식적, 또 계획적으로 확산되도록 촉구한다면, 현재 우리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퇴폐의 싹이 완전히 말소된 인종이 탄생할 것이다.
1. 개요[편집]
독일어: Aktion T4
영어: Action T4, T4 Program
나치 독일의 우생학에 기반한 장애인 대량 학살 사건이다.
히틀러가 1939년 9월 한 극비 지령 문서에 서명하면서 T4 작전이 시작되었다. T4 작전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의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이었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부적격자를 사회에서 제거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뼈대로 삼았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사람들을 쓸모도 없이 음식만 먹는 것들(Unnütze esser),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이들 기준에 따르면 게르만족들은 모두 우월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불량품'이 있다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치의 우생학적 견해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프로그램은 후에 홀로코스트로의 진화를 암시했다.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이를 "현대적 야만으로 가는 필수 단계"라고 표현했다."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살려두어 꾸역꾸역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아돌프 히틀러
'T4'라는 이름은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티어가르텐 4번지(Tiergartenstraße 4)에서 유래했다.[1] 병원 4개가 집단 살해 장소로 쓰였으며 가장 큰 병원에는 사령부가 존재하기도 했다.
2. 실시 이전[편집]
1930년대 나치당은 안락사를 선호하는 선전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국가사회주의인종정치사무소(NSRPA)가 독일인들에게 불치병과 정신병자를 위한 보호시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다루는 팸플릿과 포스터,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자신들의 환자를 죽이는 데 반발하리라 예상된 가톨릭 단체들은 점차 폐쇄되었으며 요양 중이던 환자들은 북적대는 국립 기관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의 더러운 환경은 이후 안락사를 선호하던 캠페인에 기폭장치를 제공했다. 또 "장애인 한 사람당 6만 제국마르크가 나가고 있다", "장애인 한 사람을 먹여살릴 돈으로 정상인 4인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식의 선전 포스터들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32년 독일에서는 단종법(斷種法)이 제정되어 이들 부적격자를 자율적으로 거세하도록 했다. 이듬해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이 법은 더욱 더 강화되어 1933년 7월 14일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으로 공표되었다. 이 법에 따라 유전적 질환을 가진 45세 미만의 여성은 의사들의 판결에 의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의사들의 판결에 불순응할 시 벌금형이 내려질 수 있었다. 법률 시행 첫 해에 약 4,000명의 사람이 불임화 인가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그 중 3,559명이 패소했다. 나치 정권 말까지 200여 개의 유전 건강 법원(Erbgesundheitsgerichten)이 만들어졌으며 이 법원에서의 판결에 의해 40만 명 이상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았다.
1935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의사들 사이에서 명망 있던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부적격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했고 그는 "그러한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는 좀 더 쉽게 처리될 수 있다"라고 답했다.[2] 이후 전쟁의 발발은 히틀러에게 그가 오랫동안 바랐던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3. 실시 이후의 행보[편집]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위 명렁서처럼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가 담당했다. 히틀러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주워섬긴 브란트는 가스실과 병행해 실시한 약물주사처럼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별도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멩겔레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렇듯 인간말살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그 죄악이 전면에 대두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사건도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이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실행된 지 2년이 지난 1941년 여름에는 노인들을 겨냥한 새로운 질의서가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안락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못생겼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5] 도 표적이 되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이 경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특별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전단지가 배달되었고 아이들은 비밀리에 각종 인체실험에 이용되다 목숨을 빼앗긴 후 부검되어 사라져 갔다. 게다가 이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39년 이후 더 심해져 청소년기에 다다른 아이들까지도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비질환자, 뇌염, 간질, 조현병 환자들과 치매를 앓고 있던 노인들까지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1940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이 T4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으나 나치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전혀 하지 않았다. 허나 이후 계속적으로 프리드리히 폰, 빌레펠트, 폴 게르하르트 등의 루터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시작했다. 이후 주교 프란츠 본바워를 기점으로 8월 시위가 발생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전상자가 발생했고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이러한 T4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1차대전 참전자와 2차대전 참전자(중증 부상으로 인한 장애인)들 중 소수에게 대한 안락사가 실시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T4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이들도 제대 군인들이나 참전 노인들은 아예 대상에 넣지 않았으나 그 카를 브란트가 몰래 이들도 포함시켜 생체 실험에 사용했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일부만 알았다. 독일 국민들의 추측과 소문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애시당초 장애인들을 모두 죽이는 정책인데 고의였든 실수였든 전상자 출신 수용자가 많든 적든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부 입장에선 참전용사나 산업 현장, 특히 군수 관련 분야 종사자가 근무 중 부상을 입으면 선전용으로 우대해 줘서 사기를 올리는 것이 이득이니 당연히 이들은 여건이 되는 한 챙겨 주려고 하며 독일 역시 그랬다. 브란트 등의 일탈 행위 및 행정 오류 등으로 몇몇 참전용사들이 희생된 것이 T4 프로그램에 참전용사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식으로 와전됐다.
이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종교계와 시민들이 저항했다. 특히 종교계의 경우 T4 입안 당시부터 격렬한 항의가 계속되었다. 클레멘스 폰 갈렌[6] 주교는 공개 강연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명받은 순수한 학생들이 하얀 장미라는 단체를 만들어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그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1941년 히틀러는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나[7] 이 조치 이후에도 은밀한 살인은 계속되어 이전의 7만보다 많은 9만여 명이[8] 중지 선언 이후에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종료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이다.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카를 에두아르트[9] 도 T4 작전에 가담한 바 있다. 또 아스퍼거 증후군의 발견자로 알려진 한스 아스페르거도 T4 작전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은 반대 여론이 높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록이나 명령서 등을 사전에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때문에 최초 시행 시 히틀러가 보낸 서신 정도 외에 공식적인 명령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마저도 히틀러 또한 권리라고 했지 의무라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의사 탓으로 돌리고 본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기록이나 명령만 뒤져 보면 처벌받을 사람은 정말 히틀러 포함해서 하나도 없다. T4 프로그램 자체도 내용이 엄청난 것이라 당시 관료 중에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로타어 크라이시크(Lothar Kreyssig) 판사. 허나 희생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T4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는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가족을 요양원으로 보낸 사람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시 찾아오려 했고 여러 방면으로 저항했다. 특히 이런 운동은 교회에서 가장 활발했다. 결국 히틀러도 감당이 안 되었는지 1941년 폐지를 선언하였다.[10]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즉,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일을 할 수 없는 인력을 따로 분류해 죽였던 것이 이들의 끔찍한 작품이었다.
4. 전쟁 이후[편집]
이 사건의 중요 가담자인 카를 브란트 등은 전쟁범죄자로 분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피해자의 대다수가 독일인임에도 사형을 선고받은 것은 장애인을 학살한 중대한 반인륜 범죄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 끔찍한 흑역사 때문에 독일에서는 안락사 문제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매우 강해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11] 나치 잔재 청산을 최우선시하는 독일에서 국민들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채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자칫 나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 대법원에서 환자의 동의 아래 안락사를 허용하였지만 완전히 논쟁이 일단락될지는 미지수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T4 프로그램 희생자 수. 출처 : Document 87, P. 232 cit. in Ernst Klee. Dokumente zur "Euthanasie", 1985.
독일뿐 아니라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20세기 초까지는 나치뿐 아니라 후에 나치와 적대하게 되는 주변국들에서도 우생학적 분위기가 만연했고 선천적 지적 / 정신장애인에 대한 거세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중세는 물론 근대까지도 선천적 기형과 정신질환은 천형으로 여겨져서 사회로부터 격리 - 귀족이라면 요양, 시민 이하라면 교외의 수용소 -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강제 불임, 유산과 전두엽 절제술 등의 대상이었다. 그런 마당에 진화론이 소개되었고 이어 우생학, 사회진화론이 나오면서[12] 나쁜 의미에서 인간을 떨어뜨려 가축의 연장선상에서 육종하자는 발상으로 연결되었고 "공동체가 더 높은 곳을 향해 진보하기 위해 열성인자는 솎아내야 한다"는 막장 개념이 탄생했다. 그러나 나치는 '단종'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학살을 저질러 주변국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2차대전 이후 우생학은 인권에 반하는 유사과학으로 판명되어 유럽 사회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다만 T4 작전 자체는 나치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지만 나치 이전 행위의 관성은 계속되어서 북유럽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 일본[13] , 그리고 이들 소위 선진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그 잔재는 길게는 이후 수십 년 간 남았다.[14]
독일뿐 아니라 각국에서 자행되었던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인을 불임으로 만들어 자손을 남기지 않게 하는 행위가 과연 전반적인 지능향상이나 정신질환 유병률 감소에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논란이 있는데 대개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독일 같은 경우는 역시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영양실조가 큰 원인이겠지만 조현병이나 지적장애의 발생율이 오히려 나치 집권 전보다 엄청 늘어나 버렸다.
호주의 철학 교수 피터 싱어도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입국이 거부되었다. 싱어 교수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윤리학의 석학인데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고통의 최소화가 윤리다'로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임산부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고 싶을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초기 태아의 낙태는 문제가 되지 않고 심각한 고통이 확실한 병을 가지고 태어날 태아의 낙태나 환자의 안락사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실 우리도 일상에서 사지마비로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독일은 이와 관련되어 너무 끔찍한 역사를 겪었기에 싱어의 학설은 나치의 범죄를 정당화한다고 하여 입국이 거부됐다. 독일이 과거사 반성 척도에서 보면 얼마나 나치 시대에 학을 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1년 11월에는 기존의 추모 명판 근처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자세한 정보와 만행들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새로 설치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 바로 옆에 있다.
5.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편집]
아돌프 히틀러 본인부터 잠복고환을 가진 장애인이었으며[15]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도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그러나 둘 다 오히려 장애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고 괴벨스는 아이만 7명이나 낳는 위에서 말한 나치식 논리로는 설명이 안되는 행보를 보였다. 이에 대해선 그의 자기혐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장애인들에게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상기하고 이를 지우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나 지배자 가계와 최고지배층은 예외였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16] 현대에 일어난 사실이란 점이 이를 특이하게 만든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소속 인물들은 이 같이 모순적인 사례가 매우 많다. 당장 히틀러부터도 외형 자체가 자신이 말한 이상적인 '아리안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17] 히틀러가 태어난 곳은 히틀러가 하등인간이라고 주장하던 체코 슬라브족과 통혼이 매우 흔한 곳이었다.[18] 히틀러에 이어 나치 독일의 2인자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보다 그 차이가 더욱 심하여 거의 동양인에 가까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절대권력을 누리며 홀로코스트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독일군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유대인 혈통이 상당히 섞여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폴란드 혈통과 리투아니아 혈통은 확실하게 섞여 있었다. 나치당이 상당히 미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나중에 나치당이 연구하다가 그에게 유대인 혈통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다. 이에 대한 나치당의 대응은 족보 위조였는데 조사관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무엇보다 독일은 로마 제국 이래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이고 다양한 상인들, 선교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라 혼혈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역사적으로 독일 땅은 대부분 유럽의 주요 전쟁터였고 전쟁을 했다 하면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등 인접지역의 군대가 뭉치는 건 기본이었으며 멀리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체코, 세르비아, 헝가리, 그리스 등에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의 군사들까지 파병 오는 것도 일상이었다. 역사적으로 군대가 전쟁을 하고 그 땅에 주둔하면 자연스럽게 혼혈이 발생한다. 근데 여기는 어차피 다들 비슷한 백인들끼리였으니 혼혈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었고... 거기에 독일에서는 왕족들도 국가의 동맹과 공동체 구성을 위한 혼인 동맹이 엄청났다. 당장 합스부르크 가문 왕족은 아예 모토가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였다. 혈통에 민감한 왕족들도 이럴진대[19][20][21] 먹고 살기 바쁜 평민들이야... 결론적으로 독일은 혈통적으로도 유럽에서 가장 복잡한 국가였다. 되려 구석에 처박혀서 이민이 적었던 북유럽 국가들이나[22] 대항해시대 식민지 개발 이후 유럽의 전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처박혀 있던 포르투갈 등이 혈통적으로 더 단순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지역엔 순수한 아리아인 자체가 있기가 어려웠다.[23]
루돌프 헤스의 어머니 같은 경우 나치당의 인종론을 강하게 지지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스계 독일인이었고 공군 장성 에르하르트 밀히의 경우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밀히도 유대인이란 이유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그를 아낀 헤르만 괴링이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말을 하며 풀어주게 했다.[24] 등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 내부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숱한 프랑스인들을 고문해 4천명을 죽인 리옹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계였고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 폴란드인을 학살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폴란드계였다.[25]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이 주장한 인종주의가 독일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그들의 '관념'에만 근거를 둔 피상적이고 맹목적인 환상에 불과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애당초 나치당은 북유럽에 가까운 독일 북부가 아닌 남부 바이에른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당시만 해도 당원 상당수는 눈만 파랗고 나머지는 갈색머리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알프스 인종'[26] 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 때문인지 몰라도 문학 작품에 인종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캐릭터가 정작 자신들이 혐오하는 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일종의 클리셰가 많이 적용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 순수 혈통을 중시하지만 정작 자신은 머글 혼혈인 볼드모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의 아돌프 히틀러와 아돌프 카우프만 등. 한나 아렌트의 저서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6. 픽션에서[편집]
- 은하영웅전설의 열악유전자 배제법이 이것을 모티브로 한 듯. 게다가 그 법안의 발안자가 열악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는 것까지 똑같다. 그나마 은하제국은 나치만큼 미치지는 않았는지 발안자가 죽고 나서 사문화의 형태로 법안을 엎어 버렸다.[27] 하지만 이미 전 인류의 1.3%인 40억 명이 죽은 뒤였다. 그리고 클리셰 그대로 후세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루돌프 대제는 유전병 인자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근거로 루돌프가 여러 총희들 사이에서 본 아이들 중 유전병 환자들이 많았던 점이 거론되며 작중에서는 루돌프 대제의 후손인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나 자비네 폰 리텐하임에게 유전병 인자가 있다고 밝혀졌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서는 당시 현실을 반영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B.J. 블라즈코윅즈가 입원했던 병원[28] 에서 주기적으로 나치 병사들이 와서 장애인들을 넘길 것을 강요했고[29] 마지막에 병원 폐쇄가 명령되자 데스헤드 특공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장애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B.J. 블라즈코윅즈가 깨어난다. 저항군의 멤버 중 클라우스 크로이츠는 원래 독일 국방군 출신의 순수 아리아인이었지만 장애(평발)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은 물론 아내까지 살해당하자 나치에 대항하여 싸우게 된다. 크라이서우 서클의 맥스 하스가 이 실험의 희생양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어인이 처음 시설에 갇힌 방 이름은 T-4이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장애인 혐오를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면이 있다.
- 세계대전에서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를 다룬 미드 높은 성의 사나이에선 미국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T-4 작전이 광범위하게 시행되며 SS 지휘관 존 스미스의 아들 토마스가 자신의 선천적 장애를 자진 신고하여 순교자로 추앙받는 장면이 나온다.
- 영화 작가 미상(2018)에도 T-4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어 학살당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심각한 정신적, 신체적 장애가 있다면 T-4 프로그램 집행을 위해 지정된 병원으로 보내져 곧바로 학살되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열성 유전자로 분류되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았다. 심각한 조현병 환자였던 주인공의 이모도 처음에는 불임수술 대상이었으나 조현병이 심한 것을 확인한 의사의 지시로 지정 병원으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 근육조선에선 히틀러가 이를 원래 역사대로 시행하는 바람에 분노한 대한공화국이 참전하여 독일을 근육하게 된다.
- Hearts of Iron IV의 나치가 승리한 대체역사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선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하인리히 힘러가 쫓겨나 세운 SS 부르군트 기사단국에서 T4 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장애 혹은 그와 비슷한 징후가 있다면 "인종의 순수성"이라는 명목으로 고위층 간부들의 아이까지 안락사 시키는 정신나간 행보를 보이고 있다.
7. 유사 사건들[편집]
- 터스키기 매독 생체실험 사건- 실제로 이 사건에 가담한 의사들은 "사람들은 어차피 가난해서 치료도 못 받고 죽을 사람들인데 그냥 죽을 바에야 의학 발전에 기여하고 죽는 게 낫지 않는가"라는 마인드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