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 Global Holding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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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초창기
2.2. 전성기
2.3. 위기
2.4. 몰락
2.5. 그 이후
3. K-1 룰
4. K-1 체급
5. 역대 챔피언
6. 한국에서의 인기
7. 단체 운영
8. 기타



1. 개요[편집]


공식 홈페이지

과거 일본 최대의 킥복싱 단체로 초창기에는 아래 K-1이라는 이름의 기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킥복싱, 가라데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이종격투기스러운 이미지였고, 전성기에는 'K-1 히어로즈'라는 브랜드로 종합격투기 대회도 운영하였지만 전체적으로 K-1은 킥복싱 단체로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2011년부터는 모회사가 바뀌면서 일본 단체도 아닌데, 현재 일본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기업가가 K-1의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으며 본부는 홍콩에 두고 있다.

한국일본에선 2000년대 한때 높은 네임벨류를 자랑하기도 했으나, 후술되어있듯 지금은 위상이 많이 추락한 상태다.

K-1의 K는 Karate, Kickboxing, Kungfu, Kempo, Kakutougi, Tae Kwon doKing을 정한다는 의미다.


2. 역사[편집]



2.1. 초창기[편집]


K-1의 시초는 1993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수도 단체 정도회관의 관장인 이시이 카즈요시가 글러브를 착용하고 안면가격을 포함하는, 극진공수도와의 차별화된 공수 대련 규칙을 도입하여, 수련생들을 격투기 시합에 내보낸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킥복싱이나 무에타이 시합 등에 나간 정도회관 선수들은 '가라데 VS 기타 무술'혹은 '일본 VS 외국'의 이미지를 가지고 일본 팬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는데, 이 시합들이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선수가 바로 가라테 월드컵에서 극진회관의 윌리 윌리엄스[1]를 꺾고 우승했던 정도회관의 에이스 사타케 마사아키이다. 사실 이 당시 사타케는 가라데 룰에서는 적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사타케가 이긴 윌리 윌리암스는 극진회관 최강에 가까웠고, 앤디 훅과의 대결에서도 무승부를 거쳐서 격파로 승리하는 등 잡을 선수는 거의 다 잡았다. 이후 프로레슬링 Rings에도 참가해서 괜찮은 경기를 했고[2], K-1 초기에 알려진 스탠더맨이나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에서도 승리한 적이 있을 정도이고, K-1 직전에 열린 대회에서는 피터 아츠와도 무승부였다. 사실 K-1은 사타케 마사아키가 세계에서 먹힌다는 것에 기대를 걸고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정작 사타케는 1회 대회에서 4강 브랑코 시카틱과의 대결에서 패배, 2회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피터 아츠와의 대결에서 판정패 하는 등 극초기에만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결국 무사시에게 밀려나고, 이시이 관장과 대립하면서 정도회관을 떠난다.

이시이 관장은 초창기의 종합격투기 대회였던 Rings 대회가 끝나고, 링 위에서 '내년에는 총 상금 500만 달러(대략 50억) 상금을 걸고 전세계에서 최고의 격투가들을 데려와 시합을 펼치겠다'라고 했는데, 여기에 후지TV라는 거대 스폰서를 얻으면서 K-1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눈이 휙휙 돌아가는 상금에 눈이 멀고 피터 아츠, 어네스트 후스트, 브랑코 시카틱 같은 선수들이 시합에 출전하며, 일본에서는 사타케 마사아키가 출장한다. 대회우승 상금은 10만 달러. 사실 이것마저도 세금을 피하기 위해 대전료를 낮춰 발표하는 것은 일본 격투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정도의 돈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자세한 내막은 후지타 카즈유키 참조. 설령 진짜 10만 달러였다고 해도 순수하게 입식타격기만으로 복싱을 제외하고 우승시 1억여원 상당의 상금이 주어지는 대회는 당시 없었기 때문에 진짜로 계좌에 꽂아만 준다면 엄청난 상금이라 볼 수 있었다. 이후 K-1 WGP 우승상금은 꾸준히 증가했다. 예를 들어 2003년도 우승자인 레미 본야스키가 받은 공식 상금은 40만달러.

시합은 대 성공으로 끝난다. 이후 K-1은 정기적으로 시합을 열며 선수들을 불러 모았는데, 명성과 돈 덕택에 다른 격투기 시합에 등장 안하던 선수들이 하나둘씩 참가하며 시합의 질도 올라갔다. 97년에는 프로 격투기대회에 참전 안한다던 극진회관마저도 선수들을 보내며 일본인들의 큰 관심을 얻게 되며, 근육덩어리 괴수로 알려진 밥 샙의 참가로 엔터테인먼트성도 크게 상승했다.


2.2. 전성기[편집]


그 여세를 몰아 2000년대 중반부터는 전 세계를 돌며 WGP 시리즈를 열게 되었으며, K-1이 지나치게 거인 위주로 시합이 펼쳐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경량급인 K-1 MAX 시합도 열리게 된다. K-1 MAX의 경우 파워는 모자라도 매우 빠르고 스피디한 시합 양상으로 인해 월드그랑프리로 대표되는 기존의 K-1시합과는 또 다른 재미를 주고 있다. 또한, 태국 무에타이의 전설적인 낙무아이들도 끌어들이며 질적으로 발전한 시합을 보여주었다[3]. 대략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는 실력과 파워를 겸비한 훌륭한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도 시합을 열면서 상당한 관심을 모았다. 또한 'Fighting Network'라는 지역 기반 대회를 열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복싱을 위협하는 차기 격투기 시합으로 기대를 모았었다.

그러나 이시이 관장이 K-1을 위해 탈세를 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다가, 결국 사실로 드러나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 후로는 정도회관은 약간 뒤로 물러나고 후지TV의 타니가와 프로듀서가 시합을 주최하게 되면서 일이 조금씩 틀어졌다.


2.3. 위기[편집]


이시이 관장 시절에는 격투가의 실력을 위주로 선수를 데려오던 반면, 타니가와 프로듀서 체제에서는 엔터테인먼트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에[4] 아케보노 등 온갖 입증되지 않은 선수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TV연예인, 야구 선수, 축구에 한국에선 씨름선수들까지 데려가려 했다. 최홍만 역시 이때 발탁.[5] 거구에다 강력한 힘에 악역 이미지까지 겹치면서 경기 실력 자체보다는 엔터테인먼트성으로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떡밥성 막장 매치는 처음 한동안은 꽤나 이슈거리를 만들었으나, 이후 점점 서커스성의 떡밥매치에 의존한다는 인식을 주면서 격투기 팬들이 돌아서게 만들고, 시청률과 인기의 저하를 궁극적으로 막아내지는 못했다. 게다가 K-1 MAX에서 마사토를 챔피언으로 만들려고 계속 룰에 손을 대다보니 킥복싱도 무에타이도 가라데도 아닌 요상한 룰이 되어버린 것도 문제가 좀 있다. 거기에 K-1 최대의 문제인 무사시로 대표되는 편파 판정문제도 이때쯤 심해지기 시작했다.

K-1의 경기 내적인 부분을 들여다 보자면 실력과 하드웨어를 겸비한 세미 슐트가 등장, 2005년 첫 우승을 거둘 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수층이 정체되어있던 K-1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많은 팬들이 K-1에 기대[6] 를 갖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피터 아츠, 제롬 르 밴너 등의 인기 많은 베테랑 파이터들이 부상으로 제 기량을 내지 못하고 있었고, 그나마 건졌던 2세대 파이터 스테판 레코와 알렉세이 이그나쇼프는 각기 MMA 데뷔, 알콜 중독 등으로 삽질을 하며 부진에 빠지는 둥 WGP급 파이터들이 줄어들면서 선수층의 질적 하락이 찾아오고 있었다. 때문에 2003~2004년은 말 그대로 레미 본야스키와 무사시 두 명이서 다 해먹고 있었는데 막상 그 두 명은 지나친 판정 위주의 경기 플레이로 인기가 없었고, 단체 자체는 판정 논란과 서커스 매치로 인기를 한참 까먹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챔피언 세미 슐트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세미 슐트가 정형화된 패턴[7]으로 장기집권을 해 나가자 "맨날 슐트만 이기고 WGP를 우승하니 뻔하고 재미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시청률이 더 떨어졌다.[8][9] 때문에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어차피 슐트가 독주할게 뻔한테 차라리 WGP 토너먼트 자체[10]를 없애는게 조금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WGP 토너먼트 자체가 K-1의 근간이자 K-1만이 가진 특수성이니 만큼 없애기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피터 아츠의 부활과 바다 하리라는 초대형 신인의 등장, 그리고 갑툭튀한 알리스타 오브레임의 등장으로 약간 나아지게 되었으나 이 시기에는 K-1은 이미 경영난으로 몰락이 시작되고 있었다.


2.4. 몰락[편집]


2010년을 마지막으로 XTM과의 방영권 계약도 끝나면서 근 11년간 이어져 오던 국내 중계도 불투명한 상황이 되었으나, 2013년 ETN이라는 채널에서 2012년에 열렸던 대회만 방영해주었다. 방영시간은 주로 밤 11시 경.

2011년부터는 돈이 없어서 자국 선수들 파이트머니도 못주는 상황이 벌어져서 선수들이 떠날 정도로, 재정난이 악화 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2011년 10월 현재는 후지 TV와의 방영권 계약도 끝나면서 이제는 일본에서조차 인터넷 유료 중계로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 후지 TV의 지난 K-1 경기 방영분 영상에 대한 권리는 2013년 Glory가 인수해 버렸다. # 덕분에 K-1은 현재 개최하는 대회 프로모션 과정에서 과거의 후지 TV 영상자료는 전혀 쓰지 못하고, 중국이나 한국에서 중계한 화면을 따와 사용하고 있다.

2011년 WGP도 일본이 아닌 중국에서 개최된다, 개막전은 열지 않는다는 둥 여러가지 문제로 시끄러웠다가 결국엔 K-1의 가장 큰 이벤트인 WGP가 취소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후 MAX 대회가 몇 번 열리고 이 후 약 5개월 간 아무런 대회도 열리지 않으면서 2012년에는 결국 사실상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는가 했는데, 이 시기쯤 출소한 이시이 관장이 다시 단체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단 K-1 자체는 김건일 前 서든어택 게임하이 대표 휘하의 K-1 Global이라는 회사에 매각되었고, 이후 아마추어 대회는 이시이 관장이 관리하고, 프로 대회는 K-1 Global이 관리를 하는 형태로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니가와 FEG 프로듀서가 공식적으로 K-1 프로듀서를 사임하게 되었다. 또한 입식무대로 복귀한 미르코 크로캅을 다시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터 아츠, 제롬 르 밴너, 세미 슐트 등의 베테랑 파이터들이 K-1과 다시 계약을 하지 않고 Glory 등의 다른 단체로 떠나버렸고[11], 바다 하리는 살인 미수 범죄자 가 되어 앞으로의 활동 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라[12] 흥행 파이터가 대거 떨어져나간 상태에서 불안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바다 하리가 2013년 2월 경에 다시 출소하여 현역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나 잦은 수감생활로 경기력이 막장이 되어버렸다.

2012년 5월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대회가 있었고 후에 2010년 이후로 열리지 않았던 WGP도 다시 열리는 등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프로듀서로 취임한 마사토가 프로듀서 직을 사퇴하고, Spike TV에서 중계를 취소하는 등 다시 위기에 빠진 상황.

2013년 그나마 흥행카드였던 크로캅마저 Glory로 이적했다. 사실 2011년 FEG의 손을 떠난 이후 중소단체만도 못한 규모가 되어버린지라 이제 흥행은 뒷전이고 대회 개최만 해도 다행일 정도인 상황이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2011년 이후의 K-1은 사실상 산소 호흡기만 붙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봐도 될 듯 싶다. 이미 대중들은 물론이고 다수 격투기 마니아들로부터도 잊혀진지 오래이니..


2.5. 그 이후[편집]


미르코 크로캅의 이적 이후 사실상 중량급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고 70kg World MAX 토너먼트만 개최하다가, 2014년 5월에 K-1 World League의 발족이 발표되었다. K-1 Global과는 별도의 단체인 K-1 실행위원회라는 곳에서 주최하며, 마에다 켄사쿠, 코히루이마키 타카유키, 카지와라 류지 등 일본 킥복싱계의 전성기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중심이 되며 2014년 11월 3일에 아마추어 대회인 K-1 Challenge를 개최하면서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출범 직전에 K-1 World League에서 K-1 World GP로 명칭을 개정하였으며, K-1 Global과의 협의를 통해 일본내에서 개최되는 대회명에는 K-1 World GP in Japa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2016년 하반기부터는 중량급이 중심이 된 K-1 World GP Euro가 유럽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서커스화 된 대회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싶었는지, 신생 K-1을 표방하며 2014년 11월의 대회가 제1회 K-1 World GP[13]로써 개최되며, 홍보 차원에서 지상파 채널인 TV도쿄 '신 K-1 전설'이라는 프로그램도 방송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변혁의 시도들이 부활의 단초가 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듯.

2020년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흥행을 강행한 K-1 K'Festa 3가 AbemaTV시청자 70만이 넘게 나오면서 어느정도 흥행궤도에 오르는데 성공하는 듯하다.


3. K-1 룰[편집]


K-1룰은 원래 킥복싱 시합 룰에 가라데 시합의 토너먼트 제를 섞고, 타 격투기 수련자들이 페널티를 보지 않게 팔꿈치와 빰 클린치를 줄인 것이다. 그런데 K-1이 인기를 끌자 이 룰을 사용하는 시합이 대폭 늘어나서, 무에타이나 킥복싱 시합 룰이 오히려 보기 힘들어 졌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일본인 팬들을 위해 일본인 선수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고 룰을 계속 바꾸다 보니 룰에 무리수들이 생겼다.

  • 가라데 토너먼트는 기본적으로 무체급 시합을 최고의 도전으로 본다. 작고 약한 사람이, 크고 강한 사람에게 도전해서 싸워 이길수도 있는 여지를 열어주기 때문. 이 점에 착안해서 K-1시합도 한동안 무체급이었다. 무체급에 키 제한 등도 없는 이유도 최강자를 뽑아보자는 모토와 더불어 가라데 시합도 그렇기 때문. 그런데 사실 글러브를 끼는 입식 격투기에선 신장과 파워가 굉장한 어드밴티지를 주는지라, 점점 거인 싸움이 되었다. 이는 결국 신장과 파워에서 기본적으로 밀리는 아시아권 선수들의 부진으로 이어진다.[14]

  • 어느 격투기에도 페널티를 안 주려다 보니, 무에타이에는 상당한 페널티가 걸린다. 빰 클린치도 점수에 포함이 안되고, 팔꿈치도 안되고, 무에타이 경기만 뛰던 선수들에겐 생소하게 펀치난타와 콤비네이션이 매우 중요해진다. 게다가 보통은 체급에 맞춰 시합을 하다가, 무체급 시합이 돼버리니 보통은 상대가 나보다 체급도 우위다. 때문에 무에타이 베이스의 선수는 상당한 자기개조를 해야 K-1시합에서 안정적으로 뛸수 있다... 가라데는 글러브와 링이라는 공간에 적응을 해야하고, 그나마 페널티를 덜 받는 게 킥복싱이다. 태권도산타 선수들은 거의 적응을 포기해야 될 상태.

  • 자꾸 K-1밖에는 없는 이상한 룰들을 만들기 시작. 일본인 선수들이 클린치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고 지루한 경기를 펼치는게 반복되자 클린치를 계속하면 감점을 먹도록 제한을 뒀다. 그리고 클린치 상태에서 세미 슐트같은 장신 선수들이 상대 선수의 머리를 허리께에 붙잡고 무릎치기를 하거나, 쁘아까오 같은 무에타이계 선수들이 빰으로 상대를 뒤흔들어 놓고 무릎치기를 해서 KO를 이끌어 내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무릎치기 KO로 대부분의 시합이 해결되자, 클린치 상태에서 무릎차기 2회 이상 금지 룰을 만들어 버렸다. 일본의 킥복싱 영웅인 마사토가 쁘아까오에게 이런 패턴으로 털려 생긴 이유가 가장 크다.[15]

원래 상대를 붙잡은 상태에서의 공방과 무릎치기는 무에타이에서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이 또한 복싱과는 다른 중요한 기술중의 하나로, 응용도 다양하게 가능하고 무에타이 시합상에선 오히려 펀치 보다도 이 기술이 점수가 높다. 그러나 이것을 금지시켜 버리면서 현재의 K-1 시합은 킥좀 들어간 복싱 처럼 변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빠르고 화려한 펀치+킥 콤보나 스피디한 전개가 이뤄지긴 했으나 시합의 변수나 깊이가 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또 마사토같은 인기선수를 위해 룰을 수시로 바꿔대다보니 현재의 룰은 복싱에게도, 무에타이에게도 불리한 일본산 킥복서를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K-1 특유의 룰이 이후 Glory 등의 유수 단체에도 영향을 미쳐 무에타이 등 여타 입식격투기와 차별화되는 킥복싱만의 고유한 특성이 되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킥복싱 단체들은 클린치 니킥, 킥캐치, 빰 등을 엄격히 제한하여 스피디한 공방을 지향하는 룰을 따르고 있다. 혹은 K-1룰 매치와 무에타이 룰 매치를 구분하여 대회를 치르기도 한다.

원데이 토너먼트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데[16], 소수의 선수로 여러 경기, 다양한 매치업을 하루에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선수들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 전 경기를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유불리가 심하게 갈리며 경기 순서에 따라서 쉬는 시간도 다르다.[17] 3분 3라운드로 짧긴 하지만 판정이 동률일 경우 연장 라운드까지 하기 때문에 이기고 나서 부상 등으로 기권하는 경우도 있는 편. 이 토너먼트 방식 덕분에 제롬 르 밴너, 레이 세포 등 화끈하게 치고박는 스타일보다는 어네스트 후스트, 세미 슐트 등 지능적으로 체력을 아껴가며 싸우는 아웃복서 스타일이 결국 최종 우승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4. K-1 체급[편집]


가라테에서도 적잖은 영향을 받아서인지[18], 가라테 경기처럼 키와 체중 둘 다 고려한다.

구분
표준키
표준체중
라이트급
158cm
52kg
웰터급
169cm
67kg
슈퍼웰터급[19]
171cm
70kg
미들급
174cm
74kg
크루저급
182cm
85kg
헤비급
190cm
99~100kg
비스트체급[20][21]
제한 없음[22]
제한 없음[23]


5. 역대 챔피언[편집]




6. 한국에서의 인기[편집]


한국에선 2000년대 후반까지는 입식 격투기 쪽에선 대표 주자였지만, 엔터테인먼트 강화로 어중이 떠중이들이 다 몰려온데다가, 정작 실력있는 선수들은 대우가 나빠 나가버리고 세미 슐트의 독재가 계속되면서 인기가 줄어들었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 진출도 노렸었지만 그때와는 달리 선수층도 얇아지고 질도 많이 하락한 상태라 현재는 당장 일본내 시청률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일본에서는 권투 인기 상승에 편승하고자 복싱 경기를 함께 유치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팬들이 대거 복싱으로 이동해버렸다. 단체 운영에 대한 루머들도 흉흉하다. 심지어 이제 TV 방송국들도 더이상 방송 계약을 하기 싫어할 정도였다.

국내에선 룰이나 체급 구분 등 운영상의 허점을 까면서 개그원, 게이원, 개그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복싱팬들과 이상하게 자주 부딪치는 편인데[24] 주로 복서의 위빙을 보고 니킥 한방이면 끝난다고 한다거나 로우킥 맞으면 복서고 뭐고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25]와 입식격투기에서 저조한 성적을 남겼던 파이터들이 복싱으로 넘어가서 우수한 기록을 냈기 때문에 복싱보다 더 세다는 주장을 하는 부류가 있다. 하지만, K-1 등 메이저 입식대회의 강자들이 복싱 무대에선 소규모 지역 대회 한정으로만 활약했고, 메이저 무대까지 올라간 선수는 찾아보기 어려운데다 복싱에서 성과를 냈지만 입식에선 결과물이 좋지 않았던 선수들 상당수가 복싱계에서 더이상 먹히지 않을 정도의 노장이었다. 또한, 복싱 PPV에서 거둬들이는 수익이나 파이트머니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왜 복싱까지 진출한 수많은 입식격투가들 그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킥복싱계로 돌아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일부 K-1 파이터[26]들이 복싱에서 굴욕적인 경기력을 낸 경우도 있다. 물론, 레이 머서처럼 복싱계 강자가 아무리 노장이라곤 해도 입식격투기에서 처참한 굴욕만 당한 경우도 있어서 룰이 다른 두 종목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긴 어렵다.[27]

다만 K-1을 위시한 일본 단체들이 경영난으로 몰락한 이후로는 UFC로 팬들이 대거 이동함에 따라 입식 격투기 팬들이 완전히 사라지다시피한 상태이다. 뭐 애초에 K-1 이외의 킥복싱 단체는 인기가 없었으니...


7. 단체 운영[편집]


일본계 격투기 단체의 악습의 결정체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개판인 운영으로도 유명하다. 격투기 시합 주제에 체급은 2개 뿐이고 그나마 나누는 기준도 -70 kg급, 무제한급인데 이 기준에도 논란이 많다. 저 기준대로라면 복싱으로 치자면 7-8 체급의 선수들이 한 체급에서 뛰게 되는 셈인데다가 거인 선수들의 득세를 피할 수가 없다[28]. 격투기 대회의 체급이 이렇다는 것 자체가 막장이라는 증거. 2008년경부터는 체급별 타이틀도 신설하는 등 체급 분화[29]를 시도했지만 K-1은 원매치가 중심이 아닌 토너먼트 매치가 중심이었던 단체였기에 사실상 체급 구분 및 원매치 타이틀의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2014년부터는 70kg 이하에서 체급 세분화가 시행되고 있다.

게다가 과거 프라이드를 비롯한 일본 단체의 악습으로 대전료 뻥튀기, 약물 논란 등도 여전하다. 최홍만이 계약금 10억에 대전료가 수억을 호가한다고 선전해대지만 실제 대전료는 한참 모자란다는게 정설. 일본 내에선 쉬쉬하지만 미국 대회의 경우 대전료가 공개됐는데 K-1 최고 인기 선수 중 하나인 레이 세포의 한경기 대전료가 6000달러였다. 그날 최고 대전료도 간신히 1만 달러를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룰 개정도 개판이라서 심지어 시합 전날 룰이 바뀌어서 선수들이 특정 기술을 반칙인 줄 알고 못쓴 사례도 있다.[30] 여기에 판정 시비도 빈번해서 엔터테인먼트 이전에 스포츠로서도 수준 미달이라는 평.

가장 큰 문제는 늦은 오퍼와 갑작스런 상대 변경. 선수가 부상당해 아웃되어도 이게 언론에 알려지고 대체 선수를 찾는게 빨라야 5일전에 이루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심하면 하루 전이나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경기를 준비시키는 경우도 있다.[31] 또한 원래 오퍼 당시 알려진 상대가 갑작스레 바뀌는 경우도 있으며[32], 메인 이벤트 같은 중요한 경기 조차 5일 전에 오퍼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33] 언론에선 약 1~2달 전부터 정상적으로 경기를 잡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대부분의 경기를 선 발표→후 오퍼로 경기를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선수들 부상이 많이 터지면 대회 자체가 아작나는 경우가 잦다. 이런 식으로 대회를 운영하려다가 말아먹었던게 다이너마이트 미국 대회. 자세한 것은 최홍만 항목 참조.

2000년대 중후반대, 그러니까 밥 샙과 최홍만의 성공 이후에는 엔터테인먼트적 성향이 짙어지면서 씨름, 스모 선수들을 필두로 야구, 검도, 발레, 투포환 선수같은 격투기와는 거리가 먼 베이스의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심지어는 코스프레 선수[34], 개그맨[35]에 아예 설정으로 만화 캐릭터[36]를 출연시키는 등 막장 일로를 걷고 있다.

Pride의 몰락 이후 드러난 약물 관련 스캔들도 단체 운영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2007년 라스베가스 대회 당시 두 파이터가 약물을 복용했다가 적발된 전력이 있었고, 자빗 사메도프가 많은 네덜란드 파이터들이 약물을 한다고 폭로하여 논란이 되었다. 특히나 네덜란드는 약물 규제 법률이 없는 만큼 의혹의 눈초리는 더욱 컸다. 거기다가 의혹을 받던 파이터 중 한명인 바다 하리가 살인 미수혐의로 수색을 받을 당시 집에서 약물이 발견되며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2011년 이후로는 아예 파이트 머니를 무기한 외상으로 지급한다는 것이 밝혀져 해외 선수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2011년 7월까지 체불된 파이트머니는 약 8억엔. 관련기사 #1, #2 돈 달라고 했더니 계약 끊는다.라면서 협박까지 했다고.(참고로 일본 선수들의 증언이다.)

마사토 같은 인기 선수도 은퇴하고 이렇다 할 흥행카드가 없기 때문에 2009년 안에 타개책을 찾지 못하면 단체 자체가 위험할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최대 자금줄이던 한국 방송국과의 계약도 결국 끊어졌고 자금난 때문에 대회 개수를 줄이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게다가 일본 복싱에 가메다 형제라는 스타가 탄생하는 바람에 비슷한 경쟁 종목인 K-1으로선 더욱 흥행에 위협을 받는 형편. 그런가 하면 반대급부로, K-1 MAX 는 일본인 선수들의 평균 기량이 높다보니 반대급부로 고만고만한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스타 플레이어가 더이상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그나마 챔피언이라고 올라오는 애들은 또 경기가 그다지 재미가 없거나.

참고로 방영권 계약이 상당히 복잡하다고 한다. 각 시리즈별로 방영권이 따로 있어서 WGP 시리즈 방영권 따로, MAX 시리즈 방영권 따로, 연말대회 방영권 따로의 방식으로 같은 K-1이라도 방영권이 전부 따로따로 논다고 하며[37] 생방송도 방송국 마음대로 못 한다고 한다.


8. 기타[편집]


킥복싱무에타이가 인기있는 유럽동남아시아와는 달리, 권투종합격투기가 주류인 북미에선 인지도가 매우 낮다. 한 예로, K-1의 베테랑 제롬 르 밴너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 이 때문에 팀 실비아와의 대전이 UFC측에서 여러번 무시당했다[38]. 한국에선 K-1과 계약했던 모 방송국의 언론 플레이로 메이저 격투기 단체로 인식된다. 한마디로 전세계에서 복싱보다 K-1이 인기있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39]. 현역 복싱 세계 챔피언에게 K-1 진출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실제로 현역 복싱 세계 챔피언이 타이틀을 반납하고 K-1으로 갔다.물론 이것을 K-1이나 한국 케이블 방송국, 시청자의 탓으로 돌릴 이유는 없다. 한국 복싱의 몰락은 한국 복싱계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다. 실제로 K-1이 한국에서 몰락한 이후에도 한국 복싱은 이제는 종합격투기에 밀려 여전히 인기가 없는 상황이다.

창시자인 이시이 카즈요시가 한국은 역사 조작의 국가라는 혐한스러운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라이벌 단체격이었던 Pride의 팬들과 K-1의 팬들은 관계가 별로 좋지 못했는데, 2007년 후반 경 부터 PRIDE의 선수층 중 일부가 K-1에 흡수되자 이런 기류가 확실하게 보였다. 2008년 다이너마이트는 Dream vs K-1 형식으로 PRIDE의 성지인 사이타마에서 개최되었고[40], 결과는 MMA파이터가 K-1 파이터를 입식에서 압도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에이스급 파이터인 무사시가 클린치를 할때마다 야유가 터지는[41] 약간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WGP 결승에서 대형 사고를 쳤던 바다 하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또한 PRIDE에서 K-1으로 넘어갔던 사쿠라바 카즈시와 타무라 키요시는 이 날 메인 매치를 치렀는데 관중들 반응이 아예 무반응이었다. 반대로 카와지리가 K-1 MAX 무대에서 마사토를 상대했을때에는 카와지리가 폭풍같은 야유를 먹었다. 다만 마사토의 경우에는 프라이드와 K-1을 불문하고 거의 레전드 취급을 받는지라 사이타마에서도 환호를 받았다. 물론 K-1마저 몰락하고 UFC 천하통일 체재가 된 2011년 이후 이런 단체 팬덤끼리의 대립 구도는 거의 사라지고 사실상 위 아 더 월드가 되었다. 어느정도냐면 추성훈마저 환호를 받을 정도.

국회폭력을 국K-1으로 변형해서 부르기도 한다. 싸우는 모습이 격투기 같다고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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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곰과 스파링을 한 것으로 유명했던 무술가. 별명은 곰잡는 윌리암스. 안토니오 이노키와의 이종 경기로도 알려져있다.[2] 10전 6승 3무(시간경과) 1패였다. 1패는 오른쪽 갈비뼈 골절에 의한 부전패로 이 이후 링스 출장이 끝난다.[3] 쁘아까오[4] 사실 여기에는 이시이 시절에 나온 밥 샙의 성공이 컸다.[5] 그래도 최홍만은 아케보노나 몬타냐 실바 같은 다른 이벤트형 거인 파이터들 중에서는 기량이 그나마 출중한 편이어서 탑급 선수들 상대로도 꽤 선전한 편이었다. 수술 후 급속히 몰락한 게 문제지만...[6] 저 선수를 누가 이길까?라는 새로운 화제가 생기면서 매니아들이 간만에 K-1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7] K-1 측에서는 니킥 제한, 딥킥 제한 등으로 슐트를 약화시켜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복싱스킬이 향상되고, 경기 운영이 노련해지면서 되려 슐트를 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8] 한 예로 슐츠가 없었던 2008년 WGP는 이전보다 시청률이 대폭 상승했다.[9] 당시 또 다른 독주 체재를 이어나가던 효도르의 경우에는 슐트같은 압도적인 탑독 챔피언이 아닌, 언더독 챔피언성향이 있었기에 "효도르가 저 도전자를 어떻게 이길까?" 하는 화제가 더 많았다. 때문에 독주를 해도 재미없다고 까이지는 않았다.효도르의 실력 자체는 역대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워낙 막강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 부터 이미 헤비급 치고는 너무 작았기 때문에 실력과는 무관하게 언더독 성향이 있었다. 효도르가 무패 행진을 이어가면서도 언더독 성향이 있다보니 챔피언을 응원하는 쪽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도전자를 응원하는 쪽에선 이번에 잡을 수 있을까의 대립구조가 형성된 것.[10] 여기에는 WGP 개막전 출전권 지급 방식이 큰 몫을 했다. WGP 개막전 출전권은 전 해 WGP 결승전 토너먼트 진출자, 지역 토너먼트 대회 우승자, 그리고 인기 투표로 선정된 선수에게 주어졌는데, 노화로 인해 기량이 하락하고 있던 파이터들을 인기 투표로 끌어올리는 반면에, 실력있는 유럽 신인 파이터들은 지역 대회 출전권이 걸린 Fighting Network 대회에서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가 떨어져나갔다. 이렇듯 유럽 지역 대회는 대회 출전권을 기리는 토너먼트까지 있었고 이 토너먼트마저 매우 치열했었는데 아시아 지역 대회 같은 경우에는 입식 격투기에 데뷔하는 선수가 WGP 출전권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등 상당히 부조리한 모습들이 나온 덕분에 때문에 팬들이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11] 당시 마지막 WGP 챔피언이었던 알리스타 오브레임은 UFC로 이적했고, 피터 아츠와 세미 슐트 외 다수의 파이터들은 It's Showtime을 흡수한 Glory(골든 글로리에서 주최하던 그 대회 맞다.)로 이적했으며,(여기에 아츠는 6경기후 은퇴하겠다고 한 상태이며 세미 슐트는 2013년 6월 은퇴했다.) 제롬 르 밴너는 마이너단체와 프로레슬링을 전전하다가 Glory와 계약했다. 일본 에이스였던 후지모토 교타로는 복싱으로 전향했고, 레이 세포는 MMA 전향 후 에이전트로 활동하며 사실상 현역에서 물러난 상황. 2012년 은퇴 번복을 한 레미 본야스키도 Glory와 계약했다가 2014년 재차 은퇴했다.[12] 첨언하자면 바다 하리는 과거에 '30세에 은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2013년 기준으로 바다 하리는 28세이다. 길어야 2년 이내에 은퇴하게 된다. 결국 2015년 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Glory에서 선수생활한것 보면 은퇴를 번복한 듯하다.[13] 기존의 WGP와 달리 중량급 경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체급을 통칭하는 이름.[14] 근데 이건 일본인들 심성 자체가 작은 파이터보단 덩치가 큰 파이터를 더 선호하는 탓도 있다. 스모가 왜 그런 기괴하게 거대한 돼지들의 무대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자.[15] 룰 계정이후 마사토가 판정승으로 복수에 성공한다.[16] 초기의 격투기 대회는 레슬링, 태권도 등의 방식을 따라서 토너먼트 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UFC도 1999년까지는 토너먼트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17] 물론 경기를 바로바로 이어서 하는 것은 아니고 사이사이 슈퍼파이트가 있긴 하다.[18] 킥복싱의 킥 기술은 가라테의 킥 기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19] 아마추어 한정[20] = 무제한급 (100kg 이상)[21] 밥 샙(2m, 160kg)의 별명을 따서 만들어진 체급[22] 주로 200cm / 201cm[23] 주로 160kg / 162kg[24] 주 전장은 디시인사이드 복싱 갤러리와 격투 갤러리 두 곳이었다.[25] 물론 이는 복싱 선수들의 저조한 입식 격투 성적도 한몫했다.[26] 대표적으로 레이 세포. '6라운드 검정 복서' 얘기만 해도 웬만한 격까들은 다 알고 있다.[27] 정말 비교가 어려운 부분이, 비탈리 클리츠코처럼 복싱에서 킥복싱으로 넘어가 맹활약한 후 다시 복싱으로 돌아왔을 때 레전드가 된 선수도 있고, 사마트 파야카룬처럼 무에타이의 전설인 동시에 복싱 메이저기구인 WBA 챔피언을 차지한 인물도 있다. 반면, K-1 MAX의 레전드인 고바야시 마사토는 프로복싱 진출에 실패하자 킥복싱으로 진로를 변경하였는데, 결국 킥복싱 레전드가 되었다. 마이크 타이슨과 시합까지 가졌고 IBF 챔피언이었던 프랑수아 보타는 피터 아츠같은 강자를 잡기도 했고 노장이라는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킥복싱 무대 전적이 심각하게 초라하다. 복싱과 입식 모두 재능을 발휘하는 선수가 있는가하면, 한쪽의 성과가 다른 한쪽의 성과와 너무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28] 일반적으로 운동선수가 근육으로 100 kg 이상의 체중을 만드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100 kg대를 만들려면 키가 정말로 크거나 약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복싱도 헤비급의 경우 91 kg 이상으로 기준을 잡는다.[29] -100 kg급이 신설되었다.[30] 바뀐지 꽤 된 룰도 커뮤니케이션의 미숙으로 전달이 되지 않아 정찬성 선수가 반칙 기술로 상대방을 KO시키는 사건도 있었다. 오래전에 변한 룰도 전달이 안되면 이러는 판에 하루 전에 룰을 갑자기 바꾸면 경기 중 상황에서 선수, 심판이 혼란스러워져 논란이 될 수도 있다.[31] 대표적인 경우가 대회 개최 18시간 전에 투입된 김민수가 있다. UFC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에는 경기를 아예 취소시킨다.[32] 2007년에 있던 데니스 강 vs 추성훈의 경기가 이랬다. 언론에 알려진것과는 달리 데니스 강과 원래 붙게 되었던 선수는 오야마 슌고였는데 얼마 후 상대 변경 통보를 받고 놀랐다고 한다.[33] 효도르 vs 최홍만의 경기가 이러했는데, 당시 최홍만 측에서 5일전에 오퍼를 받고 어떻게 시합을 준비하냐!고 거절했다가 K-1측에서 흥행이 중요하니까 당신 의견은 상관 없다.이라고 나와서 최홍만 측에서 뻐기다가 결국 3일 전에 오퍼를 수락하고 이틀 훈련해서 경기에 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34] 다만 이 선수의 경우에는 노리고 영입했던게 아니라 영입하고 보니 덕후였던 케이스인지라 엔터테인먼트랑은 큰 연관은 없다. 무엇보다 이 양반. K-1에 오기 전에 NJKF에서 11전 11승 7KO라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시절때도 코스프레짓 했던 인간이다.[35] 최홍만의 MMA데뷔전 상대였던 보비 올로건. 원래는 예능프로에서 1회성 기획으로 출연시켰더니 당시 나름 네임드였던 시릴 아비디를 이겨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데뷔시켜버린 케이스.[36] 실제로 가면을 쓰고 출전한 선수 자체는 다나카 쇼지 선수로 대학시절 대학 레슬링 4관왕에 전일본 레슬링 7연패 등 상당한 실력의 레슬러였다.[37] 때문에 MBC ESPN에서 방영하던 시절에는 WGP와 MAX는 ESPN에서 방영하고 다이너마이트와 Hero's는 CJ미디어에서 방영했다. 이후 WGP와 MAX 방영권 계약이 끝난 후 CJ에서 전 시리즈를 한꺼번에 계약하는데 10억대의 돈이 들었다고 한다.[38] 결국 이 대결은 프로레슬링으로나마 나중에 치러졌다(...).[39] 허나 한국에서 역시 중계 계약이 끝났고 이후 국내에서 킥복싱 시장이 하락세를 겪고 있다.[40] 아시다시피 Dream은 PRIDE의 후신 격 단체이며, 이 날 출전한 Dream 소속 파이터는 대부분 PRIDE 출신이었다.[41] 물론 일본에서도 판정 논란때문에 인기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만 K-1 무대에서 최소 야유는 받지 않았는데, 이 날은 그냥 클린치가 나올때마다 야유가 폭발했고, 오히려 상대 선수였던 게가드 무사시가 환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