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A(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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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와 자유
Euskadi Ta Askatasuna

파일:ETA 엠블럼.svg
창설일
1959년 7월 31일
해체일
2018년 4월 16일
규모
불명
사령관
불명
참전
바스크 분쟁
위치
스페인 바스크

1. 개요
2. 역사
3.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바스크 민족 독립을 주장하는 단체였다. 분리주의 세력 대부분이 그렇듯 분쟁 당사자인 스페인,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테러리스트로 취급되어 왔다. 반면 현지 분리주의 성향 주민들에게는 스페인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투사로 대접받았다. 성명을 낼 때마다 항상 흰 복면과 검은 베레모[1]쓰고 나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2. 역사[편집]


바스크 지역은 오랜 기간동안 독립된 문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1933년 바스크 자치주를 선언했으나 스페인 내전 중후로 자치권을 박탈당하고 프랑코 정권에 의해 언어적, 문화적 탄압+게르니카 폭격 등의 군사작전 피해[2]를 받아 왔다. 그로 인하여 결성된 독립 운동 단체 중 급진파가 모여서 만든 집단이 ETA이다.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은 '스페인은 하나다'라는 전제를 두고 무리하게 바스크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의 민족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스페인 민족주의만 강요하였다. 스페인은 지방자치 전통이 뿌리 깊게 박힌 나라라 언어나 지방 내부의 민족주의 정도로는 가끔가다 솜방망이 처벌이나 하지 프랑코식의 대대적인 탄압 정책은 유례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반발을 받았지만, 프랑코가 워낙 군권을 확실하게 휘어잡고 있었기에 무려 40년이나 종신집권이 가능했다. 그러나 일단은 지도상으로나마 서유럽이면서도 십만 단위로 자국민을 처형하고 고문을 하면서까지 유지한 정권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 1960년대로 넘어가며 사회 각지에서 하나둘씩 서서히 저항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1959년에 바스크 지방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바스크 조국과 자유는 무장해제 전까지 약 400명의 스페인 사람을 죽였다. 스페인 구석에 있는 배우기 어려운 바스크어를 하는 사람들이 테러를 일으키면서 독립을 외치니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을 터. 스페인 현지에서도 크게 보면 주로 우익은 국가 중심주의, 좌익은 지방친화적이지만 카탈루냐, 바스크의 분리 독립이란 의제는 PSOE, PCE, CNT 같은 역사적 거대 전국 좌파 정당/단체들 또한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따라서 신좌파식 좌파 민족주의적 메세지를 종종 품는 바스크,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도 국가주의 우익이란 적은 공유해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3]

하나 이들도 강경 급진파인 관계로 필요하다면 저격, 혹은 암살을 서슴지 않았다. 그 중 유명한 사건이 1997년 미겔 앙헬 블랑코란 청년을 납치한 뒤 2일 안에 ETA 소속 죄수들을 바스크 지역으로 이송하라는 요구를 했는데, 스페인 정부가 들어주지 않자 살해한 사건이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사건으로는 전 바스크 지방 주지사가 선거운동 기간 동안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발언을 하자 선거 전날 가족들과 나들이 가러 나가는 도중 집의 대문에서 저격당해서 숨진 사례가 있다.

한편 2004년 3월 11일 발생하여 2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의 배후로 의심을 받았는데, 당시 ETA는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수사 결과 아랍 테러단체 알 카에다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이 때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였다가 비난에 시달리던 마리아 아즈나르 정권은 ETA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으나, 그간 ETA가 일으킨 사건과 비교해 뚜렷히 다른 점이 많아서 전혀 먹히지 않았다. 원래 ETA는 사전경고 후에 공격을 감행했으며, 발생 직후 스스로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당시 사전경고도 없었고 ETA 스스로 적극 부인한 데다 오히려 알 카에다 등의 아랍 테러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혔다. 결국 사건 며칠 뒤 치러진 총선에서 아즈나르 집권 여당이 참패하며 정권이 교체[4]되었다.[5] 그 외에도 1992년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세비야 엑스포까지 겹경사가 터진 해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눈은 ETA의 테러 여부에 집중했다.

그러나 정작 ETA는 1980년대부터 쇠퇴를 겪기 시작했다. 1975년 프랑코 정권 붕괴 이래 점차 스페인 전역에 민주화와 자유가 주어짐에 따라 젊은이들이 폭력투쟁을 거부하여 가입이 저조해진 상황에서 투쟁 동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바스크를 방문한 후안 카를로스 1세 부부 모욕 퍼포먼스를 감행하고 스페인 군사독재 부활을 도모하기 위해서 1981년 한해에만 수백명을 살해하는 테러를 도발하는가 하면, 바스크의 원전건설 반대 여론을 의식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원전 기사를 납치해서 처형하는 등 막장 행각을 벌이면서 바스크 민심은 ETA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이전까지는 ETA를 반프랑코 혁명집단으로 여겨서 눈감아주었던 프랑스도 태도를 바꾸어 스페인에서 테러를 저지르고 프랑스로 달아난 ETA 조직원들을 묵인하던 기존의 방침을 버리고 80년대부터는 스페인과 공조해서 모조리 다 체포하면서 국내, 국제적으로 모조리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도부 전원이 일망타진당하는 사건도 한번 있었다. 하지만 ETA 지도부는 이를 두고 매판언론의 조작이니 자본가들이 매수한 시위이니 정신승리를 시전하면서 바뀔 줄 몰랐다.

1986년 이후 혁명세도 걷히지 않았고 돈줄이 막힌 상황이었다. 바스크 주민들 역시 그 동안 '반민족적'으로 여겨지던 스페인과의 화해를 촉구하는 운동을 벌이거나 평화적으로 투쟁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2000년대 이래 ETA 수뇌부 몇몇의 재판이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행동대장 혹은 그 이상의 간부급이기 때문이다.[6] 또 다른 이유로는 2011년까지 집권했던 총리와 집권당인 PSOE가 전통적으로 지방 자치에 유화적인 좌파 사회주의 정당이라 바스크 지방과 카탈루냐 지방의 자치 및 주권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파에게도 현 스페인 정부는 상당히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건드리기보다는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이에 서로 불간섭 관계를 유지하지만 실제로는 스페인 정부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계속되는 뻘짓 끝에 세가 너무 줄어버린 ETA는 일방적으로 휴전을 수차례 선포하고 온건 민족주의자들의 연대라던가 앞으로의 무장투쟁 노선 방법에 대한 대논쟁 등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나, 온건 민족주의자들과의 제휴는 결국 이들을 매국노로 비방하고 일방적으로 연대를 파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고, 2008년에 열렸던 대논쟁은 극도로 저조한 참여 속에서 더 이상의 무장투쟁 재개는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결론으로만 이어졌다,

내부적으로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ETA는 2011년 코피 아난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무장해제를 선언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 등에서 협상의 힘이라고 다소 뻘소리를 했으나 기실은 ETA의 무대포 막가파 전략의 파행에 가까운 결과였다. 스페인 당국은 호의적인 의사를 표했는데 무장해제 비디오에서 복면 쓰고 무장자유투쟁을 뜻하는 주먹을 쥐었으니 아직까지는 스페인 당국은 주의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2012년에는 스페인 당국과 함께 분쟁에 '결정적인 마침표'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으나, 스페인 정부의 우경화와 함께 그냥 흐지부지하게 된 것 같다. 지지 기반인 바스크 지방 내에서도 독립 운동가로 대접 받았다는 것은 한참 옛날 이야기일 뿐, 요즘 와서는 현지에서도 반스페인 감정이야 여전하겠지만 그게 어쨌든 엄연한 무장 테러 집단인 ETA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2017년 4월 8일, 공식적으로 무장해제 선언을 했다.# 2018년 4월 19일에 자신들의 활동으로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사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5월 2일에 해체 선언을 하였다. # #


3. 대중매체에서[편집]


  •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에서 '분리주의자'로 등장한다.
  •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에서 '민족해방운동'으로 등장한다.
  • 미국의 소설가 시드니 셸던의 <시간의 모래밭>이라는 작품이 ETA와 바스크 분리독립 문제를 다루고 있다. 비록 메인은 스페인 정부의 수녀원 침입을 피해 달아난 수녀들이 ETA의 대원들과 만나게 되면서 사랑놀음을 하는 로맨스 소설이지만, 프랑코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탄압, 바스크 민족과 스페인 정부의 뿌리깊은 갈등과 증오를 잘 녹여내었다.
  • 한국에는 스페인에서 보물찾기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데 소재 중 하나가 바스크 분리 독립 문제여서[7] 언급되며 이 편의 메인 빌런의 소속도 ETA였다.


[1] 바스크에서는 차펠라(Txapela)라고 부르며, 피레네 산맥 근처의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전통의상이기도 하다.[2] 이 때 바스크와 같이 저항한 카탈루냐의 바르셀로나도 프랑코의 명령으로 폭격을 당했다.[3] 다만 프랑코 정권 말기만 하더라도 "테러는 나쁘지만 블랑코를 폭탄으로 날려버린 것은 ETA가 유일하게 잘 한 일"이라는 뼈 있는 농담처럼 非바스크인이나 반프랑코 성향의 사람들이 ETA에 부분적으로 지지를 보내는 경우도 간간히 있긴 했다.[4] 당시 스페인의 한 시사 주간지는 오줌을 누는 아기 몸에 아즈나르 당시 총리 사진을 절묘하게 합성하여 '오줌싸개 꼬마의 헛소리', '선거가 다가오니까 자신이 주도한 이라크 파병과 이번 폭탄 테러가 상관없다며 ETA를 범인으로 모는 비겁자'로 규탄하였다.[5] 스페인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이다. 선거가 끝나고 들어선 좌파 정부는 곧바로 이라크에서 철군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였던 미국은 이를 테러에 대한 굴복이라고 불쾌해했지만, 스페인에선 "우리가 왜 미국이 저지른 전쟁가야 하고, 아랍인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하는데?"면서 한숨 돌렸다는 반응을 보였다.[6] 알려진 바로는 그 중 몇몇은 수십 차례의 작전에 참가하여 두 자리수 이상의 사람을 사살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7] 보물의 단서를 쥐고 있던 이가 바스크 분리독립파였다. 물론 그는 온건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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