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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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schinghis khan-Moskau IMG.jpg

맨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볼프강 하이헬, 레슬리 만도키(탈퇴), 에디나 팝,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 헨리에테 스트로벨, 스티브 벤더

이름
볼프강 하이헬
헨리에테 스트로벨
에디나 팝
루이스 헨드릭
포트기터
레슬리 만도키
스티브 벤더
생년월일
1950.11.4
1953.11.13
1947.2.4
1951.4.4
1953.1.7
1946.11.2
신체
188cm
171cm
170cm
190cm
178cm
171cm
역할




前 리더

특이사항

기혼 후 현재는 이혼 상태[1]

1993년 11월 12일 사망(향년 42세)[2]
2007년 탈퇴
1981년 탈퇴하고, 2005년 마지막 공연후 이듬해인 2006년 5월 7일 사망(향년 59세)

1. 소개
2. 음반 목록
3. 구성 멤버
3.1.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
3.2. 에디나 팝
3.3. 레슬리 만도키
3.4. 헨리에테 스트로벨
3.5. 볼프강 하이헬
3.6. 스티브 벤더
4. 영상
5. 여담


1. 소개[편집]


Dschinghis Khan

서독[3], 독일의 남성 4명, 여성 2명으로 구성된 6인조 밴드. 이름은 칭기즈 칸의 독일어식 표기에서 유래했다. 대표곡으로는 징기스칸, 모스크바, 마추픽추가 있다.

멤버 6명 중 2명이 상당한 장신이다. 루이스 핸드릭 포트기터[4]가 190cm이고 볼프강 하이헬이 188cm에 달한다.

1981년부터는 스티브 벤더가 그룹에서 빠짐으로서 5인조로 활동하였다. 1981년도에 발표된 노래들의 공연 영상을 살펴보면 5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005년 다시 무대에 섰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1979년 서독의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랄프 지젤과 경제학 박사 겸 작사가인 베른트 마이눙거에 의해 프로듀싱된 그룹이다. 그들은 Boney M.의 성공을 모델로 하여 먼저 본인들의 곡 '징기스칸' 의 데모 테이프를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보내 예선을 통과했다. 이후 루이스 헨드릭을 포함하여 6명의 멤버를 오디션을 통하여 선발하여 1979년 3월 17일 독일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그들의 대표곡 '징기스칸'으로 4위에 입상하며 데뷔하였으며 순식간에 유럽 차트를 석권하며 히트 가수의 위치에 올랐다.

1993년에는 초대 칸이었던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후 이후 슈테판 트라크가 2대 칸으로 포트기터의 빈자리를 채웠지만 2018년 탈퇴 후에도 보조 멤버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는 레슬리 만도키가 팀을 탈퇴했다.

황당하게도 멤버 구성은 Boney M.과는 정반대로 잡았는데 Boney M.은 바비 파렐 단 1명을 빼고 전원 여성인 반면 징기스칸은 헨리에테와 에디나를 제외한 4명이 남성이며 Boney M.은 전원 흑인인데 징기스칸은 전원 백인이다.

이와 비슷한 풍의 디스코 그룹으로는 상술한 Boney M., 아라베스크[5] 등이 있다.

그 유명한 "지친 놈이 비틀비틀 출근길 어제밤. 우! 하! 우!"로 유명했던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이 가수이다. 실제로 후! 하! 하는 후렴구 자체가 징기스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버리다 보니 몇몇 곡에 비슷한 후렴구가 들어가기도 하며 아예 'Huh Hah Dschinghis Khan'이라는 컴필레이션 앨범도 있을 정도다.#




세계 각국의 지명 또는 문화 등이 그들의 노래의 주 제목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작곡을 할 때 머리를 어떻게 굴려서 작곡하는지 전부 중독성이 강하다. 그 중에 '모스크바' 와 '피스톨레로', '마추픽추'의 중독성은 압권이다.

이들의 특징은 대다수 곡의 가사가 자국어, 즉 독일어로 쓰인다는 점이다. 선배 그룹 Boney M을 비롯해 세계적인 음악 밴드들이 좋든 싫든 영어로 음악을 만들고 심지어 아바마저도 영어로 만들었던 것을 감안하면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영어 가사가 있는 것은 대표곡 징기스칸과 모스크바, 로마, 피스톨레로 정도.[6]

사실 독일어로 불러도 어느 정도 통하는게, 노래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이 강한 비트의 댄스풍에, 강한 후렴구의 반복으로 중독성이 강하면서 그 후렴구가 세계 각국의 지명 등 고유명사 혹은 감탄사이다 보니까 어느 언어든 간에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차피 기억나는 것은 위 몬데그린의 예 처럼 그 후렴구이니. 한국 같은 비 서구어권에서는 정말 자세히 듣지 않으면 영어 버전인지 독일어 버전인지 막바로 감이 오지 않을 정도다.[7]

2. 음반 목록[편집]


Dschinghis khan

파일:Dschinghis khan-Dschinghis khan album.jpg

1979년
Side A
#
곡명
작사
러닝타임
A1
Moskau
B.Meinunger, Ralph Siegel
5:58
A2
Komm doch heim
B.Meinunger, Ralph Siegel
4:16
A3
Samurai
B.Meinunger, Ralph Siegel
4:56
A4
Rocking son of dschinghis khan
B.Meinunger, Ralph Siegel
4:15
A5
Paß Auf, Der Drache Kommt
B.Meinunger, Steve Bender
3:40
Side B
#
곡명
작사
러닝타임
B1
Dschinghis khan
B.Meinunger, Ralph Siegel
3:00
B2
Israel, Israel
B.Meinunger, Ralph Siegel
5:38
B3
China boy
B.Meinunger, Werner Schüler
3:54
B4
Sahara
B.Meinunger, Ralph Siegel
3:00
B5
Puszta
B.Meinunger, Leslie Mándoki
3:15
B6
Der Verräter
B.Meinunger, Ralph Siegel
5:35

Viva

파일:Dschinghis khan-Viva album.jpg

1980년
Side A
#
곡명
작사
러닝타임
A1
Rom
B.Meinunger, Ralph Siegel
5:50
A2
Madagaskar
B.Meinunger, Henne haller
4:35
A3
Kaspar Hauser[8]
B.Meinunger, Wolfgang Heichel
4:44
A4
Mann und Frau
B.Meinunger, Ralph Siegel
4:13
A5
Käp't Nemo
B.Meinunger, Leslie Mándoki, Steve Bender
5:25
Side B
#
곡명
작사
러닝타임
B1
Machu Picchu
B.Meinunger, Ralph Siegel
7:08
B2
Kontiki
B.Meinunger, Werner Schüler
3:51
B3
Tiger, Tiger
B.Meinunger, Ralph Siegel
4:44
B4
Die Fremden
B.Meinunger, Ralph Siegel
5:05
B5
Sierra Nevada
B.Meinunger, Ralph Siegel
4:44

Rom

파일:Dschinghis khan-Rom album_jpeg.jpg

1980년
Side A
#
곡명
작사
러닝타임
A1
Rom
B.Meinunger, Ralph Siegel
5:50
A2
Madagaskar
B.Meinunger, Henne haller
4:35
A3
Kaspar Hauser
B.Meinunger, Wolfgang Heichel
4:44
A4
Mann und Frau
B.Meinunger, Ralph Siegel
4:13
A5
Käp't Nemo
B.Meinunger, Leslie Mándoki, Steve Bender
5:25
A6
Die Fremden
B.Meinunger, Ralph Siegel
5:05
A7
Sierra Nevada
B.Meinunger, Ralph Siegel
4:44
Side B
#
곡명
작사
러닝타임
B1
Machu Picchu
B.Meinunger, Ralph Siegel
7:08
B2
Kontiki
B.Meinunger, Werner schüler
3:51
B3
Tiger, Tiger
B.Meinunger, Ralph Siegel
4:44
B4
Moskau
B.Meinunger, Ralph Siegel
4:30
B5
Hadschi Halef Omar
B.Meinunger, Ralph Siegel
3:37
B6
Der verräter
B.Meinunger, Ralph Siegel
5:34
B7
Dschinghis khan
B.Meinunger, Ralph Siegel
3:02

Wir Sitzen Alle Im Selben Boot

파일:Dschinghis khan-Wir sitzen alle im selben boot album_jpeg.jpg

1981년
Side A
#
곡명
작사
러닝타임
A1
Wir Sitzen Alle Im Selben Boot
B.Meinunger, Ralph Siegel
4:03
A2
Pistolero
B.Meinunger, Ralph Siegel
4:17
A3
Windjammer
B.Meinunger, Ralph Siegel
3:58
A4
Die Fremdenlegion (Armee Der Verlorenen Seelen)
B.Meinunger, Ralph Siegel
4:30
A5
Michael
Trad
4:18
Side B
#
곡명
작사
러닝타임
B1
Loreley
.Meinunger, Ralph Siegel
3:54
B2
What Shall We Do With The Drunken Sailor
Trad
3:54
B3
Goodbye Hwaii
Meinunger, Ralph Siegel
4:43
B4
Aladin
Meinunger, Leslie Mándoki
3:25
B5
We Love You
Wolfgang Heichel
2:40


3. 구성 멤버[편집]



3.1.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편집]


#
그룹의 이었던 루이 헨드릭 포드기터는 1951년 4월 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조상은 네덜란드 출신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며 그의 아버지는 프리토리아의 영업 이사였다고 한다. 또 그에게는 한 명의 형제와 4명의 여자 형제가 있었다.

그는 학교 축제에서 춤을 추고 안무를 만들기도 했으며 학교를 마친 후에는 2년간 그래픽아트를 공부하여 패션 디자이너, 음악가, 댄서의 꿈을 가졌다고 한다.

21세까지 아무런 발레 수업도 받지 않았으나 요하네스버그 극장의 발레 감독을 소개받았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감독은 3개월의 수습기간을 주었고 그는 그 3개월간 연습실에서 매일 6, 7시간을 연습했다.[9] 그는 그럼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마침내 고용되었으나 그의 자리는 맨 끝줄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 그는 솔로 댄서로 데뷔하여 그의 큰 꿈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1970년대 초 발레 단장으로서 독일 울름으로 간 그의 친구의 초대로 루이스는 독일로 떠나 울름에서 1년을 생활하고, 스위스의 장크트갈렌에서 1년을 보냈는데 그는 큰 무대에 서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다가 프랑크푸르트로 여행 갔을 때 1년에 서너번 보는 오디션에서 합격하여 뮌헨의 극장에 고용되었다.

그는 그 극장에서 오페레타를 해야 했으나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나 극장에서의 생활은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연히 다양한 TV쇼에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유명한 안무가 윌리엄 밀리(William Millie)가 댄서를 찾고있던 랄프 지젤에게 데려가 관심을 끌도록 하여 그는 오디션에서 통과하였다.

그는 그 전까지 징기스칸의 멤버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그때 당시 그룹의 성공을 믿었을 거라고 자신에게 물어봤었다면 아니라고 천번 이야기했을 것이라 말했다.

루이는 데뷔 후 가운데서 춤을 추는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룹 해체 후에는 1986년 레슬리 만도키, 헨리에테 하이헬과 함께 다른 가수들과 징기스칸 패밀리를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으나 1993년 안타깝게 에이즈로 사망해 사람들의 추모를 받고 있다.

그가 사망한 후에는 2대 칸인 슈테판 트라크가 그의 빈자리를 대신했으나 2018년에 탈퇴하면서 이후에는 보조 멤버로도 활동하기도 하였다.

3.2. 에디나 팝[편집]


#
본명은 케슈마르키 머리커(Késmárky Marika).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을 그대로 따 왔다고 하며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 형제가 있다고 한다.

그녀는 1941년 2월 4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6살 때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음악 수업을 들으며 학교를 졸업해 1963년에 처음으로 가수를 시작해 그룹 Express의 보컬로도 활동하였다. 이후 본명과 Marina marc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마침내 Edina pop이라는 간단한 가명을 정하였고 1969년에는 국제무대에 서며 유명해지게 되었다.

1971년에는 배우 귄터 스톨(Günther stoll, 1924~1977)과 결혼하였고 1972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는 7위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1977년 1월 10일 남편 귄터 스톨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스톨과의 나이차는 17년(또는 23년) 차이가 나는데 이 정도면 정말 나이차가 심한 것이다.

1979년 뮌헨에서 그룹 징기스칸으로 데뷔하였다. komm doch heim 등의 노래에는 그녀의 솔로파트가 대부분을 이루며 징기스칸 내에서 그녀의 노래실력을 알 수 있다.

1985년 해체 후에는 솔로 가수로 활동하였고 1994년에 낸 앨범 Tomatenrote Lippen에는 Dschinghis khan, Moskau, Hadschi halef omar, Pistolero 4개의 징기스칸 곡들을 리메이크하였다.

2005년에는 원년멤버 볼프강 하이헬, 헨리에테 스트로벨, 스티브 벤더와 슈테판 트라크 등의 멤버들과 함께 재결성, 복귀 공연을 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젊은 멤버들과 함께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나이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41년생이라 표기하는 곳과 1947년생으로 표기하는 곳으로 갈리기 때문.


3.3. 레슬리 만도키[편집]


#
본명은 라슬로 만도키(László Mándoki).

루이 포트기터가 유명해서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레슬리 만도키가 징기스칸의 리더다. 재미있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엄청나게 고생한 사람이다.

1953년 1월 7일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10] 능숙한 드럼 연주자로 징기스칸의 곡 Rocking son of dschinghis khan에서 빠르고 훌륭한 드럼실력을 볼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초 부다페스트에서 음악을 배웠고 야당 학생운동 밴드, JAM이라는 지역 재즈밴드의 리더였다.

1975년 추포 가보르, 다른 뮤지션들과 함께 여러차례 서부로 가려 했으나 여권을 발급받지 못하자, 8km길이의 오스트리아-유고슬라비아를 연결하는 철도 터널을 슬로베니아에서 출발해 서부로 달아났다.[이때]

그 후 난민 캠프에서 잠시 머물고 술집과 바에서 연주를 하며 지내다가 뮌헨에서 음악을 하며 1979년 징기스칸으로 데뷔하여 징기스칸의 노래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1982년에는 동료와 함께 음악 스튜디오를 설립해 솔로앨범을 발표하였고 1985년 그룹 해체 후에는 1986년 징기스칸 패밀리를 결성하기도 했다.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방한해 에바 체프레기(Eva Csepregi)라는 자신처럼 헝가리에서 태어난 여성 가수와 함께 Korea라는 노래[11]를 발표했는데 이게 인연이 되어 그녀와 결혼하여 자식들도 여럿 두었다.

프로듀서로서 다른 가수들과 협업하기도 하였고 현재는 Mandoki soulmates라는 밴드로 활동 중이다.


3.4. 헨리에테 스트로벨[편집]


#
본래 이름은 헨리에테 파울리너 스트로벨(Henriette Pauline Strobel).[12]

1953년 11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본래 노래를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고 징기스칸 데뷔가 노래 경력의 시작이었다. 8살 때 피아노를 배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적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치과의사로 아버지는 그녀를 치과 조수로 키울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생애 초반은 VIVIZ엄지를 굉장히 많이 닮았다.

5살 때 피겨 스케이트를 선물받고 너무 기뻐서 매일 빙상을 몇 시간 동안 뛰었으며 9살 때 첫 훈련을 받았고 모두가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13] 13살 때 독일 최남단의 오베레스트도어프로 보내져[14] 5시간의 훈련을 위해 사립학교에 갔다. 오전에는 3시간 운동, 오후에는 2시간 운동을 했고 그녀의 트레이너는 독일 챔피언의 아버지였었다고 한다.

그녀는 작은 대회에 나가 항상 1등을 하였다고 하나 훈련 도중 오른쪽 다리를 단단한 보드에 찧은 사고로 인해 다리와 발목이 골절되어 6개월간 쉬었어야 했고 이후 다시 도전하였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인해 결국 스포츠를 그만두었고 빙판 위의 꿈이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중학교를 마치고[15] 스위스에서 아버지의 일을 도와 치과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을 평생 하고싶지 않았고 취리히에서 미용사일을 배웠고 이때 2년간 모델일도 했다고 한다.

볼프강 하이헬과 처음 만난것도 이때라고 하는데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볼프강 하이헬이 술집에서 밴드 공연을 할 때 너무 거칠게 해서 그만 마이크로 이빨을 쳐서 깨 버렸다. 오너는 게스트로 와 있던 헨리에테가 치과에서 일한다는것을 알고는 볼프강을 그녀에게 보냈고 이때부터 알게된 사이라고 한다. 그들은 반 년 뒤인 1976년 4월 9일 결혼하게 되었고 뮌헨으로 이사가서 치과를 공부했다. 그때 볼프강은 스튜디오 음악을 하고 헨리에테는 집에서 몇 가지의 모델링 작업을 하였는데 이 와중에 1978년 볼프강과의 사이에서 득남했다.[16] 어느 날 볼프강 하이헬은 랄프 지젤에게 새로운 그룹의 멤버로서 영입되었고 헨리에테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제안했다. 가끔씩 노래를 부르던 헨리에테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인데 처음에는 무조건 싫다고 답했으나 볼프강은 헨리에테를 아예 랄프 지젤에게 끌고 가 버렸다. 결국 헨리에테는 노래를 불렀는데 랄프 지젤은 바로 계약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979년 징기스칸으로 데뷔하였고 1985년 그룹 해체, 1986년에는 볼프강과 이혼하였으며 징기스칸 패밀리를 결성하여 1987년까지 무대에 섰다가 가수 생활을 종료하게 된다. 볼프강과 이혼만 했을 뿐 아직도 여전히 친구로 지낸다.

시간이 흘러 2005년 볼프강 하이헬, 에디나 팝, 스티브 벤더와 슈테판 트라크 등의 가수들과 함께 복귀 공연을 가졌으며 현재 에디나 팝과 젊은 가수들과 같이 징기스칸 활동을 하고 있다.


3.5. 볼프강 하이헬[편집]


1950년 11월 4일 독일 메이센에서 태어났으며 두명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 형제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독일 카셀의 아트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1976년에는 루체른의 바 경영학교에 가기도 했으며 치과학을 공부하였다. 밴드활동도 하였으며 1979년 랄프 지젤에게 징기스칸의 멤버로 아내와 함께 들어가 데뷔하였고 그룹 해체 후 1986년에 이혼하였다. 그 이후에는 무대의 작곡가, 프로듀서등으로 일했고 2001년~2003년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 헨리에테와는 이혼만 했을 뿐이지 아직도 친구로 지낸다. 헨리에테와의 사이에는 아들 쿠르트(1978년~)가 있다.

2005년에는 헨리에테 하이헬, 에디나 팝, 스티브 벤더등과 함께 복귀하였으며 계속해서 그렇게 활동하다가 2018년2005년부터 2007년경까지 징기스칸에서 활동했던 슈테판 트라크를 포함한 4명의 가수들과 같이 에디나 팝, 헨리에테 하이헬의 징기스칸과는 다른 또 하나의 징기스칸 그룹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7월 16일, 몽골 건국 800주년을 맞이한 자리에서 징기스칸 세계 아카데미 회원으로 승인되었다.

2018년 1월 15일 몽골 외무장관에 의해 몽골 문화 대사로 임명되었고 베를린에서 인증서를 받았다.

동년 6월 18일에는 대통령에게 몽골 최고의 영예 우정의 메달을 수여받았고 22일에는 징기스칸이 태어난 지역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2020년에는 몽골 현지 미디어에 출연해 올 몽골 로케(...)로 징기스칸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다.#


3.6. 스티브 벤더[편집]


1946년 11월 2일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카를 하인츠 벤더(Karl Heinz Bender). 팀 내 남자 멤버들 중 최단신.[17] 2명의 형제가 있으며 아버지는 전쟁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1964년경부터 가수 생활을 시작한것으로 보이며 1972년에는 Jeremy.B라는 가명으로도 활동했다. The Poor Things , The Soul Five , Black Panthers, Charly and the Neptunes, The Pages라는 그룹들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79년에는 징기스칸의 멤버로 들어가 데뷔하여 인상적인 대머리 스타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80년까지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직후 1981년부터 그는 그룹을 탈퇴하여 제작 사업을 시작하였고 그는 1985년 해체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나 2005년 러시아 올림픽홀에서 30000명 관중들 앞에 서서 복귀하여 마지막 공연을 하였고 2006년 5월 9일 환갑을 한참 앞두고 독일 뮌헨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향년 59세) 병에 걸린 사실을 대중들에게는 알리지 않았 던 듯하다. 칸인 포트기터가 떠난지 13년만에 세상을 떠나 고인 멤버로는 포트기터와 벤더 2명이다. 반면 스티브 벤더는 포트기터보다 나이도 더 많고 17년을 더 장수한 셈이다.

여담으로 징기스칸 당시의 모습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를 완전 대머리로 아는 사람도 있으나 사실 그 전의 가수 활동 당시의 모습을 보면 장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탈퇴 후 발표한 노래들에서도 그의 머리카락은 잘 자라나 있었고 2005년도에도 마찬가지였다.

1964년 5월 8일 결혼했고 1974년 12월 7일 딸도 가졌다.[18]


4. 영상[편집]




위 영상은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모스크바' 다. 어떤 러시아인이 이 노래를 들은 후 보인 반응 "가사가 어쩐지 웃긴다" 였다(...) 잘 보면 합창단원들도 무언가 웃긴가보다 댄서들이 진짜 웃는거였다 소치 동계올림픽을 1년여 앞둔 시점에서 촬영했는데 러시아인들은 독일과 징기즈칸이 둘 다 러시아를 초토화 시킨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19] 이 곡이 마음에 들었는지 2013년 새해 축제 방송에도 이 음악을 틀고 아예 원작을 초월한 댄스 쇼까지 벌였다. 그것도 붉은 군대 합창단까지 초청해서!! 1절은 "모스코(Moskau)",[20] 2절은 "마스크바(Москва)"라며 각각 독일어러시아어로 부르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이들의 노래 중에는 코리아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징기스칸이 아니라 레슬리 만도키와 뉴튼 패밀리의 리드보컬 에바의 듀엣 곡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MBC 서울 국제 가요제 관련으로 이들이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뉴튼 패밀리는 가요제에 직접 참여했었고 징기스칸은 게스트 가수로 초청되었다. 이때 둘이 사귀게 되어 만들어진 곡. 당시 국내 TV에서는 대놓고 사랑의 듀엣 운운했었다. 홍콩이나 일본 아이돌의 리메이크판도 있다. 리메이크도 되었다. 그래서 일본어 음악이 금지되던 시절에 내한 방송했다. 그래서 이 당시에도 핑크레이디마츠다 세이코 등의 영어 앨범은 국내 발매가 되었었다.

한국에서는 소녀대 버전이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21] 만도키와 에바 선이 초대받았던 서울 국제 가요제에서 출연했던 한국 지상파 방송을 탄 최초의 일본인 가수가 바로 소녀대였을 정도로 이미 한국에서 인기가 좋았기 때문. 사실 일본 노래가 금지된 시절이었기 때문에 소녀대를 아는 사람만 알았고 소녀대가 원래 대한민국에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기보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덕분에 대한민국에 더 알려지고 인기를 더 많이 얻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기에 한국 지상파에도 자주 언급되었고 일본의 아이돌 그룹이 유럽 친한파 가수들의 노래를 불렀다는 게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조명을 더 많이 받았으며 우리나라에서 소녀대가 홍보가 많이 된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소녀대가 이 노래를 리메이크 하자마자 방송에 언급되고 원곡을 초월하는 인기로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검은 고양이 네로로 유명한 박혜령은 한국판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죽을 때까지 가수를 한다고 한다. 하술하겠지만 이미 고인이 된 루이 포트기터와 스티브 벤더, 그리고 탈퇴한 레슬리 만도키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은 원년멤버인 볼프강 하이헬, 헨리에테 하이헬, 에디나 팝은 2005년 징기스칸으로 다시 뭉쳐서 2기 징기스칸[22] 활동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특히나 최연장자인 에디나 팝은 칠순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가수를 한다. 이들이 환갑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수를 하는 이유는 후학을 양성하기 위함인 것이고 백댄서로 활동하는 가수들을 이들의 후계자로서 칭기즈 칸의 원래 멤버들이 수명이 다해 죽게 될 경우 그룹을 물려받아서 활동하기로 되어있다.



2012년 1월 1일 징기스칸 라이브. 칸이 웬 잭 스패로우로 바뀌었다.

현재는 루이 헨드릭 포트기터가 에이즈로 인해 1993년에 향년 42살의 나이로, 스티브 벤더가 2006년에 향년 59살의 나이로 각각 세상을 떠나고 2007년에 레슬리 만도키가 탈퇴하여 현재는 에디나 팝과 볼프강 하이헬, 헨리에테 스트로벨(헨리에테 하이헬)이 남아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고령이 되어 버려서 특히 에디나 팝은 이미 칠순이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격렬한 댄스는 하지 못하고 대신 백댄서들에게 담당시키고 자신들은 노래만 부른다.

헨리에테 하이헬은 젊은 시절 굉장한 미인이였다. 나이를 먹고도 매우 곱게 늙었다. 레슬리 만도키는 솔로로 나와서 코리아라는 노래로 한국에 알려진 바 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한국에 대하여 꽤 찬양하면서 한복이나 여러 가지 한국 모습도 나왔다.

다른 그룹 조이의 '코리안 걸'이란 노랠 부른 적이 있다. 노래 시작 전에 작게 "안녕하세요, 한국 아가씨" 이런 한국말까지 직접 했다. 이 노래와 더불어 한국 찬양하는 팝송이라고 오래전 꽤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이의 경우 일본에서는 'Japanese Girl' 로 노래 제목을 바꾸고 일본어로 인사를 하는 등 아시아 각국에서 이런 식으로 돈을 벌어먹었다(...) 정확히는, Joy의 노래는 Japanese Girl이 원곡이며, 한국에 발매한 앨범에만 Korean Girl로 바꾸어 부른 버전을 수록한 것. 지금 한국이나 한국 가요계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게 웬 장난? 하겠지만 서울 올림픽 이전의 한국은 한국 하면 한국전쟁을 먼저 떠올릴 정도에, 동남아 각국보다 인지도가 없었다. 여러 이유로 1980년대 해외 그룹들은 빌리지 피플, 둘리스, 놀란스, Joy, 데이비드 라임 등 많이 내한했지만 대부분 반주 틀고 립싱크 비슷하게 몇 곡 하고 떠난 정도, 어디 낮선 나라에 왔다 갔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서구권 가수가 제목이라도 Korea로 바꾼 정도라도 신경을 쓴 경우는 이전에 전무했다.[23]

가수로 활동하면서 노래는 노래대로, 퍼포먼스는 퍼포먼스대로 보여주면서 팬들에게 2중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특히 이라는 시스템을 적용하여 각 멤버는 각자의 칸 명칭을 부여받아 노래 부르는 중간중간마다 칸이 각종 퍼포먼스를 보여주도록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메인으로 활동하는 멤버가 징기스칸이라는 명칭을 받으며, 1대 징기스칸은 루이 포트기터가 담당해 왔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슈테판 트라크가 2대 징기스칸으로 활동했다. 지금은 슈테판도 탈퇴[24]하고 현재는 클라우스 쿠프라이트가 "Igei Khan"이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리더(징기스칸 팀의 수석 안무가 역할)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운영하는데도 가창력이 떨어지지도 않다. 정상급 가창력을 선보이면서도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때문에 매 공연마다 팬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5. 여담[편집]


  • 2020년 9월 17일, 충격적이게도 그룹의 젊은 멤버 외괴다이 한(Ögödei khan)[25]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졌다.[26]
  • 한국에 이들의 노래에 가사를 새로 붙인 번안곡이 무려 네 가지나 있었다. # 저작권법도 개념도 없던 시기라 가능했던 일. "말 위에서 낳고, 말 위에서 자란~"이라는 가사가 들어가고 징기스칸을 영웅으로 그린 조경수의 버전이 가장 유명했다.[27] 한 때 원곡이든 번인곡이든 모두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이유는 당시 소련 위성국이었던 공산국가 몽골의 영웅을 노래한 것이라서.
  • 독일의 가수이나 실제로 독일 태생은 볼프강 하이헬과 스티브 벤더 단 2명뿐이다. 루이 포트기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디나 팝과 레슬리 만도키는 헝가리, 헨리에테 스트로벨은 네덜란드 태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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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전 헨리에테 스트로벨에서 개명.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볼프강과 부부 사이였는데, 1986년에 이혼 후에는 다시 예전 이름인 '스트로벨'로 활동하고 있다.[2] 에이즈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이후에는 2대 칸인 슈테판 트라크가 그의 빈 자리를 대신했다.[3]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이 명칭은 잘 쓰이지 않는다.[4] 징기스칸 노래에서 칸 코스프레 하고 빙빙 도는 아저씨.[5] 그 유명한 헬로 헬로 미스터 몽키~를 부른 3인조 걸그룹 가수다.[6] 물론 로렐라이를 비롯, 상당수 곡들이 독일어 버전 외에 영어 버전이 있긴 하다.[7] 반대로 아바 같으면 서정성 있는 발라드가 대다수다. 당연 멜로디는 물론 가사를 음미하면서 듣는 것이기에 스웨덴어로 부르면 대다수의 청중들에게 나름 장벽이 된다.[8] 1800년대 수수께끼의 인물 카스파 하우저의 이야기가 가사이다.[9] 이걸 그는 3개월간 동물처럼 연습해서 뼈에 감각이 없었다고 표현했다.[10] 그룹 내에서 원년 멤버 중 헨리에테 하이헬과 함께 가장 나이가 어렸다.[이때] 무장한 경비의 눈을 피하려 춥고 축축한 풀숲에서 사흘을 있었다고 한다. 소지품과 악기는 모두 두고온 상태로 옷 몇 벌 정도밖에 없었으며 군인들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때 개들에게 날고기를 던져주고 미친듯이 달려갔다고 한다. 군인들이 자신들을 쏠 때 주저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자갈이 운동화를 찢어서 발가락에 피가 나고 쥐가 몸을 물어댈 정도로 달려서 기관차에 치이지 않고 4시간을 더 가서 보니 오스트리아의 변전소를 발견했고 독일어를 못 했기에 '위험'이라는 글자를 모르고 다음 역까지 달려가 '스웨덴에 가서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라고 말했으나 이들은 뮌헨으로 보내졌다.[11] 여담으로 케야키자카46Ambivalent가 이 노래를 표절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12]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Henriette Pauline Heichel로 개명했지만 현재는 이혼하면서 다시 본래의 성을 사용하고 있다.[13] 자신의 롤모델이 미국의 국가대표 선수였다고도 했다.[14] 이때 어린 소녀가 혼자 살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에 의해 동행한 한 할머니와 둘이서 살았다고 한다.[15] 독일로 이주해서 1년을 더 했다고 한다.[16] 아들의 이름이 쿠르트 하이헬(Kurt Heichel)이라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17] 독일의 평균 신장 기준으로도 단신이다.[18] 딸 역시 가수였다.[19] 초토화시켰지만 결국 둘 다 몰리치고 오히려 러시아/소련의 영향력 아래 뒀다. 동독은 소련의 영향을 크게 받은 공산 블럭에 속했고 몽골 인민 공화국 또한 소련의 사실상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수준까지 갔다. 1980년 기준으로 초토화시킨 건 과거의 일이지만 종주국 행세를 한 것은 현재의 일이니 승자의 여유를 부릴 수밖에.[20] 원곡이나 붉은 군대나 발음이 모스'코'쪽에 가깝다.[21] 이 소녀대를 패러디해서 만든 한국의 걸그룹이 그 유명한 세또래다.[22] 슈테판 트라크, 클라우스 쿠프라이트, 앙겔리카 에를라허, 람 비랏 페노이, 얀 그로스펠트 등의 젊은 멤버들이 합류하였고, 이들이 사실상 2대 징기스칸 멤버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타에 후술하겠지만 2020년 갑작스레 사망한 요하네스 쿠프라이트도 이곳에서 멤버로 활동을 해왔다.[23]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BTS급은 아니고 한 2군 정도 되는 K-POP 아이돌이 동남아 순회 공연 하면서 태국, 베트남 등 좀 유명한 나라가 아닌 미얀마나 라오스 정도의 국가도 같이 방문하면서 그 나라 관련 명칭을 노래에 집어넣어서 부른 경우다.[24] 정식 멤버로는 2018년 탈퇴해서 싱글 앨범도 낸 바 있으나, 프로듀서로서 계속 징기스칸 앨범에 참여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클래지콰이의 프로듀서 DJ 클래지와 약간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볼 수 있다.[25] 본명은 요하네스 커프리엣.[26] 사망원인은 교통사고 였다고 징기스칸 측은 밝혔다. 향년 30세로 요절하였다.[27] 원곡 내용은 정복당했던 유럽인답게 징기스칸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