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P미디어/역사

덤프버전 :






[ 그룹 ]
데뷔 / 계약일
아티스트
팬클럽
1992.02.21
ZAM
-
1993
코코
-
1994.01.01


1996
마운틴

1996.02
IDOL

1997.04.15
젝스키스
옐로우키스
1998.05.12
핑클
핑키
1999.08.07
클릭비
NIZI
2003.09.08
투샤이

2004.01.20
샤인

2005.06.08
SS501
트리플 S
2007.03.29
카라
카밀리아
2008.04.24
에이스타일

2009.11.14
레인보우
레인너스
2012.04.07
퓨리티

2012.06.02
A-JAX
A-LIGHT
2015.08.24
APRIL
파인에플
2017.07.19
KARD
HIDDEN KARD
2021.03.17
미래소년
NOW
2023.10.18
YOUNG POSSE

굿펠라스엔터테인먼트 인수
2022.12.12
가비엔제이

2022.12.12
베이비블루

}}}


1. 개요
2. 역사
2.1. 창립자 이호연의 배경
2.2. 1990년대 초중반
2.3.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2인자로 군림하다
2.4. 2000년대 중반~후반 : 최후의 전성기
2.5. 2010년: 이호연 대표의 와병과 몰락의 시작
2.5.1.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
2.6. 2012년~2013년: 마지막 불꽃
2.6.1. 정니콜과 강지영의 재계약 불발
2.7. 2014년~2015년: 본격 위기
2.8. 2016년: 변화의 기로에 서다
2.9. 2017년: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DSP
2.10. 2018년: 다사다난한 상반기
2.11. 2019년: REBUILD THE TEAM
2.12. 2020년: 간만의 순풍
2.13. 2021년: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
2.14. 2022년: RBW의 품으로
2.15. 2023년: 사업 확장


1. 개요[편집]


DSP미디어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역사[편집]



2.1. 창립자 이호연의 배경[편집]


대전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1]를 하던 이호연은 1981년 연예계에서 잘 나가던 선배인 양승국 한밭기획 사장의 권유로 한밭기획 전무이사로 입사하며 엔터테인먼트계에 뛰어들게 된다.[2] 이후 소방차, 유열, 심신 등을 발굴해 양사장과 함께 매니지먼트를 했다. 이외 태진아의 매니저도 했었다. 이를 계기로 상당히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고 한다. 2010년대 이른바 카라 사태 때 태진아가 아픈 이호연 대신 나서서 사태를 중재한 것도 그냥 생긴 일이 아닌 것. 이 중 소방차는 기획, 홍보 등에 있어 이호연 사장의 첫 작품으로 많은 연예관계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2.2. 1990년대 초중반[편집]


1991년에 독립하여 대성기획을 설립했다. 소방차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도 아이돌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살던 집을 털어 창업했다고 한다.[3] 이후 댄스그룹 'ZAM'을 내놓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장수 그룹은 못되었다.

90년대 중반에는 코코, , 마운틴을 내놓았다.

코코는 1994년 나온 여성 듀오로, ZAM을 탈퇴한 윤현숙에 혼성 트리오 1730의 이혜영을 영입해 만든 팀이었다. 이상민의 전처인 이혜영 그분 맞다. 둘 다 남성들한테 인기가 좋았지만 가수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2집 타이틀곡 '요즘 우리는'은 꽤 인기를 끌었다.


는 ZAM의 연장선 상에 있는 그룹으로 신선함이 부족해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준희는 꽤나 인기를 끌었고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준희는 본인이 SBS 강심장에서 밝힌 바로는, 이호연 사장님에게서 이후 핑클의 멤버로 고려되기도 했었다. 뮤는 2집도 실패했지만, 이호연은 김준희를 버리지 않고 1996년 체크 출신의 오창훈을 불러들여 듀오 Mountain을 제작한다. 타이틀곡 'Tango Tango'가 약간 인기를 끌었으나 흡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김준희는 Mountain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고 오창훈은 뒤에 스크림의 멤버였던 송호범과 함께 원투로 활동하게 된다.

사실 DSP가 H.O.T.보다 앞서 현재 일반화된 10대 아이돌 그룹을 한국에서 최초로 기획한 기획사다. 1996년 IDOL이라는 중학생으로 구성된 2인조 댄스그룹을 먼저 내놓았다. 10대들이 공감할 만한 가사로 반짝 히트했으나, 탄탄한 기획력에 스타성을 갖춘 SM엔터테인먼트H.O.T.에게 밀려 1년만에 해체했다. [4]

이외 당시 인기 있던 박소현, 이본, 오현경, 이승연, 최할리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 #


2.3.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2인자로 군림하다[편집]


SM에서 내놓은 H.O.T.S.E.S.가 히트하자, DSP는 라이벌젝스키스핑클을 내놓아 히트시키면서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아이돌 시장에서 SM과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현재 DSP 소속가수 팬들은 회사의 푸쉬 능력에 대해 아쉬워하고 있으나, 이때 당시에는 인맥을 활용해 막강한 푸시 능력을 자랑했다. 경희대 논문[5]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같은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된 가수들의 활동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출연 프로그램이나 음반활동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DSP> 소속의 젝스키스가 1998년 7월, 3집 앨범을 낼 때 핑클이 데뷔했고, 1999년 8월에 젝스키스 4집 앨범 발매와 맞추어 클릭B가 데뷔했다. 그리고 젝스키스의 경우도 데뷔 앨범은 1997년 5월 14일에 발매되었지만 첫 방송 출연은 그보다 한 달 전인 1997년 4월 15일에 있었고 1집 발매 직후부터는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처럼 젝스키스가 데뷔 전후부터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당시 이 매니지먼트사에 MBC 라디오와 KBS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탤런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소현, 이본, 오현경은 연기와 MC 등에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에 소속 가수들을 홍보하기가 훨씬 용이하다. 물론 실력도 없는 가수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출연시키면 말도 안되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었다 싶을 때 다양한 홍보채널을 이용하고, 그랬을 때 이왕이면 같은 소속사 연예인이 진행하거나 출연하는 프로에 함께 출연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방송가의 일종의 관행이기 때문이다."(DSP 사장)

이처럼 이미 다른 스타를 통해 방송가와 인맥을 쌓아 놓은 기존 매니지먼트사들은 그 회사의 신인을 홍보할 때 기존의 스타를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홍보방식은 방송사와 매니지먼트사 양측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방송사에서는 스타를 섭외해야 할 필요가 있고 매니지먼트사에서는 신인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끼워팔기'라는 기존 스타를 활용한 홍보방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젝스키스는 데뷔 직후부터 11개의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였다고 하는데, 지상파 3사가 거의 전부[6]이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푸쉬 능력이다.

이 때 'SM+1' 전략을 써서, SM을 모방하되 인원수가 한 명 많은 그룹을 내세운 것이 아니냐는 이미지도 있었다.[7] 다만 단순히 따라가는 전략 뿐이 아니라 자사 가수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살려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냥 따라간다고 성공할 정도로 가요계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당시 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을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8] 또한 아래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한 사항들' 문단에서 보듯이, DSP가 업계 최초로 도입한 아이템들이 꽤 많다.

한편 이에 대한 김기영 전 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젝키나 핑클이 H.O.T.나 S.E.S의 ‘따라쟁이’라는 말을 듣지만 ‘아이돌(100% 10대)-젝키(남자)-핑클(여자)-클릭비(밴드)’는 DSP의 일관된 아이돌 4대 프로젝트였어요. 아이돌의 ‘바우와우’가 예상 밖의 빅 히트를 기록하면서 젝키와 핑클의 데뷔가 늦어진 거죠."라고 한다.

그러나 공감토크쇼 놀러와에서 은지원이 본래 강성훈과 자신이 2인조 그룹으로 나올 예정이었으나, 이호연 사장이 "H.O.T.가 떠서 판도가 바뀌었다"며 4명을 더 모아 6인조로 계획을 변경했다고 증언하면서 구라로 밝혀졌다(…). 종합하자면, 은지원과 강성훈의 2인조 그룹은 본래 4대계획에 맞춰 준비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H.O.T.를 의식해서 급조해 1명 더 붙여 나간 것도 사실이란 뜻. 4인조 데뷔가 확정되어 나머지 세 멤버가 이효리의 합류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던 핑클도 이효리의 합류가 S.E.S.의 데뷔 이후에 이뤄졌던 걸 보면 프로젝트 자체는 있었으나 멤버 구성은 급조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클릭비 역시 초반 연습생이었던 김태형, 오종혁, 김상혁, 유호석은 댄스그룹을 목표로 준비 중이었으나 이호연 사장이 해외에 다녀온 이후 갑자기 아이돌 밴드로 방향을 전환해 하현곤, 노민혁을 발탁하고 메인보컬인 오종혁이 베이스 기타를 배웠다.[9] 가장 먼저 캐스팅되어 그룹 결성 과정을 모두 지켜본 김상혁은 이 그룹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건지 불안했다고 'Exit' 활동 당시 엠넷 재팬 인터뷰에서 밝혔다.[10] 단, 클릭비는 원래 8인조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데뷔 직전에 개인 사정으로 한 명이 탈퇴하고 7인조로 데뷔한 것으로 SM+1의 젝스키스나 핑클과는 조금 다르다. 탈퇴한 멤버는 2001년에 K-POP이라는 그룹으로 데뷔한 유빈으로[11] K-POP 활동 당시 클릭비와 함께 나오는 방송에서 여러번 언급했으며 클릭비 3집 앨범 김상혁과 노민혁의 Thanks To에 본명인 '(이)인호'로 언급된다.

이 시기 이호연 사장이 직접 젝스키스핑클을 이끌고 가서 평양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기사

1세대 아이돌의 전성기가 지나고 아이돌 암흑기였던 2000년대 초반, DSP에서 만든 샤인이나 투샤이 등의 그룹은 실패했다. 그러나 이 시기는 SM에서도 신비, 밀크, 블랙비트 등을 말아먹었던 시기라 크게 언급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 시기는 핑클 멤버들의 개인 활약이 컸다. 2003년에 솔로가수로 전향한 이효리는 '10 Minutes'으로 대상을 휩쓸었고, 뿐만 아니라 각종 의상과 스타일 등이 대한민국에 큰 신드롬을 일으켰다. 단적으로 이 당시 이효리는 삼성 휴대폰 CF 모델을 무려 4년 연속으로 맡았다. 성유리도 비록 연기력 논란이 있었지만 천년지애가 성공했고, 옥주현도 가수, DJ, 뮤지컬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또한 이진은 시트콤 논스톱3, X맨 등에 출연했는데, 2002년 4집 영원 활동 이후 따로 또 같이 활동을 하게 된 핑클 의 네 멤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상당한 활동을 하였고 멤버들끼리도 사석에서 친한 모습을 보여주며 핑클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2005년 핑클 디지털 싱글 앨범이 나올 수 있게 된 배경이기도 하였다.


2.4. 2000년대 중반~후반 : 최후의 전성기[편집]


SM의 동방신기가 데뷔부터 큰 인기를 끌자, DSP에서는 이에 대항할 남자 아이돌로 SS501을 데뷔시킨다. 앞서 언급했듯이 DSP는 'SM+1' 전략을 쓰다가, SS501부터는 (원래는 7명이었다가) 5명으로 냈다.[12] 이 점에서 한소리 듣기도 했지만, 앞선 트렌드를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시장에서 어느정도 입지를 유지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SS501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코어 팬덤을 확보하여 SS501의 팬클럽인 트리플 S는 동방신기의 카시오페아, 슈퍼주니어의 엘프와 함께 아이돌계 3대 대형 팬덤 '카트엘'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이후 동방신기가 2006년 봄 일본에 진출하자 SS501도 2007년부터 싱글을 내며 일본진출을 시도했는데, 2007년 여름 러빙유부터 인기를 얻어가며 2008년에 일본의 명실상부한 인기 그룹이 된 동방신기와 달리 SS501은 일본 데뷔의 성적은 괜찮았던 반면 그후로는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해 결국 진출시도가 실패하고 만다. 이 일본활동 기간동안 SS501의 한국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 두 시장 모두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이 되었다.

한편 2006년 3월 섬유원단 제조 업체인 호신섬유주식회사의 인수합병을 통해 코스닥시장에 우회상장되었다. (당시 코스닥 종목코드는 016040.) 이 시절 DSP는 SM보다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DSP가 제작한 드라마 그 여자, 마이걸, 외과의사 봉달희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토지〉, 파리의 연인 등을 기획한 문정수 PD, 〈성녀와 마녀〉 〈그 여자〉의 소현경 작가 등 전문 인력들을 영입했다. 훗날 문정수 PD는 해를 품은 달, 각시탈 등 대박 작품을 만들어냈고, 소현경 작가도 찬란한 유산, 내 딸 서영이, 황금빛 내 인생 등 히트작을 쏟아냈다. 이것을 보면 이호연 대표의 안목있던 인재 영입이었다.기사

그러나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50억 원+을 투자(기사)한 드라마 연개소문이 쫄딱 망하면서 2009년 4월에 3년만에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폐지되었다. 자연히 확장한 사업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다만 위 사업들이 실패했다고 해도, 회사의 본업에 있어서는 희망이 많았다. 드라마에 눈을 돌려 가수에서 잠시 손을 떼고 있었던 이호연이,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SS501의 U R Man과 카라의 Pretty Girl이 대박을 쳤기 때문이다. 김현중도 꽃보다남자로 큰 인기를 얻는다. 카라에게 반응이 오자 일본 진출 제의가 들어왔지만, 카라의 국내 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진출을 미루고 2010년에 대형기획사와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기사. 이호연 대표 와병 이후 레인보우, 에이젝스가 국내 기반을 닦지 않은 채 무리하게 일본 진출을 했다가 한국 일본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된다. 전술했듯이 SS501의 일본진출은 기대한 것만큼 히트치지 못했는데, 국내 기반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김현중의 꽃보다 남자와 U R Man으로 금세 회복할 수 있었다.

2009년 9월 핑클, 카라를 기획한 길종화 이사가 퇴사, 'B2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계기는 이효리가 엠넷과 계약이 만료되면서 길종화 이사와 함께 일하고자 했기 때문(이효리는 2010년 4월이면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 아직 이것이 DSP의 계열사 형식인지 단순한 퇴사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SS501, 카라의 앞으로의 행보를 본다면 알 수 있을 듯. SS501 멤버 허영생, 김규종 그리고 니콜이 실제로 이쪽으로 이적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이 시기는 무리한 사업 확장이 회사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그나마 상장폐지 이후 이호연이 드라마에서 손을 떼고 다시 아이돌을 손 보면서, SS501과 카라가 히트를 치며 회사 상황이 회복되어 갔다. 참고로 DSP 역사상 가장 많이 돈을 번 카라의 일본 활동은 2008~2009년에 그 기반이 형성되었으니, 나름 의미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형성된 이미지와 그때 나온 곡과 안무, 그리고 2011년 <제트 코스터 러브>로 오리콘 싱글 위클리차트 1위를 찍고 홍백가합전에 출전할 만큼 일본 시장을 휩쓸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때 온라인 학습사업에도 투자를 했었다. 이것도 망했다. 놀랍게도 이 학습사업 대표가 이호연과 결혼하게 되는 최미경이다.# 이때부터 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인터뷰에서도 이호연이 노총각이었다고 한 것을 보면 이때부터 2009년 사이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2.5. 2010년: 이호연 대표의 와병과 몰락의 시작[편집]


회사를 이끌던 이호연 사장이 2010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거짓말처럼 모든 것들이 안 좋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SS501의 경우 계약기간이 2010년 6월까지였는데, 멤버인 김현중배용준의 키이스트로 이적, 박정민은 CNR 미디어에서 지호 엔터테인먼트로 이적 김규종허영생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후 김형준이 있는 CI ENT랑 계약을 했다.

문제는 이호연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길종화와 김기영이 회사를 떠나면서 이호연이 쓰러진 후 연예계나 경영에 전혀 문외한인 주부에 불과한 최미경이 이호연의 아내라는 이유로 DSP미디어의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DSP미디어는 빠른 속도로 쇠락해 갔다. 또한 회사의 중역들이라 볼 수 있는 몇몇 임원들은 퇴사를 해버렸다. 그 중 핑클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길종화 이사는 아예 B2M엔터테인먼트를 차려버렸다. 최미경은 자기 딸[13]을 이사로 앉히고, 기존의 경영진 대신 전문경영진도 아닌 친인척들을 경영진으로 투입하는 등 회사를 망치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이 경영진 교체와 그들의 무능은 카라의 반발을 샀고 또 한 차례 소동을 일으킨다.[14]

이호연이 쓰러진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세대교체의 히든카드가 되어줄 레인보우일 것이다. 이호연이 기껏 멤버들을 야심작으로 뽑아놓았는데, 본인이 뇌졸중에 걸려 쓰러지면서 만인이 걱정하는 걸그룹이 되고 말았다.[15]

더 중요한 사실은 이호연 대표의 와병 이전 선발된 인적자원과 이호연 대표의 와병 이후 선발된 인적자원의 차이가 같은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이 맞나?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기량 차이가 심하다는 점이다.


2.5.1.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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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 교체가 이루어진 후 회사 꼴은 어느새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대본 수준이 되었고, 결국 카라가 들고 일어났다. 2011년 1월 19일. 리더 박규리를 제외한 카라 멤버 4명의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가 있었다. 법률 대리인인 랜드마크를 통해 “DSP가 지위를 악용해 멤버들이 원하지 않는 연예활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요와 인격모독, 각종 무단 계약으로 멤버들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줬다”고 주장했다. 이어 “믿음으로 일해야 하는 소속사와 소속가수의 관계에선 신뢰가 가장 중요한데 소속사는 카라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이용했다”고 주장했다.

박규리의 입장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제2의 동방신기가 되는 거냐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지만 사실 카라가 갈라질 일은 없다는 것이 팬들의 일관된 반응. 현재 기사 정황상 이번 사건은 멤버들의 부모가 주도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거기다가 모 기획사 대표 등 연예계 큰손들이 관여하여 카라를 '빼돌리려' 했던 정황들도 드러났다. 곧 박규리의 입장도 밝혀졌고 박규리 역시 멤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속계약 해지를 통보한 몇 시간 뒤. 구하라가 이 소송에서 빠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사태에 대해 DSP 측은 "그 동안 카라 그룹을 국내 일류 스타로 육성하고, 한류 열풍의 주역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 온 소속사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고 주장했다.

DSP측의 언플성 기사도 보인다. 물론 단순히 기자의 설레발성 기사일 수도 있다.

2011년 1월 24일 DSP와의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3인이 당시 경영진의 퇴진을 조건으로 계약을 유지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이는 카라 멤버들 혹은 멤버들의 가족중 일부가 당시 경영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의미. 이에 DSP미디어측은 "경영진 교체는 말도 안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인터뷰로 인해 DSP의 숨겨진 치부가 드러났다. 이호연 사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이호연 사장의 부인을 중심으로 경영진이 움직이면서 전에 없던 여러가지 병폐가 발생된 것. 그 동안 DSP의 무능을 답답해 하던 팬들은 "이렇게 이호연 사장을 그리워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며 이호연 사장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고 있다.

2011년 2월 가까스로 가수협 회장이자 이호연과 친분이 두터웠던 태진아가 중재에 나서면서 겨우 협의점을 찾았다. 이후 4월 28일 DSP와 카라 3인간의 합의가 끝나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팬들은 4월 28일을 카라가 부활했다는 의미인 카활절로 지정했다.


2.6. 2012년~2013년: 마지막 불꽃[편집]


8월 25일 카라가 '14회 한·중가요제' 행사를 위해 이동 중 탑승했던 차량이 휴게소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는 기사가 떠서 잠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곧 DSP 측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는 발표를 해서 곧 잠잠해졌다.

2012년 겨울에 사무실을 이전한다고 한다. 현재 사옥 근처에 있는 빌딩에 입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호연이 쓰러진 후, 이호연만한 재목이 아무도 없게 된 DSP미디어는 인재관리를 엉망으로 해서 이 때를 기점으로 자사의 쟁쟁한 연습생들을 외부 유출, 부고 등의 사유로 놓쳐 버렸다.

2012년 초 새 5인조 걸그룹 DSP걸즈(가칭)를 대한민국일본 양국에 출격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걸그룹 명칭은 '퓨리티(PURETTY)'로 결정되었고, 한일 공동 제작 실사 결합 애니메이션으로 프리티 리듬 오로라 드림의 후속작인‘프리티 리듬 디어 마이 퓨처’를 통해 새로운 걸그룹 DSP걸즈를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18세 혜인, 16세 시윤, 채경, 소민, 14세 막내 재은 등 다섯명으로 구성된 DSP걸즈는 데뷔 준비 중 닌텐도, 위스퍼 등 CF에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에는 언제 오냐는 퓨리티 팬들의 바람이 있었는데 2013년 2월 애니매이션이 '꿈의 보석 프리즘스톤'으로 한국 방영을 결정하면서 조간만 국내 무대에 서야 하는데... 2013년 7월 19일 서울 캐릭터라이센싱 페어에서 첫 대한민국 공연을 하게 되었다. 다만, 방송무대 데뷔는 여전히 소식없다가... 2013년 9월을 끝으로 일본활동까지 접고 2014년 5월 17일에 공식 팬카페를 통해 혜인은 배우로 전향을 하고 재은은 학업을 위해 탈퇴, 나머지 세 명은 카라 프로젝트에 나온다는 소식을 알려 해체 확정. 이후 시윤만 데뷔를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고 채경은 APRIL, 소민은 KARD로 각각 영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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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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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일 때문에 계속 미뤄졌던 새 남성그룹인 'DSP보이즈(가칭)'이 공개되었다. 정식 그룹명이 'A-JAX(에이젝스)'로 확정되었고, MBC MUSIC에서 페이크 다큐 형식을 가미한 신인 소개 프로그램[17]에 출연했다. 특이하게도 군필 멤버(형곤)가 있다. 이들은 나중에 굉장히 비참해지는데, 승진중희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 내보내지만 중희는 초반에 광탈하고 승진은 극하위권을 전전하다가 탈락했다. 승진과 중희 둘 다 참가 오디션에서는 제일 높은 성적에 해당되는 슈퍼 부트[18]를 받았음에도 중희는 슈퍼 부트 중 제일 먼저, 승진은 두 번째로 먼저 탈락했다. 중희가 탈락한 시점에서 슈퍼 부트 탈락자는 중희 혼자였다.

레인보우와 갓 데뷔한 A-JAX일본에 데뷔시켰다. 레이블은 유니버설 뮤직 재팬. A-마하-투미 등으로 국내에서 팬덤을 키워나가던 레인보우는 한창 성장할 시기에 성장이 뚝 끊겨 버렸고[19], 국내에 팬덤이 거의 없는 A-JAX일본 활동의 후유증으로 팬사이트 하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성공했냐 하니 그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2013년 한일관계가 급격히 경색되는 바람에 결국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SS501도 한때 한국도 일본도 제대로 못 챙긴 시절이 있었긴 하지만, 이 경우와는 달랐다. SS501은 트리플S의 힘이 그대로 존재했으니,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U R Man꽃보다 남자로 금새 회복했다. 하지만 레인보우와 A-JAX는 카라의 성공만 믿고 '카라 여동생', '카라 남동생' 그룹으로 포지셔닝되어 국내 기반 없이 일본에 진출했고, 이는 DSP 가수 전체의 중국 등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 진출의 지연으로 이어져 큰 타격으로 다가왔다.[20][21] 하지만 대만,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국가 팬덤은 작게나마 형성되어 있는 편.

  • 마지막 불꽃, DSP 페스티벌
2013년 12월 14일에 DSP 페스티벌을 열었다. DSP 콘서트니 만큼 역대 DSP의 많은 가수들이 출연했다. 젝스키스의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도 출연했다.[22]# 2013년, DSP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카라가 이날 공연의 첫 무대를 시작했고, 마지막에 모든 가수가 한꺼번에 엔딩곡 부르기 직전에도 카라의 무대가 한번 더 있었다. 카라가 아닌 다른 DSP 가수들을 보러간 팬들 입장에서는 약간 뜬금없었을 수도 있지만 상기한대로 카라가 DSP의 간판인데다가 결과적으로 이날 무대가 연말 가요대상을 제외하고 5인조 카라의 마지막 무대였기에 그만한 의미가 있는 무대였다.


2.6.1. 정니콜과 강지영의 재계약 불발[편집]


2014년 1월 14일 DSP미디어는 정니콜과의 재계약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니콜을 탈퇴 처리했다. (니콜이 재계약 거부한 이유는 이 글 참조) 그리고 다음날 강지영 역시 DSP와 재계약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는 내용증명을 DSP에 보내면서 최종적으로 니콜과 강지영은 2014년에 모두 탈퇴하게 됐다. 앞으로 3인조 체제로 갈지 새 멤버를 영입할지는 미지수지만 5인조로서 쌓아온 이미지와 역사가 워낙 뚜렷한 데다가 개인 팬덤보다도 팀으로서의 카라에 대한 팬덤이 강한 카라였기에 사실상 기존같은 팀 활동은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니콜은 카라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DSP가 그 정니콜이라는 이름을 가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쨌다.

아직 남은 멤버들도 있으니만큼 카라라는 팀과 이름 자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남겠지만 사실상 회사의 미래는 레인보우A-JAX 둘 중에 하나가 뜨기를 바라야 할 듯.

결국 카라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 카라 프로젝트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새 멤버를 뽑았다. 하지만 새 멤버가 객원멤버인줄 알았다는 박규리의 발언을 보니 소속사 단독으로 새 멤버 영입을 결정한 것 같다.

한편 회사를 떠난 니콜은 B2M으로 가서 11월 솔로앨범을 발표하였고, 강지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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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렇게 홍역을 겪는 3년 동안에도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흑자를 기록했다.


2.7. 2014년~2015년: 본격 위기[편집]


2013년까지는 이렇게 어떻게건 버텼지만, 201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금융감독원에 공시한 자료에 따르면, DSP미디어의 2014년 총 이익은 1/3으로 줄어든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관리비 등을 포함해서 순이익을 계산하면 2013년에 30억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3억으로 무려 1/10으로 감소했다. 다 망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2015년은 당기순이익 -22억으로 적자운영으로 돌아섰다. 정말 회사에 위기가 닥친 것.

카라는 건재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2015년 발매한 IN LOVE는 전 앨범이었던 Day&Night에 비해 음원 사이트 순위, 가요 프로그램 순위는 높아지긴 했으나 음반 판매량은 완전히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재계약일이 2016년 1월로 다가와 팬들의 불안감을 높이고 있다. 레인보우는 1년여 만의 컴백임에도 불구하고 6년 전과 변함 없는 타이틀 곡 선정으로 인해 처참한 성과를 거두고 2주만에 활동을 종료했다. A-JAX는 2년 동안이나 음반활동이 없는 등 소속사로부터 철저히 방치당했다. 한일 동시데뷔 등 DSP의 삽질로 인해, 본인들이 뭘 해볼 새도 없이 수렁에 빠진 케이스. 거의 해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에이프릴을 새로 데뷔시켰으나 이 역시 출발부터 잡음을 일으켰다. 카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안소진이 APRIL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당한 뒤 자살한 일이 발생한 것.[23] 게다가 데뷔한 후에도 리더였던 소민이 탈퇴하는 등[24] 내홍을 겪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콘셉트의 걸그룹이 쏟아져 나와 그 사이에서 차별화를 못 하기도 했다. 데뷔 음반 Dreaming의 판매량은 한터 기준 1,500여 장으로 상당히 저조하다. 이렇다 할 비주얼을 가진 멤버도 없고[25] 이렇다 할 재능도 없는[26] APRIL은 컨셉마저 밋밋하니 인기를 얻을래야 얻을 수도 없었다. 지방 팬사인회를 안 돌려서 판매량이 낮아져 버린 게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는 하지만 기존 DSP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낮아도 너무 낮은 수치. 이렇게 APRIL이 시장에서 반향을 일으키는데 실패하면서 DSP의 몰락을 경고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게다가 같이 데뷔한 TWICE여자친구소녀시대원더걸스, 자사 선배인 카라보다도 더 쟁쟁한데 정작 에이프릴은 자사의 또다른 선배인 레인보우와 비슷한 수준이니 더욱 경쟁이 힘들어졌다. 거기에 또다른 데뷔 동기인 오마이걸이 치고 올라오는 형국에다가 조금 일찍 데뷔한 Red Velvet마마무 역시 원카소와 동급이니 에이프릴로서는 너무 힘든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에이프릴은 데뷔 동기 중 최하위권인 소나무와 비비는 수준이었다. DSP미디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진짜 속이 쓰린 점은 저들 중 여자친구의 경우 그 팀의 리더가 원래 DSP미디어에 있다가 다른 기획사로 이적한 소원이었다는 점이다. 데리고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기획사의 주 수입원인 남자 그룹이 없다는 것이 문제. 일찍이 SS501의 뒤를 이어 에이스타일과 에이젝스를 데뷔시켰지만 에이스타일은 여러 문제로 인해 이미 2009년에 사실상 해체했다. 에이젝스는 한일 동시 데뷔라는 최악의 악수로 인해 국내 팬덤 형성에 실패하는 삽질을 보여주었고 멤버 서재형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데다가 2년 가까이 이렇다 할 활동이 없는 실정이다. 2015년 데뷔 예정인 남그룹이 있었으나, 플랜이 밀린 끝에 연습생 두 명이 군대에 갔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 참고로 남자 아이돌이 군대에 입대하면 일명 '군필돌'이 되는데[27], 괜히 연장자 이미지가 덧씌워지게 되고 이로 인해 인기를 얻기 어려워진다.[28] 아이돌이란 나이가 무기인데 나이가 어릴수록 화력은 강력해진다.

회사의 명실상부한 원톱이자 소녀가장카라의 국내 앨범 활동 성적이 멤버 교체를 겪은 이후 전성기 때보단 한풀 꺾인 모양새인지라 확실한 후발주자가 필요한데, 레인보우A-JAX는 공백기가 길어도 너무 길다. 그렇다고 컴백할 때 어마어마한 명곡을 주는 것도 아니다 레인보우에겐 망곡을 줬지... 데뷔 시에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으나 꾸준한 활동으로 팬층을 다지며 결국 정상까지 올라선 아이돌 그룹[29]들을 보면, 일정 부분 적자를 감수한다하더라도 소속 연예인들에게 투자를 해서 꾸준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2015년 10월, 이호연 대표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받은 건 좋은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5년째 와병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제와서 표창을 주는 의미가 있을까 싶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30여년간 배출한 가수들과 한국 가요산업에 끼친 영향력을 보면 충분히 받을만한 상이긴 하다.[기사원문] 표창은 카라 멤버 박규리와 한승연이 대리 수상했으며, 이 날 시상식에는 레인보우, 에이젝스, APRIL이 출연하여 선배 가수들의 곡을 불렀다.

사실 2015년을 돌이켜보면 DSP미디어가 총력전을 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레인보우와 카라의 컴백, 구하라의 솔로, APRIL의 데뷔에 클릭비 재결합까지. 1년 내내 회사 내부적으로는 공백기가 없을 정도로 열일(!)했다. 이 와중에 컴백 못한 에이젝스... 그러나 이들 중 성공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은 아무도 없었다. 카라의 국내 성적은 이미 2011년 이후 하락세를 타고 있었지만, 정규 4집 숙녀가 못 돼 이후로는 음원차트 상위권조차 간 적이 없고 음반판매량도 전성기의 1/10도 못 되는 수준으로 매우 큰 하락세를 타고 있으며, 1년 8개월만에 컴백해 최악의 곡이라는 평을 들은 레인보우, 3세대 아이돌중에서 차별화가 부족해 큰 화제까진 일으키진 못했던 APRIL, 모두가 우려했던 대로 된 구하라의 솔로, 2015년 내내 불었던 재결합 열풍 속에서도 화제를 일으키지 못한 클릭비까지 받아든 성적표는 암울 그 자체다. 대충 정리 해서 이야기 하면 열심히는 했지만 결과는 최악인 한 해를 보낸 셈(...).

2015년 11월 26일, 계약이 만료되고 6년 반 가량이 지나서야 SS501의 유닛 SS301의 상표권을 등록했다. SS501 상표권은 카라사태 때 등록했다 허영생, 김규종, 김형준이 유닛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슬슬 들리자 선수 친 것이다. 상표권 사용료라도 노렸나보다 그래서 Double S 301로 나왔다. 다만 SS301같은 경우는 CI Ent가 준비중이었는데도 상표를 등록하지 않은 탓도 있다.

결국 2015년에는 매출도 전년보다 떨어지고, 그동안 봤던 흑자도 못 보고 적자전환이 이루어졌다. 그야말로 위기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 2016년: 변화의 기로에 서다[편집]


"팬들은 DSP에게 SM 급의 기획력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JYP 급의 언플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YG 급의 음악성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CUBE 급의 이미지 메이킹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팬들은 DSP에게 묻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앨범 이라도... 심지어 케어라도 제대로 해주길 바랐다고... 동시에 저렇게 오랫동안 텀이 길어지면 저절로 팬덤은 와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해온 건 뭐냐고 묻고 싶습니다."

딴지일보, <[전격분석]걸그룹 계의 잠수함 조명 프로젝트1: 레인보우>베스트 댓글


2016년 들어서, 본격적으로 몰락의 신호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프로듀스 101 방영 전후로 실용음악 학원 및 댄스스쿨에서 비공개 오디션을 진행 중인데, 다른 기획사에서 데뷔를 위해 DSP로 가는 게 어떻냐고 하면 가지 말라고 팬들이 만류하는 글까지 나오고 있다.

카라는 허영지를 제외한 기존 3인의 계약 만료가 1월 말로 다가오면서[30] 또다시 2014년 때의 암흑기가 떠올라 팬들이 불안해하던 동안 구하라의 이적은 이미 기정사실화가 되었었고 ??? : 요시! 찬스다![31] 한승연도 연기에 더 관심을 보인다는 기사가 나왔다.[32] 즉, 2년 전에는 새 멤버 투입으로 위기를 타개했다면, 이젠 기존 멤버들의 잔류도 불투명해지면서 점점 팀 존속에도 물음표가 달려가는 상황... 게다가 이렇게 소속사 입장에 유리하고 허영지를 제외한 멤버들을 깎아내리는 언플 기사를 쏟아내어 비판을 받았다.[33] 하여튼 소속 연예인 언플은 안하면서 이런 언플은 잘도 해요 하지만 오히려 소속사가 일을 못 하는 것을 대중들이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류의 음해성 언플 기사에도 대중들은 별 반응 없이 카라를 응원하였다. 소속사가 붙잡아도 모자랄 판에라면서 오히려 응원하는 중.[34] 그리고 1월 15일부로 허영지를 제외한 3인 모두의 전속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DSP는 '카라를 해체할 지 멤버 구성을 새로 할 지 고민 중'이라거나 '훗날 재결성의 가능성을 열어두었기에 해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이라는 식의 언플로 카라의 이름을 유지하려는 상황. 심지어 APRIL의 첫 일본 팬미팅에 허영지를 MC로 쓰고 카밀리아를 대상으로 우선예약을 받아서 팬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신인 그룹과 앨범을 알리는 데 중요한 쇼케이스 및 팬미팅에서는 다른 걸그룹 멤버가 아니라, 전문 MC의 자질이 있는 아나운서코미디언을 쓰는 게 관례다.[35] 왜 관례냐 하면 아나운서나 코미디언은 제 3자의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면서 동시에 말빨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절대 겉치레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레인보우가 Prism으로 컴백하고 홈페이지가 개편되면서 소속 아티스트란에서 카라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허영지가 대신하게 되었다.

전속계약 만료 이후 한승연과 구하라는 각각 배우 전문 기획사인 제이와이드컴퍼니, 키이스트로 이적하였고 박규리는 모션미디어로 이적했다.[36] 모두 DSP를 떠나자마자 전 멤버들이 2016년 1분기(1~3월)에 드라마를 두 개나 한다는 낭보가 들어왔다.[37] 박규리는 KBS 대하드라마 장영실, 강지영은 닛폰 테레비 수사드라마인 히간바나에 중요한 조연으로 출연하여, DSP의 능력이 다른 기획사에 비해 얼마나 부실한지를 입증하였다. 활동 지원에서도 전 카라 멤버들의 새로운 소속사 및 레이블들이 지원을 잘 해 주고 있는 건 덤.[38] 한승연도 JTBC 금토드라마 청춘시대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면서 DSP는 그야말로 무능력을 인증했다.

A-JAX는 중국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멤버 성민이 탈퇴하였다. 탈퇴 과정에서 소속사 측의 명확한 입장 발표가 전혀 없었고, 팬들은 네이버 프로필이나 뉴스 기사를 통해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멤버 변동이 팬들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인 것을 감안하면 기획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멤버 및 홍보 관리를 방관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팬들은 DSP 측에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했고 탈퇴는 사실이 아니라는 답을 들었지만, 그 이튿날 바로 언론 보도가 떴다. 이를 두고 카밀리아들은 DSP 내부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안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분석하였다. 결국 2월 5일 성민을 비롯해 효준(지후), 사회복무요원 복무 중인 재형이 공식 탈퇴하고 2015년 연말부터 에이젝스에 합류해 있던 연습생 중희가 공식적으로 합류했다.[39]

더군다나 레인보우도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일단 레인보우는 2월에 Prism으로 컴백하였으나 역시나 이번에도 뜨지 못하고 3월 중순 활동을 마감했는데, 제작 예산 부족으로 인해 디지페디가 제작한 뮤직비디오의 퀄리티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40] 레인보우의 경우에는 타이틀곡 선정이 Prism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레인보우도 제발 DSP를 나와서 타 소속사로 이적해 컴백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 단 한번의 멤버 변화 없이 7년 동안 동고동락한 멤버들의 우정도 끈끈하기 때문에 해체라는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한, 전부 다 재계약을 하거나 아니면 타 소속사로 멤버 전체가 이적을 해서 활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퓨리티 해체 후 카라 프로젝트에 참가했으나 탈락한 뒤 에이프릴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연습생으로 내려간 윤채경조시윤프로듀스 101에 내보냈으나 조시윤은 별다른 분량 확보를 하지 못한 채 힘겹게 버티다가 8회차 방송에서 41위를 기록하며 방출되었고, 윤채경은 8회에서 15위를 기록한데 이어 10회에서 7위로 상승하며 TOP 11 진입 가능성을 높였으나 최종 11회에서 16위로 내려앉으며 또 한 번 좌절했다. 이후에 방송이나 SNS 등으로 두 명의 소식을 자주 내보내 주지 않는 이상 데뷔 전에 팬들이 와해될 수 있는 상황.

그런 가운데 허영지, 프로듀스 101에 출연한 윤채경조시윤, 그리고 APRIL에서 탈퇴한 전소민이 함께 4인조 걸그룹으로 데뷔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윤채경이 본인이 곧 데뷔할 수도 있다는 떡밥을 던지기도 했다. 만약 DSP가 이 그룹을 데뷔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면, 굳이 허영지를 각종 예능에 내보내며 대중에게 노출을 시키고, APRIL에 집중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윤채경과 조시윤을 굳이 힘들게 프로듀스 101에 내보냈던 것, 또한 나름 순항하고 있던 APRIL에서 소민이 탈퇴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윤채경의 팬덤도 매우 커져 버린 만큼 데뷔를 늦췄다간 그나마 적지않은 팬덤을 모았다가 소속사의 실수로 와해되는 일을 다시 만들어 낼 순 없으니. 그러나 윤채경이 프로젝트 걸그룹 C.I.V.A에 이어 I.B.I에서 활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물론 윤채경이 프로듀스 101에서 최종승자가 되어 아이오아이가 되었더라면 얘기는 훨씬 달라져서 윤채경이 국민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에 따라 DSP 역시 호황을 누릴 수 있었으나[41] 윤채경이 프로듀스 101에서 낙방하고 결국 버리긴 아깝다는 팬들의 마음 덕분에 그나마 I.B.I로라도 활동하였으나 인기가 치솟는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진 못했다. 허영지의 경우에는 카드의 첫 번째 객원 멤버로 발탁된 상황이었으나 카드는 객원멤버 시스템을 폐기했다. 그리고 월드스타가 되었다

10월 28일 레인보우가 결국 해체를 발표했다. 계약이 끝나는 11월 12일에 공식적으로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멤버들은 각자 하던 부업을 당분간 하게 될 것으로 보이며 조현영은 츄러스집을 차려 영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DSP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에이프릴은 동시에 같이 컴백한 동세대 아이돌에 묻히고 활동 도중 이현주가 건강 문제[42]로 잠정 휴식을 한 데 이어 팀에서 탈퇴하는 변화를 겪었으나 THE SHOW에서 1위후보에 두번 들어 2위까지 들었으며, 미니 2집이었던 Spring은 팬싸인회 하나없이 초동 1000장으로 우주소녀의 데뷔 앨범과 CLC의 리플레시의 초동을 넘기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막내인 이진솔은 JTBC의 보컬 경연 프로그램인 걸스피릿과 걸스피릿의 스핀오프 컨텐츠인 소녀어택에 출연과 EBS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의 새 MC로 발탁되는 동시에 롯데제과 자일리톨 토이플레이 모델로 발탁되는 등[43] 본인과 APRIL의 인지도를 올리고 있다.

문제는 이 시기가 원카소 시기보다 더한 강적들이 APRIL의 동기들로 포진되어 있었는데 시간을 달려서로 폭풍 같은 인기를 구가하는 여자친구[44], OOH-AHH하게로 데뷔해서 심할 정도로 성장폭이 커서 당대 최고의 걸그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TWICE[45] 등이 APRIL의 데뷔 동기APRIL은 무지막지한 경쟁 상대들을 만난 것이다. 원카소 시절보다 더 힘든 싸움인 것이다. 게다가 조금 늦게 데뷔한 BLACKPINK 역시 나중에 포텐이 장난 아니게 터지게 되어 APRIL과는 비교 대상조차 아닌 대형 걸그룹이 되었다.

윤채경11회에서 탈락후 방황하던 팬덤을 V앱으로 확실히 잡은 뒤 홍대 미니 콘서트, 케이블 고정, 특별 음반까지 내주는 특별 혜택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로젝트 걸그룹인 C.I.V.A활동으로 인지도를 한번 더 끌어올렸으며 이후 또 다른 프로젝트 걸그룹인 I.B.I소속 멤버로 활동도 예정되어 있다. 비록 정식 걸그룹이 아닌 프로젝트 그룹이긴 하지만 그동안 데뷔에 목말라있던 본인과 팬덤에게는 괜찮은 기회로 작용 할 수 있다. 레인보우도 마이 리틀 텔레비전 등 지상파 예능 출연을 이루어내며 팬들 사이에서 큰 호평을 들었다. I.B.I 활동이 끝난 이후가 문제일 뿐이었는데 2016년 11월 11일 APRIL에 전격적으로 합류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사실 잠정 휴식 상태였던 현주의 빈 자리로 들어가 임시로 활동을 하는 등 어느 정도 밑바탕을 깔아 두기는 했지만.

또한 기존에 아이돌 그룹외에 신경을 덜 쓰던 부분에도 진출한점.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으로 인지도를 넓혀가던 배우 최배영을 영입하고 언프리티 랩스타2 출연 래퍼인 캐스퍼를 영입하면서 기존의 아이돌이 아닌 새로운 길, 새로운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결과중 하나로 혼성 그룹을 새롭게 런칭하였다. KARD가 바로 그것.

그외엔 특이하게도 2016년 이 기획사우회상장, 대표의 건강상태 악화, 소속가수 이탈 및 불법행위 연루, 매니저의 자회사 설립 후 독립, 방송영상사업 진출이건 사망플래그라는 DSP 몰락의 과정을 놀랍도록 똑같이 밟아가고 있다. 코스닥 다시 1패 그나마 큐브는 2018년에 상태가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DSP는 하는 짓이 여전히 답이 없다


2.9. 2017년: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DSP[편집]


레인보우마저 떠나 버리고 새 보이그룹을 결성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탓에, 남아있는 가수가 에이젝스, 에이프릴, 카드 세 팀밖에 없는 실정이다. 게다가 일부 멤버들이 탈퇴한 에이젝스는 국내 활동이 전혀 없어서 사실상 방치 상태. 올해 하반기 국내에서 컴백한다고 예고했다.

먼저 2017년 1월에이프릴이 멤버 윤채경레이첼을 보강해 새롭게 컴백했다. 타이틀곡은 상당히 잘 뽑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기존의 낮은 인지도와 멤버들의 평범한 보컬 실력[46]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초동 주에 팬사인회도 많이 안 잡혔으며, 이진솔의 보니하니 활동으로 일부 음악 방송에는 불참까지 하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그래도 쇼 챔피언은 역대급 무대를 가지기도 하였고, 더 쇼는 2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또한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힌 윤채경아는 형님 출연을 비롯해 예능 출연 빈도도 높아지고 있다.

1월부터 공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는데, 조건이 '남자'인 만큼 새로 보이그룹을 준비하려는 듯하다.[47] 이후 다른 오디션에서도 2018년 1분기 데뷔라고 붙이면서 확정으로 가는 분위기였으나 2018년 1분기가 끝나가는데도 소식이 없는데, 언더나인틴에 연습생을 내보낸 걸 보면 2019년 데뷔할 듯하다.

또한 2017년 2월 2번째 프로젝트 싱글 Don't Recall로 컴백한 혼성그룹 KARD해외 반응이 심상치 않다. 첫 싱글 Oh NaNa가 아이튠즈 미국 K-POP 차트에서 2위까지 오르는가 하면, 두번째 싱글 Don't Recall은 발매 직후 해외팬덤 끝판왕을 제치고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별 K-Pop 차트에서[48] 1위에 올랐다.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튠즈 메인 차트인 송 차트 (World Wide Song Chart)에서 25위까지 오르는 성과를 이뤄냈다. 참고로 현재까지[49] 아이튠즈 송 차트 25위 안에 들었던 아이돌 그룹은 방탄소년단이 유일하다. 또한 Don't Recall 유투브 뮤직비디오가 5일만에 조회수 500만을 넘는듯, 음방 한 번도 안 한 신인 그룹으론 엄청난 성과다. 아직 정식 데뷔를 하지 않았고, 국내에서의 반응이 없어 단정짓기는 이르나, 에이프릴과 함께 DSP에 재기의 발판이 되어 줄 수 있을 지 기대가 되는 전망이다.

소속사가 아닌 팬사이트가 다른 컨셉으로 만우절 행사를 진행한 과거와는 다르게,[50] 2017 만우절 특집으로 에이프릴과 카드[51]가 서로 V LIVE 채널을 바꿔서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했다.걸그룹 채널인데 가 나타났어요! 제이셉:"우리 치킨 못먹어" BM:"안녕하세요 에이프릴의 매튜입니다"[52]

하지만 에이프릴은 5월에 나온 싱글 앨범 MAYDAY에서 기존의 컨셉을 버리고 어울리지 않는 복고 컨셉으로 팬들에게마저 원성을 샀다. 결과적으로는 차트광탈부터 시작해 음원, 음반 성적 모두 반등에 실패했으며, 팬들로부터 타이틀곡 선정 실책을 지적받았다. 제대로 삐끗한 에이프릴은 답이 없는 상황으로 몰리고 말았다. 2년 3개월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반면 KARD는 데뷔 프로젝트 마지막 앨범인 RUMOR 역시 호평을 받았으며, 드디어 2017년 7월에 정식 데뷔를 했다. KARD의 미니 1집인 Hola Hola엠카 4위라는 기록을 남겨 나쁘지 않은 데뷔를 하였다. 트렌디한 음악과 무대 장악력으로 매번 외신의 찬사를 받는 이들로 인해, DSP 특유의 고질적인 일본 팬덤 의존 현상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기껏 영입했던 연기자 최배영은 1년 만에 계약을 해지하고 HB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 소속 아티스트들에 대한 의욕적 마케팅 능력이 여전히 미숙한 회사임을 입증해 버리는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2017년 9월 말부터 에이프릴 미니 4집 eternity 활동을 시작했으며, V.O.S최현준을 프로듀서로 영입했다. APRIL의 쇼케이스장에서 최현준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APRIL은 더 쇼에서 1위 후보에 올랐지만 3위에 머물렀다.

한편 A-JAX(중희, 승진)와 이현주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 출전했다. 그러나 에이프릴 탈퇴 후 배우로 전향한 이현주가 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취지를 생각하면 조시윤이 나가는 게 맞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시했다. 사실 조시윤도 배우로 전향했기 때문에 누가 나가든 프로그램의 취지와 맞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녀가 세 번이나 좌절을 겪었던 것을 생각해서 안타까움을 표시했다고 봐야 할 듯. 믹스나인에는 여력이 안 되어서인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팬덤이 약한 A-JAX는 중반부터 경쟁이 과열된 남자부에서 치고 나가지 못해 중희의 광탈을 시작으로 승진마저 2차 순발식에서 밀려 20회에서 전멸했고, 억울해서 출전했다고 밝힌 이현주는 데뷔권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2.10. 2018년: 다사다난한 상반기[편집]


2018년 2월 7일 에이프릴이나은, 이진솔 스페셜 유닛으로 음원을 공개했다.

2월 10일 킨텍스에서 열린 더 유닛 파이널에서 이현주가 전체 5위로 UNI.T 데뷔가 확정됐다. 이현주는 DSP 최초의 서바이벌 승자로 등극했다.[53]

2월 14일, 이호연 前 대표가 끝내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향년 6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10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유증으로 투병해 오다가, 전날에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어 끝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부고 소식이 전해진 후 많은 추모 기사가 올라왔고, 조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DSP 출신 가수들이 SNS 등을 통해 공개적으로 조의를 표하기도 했으며, 윤종신 등 연예인들도 조의를 표했다.######[54] 옥주현은 장문의 글을 통해 이호연 사장과의 인연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내용 자체가 재미있고 잘 읽히게 써서 화제가 되었다.(전문) 이외 소방차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는 홍성규 가요평론가는, 이호연 사장의 심미안을 인정하면서 그가 건재했으면 DSP가 SM, YG, JYP와 더불어 4대 대형 기획사에 속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단순히 가정이 아니라 DSP는 실제로 이호연이 건재할때는 소속 연예인으로 보면 대형 기획사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돌 1세대인 젝스키스-핑클 시절에는 SM과 함께 2대 대형 기획사, 2세대 초반인 SS501-카라 시절까지만 해도 역시 SM, JYP, YG와 함께 4대 대형 기획사라고 평가할 만한 수준이였으나[55] 이호연이 쓰러지고 바로 레인보우가 부진하면서부터 가수들이 인기를 못 얻고, 3세대에 와서는 대형 기획사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어져 버렸다.[56]

3월 12일에 에이프릴The Blue로 컴백했으며, 짧은 활동을 마친 후 4월 말 일본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다른 유명 가수들이 많이 컴백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했으며, 일본 활동의 경우 오리콘 차트 주간 29위, 2,000여 장의 판매량으로 큰 의미는 없는 활동이 되었다.

여전히 여력이 안 되어서인지, 프로듀스 48에는 불참했다.

2018년 7월 카드메이크스타에 참가하면서 혼성그룹 전원이 메이크스타 유경험팀이 되었다.

2018년 7월부터 이나은이 웹 드라마 에이틴[57]에 김하나 역으로 출연하면서 개인 인지도 및 인기, 에이프릴의 그룹 인지도가 올라갔으며[58], 9월에는 에이프릴의 10월 컴백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거기에 이나은2018 추석 아육대 리듬체조(후프)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 에이프릴의 2연속 리듬체조 메달 행진을 이어 갔다. 2018년부터 에이프릴에는 OST, 웹 및 TV 예능 등 멤버별로 개인 활동이 조금씩 들어오는 중.

8월 경에 조시윤이 소리소문없이 DSP와 결별했다. 전년도에 프로듀서로 영입했던 최현준도 불과 1년 만에 결별했다.

10월 16일 에이프릴이 미니 6집 the Ruby로 컴백했는데, 이 싱글의 문제점과 같이 타이틀곡 선정 미스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59] 타이틀곡 미스가 있었지만 음원 유통을 맡은 원더케이에서 댄스 커버 콘테스트 영상이 올라오고, 네이버TV 실시간 감상횟수, 좋아요 1위를 찍으며, 트위터 프로모션[60] 및 블루룸 라이브도 섭외되는 등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씩 들어오는 중. 또한 the Ruby 활동 이후 유입 팬들도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한 건 여전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규 팬이 유입되는데도 불구하고, 음반 판매량은 되려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11월부터 방송되는 MBC의 보이그룹 서바이벌 언더나인틴에 남자 연습생(전찬빈, 이상민, 송재원, 강준혁, 박시영)들을 출전시켰는데, DSP 공식 계정도 언더나인틴에 나온 연습생들 떡밥을 전혀 안 올려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언더나인틴의 시청률 부진과 함께 출연 직후 프로듀스 X 101 계획이 발표되어서 팬들 사이에서도 언더나인틴 출연에 대해 말이 나오는 중. 출전자들 중 박시영이상민언더나인틴 파이널에 진출했으나, 둘 다 파이널에서 탈락해서 원더나인로 데뷔하는 데에 실패했다.[61]


2.11. 2019년: REBUILD THE TEAM[편집]


2019년 2월 18일에 중희입대했다. 거기에 2012년에 데뷔한 A-JAX는 표준계약서 기준으로 치면 2019년이 계약 만료다. 군필자인 도우를 제외한 멤버들이 중희를 기점으로 서서히 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는데, A-JAX가 워낙 활동이 적어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결국 3월 31일 부로 전속 계약이 만료되어 데뷔 7년 만에 해체하게 되었다. #

허영지가 2019년 1월 31일에 DSP미디어와 계약이 만료된다. 따라서 DSP 측은 허영지와 재계약할 것인지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허영지는 회사에서 2016년부터 음악 방송이 아닌 예능 및 라디오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시키고 있고, 본인의 전례를 볼 때 걸그룹으로 재데뷔시키기도 힘들어서 재계약하더라도 향후 활동 방향에 대해 고민해야 할 상황. 일단 2월까지 DSP에서 잔여 활동을 수행했으나 3월에 들어서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지속적으로 DSP 공계에 일정이 올라오고 있으나, DSP에서는 아직 재계약 여부를 공식 발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에이젝스가 공식해체 선언을 하게 되고 회사 홈페이지 개편에 허영지 페이지가 리뉴얼됨에 따라 허영지는 DSP와 재계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활동하더라도 가수 활동이 아니라 예능 위주로 돌릴 듯.[62]

또한 2019년에는 언더나인틴 출연자들을 중심으로 새 보이그룹이 데뷔할 것으로 보이는데, 데뷔하면 7년만에 보이그룹이 데뷔하게 된다. 언더나인틴은 아무도 데뷔조 멤버를 내지 못하고 마감했는데, 흐지부지 끝나 버린 UNB의 선례를 볼 때 데뷔조 멤버 때문에 활동이 방해받을 일이 없어서 어찌 보면 원더나인 멤버로 선발되지 않은 것이 전화위복일 수 있다.

에이프릴이 1월 16일 일본에서 새 싱글을 발표하며 일본 활동을 재개한다. 국내 활동의 타이틀곡 선정 문제 때문인지, 일본 활동곡은 Oh-e-Oh로 바꿨다. 또한 이진솔별이 빛나는 밤에 고정코너에 들어가고, 이나은에이틴 2에 출연하는 등 에이프릴 멤버들의 개인 활동도 양보다 내실 위주로 조금씩 늘어나는 중. 행사도 봄이 되니 노래 제목대로 어느새 들어와 있다

그리고 2019년 3월~4월 KARD가 첫 디지털 싱글인 Bomb Bomb로 컴백하며 일본 외 글로벌 팬덤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9년 3월 손동표[63], 이준혁, 이환 연습생 3명이 프로듀스 X 101에 출전함에 따라 2016년 이후 3년 만에 프로듀스 시리즈에 복귀했으며, 남자부 시즌에는 첫 출전이다. 아예 DSP 자체에서 언더나인틴 참가자들과 별도로 프로듀스 X 101에 나갈 연습생들을 따로 선발한 것으로 보인다.[64] 손동표, 이준혁이 센터 후보로 뽑힌 건 덤. 그리고 손동표 연습생이 센터로 선발되어 엠 카운트다운 무대에 올랐다! 프로듀스 시리즈에서 센터는 반드시 데뷔한다는 기록이 이어지고 있는데, 손동표 연습생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65] 세상에 DSP가 보이그룹 띄우기 위해 제대로 이를 갈았다 정말로 데뷔한다면 화제성 좋은 프로듀스 시리즈의 특성상 DSP에는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2019년 5월 31일에 방송한 1차 순위 발표식에서 손동표가 7위를 기록하며 데뷔조 순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환은 67위, 이준혁은 75위를 기록하며 프로듀스 X 101을 마감했다. 손동표가 워낙 강세를 보이는지라,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서 최종 선발된 이현주에 이어 2번째로 오디션 서바이벌에서 최종 선발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손동표는 6회 이후 데뷔조 순위에서 이탈하여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확실히 항상 한자리수 등수를 유지하던 작년 센터 미야와키 사쿠라에 비해 손동표는 두자리수 등수가 된 적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프로듀스 48에 비해 프듀X는 데뷔 인원이 1명 적으며, 생방송 당일 11등이 아니라 역대 최다 득표자 1명이 11번째 멤버 X로 데뷔한다. 여태까지의 손동표의 득표수를 고려하면 손동표가 X가 될 확률이 낮다. 손동표 본인도 센터는 데뷔한다는 기록[66]을 깰 까봐 불안해하고 있다. 이현주가 그랬던 것처럼, 파이널을 앞두고 DSP 전현직 가수 팬덤이 더 유닛 때보다 강하게 결집해야 할 필요가 있다.[67] 하지만 전직 아이돌 팬덤들이 DSP에 대해 치를 떨어서 해줄지가 의문... 해주면 다행이지만... 도현 때문에 파이널이 밤 8시로 앞당겨졌는데, 손동표가 10대 지지표가 많으면 데뷔조에 들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소속사 식구들의 지지와 팬덤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손동표가 최종 6위를 기록하며 X1 멤버로 데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듀 복귀와 함께 프듀 남자부 시즌에 첫 도전한 DSP는 2번째 도전에서 프듀 첫 승리를 신고했다. 이렇게 손동표는 이현주에 이어서 DSP미디어에서는 2번째로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 최종선발자가 되었다. 그런데 조작 사건이 터져 활동이 사실상 무산돼서 문제지만, 다행인건 DSP는 첫 출전인 TOP나 이전 출전 시즌에서 최종 데뷔조에 든 참가자가 없는 위엔터, 플레이엠처럼 압수수색 대상 기획사도 아니라서 의심 받을 구석이 가장 적은 게 위안.


2.12. 2020년: 간만의 순풍[편집]


에이프릴이 2020년 2월이 되면서 공백 기간이 1년을 초과했다. 아이돌로서 공백이 1년을 넘어가면 분류상 장기 공백에 해당된다. 사실상 이 회사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는 건 2월 기준 KARD 하나뿐이다.[68] 따라서 APRIL의 신보가 급한 상황이다. 꾸준히 활동해야 팬들에게서 잊히지 않는 아이돌에게 장기 공백은 매우 치명적이다.

X1프로듀스 101 시리즈 투표 조작 사건으로 해체되면서, 손동표가 계약 기간보다 이르게 소속사로 복귀하였다. 이후 손동표를 주축으로 신인 보이그룹이 올해 안에 데뷔한다는 기사가 나왔으며, 남자 연습생들인 '새싹즈'의 팬카페, 공식 트위터, 공식 유튜브가 개설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천천히 데뷔를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싹즈 목록에서 프로듀스 X 101 참가자 이환, 언더나인틴 출전자인 강준혁, 전찬빈이 빠진 것을 보아 3명과는 결별한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프릴이 3월 컴백을 앞두고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4월 22일에 미니 7집 Da Capo으로 컴백을 하였다. # 1년 6개월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지만 멜론 실시간 진입 47위벅스 실시간 진입 1위, 멜론 실시간 최고 순위 37위, 멜론 일간 최고순위 56위, 데뷔 첫 멜론 월간차트 진입 등 차트에서 자신들의 최고 순위[69]를 경신하고 발매 후엔 차트아웃은 하지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진입 순위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최초로 주간순위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또한 초동도 지난 앨범의 초동을 하루만에 넘겨버리는 등 음반 판매량도 좋은 성과를 남겼다. 장기 공백을 딛고 괄목할 만한 성적으로 첫 음방 1위를 기대했지만, 솔라오마이걸과 붙게 돼 그보다 매우 미약세인 APRIL은 결국 1위를 하지 못했다.

4월 27일에는 21년 동안 함께해 온 오종혁이 DSP와 결별했다.

JTBC 스튜디오와 DSP미디어가 손잡고 새로운 유튜브 콘텐츠를 선보인다. 글로벌 모바일 매니지먼트 플랫폼 뜨자(ttja.net)가 K-POP 스타를 꿈꾸는 지원자들의 ‘Burn Up : 빌보드 도전기’를 담은 리얼리티 예능을 제작해, JTBC스튜디오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 될 예정이다.

과연 신인 보이그룹과 함께 DSP 반등의 요인이 될 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에이프릴이 7월 29일 섬머 스페셜 싱글 Hello Summer로 컴백을 했다. APRIL의 이전 앨범이 반등에 성공한 활동이었기 때문에 APRIL의 그룹활동에 더욱 주력하고 있는 듯 하다.


2.13. 2021년: 창사 이래 최악의 위기[편집]


마침내 손동표를 주축으로 한 신인 보이그룹 미래소년이 공개되었다. 현재 그룹과 관련된 컨텐츠를 하나씩 공개 중이며 3월 중으로 데뷔한다고 한다. 이로 인해 드디어 DSP미디어에서도 4년 만에 신인 그룹이자 9년 만에 새로운 보이그룹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2021년 DSP미디어의 첫 주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DSP미디어는 현재 수많은 연예 기획사 중 유일하게 걸그룹, 혼성그룹, 보이그룹을 다 가진 소속사가 되었다.[70]

그러나... 밑에 후술할 초대형 사태로 인해 재기는 고사하고 소속사 자체가 영원히 존폐되고 말았다.[71]

2월 28일 자신을 에이프릴의 前 멤버 이현주의 남동생이라고 밝힌 사람이 네이트판에 글을 올려 이현주가 APRIL을 탈퇴한 이유가 당초 알려진 배우 활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팀 내에서 괴롭힘과 왕따를 당했고 이로 인해 공황장애, 호흡곤란을 겪었으며 자살 시도까지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이현주가 배우를 하고 싶었으면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 더 유닛에 출전할 일 따위 없었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에 대해 DSP는 처음에는 사실 확인 중이라는 원론적인 태도를 보였다가 3월 1일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현주의 불성실한 태도로 팀 전체가 피해를 입었으며 탈퇴는 이현주 본인의 뜻이었다"라고 밝히며 사실상 책임을 이현주에게 전가했다.

이에 여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현주의 왕따로 의심되는 행동들이 속속 공유되면서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 엄연히 멤버들간의 사이를 중재해야하는 DSP마저 방관하는 모습으로 일관하는 장면들이 낱낱히 까발려지면서 이제는 재기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리조차 지키지 못하는 최저최악의 빌런 소속사로 낙인찍혔다.[72] 특별한 반전의 계기[73]가 없는 한, 에이프릴과 DSP의 운명은 사실상 끝난 상황이나 다름없을 것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2021년 8월 중순을 기점으로 이현주와 관련한 논란, 그 중에서도 이현주 자신이 밝힌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시기와 남동생 및 동창이 밝힌 왕따를 당하기 시작한 시기가 불일치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상황이 조금씩 반전되어 여러 방향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긴 하지만[74], 그렇다고 DSP의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이현주와 주변 인물의 거짓 폭로로 밝혀진다고 해도 데뷔 8년차에 접어든 APRIL이 아픔을 딛고 과거와 같이 라이징스타로써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3월 17일 신인 보이그룹 미래소년이 미니 1집 KILLA로 정식 데뷔하였다. 다만 새싹즈에 있었던 정호진은 미래소년으로 데뷔하지 못하면서 퇴사하고 씨제스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75]

6월 11일 DSP미디어 웹사이트의 아티스트에서 이현주가 삭제되었다.

현재 에이프릴의 멤버 중에서는 윤채경만 방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14. 2022년: RBW의 품으로[편집]


1월 12일, 미래소년이 세 번째 미니앨범 Marvelous로 컴백했다. 이젠 APRIL이 8년 차 아이돌로 8월 재계약을 앞둔 데다가, 2021년 2월 일어난 APRIL 원년 멤버들의 이현주 집단괴롭힘 논란의 여파로 인해 제대로 된 그룹 활동도 없는 상황으로 당분간 재계약은 불투명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DSP미디어는 미래소년과 KARD 그리고 허영지와 APRIL의 멤버 윤채경의 개인 활동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운명이다.

1월 26일, 동종업계 종합엔터테인먼트 상장사 RBW가 최미경 대표가 보유중인 지분 39.13%를 90억원에 확보 후 순차적으로 100% 인수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오는 28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예정이고, RBW는 인수를 희망할 경우 매수청구권을 행사해 2025년까지 순차적으로 DSP미디어 지분 100%를 확보할 수 있다. 또한 김진우 RBW 대표가 DSP미디어 대표까지 겸직하게 되면서 최미경은 약 12년 만에 DSP의 대표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76]

1월 28일, RBW와의 주식매매계약이 이루어진 동시에 APRIL의 해체 소식을 발표했다. # 이 점으로 미루어 APRIL의 해체는 RBW의 DSP 인수 확정 전에 이미 결정된 사안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2021년 일어난 집단괴롭힘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것이 APRIL 해체의 원인이라고 예측하고 있다.[77]

2월 11일, 에이프릴 멤버 중 김채원이 가장 먼저 회사를 떠났으며 4월 7일에는 양예나, 20일에는 윤채경, 26일에는 이진솔, 6월 2일에는 이나은이 차례로 DSP와 결별했다.

6월 22일, KARD가 다섯 번째 미니앨범 Re:로 컴백했다. 이후 7월 부터 8월까지 남미 5개 도시[78] 월드투어가 예정되어있다.

9월 15일, DSP가 마지막으로 히트시킨 카라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을 발매하는 것이 밝혀졌다.# 다만 RBW 소속으로 발매가 확정돼 2022년 DSP는 KARD를 제외하고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활동을 보이지 못한 해로 남았다.

12월 12일, 발라더 전문 매니트먼트사인 굿펠라스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합병 하였다. 기존 굿펠라스의 민명기 대표는 DSP미디어의 총괄 프로듀서로 선임되어 아티스트 및 음악 기획과 제작에 참여할 계획이며, 더불어 프로듀서 이석주, 작곡가 이율, 가수 이진재, 가수 베이비블루(지나온, 도아윤)는 DSP미디어 소속 아티스트로 새롭게 도약할 예정이다. 특히, DSP미디어는 대대적인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가비엔제이를 론칭할 계획이다. 기사[79] 이로써 핑클에서 시작된 DSP의 아이돌 걸그룹 계보는 APRIL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막을 내린 것으로 보였으나......


2.15. 2023년: 사업 확장[편집]


5월 12일, 솔로 싱어송라이터 안예은과 계약했다. #

6월 1일, 배우 전문 기획사인 지킴엔터테인먼트를 인수했다. 기존 지킴엔터테인먼트 공식 SNS 또한 DSP 미디어 배우 계정으로 전환되었다. # 이후 소년판타지 참가자인 강대현을 영입했다.

6월 22일, 하반기에 5인조 걸그룹이 데뷔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 이후 그룹명은 YOUNG POSSE로 정해졌다. #

6월 23일, DSP에 마지막까지 잔류한 APRIL의 멤버 레이첼의 계약이 모기업 RBW로 이관되며[80] APRIL 멤버 전원 DSP를 떠나게 되었다. 또한 강대현도 RBW의 새로운 보이그룹 멤버로 발탁되면서 계약이 이관되었다.

9월 12일, 허영지가 솔로 데뷔 싱글 Toi Toi Toi를 발매하였다.

10월 18일, YOUNG POSSE가 미니 1집 MACARONI CHEESE EP로 데뷔하였다.
[1]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 출신. 윤종신라디오 스타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과거 태권도 선수였었다고도 한다.[2] 김광수 등 대부분 연예 기획제작자가 밑바닥 로드매니저부터 밟고 올라오는 것과 달리, 81년도에 한밭기획 전무이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나이도 만 27살이었으니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지금보다 많이 드물던 당시 대학도 제대로 나온 것을 보면, 90년대 당시 조폭도 얼씬대던 어두웠던 연예업계 분위기에 비하면 나름대로 인텔리에 가까웠다고 보인다.[3] 참고로 TS엔터테인먼트의 김태송 대표는 소방차의 매니저로 연예계 일을 시작했으며, 이후 ZAM의 매니저를 맡은 바 있다.[4] 당시 해체의 이유를 멤버들의 학업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항간에서는 데뷔를 앞둔 젝스키스에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해체시켰다는 소문도 있었다.[5] 가수 매니지먼트에 관한 사례연구, 김정은,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2000[6] 그 지상파 3사 말고는 EBS 정도가 있을 뿐인데 EBS는 교육방송이라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오로지 강의 방송밖에 안 하던 방송국이었다. 케이블TV까지 범위를 넓혀도 엠넷KMTV가 전부였고 2020년대 초반 현재 있는 많은 연예 채널은 이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 당시에도 지금의 tvN과 비슷한 포지션이던 HBS 현대방송(훗날의 NTV→채널CGV)이 있긴 했지만....[7] H.O.T.(5명)→젝스키스(6명), S.E.S.(3명)→핑클(4명), 신화(6명)→클릭비(7명) 등.[8] # [9] 멤버들 중에 가장 리듬감이 좋아서 메인보컬임에도 베이스 기타를 배우게 되었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하지만 메인보컬이라는 포지션에 베이스 기타까지 병행하기 어려워 2집부터는 김상혁이 베이스 기타를 맡고 오종혁은 메인보컬만 담당했다.[10] 지금이야 FT아일랜드나 씨앤블루, AOA 같은 팀들이 있지만 당시로서는 아이돌 밴드의 시초격이었고 실제로 그룹 정체성에 대해 욕을 많이 먹었던 걸 보면 김상혁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냥 밴드 아이돌이 아니라 일부는 연주를 하고, 일부는 춤을 추는 락댄스 그룹이었다.[11] 오디션에서 우연석과 함께 합격했다고 한다.[12] 에이스타일(슈퍼주니어 - 7), 카라(천상지희 - 0)로 멤버 수가 오히려 줄고 있다(?).[13] 이름이 강나현이다. 이호연과 결혼하기 전 낳은 딸, 다시 말해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다. 이름으로 미루어 보면 전 남편의 성이 강씨임을 알 수 있다.[14] 더불어 젝스키스가 재결성을 준비하던 시기 DSP를 찾아갔다가 이 꼬라지를 보곤 "우리가 알고 있던 DSP가 아니다. 사장님 말고는 우리가 활동하던 시절 있던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라는 말과 함께 DSP 미디어가 아닌 YG엔터테인먼트에서 재결성을 하게 되었다.[15] 이후 연습생들 행보를 봐도 안타까운 경우가 많았다. 퓨리티는 일본에서 반짝 활동하더니 카라 프로젝트를 하려고 해체했다. 이로 인해 퓨리티의 멤버였던 조시윤윤채경의 향후 활동이 꼬였다. 그나마 이들은 프로듀스101로 기회를 찾았지만, 안소진자살로 생을 마감했다.[16] 이중 퓨리티의 윤채경전소민나중에 다시 데뷔한다.[17] 파일:gp0swP5.jpg
여기에서 빠순이 역할을 한 연습생이 다름아닌 훗날 여자친구소원이다.
[18] 슈퍼 부트는 아예 경합 면제였고 1,2,3,4,5,6부트까지 경합으로 통과했는데 경합 탈락자는 0부트가 되어 0부트끼리 패자부활전으로 올라간다.[19] 2010년부터 활동시 대중적인 관심은 늘어서 직찍, 직캠러들은 많이 붙었지만 코어팬층은 잘 붙지 않았다.[20] 중국에는 상하이에 합작 때문에 간 걸 제외하면 중국 활동이 거의 없는 편이다.[21] 이 때의 데뷔 동기가 뉴이스트. 뉴이스트도 플레디스와 일본 소속사인 소넷엔터테인먼트의 만행 때문에 맨땅으로 진출한 일본 전국, 그리고 해외를 돌아다니며 지나친 대일의존도, 스케줄 문제 등 지독한 고생을 하다가 2017년 프로듀스 101 시즌2를 통해 빛을 보았다.[22] 그리고 젝스키스는 2016년 YG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여 한때 DSP를 먹여 살리던 가수들은 전부 DSP에 없게 되었다.[23] 이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APRIL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4월에 데뷔하려 했던 그룹은 자살사건의 이미지가 잠잠해진 8월이나 가서야 데뷔했고 사건의 여파로 회사는 에이프릴에게서 베이비카라의 색채를 지우려 해서 베카 출신 윤채경 조시윤이 데뷔조에서 빠지게 되며 후술한 소민이 탈퇴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셋 다 베이비카라 출신) 즉 셋의 커리어가 꼬인 것. 거기에 사건으로 인해 싸늘해진 팬덤의 분위기 및 늘어난 DSP 안티로 인해 초기에 제대로 자리잡지도 못했고 하필이면 타사에서도 비슷한 컨셉트의 그룹이 쏟아져 차별화도 못한 상태에서 다음 컴백 시기에는 대박 터진 걸그룹 오디션 프로때문에 대중들의 관심도가 낮아졌다. 사건 없이 예정대로 4월에 원래 멤버로 데뷔했다면 카라 프로젝트 시청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속에 처음부터 더 나은 환경으로 시작했고, 가을쯤 컴백해서 그 오디션 프로 이전에 제대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 걸그룹 오디션에 윤채경이 나가서 선전하는 바람에 그나마 지금만큼의 팬덤이라도 쌓았지 그조차도 없이 초반에 광탈했다면 지금보다 더 암울했을 듯.[24] 이후 음악적 색깔이 맞는 KARD로 전환배치되어서 부정적인 의견은 팬덤 사이에서도 없는 편이다.[25] 같이 데뷔한 동기팀들 중 비주얼 에이스를 보자면 여자친구의 소원, 소나무의 나현과 뉴썬, TWICE의 쯔위와 정연, 심지어 2010년대 초반에 대뷔한 비슷한 컨셉의 선배 그룹인 에이핑크의 손나은 등 다들 미모상으로 매우 쟁쟁한 멤버들이 존재하지만 APRIL은 이 정도 수준의 비주얼이 없다.[26] 에이핑크의 정은지, 여자친구의 유주와 은하, 마마무의 솔라, 소나무의 하이디 같이 독보적인 가창력을 지닌 메인보컬이나 여자친구의 예린과 신비, 소나무의 의진, TWICE의 모모 같은 뛰어난 춤꾼도 APRIL에는 없다.[27] 2세대 아이돌만 봐도, 슈퍼주니어가 멤버들의 병역이행 기간이 각각 달라서 콘서트 및 활동 조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28] 극히 드문 예외가 2AM이창민, 엔플라잉유회승인데 이 둘은 아예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데뷔 전에 병역문제를 해결했으며 데뷔한 시기가 그렇게 늦지도 않다. 그리고 유회승은 동반입대한 친구가 1호팬이 되었다[29] 멀리 갈 것도 없이 소속사 선배인 카라만 해도 2008년에 엠넷과 공동 진행한 오디션을 통해 구하라, 추가 멤버 강지영을 영입하여 미니앨범을 3장 발표했고, 결국 그해에 엠카에서 데뷔 첫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8년 뒤 아이오아이가 엠넷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데뷔하였다. 무학여고 출신 걸그룹 멤버 전원이 엠넷이라는 공통분모가[기사원문] 이호연 대표는 국내 매니지먼트 1세대 출신으로서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레인보우 등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은 뮤지션들을 기획, 제작하여 한국의 음악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카라의 경우 국내 걸그룹 최초로 첫 도쿄돔 단독 공연을 기획, 개최하는 등 한류 열풍을 이끄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이호연 대표는 TV 드라마 '마이걸', '연개소문',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제작.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미디어사업 분야에도 기여한 점이 이번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수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30] 허영지는 2019년 1월 31일에 계약이 만료된다.[31] 그러나 김광수의 그간 언행을 보면 MBK 쪽으로 갈 가능성은 없다. 특히 김종국을 두들겨 패 신체에 장애를 만들어 놓은 건 거의 전설이다. 실제로 이적 루머 뉴스가 쏟아졌을 당시에는 언론들이 유력한 후보로 키이스트를 골랐지, MBK를 고른 뉴스는 하나도 없었으며, 결국 키이스트로 이적했다.[32] 한승연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희빈 장씨김태희와 대립되는 숙빈 최씨를 배역했었고 이것을 시작으로 연기자 생활에 제대로 맛들렸다. 실제로도 숙빈 최씨 배역을 엄청 마음에 들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승연은 해당 배역에서 엄청나게 혹평을 들었고 이후에 맡은 다른 배역들의 평가가 훨씬 좋지만...[33] 이 시기 허영지 본인이 '카라의 인공호흡기'라는 기사를 트위터 링크로 업로드했다가 비판을 받고 해당 트윗을 삭제함과 동시에 계정도 삭제했다. 이미 인공호흡기란 단어 자체가 '그룹이 죽어 있다' 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고. 그리고 이 이전부터 2014년 후반기~2016년 초까지 데뷔 직후 룸메이트에 출연하기 시작한 허영지를 제외한 멤버들과 나머지 멤버들의 TV, 라디오 등 미디어 출연 분량 차이가 심각할 정도라 그간의 공헌도를 무시한 불공평 푸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특히 데뷔 직후 지상파 예능 고정출연 및 해외투어의 경우 허영지와 데뷔연차가 같은 Red Velvet도 못 받아본 대우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팬덤 내부 반발이 심각했던 편. 또한 에이프릴 팬덤 내부에서도 에이프릴에 써야 할 푸쉬를 허영지 홀로서기 프로젝트를 위해 썼다는 비판도 있으며, 형해화된 일본 공식팬클럽에서 카라 이름을 아직 쓰는 것에 대한 비판도 상당하다.[34] 재계약 여부에 대한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던 시점에서 오히려 팬덤에서 들고 일어나 재계약 거부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보통 팬덤들이 재계약을 하길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인걸 감안하면 소속사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는 부분. 여담으로 DSP는 2022년 현재까지 7년 계약을 끝내고 재계약에 성공한 케이스가 허영지를 제외하곤 없다.[35] 실제로 2015년 이전의 카라 국내 쇼케이스 및 팬미팅에서는 아나운서 박지윤, 전현무, 전문 MC인 MC딩동 등이 진행을 맡았으며, 일본 쇼케이스에서는 한국 대중문화 전문 MC인 후루야 마사유키가 진행을 맡았다. 그러나 2016년 4월의 APRIL 컴백 쇼케이스에서는 전문 MC가 아닌 레인보우지숙이 진행을 맡았다.[36] 박규리 본인은 장영실 드라마에 먼저 집중하고 소속사를 찾겠다고 하였으며, 2016년 7월 유선, 이종혁이 소속된 모션미디어로 이적했다. 이후 다인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이 전환되었다.[37] 쟈니스를 비롯한 일본 아이돌을 보더라도, 한 분기에 같은 그룹에서 드라마를 2명 이상이 동시에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38] 특히 스위트파워는 일본에서 여배우와 관련해 탑티어급 기획사로 유명하다. 가수활동의 경우에는 소니 뮤직에 매니지먼트 및 프로모션을 위탁 중. 지영이 하고싶은거 다해 [39] 군필자인 형곤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로 진학하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 아이돌 최초 학생예비군일 뻔했는데 예비군 6년차라서...[40] 다만 디지페디는 뛰어난 능력의 뮤직비디오 제작자 맞다. Whoo직후의 작품이 아이오아이너무너무너무라는 것을 감안하면 Whoo 뮤비 퀄리티가 낮은 건 역시 예산 부족인 듯하다. 돈을 이만큼밖에 안줬으니 제아무리 뛰어난 뮤직비디오 제작자라고 해봐야 뭔 소용인가.[41] 당장 왕뚜껑부터 시작해서 I.O.I멤버들을 '단지 I.O.I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난 섭외를 하고 CF를 엄청나게 찍어댔다. 그 타이틀 하나뿐인데도 인기가 어마어마했다.[42] 안타깝게도 건강 문제는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 이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게 드러나자 에이프릴은 결국 2022년 1월 공식 해체, DSP는 결국 다른 회사에 인수되면서 회사가 사라지고 말았다. 밑에서 자세히 후술 예정이니 참조.[43] 그런데 보니하니 오디션 참가는 소속사와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일이었고 DSP는 뒤늦게 이를 인정했다.[44] APRIL은 지금도 음악 방송 1위 기록이 없는 반면 여자친구시간을 달려서 단 한 방으로 음악 방송 1위 15회라는 기상천외한 기록을 달성했다.[45] TWICETWICEcoaster : LANE 1 음반을 491,670장 팔아치우는 동안 비슷한 시기에 APRILPrelude를 8,200장밖에 못 팔았다.[46] 보컬 실력이 여자친구유주마마무솔라 수준이었더라면 인지도를 무시하고 화제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실제로도 에이프릴은 멤버 3명을 V-1에 출전시켰으나 윤채경김채원은 예선 탈락하고 이진솔만 1라운드에 진출했는데 그 이진솔 역시 별로 강하지도 않은 정다경에게 털려서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참고로 소나무하이디는 준결승인 2라운드에 진출해서 V-1 우승자인 유연정에게 패해서 탈락했다.[47] 위에도 써져 있지만 보이그룹은 기획사의 주요 돈벌이다.[48]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ard&no=3368&page=1&exception_mode=recommend[49] 2017년 2월 20일 기준.[50] 대표적으로 카라의 경우 2010년 만우절엔 카라티닷컴이 보성녹차 사이트로 만우절 컨셉을 잡기도 했다.[51] 두 그룹은 아주 친하다.[52] 에이프릴이 젠가미션을 먼저 이겨서 치킨을 못 먹게 되었다(...). 대신에 카드는 을 마실 수 있어서 성인멤버 둘이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하였다[53] 물론 진짜 '최초'는 자체 서바이벌인 카라 프로젝트의 승자인 허영지이다. 이현주는 정확히는 DSP 최초의 대외 서바이벌 승자인 것이다.[54] 장례식에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례로 옥주현의 경우 장례식 기간 내내 아무 기사가 없었지만, 발인식날 소속사 SNS에서 조문했다는 내용이 올려졌다. 기사로 언급되거나 연예인 자신이 밝히지 않는 한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조문객 취재는 언론 윤리상 하기 않기로 합의되어 있다.# 그러나 안 지켜지는 경우도 많다.[55] 정작 YG와 JYP는 이 시점에서는 신흥 대형 기획사였다. 각각 BIGBANG원더걸스의 대박으로써 비로소 대형 기획사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1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유지한 DSP가 오히려 박힌돌이였다.[56]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나 4번째 대형 기획사 자리는 약 10년 후인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 HYBE LABELS가 차지하게 됐다.[57] 이 드라마의 OST 곡인 A-TEEN을 세븐틴이 불러서 플레디스도 이득을 얻게 되었고 CARAT들도 이 곡으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데습엔 현재 활동중인 남자아이돌이 없다[58] 이 이전부터도 보니하니, 복면가왕에 진솔이 출연하면서 서서히 TV를 통해 일반 시청자들(특히 30~40대 학부모층)에게도 에이프릴의 인지도가 올라갔으며, 소속사에서 컴백 때 온에어프릴에서 에이틴 패러디를 하기도 했다.[59] 실제로 음원사이트의 댓글들을 본다면 타이틀곡인 예쁜 게 죄보단 1번 트랙 oh-e-oh나 3번 트랙 이야기가 훨씬 좋다는 평이 많다. 그리고 일본활동은 oh-e-oh 주력으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4곡 늘어놓고 타이틀 곡 정하자 하면 타이틀 곡으로는 '예쁜게 죄'를 쓸 수밖에 없다. 다시 돌아가도, 그 어떤 프로듀서가 와도 '예쁜게 죄'로 정할 것이다.) 없나.그리고 영어권에서도 버즈가 있어서, 80년대 레트로 사운드를 충분히 재현해 빌보드 케이팝 전문기자 타마르 허만(Tamar Herman)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60] 트위터 프로모션은 KARD, NCT 127, 몬스타엑스 등에서도 활용 중인데, 이를 보고 팬들은 DSP의 홍보 전략이 달라졌다는 반응을 보였다.[61] 김시현 외 파이널 탈락자들의 순위는 공개되지 않았다.[62] 일본에서는 이런 노선을 '버라돌'(버라이어티+아이돌) 노선이라고 한다.[63] 외부 영입으로, 댄스 크루 AB PROJECT 출신이다. DSP에서는 김재덕 이후 근 20년만의 댄스 팀 출신.[64] 연습생들은 'DSP 새싹즈'라고 불리며, 언더나인틴 출전 연습생들과 같이 데뷔한다면 8인조+a로 데뷔할 것으로 보인다.[65] 에이젝스 이후 6년 만에 DSP 소속 남자 아이돌이 엠넷 음방에 출연했다.[66] 시즌 1 센터 최유정, 시즌 2 센터 이대휘, 48시즌 센터 미야와키 사쿠라 3명 모두 데뷔조에 들었다.[67] 당시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며 출전한 이현주파인에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음원미션에서 뫼소리 관련 지적을 받으면서 APRIL 시절 애기 목소리를 강제한 것이 방송을 탄 것+중희, 승진의 광탈+이현주 대체자가 윤채경인 점+2차 8위서 3차 10위로의 추락이 겹치면서 그 따가운 시선이 대신 같은 처지니까 일단 살리고 보자는 반응으로 이어졌는데, 손동표는 동료의 광탈과 순위 하락세만 같지 나머지 2가지가 아예 없어서 문제. 이현주가 대단히 웃긴 게 이현주가 에이프릴을 탈퇴하는 바람에 파인에플이 이현주를 아예 대놓고 외면한 반면, 엄지의 친구라는 이유로 BUDDY 쪽에서 예린의 친구인 의진 다음으로 밀어 주던 차애 픽이 이현주였다는 것.[68] 이나은이 그나마 꾸준히 예능에 출연하고 광고를 찍으면서 소녀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69] 봄의 나라 이야기 때의 진입 순위 이자 최고 실시간 순위인 54위, 꿈사탕때의 최고 일간 순위 62위[70] 물론 이건 DSP미디어가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기획한 것이며 다른 기획사들은 혼성그룹이 점차 도태되는 아이돌 시장의 분위기에 따라 어지간하면 혼성 그룹은 육성하지 않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다른 기획사 같으면 남자 4명과 여자 3명이 있으면 4인조 보이그룹과 3인조 걸그룹을 만들지 절대 7인조 혼성그룹을 만들지 않는다. 실제로도 DSP미디어에서는 혼성그룹이 반쯤 도태된 상황인 것을 알기 때문에 KARD 또한 아직 아이돌의 성별 구분을 거의 하지 않는 해외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적어도 동아시아에서 혼성 아이돌은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며 그래서 KARD는 주로 미주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특히 남미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다.[71] 지잡대에 대해서 우스갯소리로 군대 갔다 왔더니 학교가 사라졌어요라고 농담삼아 자조하기도 하는데 J.Seph은 정말로 군대 갔다 왔더니 소속사가 사라졌어요가 될 판이다.[72] 폭력 사태에 있어서 방관은 엄연한 범죄에 해당된다.[73] 재판 결과 등등[74] 관련 의혹에 이현주는 여전히 침묵 중이며, 이와 관련한 비판이 이어지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계속 감소하자 아예 댓글 기능을 전부 막아버리는 등 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뒷광고 논란까지 겹치며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75] 그러나 정호진은 2022년 9월 씨제스에서도 퇴사했다.[76] 같은 RBW 레이블 소속 WM엔터테인먼트는 인수 이후에도 이원민 대표 체제를 유지해온 반면, DSP미디어는 대표까지 변경되며 회사 내의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DSP미디어의 대표 변경이라는 게 다른 대표를 선임하는 것이 아닌, 김진우 RBW 대표가 직접 겸직한다는 점은 이 변화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77] 논란 이전에는 팬덤의 증가, 멜론 월간차트 차트인, SBS 가요대전 출연 및 멤버 이나은 드라마 주연 캐스팅 등의 라이징 아이돌로써의 정석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재계약이 다가오는 연차에 비해서 앨범 판매량이 다소 부진하였고,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활동, 행사 및 해외 활동이 불가능해진 점도 해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된다. 실제로 7년차를 달성한 걸그룹 중에서 유일하게 전체 활동을 총합해도 초동 1만장도 못찍은 걸그룹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78] 칠레 산티아고, 멕시코 몬테레이, 브라질 멕시코시티, 콜롬비아 보고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79] 기존 가비엔제이 멤버인 서린, 건지, 제니는 이미 2022년 3월에 굿펠라스와 계약이 만료되었다.[80] 이관 후에도 한동안 DSP미디어 사이트에 프로필이 남아 있다가 뒤늦게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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