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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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저 베이커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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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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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크림
CREAM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
입성 연도
1993년
후보자격 연도
1992년
후보선정 연도
1992년, 1993년











크림
Cream


파일:Cream.jpg


국적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결성
1966년 6월
영국 잉글랜드 런던
데뷔
1966년 12월 9일
정규 1집
해체
1968년 11월
재결성
1995년, 2005년
멤버
잭 브루스 (베이스, 보컬)
에릭 클랩튼 (기타, 보컬)
진저 베이커 (드럼)
장르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블루스 록
레이블
애틀랜틱 레코드, 리프리스, 리액션, 폴리도르, 앳코, RSO

1. 개요
2. 멤버
3. 경력
4. 디스코그래피



1. 개요[편집]



파일:Cream Farewell Concert, Royal Albert Hall, London, Britain - 26 Nov 1968.jpg


크림은 6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의 전설적인 록밴드이다.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과 천재 작곡가이며 베이스의 귀재이자 피아노, 하모니카 까지 담당한 잭 브루스,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1] 3명이 조직했던 세계 최초의 슈퍼밴드[2][3]이다. 하드 록이란 개념이 크림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블루스를 바탕으로 극한으로 올린 사운드[4]와 재즈에서나 볼 수 있는 개념인 임프로바이제이션(즉흥연주)를 록 공연에 최초로 도입함으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Jimi Hendrix Experience)와 함께 후대의 하드 록과 헤비메탈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록 음악 최초의 파워 트리오 밴드이며, 동시에 파워 트리오 편성을 대표하는 밴드이기도 하다.


2. 멤버[편집]


크림의 구성 멤버

잭 브루스 Jack Bruce
생몰
1943년 5월 14일 - 2014년 10월 25일 (향년 71세)
출신지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스코틀랜드"
행정구
]]
라나크셔 비숍브릭스
활동
1966년 - 1968년
포지션
베이스 기타, 보컬

에릭 클랩튼 Eric Clapton
출생
1945년 3월 30일 ~ (79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서리 리플리
활동
1966년 - 1968년
포지션
기타, 보컬

진저 베이커 Ginger Baker
생몰
1939년 8월 19일 - 2019년 10월 6일 (향년 80세)
출신지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런던 루이셤
활동
1966년 - 1968년
포지션
드럼
파일:크림 로고.png


3. 경력[편집]


에릭 클랩튼이 이전에 소속되어있던 밴드인 블루스브레이커스에서 나온 후, 진저 베이커는 에릭 클랩튼에게 밴드 결성을 제안한다.[5]이에 에릭 클랩튼은 잭 브루스의 가입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진저 베이커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크림은 시작되었다.[6]
1966년 3월, 진저 베이커가 "멜로디 메이커"지와의 인터뷰에서 크림의 결성을 알렸다.[7] 이후 런던에서 펼쳐진 재즈/블루스 페스티벌에서 정식 데뷔무대를 갖게되었는데 당시 크림은 무명이라 마지막날 공연의 끝 순서에 배정을 받았다고 한다. 앞 순서가 더 후의 공연이었는데, 알다시피 더 후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밴드"로 정평이 나있었다. 크림은 이에 대조적인 반응을 보이며, 세 곡의 레퍼토리와 즉흥연주를 선보이며 공연을 이어갔고, 당대 최고의 실력과 자부심이 있는 만큼 관중들은 열띤 반응을 보였다.[8]

밴드 내의 음악적 주도권은 베이시스트 겸 리드 보컬리스트인 잭 브루스가 가지고 있었고, 에릭 클랩튼은 기타리스트로써 본연의 역할을 한다. 대표곡들도 그가 작곡한 곡이 대부분인데, 열거해보면, "I Feel Free", "Sunshine of Your Love"[9], "White Room"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참고로 이 곡들의 작사는 피트 브라운이라는 외부 인물이 따로 담당했다.

데뷔앨범, Fresh Cream 과 싱글 "I Feel Free" 가 인기를 모으면서, 영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점차 열성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이키델릭 블루스/하드록의 명반이라 불리는 "Disraeli Gears"가 나왔을 때 지미 헨드릭스가 혁신적인 비주얼과 음악을 들고 음악계에 등장했다. 그리고 1967년 록 음악계는 비치 보이스브라이언 윌슨의 정신적 문제로 빠지고, 킹크스가 미국 공연을 금지당한 가운데, 비틀즈, 롤링 스톤즈, 지미 헨드릭스, 더 후로 압축되었고, 지미 헨드릭스는 인기의 여세를 몰아 크림을 제치고 몬테레이 팝 페스티벌에도 출연했다.[10]

사실 크림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에게 잠시 밀렸던 건 사실이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Disraeli Gears"는 영국 차트를 점령하고, 미국 차트 5위까지 기록했다. 그 불세출의 명곡 "Sunshine of Your Love"도 이 앨범에 수록되었다.[11] 당시에는 Sunshine of Your Love가 빌보드 최고순위 5위, 연말차트 6위로 크게 히트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Purple Haze의 인기를 압도했을 정도고, 1967년 연말에 3번째로 히트 친 사이키델릭 록 음악이었다.[12] 그리고 이 곡의 성공에 힘입어 크림은 1968년 1년 동안 대중가요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 중 하나가 된다.

1968년 크림은 "Wheels of Fire"를 발표했다. 하드록의 고전이 된 "White Room"을 빌보드 싱글차트 10위권에 올려놓으면서 앨범 차트 1위를 거머쥐었고, 크림의 최대 성공작이 된다. 그리고 전미 순회공연으로 인기몰이를 한다. 그러나 엄청난 공연 스케줄은 당시 멤버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음악도 각자의 기교를 과시하는 방향으로 목적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이러다 보니 음악적인 아이디어도 고갈되었고, 멤버간의 불화도 심해진다. 그리고 이 앨범은 최초로 백만장 이상이 판매된 더블 앨범이 된다.[13]

1968년 11월 여러 문제로 인해, 크림은 갑작스런 고별공연을 발표한다. 크림의 고별공연은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이틀간 펼쳐졌다.[14] 이후 "Goodbye" 앨범이 발표되고 크림은 해체된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잭은 이전에 연주하던 프리재즈 성향의 음악에 투신하고, 진저는 아프로 비트 스타일의 음악을 시도하며 지속적으로 재즈 음악을 하였으며 에릭은 조금 더 대중적인 음악을 하면서 점차 인지도를 높여 갔다. 이 이후 크림의 세 멤버가 다시 모여 처음으로 공연을 한 것은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때 기념공연을 했던 것이다.

2005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크림의 세 멤버는 다시 셋이서 공연을 할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15] 2005년 5월 2, 3, 5, 6(월, 수, 목, 금요일)을 공연 날짜로 잡고 4월 즈음부터 리허설을 진행한 후, 로열 앨버트 홀에서 공연을 진행하였다. 이 공연의 티켓은 판매 시작 1시간만에 매진 되었으며, 빌 와이먼, 스티브 윈우드,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로저 워터스, 브라이언 메이, 지미 페이지, 믹 테일러가 참석했다. 이 일련의 공연은 라이브 앨범과 DVD로 발매되기도 했다.[16] 앨범과 DVD 모두 3, 5, 6일자의 공연을 잘 혼합하여 구성되었다.[17]

이후 같은 해 10월 24일, 크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을 하기로 계획했다. 실제로 공연이 진행되었지만, 100% 본인들의 의지로 진행한 것이 아닌, 계약금 문제가 얽혀있던 공연이어서 에릭 클랩튼은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렇다 할 공식 녹음/녹화본도 따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18]

영국 현지시간으로 2014년 10월 25일, 베이시스트 잭 브루스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간질환으로 알려졌다.
이후 영국 현지시각으로 2019년 10월 6일. 드러머 진저 베이커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결국 크림에서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멤버는 최연소인 에릭 클랩튼이 되었다. 에릭 클랩튼은 마지막 남은 크림의 멤버로서 2020년 연초 친분이 있던 음악가 로저 워터스와 함께 진저 베이커 추모 공연을 열었다.

4. 디스코그래피[편집]



파일:크림 로고.png

진저 베이커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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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cograph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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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투베이스 드러밍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이후 헤비메탈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2] 멤버 세 명 모두 각 분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이다. (롤링스톤지 선정 위대한 연주자 명단에서 기타 2위, 베이스 6위, 드럼 3위에 선정. 말 그대로 슈퍼밴드.) 한편으로는 이 밴드가 단명한 것을 두고 "음악 천재들만 모인 밴드는 오래가지 못한다"라고 하기도 한다.[3] 여기서 레드 제플린, 더 후의 사례를 들어 위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크림은 밴드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리더 성향'의 사람들만 있던 밴드라고 할 수 있다. 레드 제플린의 경우는 존 폴 존스가, 더 후의 경우에는 존 엔트위슬이 비교적 조용한 성격이라 밴드 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베이시스트다.[4] 이명증으로 고생중인 에릭 클랩튼은 그 땐 정말 미친 짓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5] 참고로 에릭 클랩튼은 진저의 드럼 실력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우상으로 삼았던 블루스/재즈 기타리스트들이 대부분 그와 작업하고파 하는 모습을 보고 잘하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했다고 한다.[6] 여담으로 진저 베이커는 에릭 클랩튼과 같이 드라이브를 갔다가 제안을 했는데, 에릭이 잭의 가입을 조건으로 내세우자 깜짝 놀라면서 교통사고를 낼 뻔했다고 한다. 진저 베이커 문서에도 간단히 나와 있듯이, 잭과 진저 사이에 음악적 갈등이 좀 심했던 탓에...[7] 잭 브루스와 에릭 클랩튼은 당시 각자의 밴드가 있었고 결성 사실은 비밀에 부쳤기에 불같은 성격의 잭에게 왕창 깨졌다고 한다.[8] 이 공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이 크림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멤버들도 음악적인 발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에릭 클랩튼이 쓴 자서전에 따르면 "우리는 3인조 블루스 밴드도 4인조 팝밴드만큼 멋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밴드의 방향을 끊임없이 모색했다."라고 했다고 한다.[9] 에릭 클랩튼과 공동 작곡[10] 이는 폴 매카트니가 지미 헨드릭스의 천재적 재능을 옅보고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것 때문이기도 했다.[11] 같은 해 나온 지미 헨드릭스의 Purple Haze와 함께 인상적인 리프로 하드 록 사운드의 시초로 알려진 곡. 오늘날 매체에서는 크림의 최대 히트곡인 White Room보다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12] 1위와 2위는 각각 비틀즈All You Need Is Love도어즈Light My Fire.[13] 이 앨범이 발매된 건 8월이고,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이 발매된 건 11월이었다.[14] 록 밴드 예스가 오프닝 밴드로 섰다.[15] 에릭은 이 공연의 아이디어를 꽤 긴 시간 동안 구상 해왔지만 나머지 두 멤버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조심스레 제안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본인이 하고 싶었어도 당시 잭은 수술을 한 터라 후유증이, 진저는 만성적인 등/어깨의 통증이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잭과 진저는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16] 참고로 관객석을 비춘 카메라에 팀 버튼/헬레나 본햄 카터 부부, 그리고 퀸(밴드)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가 포착되기도 하였다.[17] 2일자 공연은 수록되지 않았다는 듯 하다.[18] 실제로 자서전에서 "아무래도 크림 공연은 로열 앨버트 홀 공연이 마지막이었어야 했나 보다."라고 회의적인 회상을 했다. 다만 본인은 잭과 진저가 한동안 풍족하게 지낼 돈을 벌었으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