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고속도로 씨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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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고속도로 씨리즈
88Expressway Series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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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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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8고속도로 시리즈 엠블럼 2020.jpg
2020년 양 팀의 첫 이벤트 시리즈 엠블럼

종합전적
총 경기-753경기
2024-04-19 20:55:21 기준

KIA 타이거즈
무승부
삼성 라이온즈
352승
12무
389승
최근 경기
삼성 라이온즈 1 : 3 KIA 타이거즈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23년 10월 9일)
첫 경기
삼성 라이온즈 5 : 1 해태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982년 4월 5일)
최근 우세 구단
KIA 타이거즈 우세 (11승 5패)
(2023년)
역대 최다 점수 경기
KIA 타이거즈 13 : 12 삼성 라이온즈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2014년 6월 5일)
KIA 타이거즈 5 : 20 삼성 라이온즈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2018년 10월 3일)
역대 최다 점수 차 경기
삼성 라이온즈 1 : 22 KIA 타이거즈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2017년 6월 29일)
다음 경기
삼성 라이온즈 : KIA 타이거즈
미정
(2024년)

1. 개요
2. 상세
3. 역사
3.1. 2020년
3.2. 2021년
3.3. 2022년
3.4. 2023년
4. 역대 상대 전적
4.1. 정규시즌
4.2. 포스트시즌
5. 양 팀 간 트레이드
6. 양 팀을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
7. 양 팀의 VS놀이
8. 말말말
9. 여담
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KBO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 구단들이자 운명의 라이벌인 KIA 타이거즈삼성 라이온즈의 라이벌전을 일컫는 말이다. 광주와 대구 두 도시를 오가려면 반드시 건너야하는 광주대구고속도로의 옛 명칭인 88올림픽고속도로에서 유래했다.

원래 발음은 '시리즈'가 맞는 표현이지만, KIA 구단 홍보자료나 언론에서도 일부러 '씨리즈'로 표기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두 팀이 전통이 깊고 올드 유니폼을 입고 대결하며 추억을 상기시켜주니 이렇게 옛스럽게 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상세[편집]


정말 많은 부분에서 대립되는, 타고난 라이벌 구도이다.

  • 호랑이 VS 사자
  • 유니폼 색깔도 빨강파랑[1]
  • 연고지가 각각 광주대구[2]
  • 기아(현대자동차그룹 산하), 삼성 간의 재계 라이벌
  • 해태 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3] 등 양팀간의 충돌

게다가 두 팀 모두 전통의 강팀이다. KBO 한국시리즈 우승 횟수를 합치면 무려 19회로, 나머지 8팀의 우승 횟수(17회)를 다 합쳐도 미치지 못한다.[4] 심지어 양 팀이 모두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것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래로 단 세 번(1995년, 2019년, 2020년)밖에 없다. 그나마 1995년도 해태 타이거즈는 4위에 오르고도 3위 롯데 자이언츠와 4.5게임차로 벌어져 당시 규정상 준플레이오프 진출이 무산된 것이며 삼성은 5위로 탈락. 2019년은 7위, 8위였으며 2020년은 6위, 8위로 포스트시즌 탈락했다.

해태의 전성기 시절엔 삼성이 우승을 한 번 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준우승 전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2011~2014 시즌엔 4연속 통합우승을 일궈내며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타이거즈팬들의 여러 우려[5]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고 삼성의 암흑기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한국시리즈에서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이렇게 설전이 오가지만 김응용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위 아 더 월드가 되기도 한다. 양 팀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감독이라 김응용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지역감정은 점차 사라지고 지역간 화해모드로 접어들면서 광주시-대구시에서 달빛동맹을 만들었고 이에 야구단끼리도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19가 대구경북에 확산되자 KIA 선수단 및 코치진, 주장 양현종과 이화원 대표이사가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을 대구적십자사에 기부를 하며 달빛동맹에 힘을 쓰기도 했다.

이런 양 팀의 라이벌 관계에 부응하여 2019년 12월 15일,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가 끝난 후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OB회 사무총장이 이순철 SBS SPORTS 해설위원에게 공식으로 '타이거즈 vs 라이온즈 레전드 매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라이온즈 측은 이미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고, 타이거즈는 이순철 해설위원이 타이거즈 OB회 송유석 총무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히면서 2020 시즌이 끝난 후 스토브 리그에 친선 매치가 열릴 확률이 높아졌다.


3.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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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출범 이전인 1970년대부터 전라도와 경상도는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6]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는 상징부터가 호랑이 VS 사자에 유니폼 색깔도 빨간색의 타이거즈와 파란색의 라이온즈[7]이고,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를 상징하는 도시가 연고지인데다가 당시 정당지지 스탠스도 극명했었기에 여러 이유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됐다.[8][9]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원년에는 경북고대구상고가 전국대회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구의 야구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업야구에 뛰던 선수들이 출범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삼성에 입단했기 때문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은 모두 국가대표 수준이었다. 여기에, 창단 이후로도 선수단에 투자를 많이하고 김일융, 김성길, 김기태재일 한국-조선인 선수들을 적극 스카웃하는 등 모그룹 삼성이 밀어주었다.

반면 해태의 선수단 구성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단 구성원이 약 열일곱명 정도로 선수층도 얇았다. 당시 나이로 고령인 김봉연김종모를 주축으로, 출전할 선수가 모자라 김성한이 억지로 투 웨이를 뛸 수 밖에 없을 정도였다. 훗날 타이거즈를 강자로 이끌게 되는 선동열은 당시 아직 고려대학교 2학년 대학생이었고, 지역 연고학교인 광주일고 야구부의 황금기는 1983년에서야 시작됐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광주는 전국대회였던 4도시(서울, 부산, 대구, 인천) 야구대회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처럼 야구로 각광받지 못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선수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원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 베어스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반면 선수가 부족해 삼성으로부터 서정환을 1982년 12월에 트레이드 해온 해태는 이듬해 1983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해버린다.

중형 과자회사 팀이었던 타이거즈는 부족한 지원을 근성으로 버틴다는 언더독 이미지까지 겹쳐 더 열띤 자존심 경쟁에 들어갔다. 해태에는 비록 삼성처럼 풍족한 선수층과 구단의 지원은 없었지만 개성 넘치고 독특한 선수들이 많았다. 김응용 감독은 그의 리더십과 카리스마로 이 선수들을 잘 휘어잡았고 1985년 선동열의 입단으로 대등한 수준의 팀이 되고 나서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뜨거운 라이벌전 중 하나로 인기몰이를 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염원은 1984년에도 이루지 못하고 1985년 통합우승을 했지만, 한국시리즈를 치르지 않아 찜찜하던 찰나에 1986년 결국 두 팀이 1986년 한국시리즈 정상에서 맞닥뜨리게 된다.[10] 그런데다가 한국시리즈 3차전 해태 버스 방화 사건으로 인해 양 팀간의 사이는 더 극단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결과는 해태의 4승 1패 우승.

게다가 그 다음해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이 23승의 김시진KBO 리그 역대 최강타선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하여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며 무난히 우승할 것으로 평가를 받았으나, 전국체육대회 일정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일정이 다소 연기되었다. 이로 인해 해태는 정규시즌을 2위로 끝마치고 플레이오프에서 10월 12일까지 경기를 한 후, 8일 간의 휴식 후에 10월 21일부터 한국시리즈를 시작하며 누적 된 경기경험에 투수진도 적당히 쉴 만큼 쉬어서 상대적으로 삼성이 경기 감각적인 면에서 불리하게 작용되었다. 결국 해태가 4승 무패로 스윕하며 홈에서 손쉽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 스윕은 한국시리즈 사상 첫 스윕[11]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는 해태가 도통 힘을 쓰지 못했는데, 1990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이 선동열을 공략하여 시리즈 스윕을 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후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또 다시 만나 7차전까지 가는 혈투[12] 끝에 신인 이종범의 맹활약으로 해태가 V7을 달성했다.

해태 왕조 시절엔 삼성이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 한 번 밖에 없었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항상 해태가 우승을 차지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 한국시리즈,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1996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를 모두 우승하고 심지어 준우승이 한 번도 없는 반면 삼성 라이온즈는 달구벌의 저주에 걸려 1982년 한국시리즈, 1984년 한국시리즈,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90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퇴했다.

그 후에는 삼성에서 이순철, 조계현, 정회열 등 해태의 선수들을 영입한다거나, 혹은 임창용, 이강철처럼 돈으로 영입을 해가며 해태를 따라해보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나, 당시엔 우승 횟수가 워낙 차이도 났고 삼성은 항상 콩라인이라는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비웃음을 샀다.

하지만 삼성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2005년 한국시리즈, 2006년 한국시리즈, 2011년 한국시리즈, 2012년 한국시리즈, 2013년 한국시리즈, 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5연속 페넌트레이스 우승 + 4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내며 삼성 왕조를 구축하고 V8까지 달성하면서, 이러다 '우리의 우승 횟수를 뛰어넘을 수도 있겠다'는 KIA팬들의 여러 우려[13]에 인터넷 상에서는 양 팀간의 설전이 계속 있었다. 야만없이지만 현대와 붙었던 2004년 한국시리즈, SK와 붙었던 2010년 한국시리즈, 두산과 붙었던 2015년 한국시리즈 기간 중 우승을 추가했다면 진짜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앞서 1호 왕조인 1980, 90년대의 해태 왕조[14], 2000년대 초반의 막강한 현대[15], 2000년대 후반의 공포 그 자체였던 SK[16]에게 모두 패퇴한 뒤 2010년대 초반의 2호 왕조[17][18]를 본인들이 세운 성과가 있지만.

하지만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발생하며 예상치 못한 삼성의 긴 암흑기(99688)가 시작되고, KIA는 공교롭게 FA로 삼성의 최형우를 영입하고 2017 시즌 압도적인 선발 투수와 타선을 바탕으로 2017년 페넌트레이스와 2017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며 V11을 이룩하게 되며 다시 양 팀간의 상황이 미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이후로는 양 팀이 사이좋게 추락하며 팬들도 예전처럼 싸우기보다는 좋았던 옛날을 추억하며 서로의 슬픈 신세(5,6위-7,8위-6,8위)를 한탄하는 훈훈한 말들이 더 자주 오가는 편.

그러다가 삼성 라이온즈는 암흑기를 끝내고 2021년은 정규시즌을 kt wiz와 공동 1위로 종료했으나 1986년 후기리그 챔피언 결정전 이후 35년만에 열린 2021년 정규시즌 1위 결정전에서 패배하며 페넌트레이스는 최종 2위로 마감했고, 이후 2021년 플레이오프에서 정규시즌 4위 총재두로 무장한 두산 베어스에게 스코어 0-2로 패배하며 2021년 한국시리즈에는 진출 실패, 2021시즌 최종 순위는 3위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KIA 타이거즈는 이 시즌을 9위로 마감하며 또다시 쓴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렇듯 각종 설전이 오가지만 김응용 감독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 한마음이 되기도 한다. 양 팀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감독이라 김응용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화기애애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서는 단순히 팀을 떠나 지역간 화해모드로 접어들면서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달빛동맹 문서를 참조.

이런 양 팀의 라이벌 관계에 부응하여 2019년 12월 15일,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가 끝난 후 양준혁 삼성 라이온즈 OB회 사무총장이 이순철 SBS SPORTS 해설위원에게 공식으로 '타이거즈 vs 라이온즈 레전드 매치'를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라이온즈 측은 이미 참여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고, 타이거즈는 이순철 해설위원이 타이거즈 OB회 송유석 총무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히면서 2020 시즌이 끝난 후 스토브리그에 레전드 친선 매치가 열릴 확률이 높아졌다고는 했지만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는 못했다.

3.1. 2020년[편집]


6월 20일과 21일에 이뤄진 양 팀간의 경기에서는 KIA가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문희수가 시구, 김봉연이 시타를 맡으면서 조만간 이벤트 시리즈로 확대되는 것이 아니냐는 팬들의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19]

파일:허삼영 답례품.jpg

맷 윌리엄스 감독이 KIA 감독으로 취임을 한 후 상대팀 감독에게 선물로 와인을 한 병씩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각 구단 감독들이 답례품을 준비하는 문화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7월 15일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삼성 허삼영 감독은 평소 와인을 즐긴다고 하여 연고지 인근 청도군의 감으로 만든 청도 감 와인을 답례품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7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3연전에는 25일과 26일[20] 이틀 동안 드디어 양 팀간의 공식적인 첫 이벤트 시리즈 매치가 열렸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열린 이 시리즈에는 서로 올드 유니폼을 착용하고 시리즈 첫째 날인 25일에는 선동열 前 감독이 시구했으며, KIA 프런트에서는 이번 이벤트에 맞춰 양현종오승환 사진이 함께 래핑된 기념구와 반팔 티셔츠, 열쇠고리 등 기념 상품을 판매했다. 그 외에도 TBC에서 챔필까지 찾아와 직접 취재를 하고, 전상현최채흥[21]이 함께 하는 랜선 싸인회, 타이거즈-라이온즈 팬인 커플이나 부부 유니폼 인증샷, 1980~90년대 양 팀간의 경기 직관 사진을 SNS에 올리면 기념 상품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열렸다. 첫 이벤트 시리즈 경기는 25~26일 모두 KIA가 승리했다.

이후 9월 17일~18일에는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두 번째 이벤트 시리즈가 열렸다. 그리고 이 두 경기도 모두 KIA가 승리했다.


3.2. 2021년[편집]


시리즈 개최는 아니었지만, 4월 24일 챔필에서 열린 '타이거즈 레전드데이'를 맞아 양 팀의 경기에서 김응용 前 감독이 시구를 했다. KIA 선수단은 올드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가졌고, 삼성 선수단은 올드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지난해와 달리 이날은 삼성이 홈런 2방을 앞세워 8:4로 완승하면서 징크스를 깼다. 그리고 다음 날인 25일엔 오승환이 KBO 리그 사상 처음으로 개인 통산 300 세이브를 달성했다.

직접적인 시리즈 매치는 없지만, 2021년 6월 10일에는 중계방송사인 MBC SPORTS+가 크라식 매치라는 타이틀로 옛날식으로 경기를 중계했다. 이날은 크라식 매치마다 나오는 구자욱의 홈런을 앞세운 삼성이 승리를 가져왔다.

이후로도 삼성이 엄청난 상승세를 타고 있음과 동시에, 기아는 엄청난 추락세를 기록하고 있어 임기영멩덴 선발일 때를 제외하고 어김없이 삼성이 승리해서, 최종적으로 삼성이 11승 5패로 압도했다.


3.3. 2022년[편집]


이번 시즌은 반대로 삼성이 엄청난 추락을 하고, 기아는 어느 정도 팀이 다시 살아났지만 기아가 폭발적인 상승세를 하고 있던 5월을 제외하고 어김없이 삼성이 위닝 시리즈 내지 스윕을 하면서 삼성이 우세를 확정지었다.


3.4. 2023년[편집]


연일 죽을 쒔던 KIA가 삼성과의 광주 3연전 스윕을 가져가며 반등에 성공했고 5월 16, 17일 대구 2연전[22]마저 쓸어담았다. 삼성은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둔 경기에서 뷰캐넌의 완투승으로 겨우 KIA전 연패를 끊어냈다.

후반기에는 포항에서 KIA가 위닝 시리즈를 가져갔으나 이어진 대구 원정에서 위닝 시리즈와 1승을 가져가며 삼성이 분전했다.[23] 하지만 10월 8일~9일 경기에서 다시 KIA가 2연승을 달리면서 상대 전적 우세를 굳혔다.

4. 역대 상대 전적[편집]



4.1. 정규시즌[편집]


연도
해태-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상대우위
1982년
3승 13패
13승 3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83년
11승 1무 8패
8승 1무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4년
11승 9패
9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5년
7승 15패
15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86년
11승 1무 6패
6승 1무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7년
9승 9패
9승 9패
동률
1988년
11승 7패
7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89년
12승 8패
8승 12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0년
13승 7패
7승 13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1년
14승 4패
4승 14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2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3년
7승 11패
11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4년
10승 1무 7패
7승 1무 10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5년
6승 1무 11패
11승 1무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6년
11승 7패
7승 11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7년
10승 1무 7패
7승 1무 10패
해태 타이거즈 우위
1998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1999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0년
7승 1무 11패
11승 1무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1년
6승 13패
13승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2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3년
12승 2무 5패
5승 2무 12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04년
6승 1무 12패
12승 1무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5년
3승 15패
15승 3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6년
9승 2무 7패
7승 2무 9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07년
8승 10패
10승 8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08년
9승 9패
9승 9패
동률
2009년
13승 6패
6승 13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10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1년
7승 12패
12승 7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2년
6승 1무 12패
12승 1무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3년
4승 12패
12승 4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4년
4승 12패
12승 4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5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16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17년
12승 4패
4승 12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18년
6승 10패
10승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19년
8승 8패
8승 8패
동률
2020년
10승 6패
6승 10패
KIA 타이거즈 우위
2021년
5승 11패
11승 5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22년
6승 10패
10승 6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2023년
11승 5패
5승 11패
KIA 타이거즈 우위
통산 전적
352승 12무 389패
389승 12무 352패
삼성 라이온즈 우위

요약하면 해태 왕조 시절에는 해태 우위, 해태가 몰락하고 KIA에 인수된 이후에는 삼성 왕조의 건설로 인해 삼성 우위, 삼성 왕조가 몰락하고 나서는 두 팀이 백중세를 보이고 있다. 해태-KIA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해의 경우 삼성에 상대전적 열위를 보인게 1993년뿐이고, 삼성이 KS를 제패한 해의 경우 해태-KIA에 상대전적 열위를 보인 건 2006년뿐이다.

4.2. 포스트시즌[편집]


연도
해태-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결과
1986년 한국시리즈
4승 1패
1승 4패
해태 타이거즈 V2
1987년 한국시리즈
4승
4패
해태 타이거즈 V3
1990년 플레이오프
3패
3승
삼성 라이온즈 KS 진출
1993년 한국시리즈
4승 1무 2패
2승 1무 4패
해태 타이거즈 V7
통산 전적
12승 1무 6패
6승 1무 12패
KIA 타이거즈 우위


5. 양 팀 간 트레이드[편집]



5.1. 서정환[편집]


트레이드 일자
1982.12.07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1982~1988).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서정환

현금

KBO 최초의 트레이드이자, 최초의 현금 트레이드이다. 주전에 밀려 해태로 트레이드 된 서정환은 해태왕조에 기여하며 해태의 트레이드 승리로 끝났다.


5.2. 김승남 ↔ 정성룡[편집]


트레이드 일자
1992.11.17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파일:samsung_lions_logo_1989.png
김승남

정성룡

포철공고 시절, 제2의 장효조라고 불릴 만큼 최고의 유망주였던 정성룡은 정작 프로에 입단하니 꽃을 피우지 못하고 2군을 맴돌았고, 좌타자에 항상 목 말라했던 김응용 감독의 눈에 띄어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1993 시즌에는 해태의 V7에 기여하였다.


5.3. 동봉철, 김태룡이병훈, 김훈[편집]


트레이드 일자
1996.05.25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동봉철, 김태룡

이병훈, 김훈

삼성 백인천 감독이 주도한 트레이드. 동봉철김태룡1996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우승을 맛봤다. 이병훈은 1997년 초 음주운전에 교통사고를 내고 거기에 후유증까지 얻으며 선수 생활이 어려워져 은퇴했다. 이 트레이드도 해태의 승.


5.4.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 20억 ↔ 임창용[편집]


트레이드 일자
1998.12.14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 20억

임창용

KBO 역대 트레이드 중 최대어급의 트레이드라고 불리는 트레이드다. 두 선수 모두 전성기 나이였다. 1997년 외환 위기로 해태 타이거즈의 모기업인 해태그룹은 힘들어졌고, 그로 인해 선수를 팔아야 해서 현금 트레이드를 실시했다. 임창용은 삼성에 가기 싫어서 울었다고 하고, 항상 삼성만을 원했던 양준혁도 군기로 유명한 해태에 입단 거부 선언까지 하는 등 잡음이 많았으나 김응용 감독이 잘 달래서 결국 합류하였다.

양준혁은 아이러니하게 합류 후 1999 시즌 커리어 하이를 달성[24]하고 1년 뒤 LG 트윈스로 이적을 했고, 임창용은 삼성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며 결국 이 트레이드 이후 18년 후에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진 후 방출되어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로 합류했다. 결국은 양준혁과 임창용 모두 자신들의 고향팀이자 친정팀에서 선수 커리어를 마감했다. 재밌는 건 트레이드 당사자였던 양준혁과 임창용은 2002~2007 시즌 한솥밥을 먹으면서 한국시리즈 반지 3개를 얻었다는 것이다.


5.5. 신동주강영식[편집]


트레이드 일자
2001.03.21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신동주

강영식

삼성 감독으로 부임한 김응용이 자신이 총애하던 강영식을 데려오기 위해 주전 외야수인 신동주와 맞바꾼 트레이드. 하지만 강영식은 정작 권혁에 밀려 자주 출전하지 못했고, 그 이후 롯데 자이언츠신명철과 1:1 트레이드가 되었고, 롯데에서 활약했다.

신동주는 짧은 기간 동안 타이거즈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으나, 2003 시즌이 끝난 후 FA 마해영의 보상선수로 다시 삼성에 돌아갔다. 하지만 2005년, 최용호와 트레이드로 다시 KIA로 이적했으나 부진하여 방출되며 결국 은퇴한다.


5.6. 이강철[편집]


트레이드 일자
2001.07.30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96~2001).svg
이강철

2,600만원

선동열 때문에 항상 2인자였던 해태의 간판 투수 이강철은 KBO FA 이적 1호로 삼성으로 갔다. 하지만 부진으로 먹튀가 되어버린 이강철은 고향 팀으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해태가 KIA로 인수되기 이틀 전에 성사된 트레이드여서 7월 31일 인천 SK전에서 이강철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투구하는 마지막 모습을 볼 수도 있었지만, 당시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우천취소되었다. 결국 이강철은 친정팀으로 복귀하여 부활했고, KIA에서 성대하게 은퇴했다.


5.7. 신동주최용호[편집]


트레이드 일자
2005.07.24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1995~2007).svg

[[KIA 타이거즈|[[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01~2009).svg|width=65
]]]]
신동주

최용호

최용호는 트레이드 이후 1군 마운드에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한 뒤 2006년 시즌 후 방출되었고, 신동주 역시 2006 시즌 중 방출되며 두 팀 모두 손해를 보게 된 트레이드가 되었다.


5.8. 김희걸조영훈[편집]


트레이드 일자
2012.06.21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10~2016).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김희걸

조영훈

2005년 트레이드 이후 7년 간 선수 교류가 없었던 두 팀이 삼성 전임 감독을 지냈던 선동열 감독과의 인연으로 오랜만에 트레이드를 단행하였다. 김희걸은 삼성 라이온즈 불펜에서 추격조 롤을 수행하며 한국시리즈 엔트리까지 들어 2개의 우승반지를 획득했으나, 조영훈은 초반의 맹타 이후 결국 고질적인 수비 불안과 부진으로 시즌이 끝난 후 특별지명을 통해 NC 다이노스로 이적하며 삼성의 승리로 끝났다.

5.9. 한기주이영욱[편집]


트레이드 일자
2017.11.29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2017~2020).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한기주

이영욱

최고 유망주이자 데뷔 후 즉시 전력으로 팀을 이끌던 한기주는 아마시절부터 누적된 혹사로 인해 젊은 나이부터 끊임없는 부상 및 재활로 성적을 내지 못했다. 결국 한기주가 KIA 프런트에 꾸준히 트레이드 요청을 했고, KIA 프런트는 여러 구단과 접촉해 본 결과 삼성이 이영욱을 제시하면서 1:1 트레이드가 되었다.

KIA의 경우 외야수 김호령의 군 입대로 생긴 로저 버나디나의 중견수 백업 롤을 수행해줄 것으로 기대했고, 삼성은 신용운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힘을 빌려 부활하기를 기대했다.

결국 이영욱은 허벅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여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고, 한기주는 2018 시즌 초 잠깐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활약을 했지만, 결국 6점대 불펜이 되고 2019 시즌 이후 은퇴하며 양팀 모두 손해만 본 트레이드가 되었다.

5.10. 류지혁김태군[편집]


트레이드 일자
2023.07.05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sv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류지혁

김태군

KIA는 FA 시장에서 박동원을 놓친 이후 주효상, 한승택, 신범수 등 여러 자원들로 주전 포수 자리를 돌려막기했으나 누구 하나 공수 양면에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삼성은 김상수, 오선진, 이원석의 이적 등으로 인해 얇아진 내야 뎁스를 보강하기 위한 양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트레이드.

6. 양 팀을 오갔던 선수ㆍ지도자들[편집]


지도자로서 오간 경우 ★ 표시.
현역일 경우 볼드체 표시.



7. 양 팀의 VS놀이[편집]


  • 김봉연 vs 이만수
    • 프로야구 초창기의 홈런왕 대결. 실업야구의 슈퍼스타였던 김봉연과 신예 홈런타자 이만수 두 선수 모두 원년 출범부터 전국구 인기스타가 되어 큰 이슈를 몰고 다녔다. 결국 원년 홈런왕은 김봉연이 차지했고 이후 최초 통산 100홈런은 이만수가 먼저 달성했다. 당시 둘 중 누가 최초의 통산 100홈런을 먼저 달성할 것인지가 장안의 화제였다.히스토리 13 이만수 vs 김봉연 '최초 100호 홈런 전쟁'

  • 김성한 vs 이만수
    • 통산 성적으로 보면 이만수가 우세하지만, 둘 다 원년부터 1990년대 초기까지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이자 각각 영호남을 대표하는 타자들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전 실업에서 뛰던 선배들과 달리 마침 둘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프로야구 원년에 참가해 누적기록 손해 없이 라이벌로서 십수년간 활약했다. 첫해부터 둘다 리그 탑급 성적을 내는 스타였다. 팬들의 관계는 치열했지만[27] 실제 두 선수는 1958년 개띠 동갑내기끼리 사이가 매우 좋아서 김성한의 은퇴식 때 이만수가 자신의 경기를 제치고 무등구장까지 찾아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광주MBC 김성한 은퇴식 영상

  • 이종범 vs 양준혁
    • 프로야구 커뮤니티 최고의 떡밥 중 하나. 통산 KBO 성적은 양준혁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1990년대 중반(이종범 일본 진출 전) 한정으로는 이종범이 1인자였고 양준혁이 좋은 성적에도 2인자로 활약했었기 때문에[28] 전성기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엔 이종범이 우세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또한 NPB에서 실패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종범의 성적이 부상 이전까지는 세이버매트릭스상으로 꽤 괜찮게 나오면서 '상위 리그에서 유의미한 성적은 어디까지 어떻게 인정해줘야 하는가?'의 예로 간혹 논쟁이 붙기도 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이다. 통산 커리어는 양신의 우세, 전성기는 종범신의 우세다. 최근 들어 두 선수는 희망더하기 자선야구대회에서 양신팀 vs 종범신팀으로 대결하고 있다.

  • 임창용은 어디 레전드인가?
    • 돈이 없어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야 했던 해태와, 임창용의 전성기를 함께 한 삼성. 임창용이 삼성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거쳐 시카고 컵스에서 퇴단하고 삼성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다들 삼전드의 컴백이라며 반겼으나[29],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이 터지며 방출되고 당시 도박 선수 명단이 알려지기 전, 대다수 크보팬들은 "해당 선수들 은퇴해야한다!" 라는 의견이 많았는데, 정작 해당 선수 중 임창용이 있음이 알려지고 그 선수만 방출이 되자 일부 KIA팬들은 다시 불러 오자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임창용은 2016년 KIA에 복귀해서 반갑다는 환영을 받았고 3년간 활약하며 우승도 함께하였으나 결국 김기태 감독 및 프런트와 불화로 은퇴식도 없이 방출되며 현역 생활을 쓸쓸히 마무리했다. 이래저래 삼성팬들에게는 전성기를 함께하며 좋은 순간들을 같이 보낸 팀 레전드이자 애증의 존재, KIA팬들에게는 아쉽게 떠나보낸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 김선빈 vs 김상수
    •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양 팀의 주전 유격수. 특히 2012~2014 시즌 선동열 감독이 삼성에서 기아로 건너간 시절에 온라인 상에서 둘 중 누가 더 잘하는 유격수인지 양 팀 팬들간의 설전과 키배가 간혹 벌어지기도 하였다. 김상수는 2019 시즌부터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는데 김선빈도 20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2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했고 누적 성적도 비슷하다.

  • 김주형정인욱 or 우동균 or 이영욱
    • 안터지는 노망주들끼리 바꿔보자고 양 팀팬들이 서로 트레이드 의견을 묻기도 했다. 프런트에서는 시도해본 적 없고 팬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하는 이야기. 다만 이영욱은 이후 한기주와 트레이드 되어 기아 유니폼을 잠깐 입기도 했다. 결국 해당인물 모두 끝내 이렇다할 활약을 못한 채 방출됐다.

  • 무등 야구장 vs 대구시민구장
    • 챔필과 라팍을 짓기 전, 양 팀 팬들이 온라인 상에서 우리 구장이 더 구리다며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무등야구장 물방개 사건과 대구시민구장 정전 사건[30] 등 양 팀은 계말 열악한 홈구장을 사용했었다. 사실 무등구장은 1966년 완공, 대구구장은 1948년 완공이라서 대구구장이 더 상태가 나빴다. 아예 안전 진단에서 위험하다고 나아 H빔 추가 공사한 프로야구장은 역대 대구구장 뿐이다.

  •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vs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 챔필은 2014년에, 라팍은 2016년에 나란히 완공되었다. 이제는 양 팀 팬들이 서로 우리 구장이 더 좋다며 싸웠다.[3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원탑 구장 창원 NC 파크가 완공되며 자연스럽게 논쟁은 사그러들었다.

그 외에도 어디가 더 명문 팀인가 등 파이어가 나는 주제들이 많아서 팬덤이 충돌하기도 한다.

8. 말말말[편집]


“직장을 옮기는 스트레스가 이렇게 큰 것인지 몰랐습니다. 허허벌판에 혼자 서있는 것 같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고. 어떤 잡지를 보니까 직장 옮기는 스트레스가 자식 먼저 보내는 스트레스나 부모 잃은 스트레스 못지않다고 했던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아. 아무튼 어려워요”

- 2000년 11월 5일, 삼성 이적 후 김응용 인터뷰 #


"영호남 라이벌팀인 해태와 삼성전은 아주 치열했다. 광주로 원정 경기를 가면, 해태 응원석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수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담배 필터를 귀에 틀어막고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그때는 해태 팬들이 너무 두려웠다. 나한테 바보라고 놀린 사람은 그들 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슬럼프에 빠질 정도로 ‘만수 바보’란 구호가 듣기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또한 관심의 표현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 2011년 7월 4일, 이만수 인터뷰 #


"KIA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30년 동안 쌓였던 한을 풀 기회다. 설령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관계 없다. 삼성과 KIA가 붙는 한국시리즈 매치업은 상당한 파괴력이 있는 흥행 카드가 되지 않겠는가"

- 2011년 7월 5일, 삼성 구단 관계자 인터뷰 #


나이쑤 내가 다 기뻤음

- 2013년 7월 2일, 손동욱정병곤에게[32]

#


"아마 내가 은퇴하기까지 (대구에서) 야유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나"

- 2017년 7월 18일, 최형우[33]

#


"해태하고 코리안시리즈나 이런 게임을 하면 해태한테 많이 진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93년도에 저희들은 박충식 선수가 던졌고 2대1 인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동열, 주자 2루에 놔두고 제가 2루타 쳐서 동점 만드는 상황이 있습니다. 다른 홈런 치고 이런 것보다도 그 게임이 아마도 제일 인상 깊게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 2018년 4월 16일, 이종두 인터뷰,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34]

을 추억하며 #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자금력이 없었고, 삼성 라이온즈는 있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삼성이 반대로 우승을 했다면 야구판이 어떻게 됐을까…. 삼성이 1980년대 우승을 많이 했다면 새 야구장도 빨리 지었을 것이고, 투자도 더 많았을 텐데. 자꾸 늦어졌다"

- 2019년 8월 15일, 류중일 인터뷰 #



9. 여담[편집]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대구경북에 확산되자 KIA 선수단 및 코치진, 2020 시즌 주장 양현종과 이화원 대표이사가 각각 1,000만 원씩 총 3,000만 원을 대구적십자사에 기부를 하며 달빛동맹에 힘을 쓰기도 했다.

  • 호랑이사자의 대결이라는 점 때문인지 야구친구에서는 해당 더비를 '사파리 시리즈'로 부른다. 참고로 이 두 동물 모두 고양이과라는 공통점이 있다.[35]

  • 의 연고지 대구광주수도권이 아닌 비수도권에 속하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팬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구단이다.[36]

  •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고별경기가 2001년 7월 29일[37] 무등 야구장에서 열렸는데, 상대는 전년도까지 18년간 해태 감독으로 재직하며 해태 왕조를 건설했던 주역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삼성 라이온즈였다.

  • KBO 리그 10개 구단 중 이 두 구단만 3루를 경기장 내 홈 덕아웃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는 북서향으로 지어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시절부터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고[38] KIA 타이거즈무등 야구장 시절에는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지만 동북동향으로 지어진 새 야구장으로 이사 온 뒤부터는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고 있다. 과거 정북향으로 지어진 목동 야구장을 홈으로 쓰던 서울 히어로즈도 3루를 홈으로 썼으나 고척 스카이돔으로 옮긴 후로는 1루를 사용하고 있어서 3루를 홈 덕아웃으로 쓰는 팀은 이 두 구단만 남게 되었다.[39][40]

  • 오승환의 400번째를 제외한[41] n백번째 세이브가 모두 88고속도로 씨리즈에서 나왔다.


  • 기아 타이거즈의 경우 한국시리즈 진출시 100% 우승[42]기록과 리그 최종우승 1위(11회)라는[43] 기록과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대를 제외한 1980 1990 2000 2010년대 최소 한 번 이상 우승이라는 기록[44]을 가지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리그 정규우승 1위(9회)라는 기록과 포스트 시즌 진출 최다 1위(29회)[45]라는 기록과 포스트시즌 연속 최다 진출 1위(12년 연속)라는 기록과 팀 역대 꼴찌 횟수 0회[46][47]라는 기록이 있다. 그야말로 타팀과는 대비되는 상당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시 100% 우승과 원년팀 유일 미꼴찌는 그야말로 넘사벽 기록.



1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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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 역사
해태 타이거즈 역사KIA 타이거즈 역사감독해태 왕조김씨 왕조(김씨 타선)KKK포이강철-조계현-이대진SKYCK포-LCK포양현종-헥터 원투펀치박전문전장정(JJJ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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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KIA 타이거즈 관련 기록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1호 기록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공사 현장 변천사홈런존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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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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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삼성은 원년에는 파랑색 유니폼이 아닌 빨강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자세한 건 삼성 라이온즈/유니폼 참조.[2] 같은 경상도여도 TK와 PK의 정치 성향은 3당 합당 이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달랐고, 현재도 큰 차이가 있다. 사실 3당 합당 전까지만 해도 부울경김영삼의 본거지였고, 부마민주항쟁이 터질 정도로 굉장히 반 박정희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노무현문재인이 인권변호사 시절 활동한 곳이 부산이었다. 법무법인 부산 참조. 그래서인지 둘 모두 롯데 자이언츠 팬이다. 또한 박정희 정부 이전까지만 해도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좌익의 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대구 10.1 사건 참고.[3] 술에 취한 광주 해태팬이 호투하던 삼성 투수 진동한을 소주병으로 가격하자 이에 대구 삼성팬들이 복수심으로 해태 구단버스에 불을 지른 사건.[4] 2021시즌까지 40번의 한국시리즈가 있었고, 4번은 현재 해체한 현대 유니콘스가 우승하였다.[5] 게다가 KIA는 2011 시즌엔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6] 다만 박정희 집권기에 이 지역 갈등이 고착화된 것은 아니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러한 경향이 보이기는 했으나 10월 유신 이후 체육관 선거가 되면서 이 구도는 잠잠해졌다. 이 지역 갈등이 제대로 고착화된 것은 5.18 민주화운동으로 신군부가 대놓고 전라도 차별을 시작하고, 민주화 이후 3당 합당을 거치며 PK 지역이 보수 지역으로, 전라도가 반(反)보수 지역으로 고착화된 것이 더 큰 이유다.[7] 다만, 삼성은 원년에는 파랑색 유니폼이 아닌 빨강색 유니폼을 입기도 했다. 자세한 건 삼성 라이온즈/유니폼 참조.[8] 다른 라이벌 구도를 가지고 있는 구단은 롯데. 애초에 괴물 투수 2명이 롯데와 기아에 있으니...[9] 롯데는? 엘롯기와 엮여서 엘 꼴라시코 확정.[10] 삼성이 전기리그 1위, 해태가 전후기 모두 2위였는데 '한 팀이 전후기 모두 2위 안에 들면 한국시리즈에 직행한다'는 규정으로 해태가 한국시리즈에 직행, 삼성은 후기리그 1위 OB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올라왔다.[11] 해태는 MBC 청룡과 맞붙은 1983년 한국시리즈도 스윕할 수 있었으나 4차전 9회말 2사에서 김바위에게 동점타를 내주고 15회까지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바람에 5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냈다.[12]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7차전까지 치른 최초의 시리즈였다. 나머지는 SK 와이번스와 겨룬 2009년 한국시리즈이다.[13] 게다가 KIA는 2011 시즌엔 DTD로 인해 4위에 그쳤고, 2012년부터는 선동열 감독의 암흑기(588)가 시작되어서 더 비참함을 느꼈다.[14] 1980, 90년대 18시즌 중 1983년 한국시리즈,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88년 한국시리즈, 1989년 한국시리즈, 1991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1996년 한국시리즈,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총 9시즌 우승. 준우승 0회[15] 1998년 한국시리즈, 2000년 한국시리즈, 2003년 한국시리즈, 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 및 2001년 정규시즌 2위, 2002년은 정규리그 3위 기록. 그러나 결국 모그룹이 지원을 포기하고 매각한 뒤로는 현대 유니콘스의 주축 선수들이 우리 히어로즈로 재창단되고 스폰서를 구해서 뛰는 팀인 히어로즈가 되었다.[16] 2007년 한국시리즈, 2008년 한국시리즈, 2009년 한국시리즈, 2010년 한국시리즈, 2011년 한국시리즈, 2012년 한국시리즈 6번 진출해 3번 우승.[17] 2011년 한국시리즈, 2012년 한국시리즈, 2013년 한국시리즈, 2014년 한국시리즈, 2015년 한국시리즈 5번 진출 중 4번 우승. 페넌트레이스 이 기간 동안 5연패.[18] 4호 왕조 아니냐 묻는다면 5년간 3우승은 생각보다는 쉬워 현대, SSG(SK) 그리고 삼성 왕조 이후의 두산은 논란이 일고 있다. KIA(해태)는 3연패를 성공해서 기간이 축소될지언정 최초 왕조가 인정되지만, 나머지는 3연패를 못했다. 삼성은 2011년부터 3연패를 했기에 떳떳이 붙여도 문제 없다.[19] 원래는 이날부터 이벤트를 개시하려다 준비 부족으로 미뤄졌다는 루머가 떠돌았을 정도였다.[20] 원래 24일~25일에 개최하려고 했으나, 24일 우천취소가 되면서 하루씩 미뤄졌다.[21] 둘은 대구상원고등학교 2년 선후배 사이다. 생년월일은 1년 차이이나, 전상현이 부상으로 인해 1년 유급했기 때문.[22] 18일 경기는 우천취소[23] 그러나 이미 승리를 많이 헌납해서 우세 불가와 열세 확정을 8월에 확정지었다.[24] 다만 1999년은 1982~2013년까지 시즌 중 최고의 타고 시즌이어서 클래식 기록들이 그렇게 보인것이고, 실제론 양준혁이 당시에 데뷔하고 뛴 7년중 가장 낮은 wrc+를 기록한 해였다.[25] 1983년~2001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감독을 맡는 동안 우승만 무려 9번 했었고, 삼성으로 넘어온 이후 2001년에는 한국시리즈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패해 준우승 했으나, 이듬해인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그동안 우승 기록이 없었던 삼성에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선물해 주었다. 이후 2004년 또한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나, 김재박 감독이 이끄는 현대 유니콘스에게 패하여 준우승 한뒤, 선동열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자신은 삼성 라이온즈의 사장이 되었다.[26] 2005 시즌부터 2010 시즌까지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고, 2011년 류중일 당시 삼성 수비/주루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긴 뒤, 1년간 현장을 떠나 있었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27] 이만수가 무등구장 원정에 올 때마다 해태팬들이 '만수 바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28] 양준혁은 이종범이 떠난 이후에도 같은팀에 1인자가 등장하며 꾸준한 2인자 그룹의 이미지가 더욱 공고해졌다.[29] 사실 임창용은 해외 시절 인터뷰를 여러 번 하면서 말년은 타이거즈에서 뛰고 싶다고 하였으나, FA 신분이 아니라 삼성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2011 시즌 인터뷰 당시에는 타이거즈 복귀를 강력 어필했으나, 그 다음 해부터 사이가 껄끄럽던 선동열 감독이 부임하자 그 이야기가 흐지부지 되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KIA나 삼성 어디라도 부정적이지 않지만 선동열 있는 곳은 안 간다[30] 2011년 4월 16일, 두산과 삼성의 경기 8회 초, 정수빈이 기습번트를 치고 1루로 달려나가던 도중에 정전이 되어 경기장 전체가 칠흙같은 어둠에 쌓였던 사상 초유의 사태.[31] 참고로 두 구장의 설계사가 공간으로 같다. 챔필을 설계 후 문제점들을 어느 정도 개선하여 라팍을 지었다는게 정설이다.[32] 자신의 페이스북에 2013년 6월 28일, 양 팀간의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친 삼성 정병곤의 페이스북에서 당해년도 KIA 1라운드 지명 손동욱이 '나이쑤 내가 다 기뻤음'이란 댓글을 달았다가 KIA팬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질타를 받았다. 뒤늦게 이에 대해 단국대학교 선후배 사이라서 그랬다고 해명했지만, 잠시 더위를 먹어서 그랬다는 핑계로 더더욱 욕을 먹었다.[33] FA로 KIA 이적 당시, 삼성에 '소외감'을 느꼈다는 실언으로 이적 후 첫 시즌인 2017 시즌 시범경기부터 라팍 원정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야유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KBO 올스타전/2017년을 참고 바람.[34] 이 경기는 박충식이 전설의 181구를 던지는 투혼과 15회 공방 끝에 무승부로 끝난 한국시리즈 명경기로 불리는 경기 중 하나다.[35] 게다가 두 동물은 동물원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은 동물인지라, 본 경기는 '동물원 시리즈'로도 통한다. 그러나 호랑이사자야생에서는 사는 곳이 다르다. 호랑이는 아시아 대륙에서만 사는 반면, 사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살기 때문에 두 동물은 실제로 만나는 일은 없다.[36] 이는 대한민국의 인구 대부분이 수도권에 밀집해 거주하며, 압도적으로 강했던 수도권 구단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광복 이후 서울 중심 경제 개발이 이루어지며 지방사람들이 서울로 이사를 가 뿌리가 전라도나 경상도인 서울 사람들이 많고, 고향팀을 응원하는 건 이상하지 않다. 수도권에 요미우리마냥 우승을 밥먹듯이 해먹었던 극강의 팀이 있으면 다른 팀들이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이에 부합하는 팀도 없다.[37]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원래 7월 31일 인천 SK 와이번스전이 해태의 마지막 경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당시 중부지방을 할퀸 집중호우로 이 경기가 우천취소되었다.[38] 1984년과 2000년 딱 두 시즌만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다. 그러나 다시 3루로 돌아오게 된다.[39] 이들 팀 외에 한때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던 팀도 있다. 과거 인천을 연고로 했던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가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썼다. 희한한 것은 이 당시 홈구장인 숭의야구장은 남향으로 지어져 있어서 3루 덕아웃을 홈으로 쓰면 시종일관 홈팬들과 홈팀 선수들이 땡볕을 바라봐야 하는 불편이 생긴다. 그럼에도 3루 덕아웃을 고집했던 것은 선수단의 비상시 동선 때문이었다. 이유인즉슨... 청보와 태평양의 성적이 처참하게 안 좋다보니 거의 매 경기마다 극렬 관중들이 난동을 피웠는데 선수들이 이를 피해서 빨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고 결국 3루 덕아웃으로 가면 성난 관중들을 피해 빨리 도망갈 수 있다는(...) 답을 찾았다. 실제로 당시 3루 쪽은 인천공설운동장의 정문과 더 가까웠다. 결국 팀의 성적이 정상을 되찾은 1994년이 돼서야 홈 덕아웃이 1루로 돌아오게 된다.[40] 2020년 잠실시리즈 전 경기에 한해 LG 트윈스가 3루 덕아웃을 사용한다. 원래 LG 트윈스 홈경기라면 1루 덕아웃을 홈으로 써야 하지만 락커룸이 3루 덕아웃 뒤에 있기 때문에 그라운드 위나 구장 내 실내 복도를 통해 1루와 3루를 오가야 한다. 그런 가운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 창궐하면서 선수단 이동으로 인한 불필요한 접촉을 막기 위해 각 팀의 락커룸과 인접한 덕아웃을 홈으로 쓰기로 한 것이다. 잠실 3루 덕아웃 뒤에는 LG 트윈스 락커룸이 있고 1루 덕아웃 뒤에는 두산 베어스 락커룸이 있다.[41] SSG전에서 달성.[42] KT 위즈 역시 이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시리즈 우승 1회로 표본이 너무 적다.[43] 과거엔 프로 전종목 범위에서도 1위였으나 아산 우리은행 우리WON이 12번째 우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가져가버렸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 1위는 유효. 참고로 삼성이 챔피언 결정전 우승 수 동률을 만드려면 KIA 우승횟수를 추월해야 한다.[44] KIA와 두산만이 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 삼성은 1990년도에 우승이 없다.[45] 기아 타이거즈는 21회로 4위[46] 삼성 이외 SSG 랜더스 역시 꼴찌기록은 없지만 창단년도인 2000년에 매직, 드림 전체 총합 최하위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 때는 드림리그와 매직리그 양대리그로 운영되었기에 단일리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삼성은 단일리그나 양대리그에서 한 번도 최하위 기록이 없다. 삼성이 원년팀인 걸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인셈.[47] 기아는 2005년, 2007년 꼴찌를 기록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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