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영국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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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경위
3. 전개
3.1. 발단
3.2. 확산
4. 진행
5. 특징
6. 시민들의 반응
6.1. 비판
7. 결과 및 피해
8. SNS 검열 논란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2011 England riots

2011년 8월 8일부터 영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이다. 그야말로 난장판, 아수라장, 무법천지라는 말이 어울린다.

2. 경위[편집]


2011년 8월 4일, 4명의 자녀를 둔 29세 흑인 마크 더건이 런던 북쪽에 위치한 토트넘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유족들과 지역 주민들은 경찰이 과잉 대응을 했다고 생각해 이에 대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8월 6일부터 시작한 시위는 그저 평범한 항의 시위로 끝날 것 같았지만 8월 8일 밤이 되면서 시위대가 하나둘씩 폭도로 변하기 시작해 상가를 약탈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시 마크 더건은 지역 조직폭력배의 두목으로 수배 중이었으며 경찰 측은 경찰이 차를 세우자 더건이 총을 꺼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경찰관은 총알이 무전기에 맞아서 생명을 건졌고 경찰이 반격으로 총을 세 번이나 쏴서 마크 더건이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마크 더건이 사망한 상황을 다룬 기사 수사가 진행되면서 총격 당시 마크 더건은 단 한 발도 총을 쏘지 않았고 무전기에 박힌 총알까지 모두 경찰이 발포한 총알이었고 경찰이 언론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경찰이 이런 식으로 책임회피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영국 스포츠사의 흑역사로 분류되는 힐스보로 참사 때도 경찰측의 판단 미스와 운영 미숙으로 일어 난 참사를 '술 취한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언플하고, 그 근거를 만들기 위하여 희생자들을 '폭도'로 치부하거나 '죽은 사람 품에서 돈을 훔치는 인간 쓰레기'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2012년이 되어서야 경찰측이 유족측에 사죄를 했다. 영국 경찰은 마거릿 대처 내각 시기 노조에 대한 강경 대응 기조로 말미암아 선진국 경찰치고는 상당히 고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집단이 되었다. 본문에서 예시로 든 힐스보로 참사 역시 대처 시기의 일이다. 그나마 존 메이저 내각 이후 경찰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벌였는데도 이 지경이다.

선진국에서 발생한 것이라 보기엔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사태로, 1981년의 브릭스턴 폭동[1] 이후 최악의 소요 사태라고 평가된다. 런던의 흑인 세력과 경찰 간에 그간 쌓여왔던 알력이 근본적인 원인이고, 마크 더건이 경찰에 피격되면서 촉발됐다.

3. 전개[편집]



3.1. 발단[편집]


2011년 8월 6일 런던 북부의 토트넘에서 최초로 시작됐다. 29세인 마크 더건을 경찰이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변질되어 폭동으로 발전했다. 8월 9일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규모로 번졌으며, 파괴, 방화, 약탈, 폭력사태 등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폭력의 커지고 있음은 물론, 지역적으로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8월 9일부로, 폭동은 버밍엄리버풀, 브리스톨까지 번져나갔다. 폭동의 범위가 커짐에 따라 이 폭동을 지칭하는 명칭도 '토트넘 폭동' → '런던 폭동' → '잉글랜드[2] 폭동'으로 변경되어왔다.

3.2. 확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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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동을 시작으로 엔필드(Enfield), 해크니(Hackney), 페캄(Peckham), 루이샴(Lewisham) 등 런던의 다른 저소득층 주거 지역에도 폭동이 번지기 시작해 런던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대형 상가들은 폭도들의 주요 타겟이였으며 심지어 동네 슈퍼마켓 또한 폭도들에게 털렸고 건물들은 불에 타올랐으며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폭도들에게 습격당했다. 심지어 폭도들은 자신들을 취재하는 방송국 차량에도 돌을 던지기도 했다. 여기에 경찰 병력 투입도 늦어지면서 런던은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런던의 폭동은 다른 도시에도 번져나가 리버풀, 버밍엄, 맨체스터 등지에서도 폭동이 일어나 차를 불태우고 상가가 습격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예정이였던 잉글랜드 대표팀과 네덜란드 대표팀의 축구 A매치도 취소되는 등 스포츠 산업도 타격을 입었다.

이후 참다못한 시민들이 폭도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영국 정부도 런던에 대규모 경찰병력을 투입하면서 폭동은 진정세에 들어갔다.

더불어 몇몇 대학은 오전 수업만 진행하거나 휴교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4. 진행[편집]



5. 특징[편집]


대개 폭동이 번지기 시작한 곳은 이민자, 하층민 거주지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사건 초기에는 영국의 경제 악화와 이로 인한 긴축 재정으로 복지 정책이 축소되면서 일어난 사태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폭동이 사그라들고 여러 정보가 입수되면서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점들이 발견되었다. 우선 폭도들의 구성이 10대 청소년들에서 노인들은 물론 흑인, 백인, 아시아인 등 인종 구성도 다양했으며 하층민뿐 아니라 중산층에 심지어 부유층 자녀들까지 폭동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났다.[3] 이들은 정부나 사회에 대한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는 것보다는 그냥 때리고 부수는 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오히려 놀이나 여흥으로 여기는 반응까지 보였다. 대부분의 폭도들은 폭동이 일어나자 일탈을 즐기거나 분위기에 휩쓸려서 폭도가 된 것 같다는 분석이 다수.

일각에서는 영국 왕실의 화려한 결혼식과 스타들의 호화생활 등이 영국 폭동의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폭동이 일어난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영국 사회에 큰 병이 든 것은 확실하며 그동안 쌓여온 게 한꺼번에 표출된 것이라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현재 영국이 겪고 있는 문제가 너무 뿌리가 깊어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 시각도 있다. 박노자 교수가 한겨레에 실은 글에 따르면, "그들은 부자들이 여태까지 약탈해온 재물을 그저 공유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박노자 교수 평론의 맥락은 단순히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폐해를 말하는 것인데 사실 생계와는 무관한 부유한 집안 자녀들도 이 난리에 가담해서 무분별한 일탈행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블랙베리폰을 이용해 서로 정보를 교환해 어느 지역에 경찰이 있는지 정보를 공유했고 어느 동네를 털러갈지 의견을 나누고 자신들이 약탈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리거나 약탈한 물건을 전리품인 마냥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해서 보는 이들의 정신을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는 무개념을 보여줬다. 이후 영국 경찰이 이를 이용해 해당 폭도들을 역추적해 체포하는 용도로 썼으나 블렉베리 메신저로 정보를 주고받는 경우에는 암호화가 되어 있어 추적이 어려웠다고한다. 런던 폭동 상황을 찍은 동영상에 주로 나온 BGM은 80년대 영국 국민밴드 스미스의 'Panic'이었다. 이 노래는 "Panic on the streets of London..."이란 가사로 시작한다.

아울러 영국 서브컬처 역사 중 가장 개념없는 인간들로 여겨지는 차브족들이 대거 가담해서 세간의 분노를 더더욱 사게 되었다.

덤으로 이들 중에서 자국에 대한 반감을 외치며 나치 옹호와 숭배를 지껄이는 네오 나치들도 수면위로 드러났다.

추가로 영국 아마존에서는 야구배트의 판매량이 50,000% 이상 급등했다. 정부 차원에서 근본적인 문제 개선에는 별 관심 없는 듯하니 일반 시민들이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지키기 위해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폭도들이 이 야구배트를 다른목적으로 악용하기 위하거나.

6. 시민들의 반응[편집]


대다수의 영국 국민들은 이번 폭동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폭도들이 많은 상가와 건물, 차량을 재미로 털고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시민들은 폭도를 패배자, 쓰레기들이라고 여겼다. 또 많은 건물이 불타버린지라 제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세대들은 당시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불바다가 된 런던이 떠오른다며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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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말레이시아 유학생 모하메드 아쉬라프 하지크(Muhammad Asyraf Haziq)사건도 터졌다. 이 학생이 폭도들에게 얻어맞고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다른 폭도가 그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도리어 강도질을 하는 모습을 유학생의 친구가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면서 폭도에게 전세계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도 이 동영상을 언급하며 구역질이 난다고 평했다.

결국 시민들은 각 계층, 지역마다 자경단을 조직해 폭도의 습격에 대비했으며 경찰병력이 투입된 후 폭동이 약세를 보이자 런던 시내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상점을 터는 폭도에게 훈계를 한 할머니#와 이웃 주민에게 아들이 살해당하고도 보복보다는 평화를 호소한 아버지가 화제가 되었다.#

이외에도 자경단 활동에 극우단체들이 앞장서서 나섰기 때문에 극우단체와 이민자 단체가 조직한 자경단이 서로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다. 링크

6.1. 비판[편집]


한편 영국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물론 당시 내각 고위인사들이 대부분 여름 휴가를 떠나 폭동 당시 영국 정부는 내무차관이 폭동 진압을 지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런던 시장도 런던을 떠나 있는 상태여서 경찰의 초동 대응도 늦어졌고 경찰도 조금만 투입되어서 초동 진압에 실패해 국가 비상사태로 커질 정도로 폭동이 커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폭동이 전역으로 확산되자 급히 귀국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편 경제 위기와 정부의 긴축 재정이 시위의 원인으로 지명되면서 보수언론은 노동당 정권의 복지잔치로 인한 경제 위기와 긴축 재정이 원인이라고 주장했고 진보언론은 지금이라도 이를 타산지석 삼아 신자유주의 정책을 버리고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맞섰다.

7. 결과 및 피해[편집]


이 폭동은 공식적으로 8월 10일을 끝으로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피해는 한바탕 광풍이 지나간 8월 15일을 기준으로 집계를 내보면…
  • 체포: 3,100명 이상.
  • 인명 피해: 사망 5명, 일반인 부상 16명 이상, 경찰 186명 부상.
  • 재산 피해: 보험사에 의하면 보험에 가입된 재산피해만 10억 파운드를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

8. SNS 검열 논란[편집]


영국 정부는 SNS가 이번 폭동 확산에 기여했다고 보고, 폭동 등 사회불안을 선동하는 특정 글에 대한 제재 및 삭제를 요구한다는 일종의 SNS 검열 계획을 발표했다. 당연히 이는 인터넷 검열 논란에 불을 지피는 짓이었다. 이미 영국은 CCTV가 과도하게 많이 설치된 국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와 맞물려 사생활 침해 논란이 거세졌다. 게다가 2013년 프리즘 폭로 사건이 터지고 여기에 영국 GCHQ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정점을 찍었다. 영국이 앵글로색슨족이 상류층을 구성하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함께 이른바 다섯 개의 눈(Five Eyes)'에 속해있고, 이들 국가들끼리 인터넷이나 SNS 정보를 공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문제가 된 것이다. 완전 빅 브라더 현실판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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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한 흑인 청년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일어난 인종폭동. 발생과 전개가 현재의 영국 폭동과 비슷했고, 해묵은 인종갈등과 경제문제라는 점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경찰이 폭동진압을 목적으로 무고한 시민들까지 연행하면서 여기에 분노한 백인 청년들까지 가세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런던 경찰은 이후 인권 침해를 인정하고 인권보호 대책을 마련하게 된다.[2] 흔히 떠올리는 브리튼 섬에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뺀 것.[3] 그중 가장 화제가 된 게 첼시 이브스(Chelsea Ives)로 부유한 집안 배경에 2012 런던 올림픽 홍보대사까지 맡은 재능도 많은 소녀였다. 하지만 방송에서 폭동에 가담한 것을 본 부모의 신고로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