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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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Vatican_Council_by_Lothar_Wolleh_005.jpg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 장면.


개회식 장면

1. 개요
2. 배경
3. 내용
4. 주목할 만한 결과
5. 평가와 영향
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
Second Vatican Council (VC2로 줄여쓰기도 한다)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4회기 동안 로마에서 개최된 가톨릭 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

이 기간 동안 계속해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니라 한 회기(1개월에서 3개월)씩 4번 회의가 진행되었다. 요한 23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첫 번째 회기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고, 바오로 6세의 재위 기간 동안에 개최된 나머지 3개의 회기는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14일까지,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1965년 9월 14일부터 12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즉, 이 공의회의 시작은 요한 23세가 했고, 마무리는 바오로 6세가 했다.

'제2차'라는 수식어에서 보듯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도 존재하지만,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점은 교황 무류성에 교계적이고 법적인 명시이기에 신자들의 실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1]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 존재하던 현대 세계와의 적극적이고 대회 지향적인 입장들을 공의회의 이름으로 확정하면서[2], 아직까지 잔존한 '현대에 대한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들'[3]과 선을 긋게 되었다.

여기 서술된 내용이 끝이 아니라 더 많은 개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관련 전문서적과 논문을 읽기를 추천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변화와 개혁의 규모는 깊고 광범위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비오 9세와 달리 개최한 업적만으로도 기적심사를 면제받아 성인품에 올랐으며, 이는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성과와 영향을 인정한다고 볼 수 있다.

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 요한 23세를 시성하여,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2. 배경[편집]


1860년대 가톨릭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의 한가운데에서 변화하느냐, 전통을 고수하느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던 차였다. 근대 이후 과학과 세속권력은 점차 기존의 신권(神權)을 압도해갔고, 프랑스 혁명 등의 여파로 그 흐름은 결정적이 되었다.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권과 특히 교황권의 우위를 재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가톨릭의 영향력은 계속해서 쇠퇴했다. 1ㆍ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가톨릭은 전화(戰禍)를 누그러뜨리는 데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심지어는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 등 나치에 협조하거나 방관한 일부 주교들의 사례 등) 그릇된 폭력에 맞서지 못하고 외면하는 일도 있었다.

1950년대 말 젊은 가톨릭 신자들과 새로운 세대 성직자들은 바티칸의 완고한 권위주의가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에서 똑같이 시대에 뒤떨어졌고 경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쾌감을 느꼈다. 20세기 중반 이후 결혼은 35년 이상 유지되었고, 이혼할 권리를 원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커졌다.

한편 전후 베이비붐으로 피임에 반대하는 인구학상의 논거는 약해졌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에 반대했던 교회 당국은 고립되었다. 서유럽 전역에서 미사 참례율이 낮아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4] 문제는 이미 신자들이 사는 현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좀 더 명민한 가톨릭 지도자들이 알아차렸듯이 더 이상은 이런 문제를 전통과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다룰 수 없었고, 1940년대 말과는 달리 반공주의를 자극한다고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톨릭은 굼떴고, 주요인사들은 여전히 구시대적인 교권의 절대성 고수에만 매달려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상황을 타개한 것이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1958년,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였다. 요한 23세의 전임 교황인 비오 12세는 권위적인 보수파였던 데다가 치세 동안 건강 문제 때문에 교황의 정치적 권한을 비서 수녀파스칼리나 레네르트에게 위임할 정도였다. 파스칼리나 수녀는 여교황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이 권력을 행사하여 추기경단을 비롯한 가톨릭 수뇌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런 두 사람의 행보에 질려버린 보수파를 비롯한 가톨릭 상층부는 적당히 나이도 많고 성품도 온화해서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론칼리 추기경을 교황 요한 23세로 선출한 것이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온화하여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가톨릭 내부만이 아니라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에도 주목하여 가톨릭이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교황이 되자 이를 실현하기로 결심했다. 결국 보수파들의 반대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를 열어 이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를 꾀하였다.

당시 공의회는 그 규모뿐만 아니라 구성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했는데, 당시 공의회에는 가톨릭 주교들 외에도 이제까지 이교(離敎), 이단으로 규정되던 다른 계열 그리스도교 교회 및 공동체의 대표자들, 그리고 평신도들이 초청받았다. 또한 준비위원회 작업은 교황청 관료들이 맡았으나, 일단 공의회가 열린 뒤에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인 공의회 교부들이 각 위원회에 배속되었다. 전 세계 각지의 가톨릭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현장의 목소리를 쏟아내었을 때, 역시 자리에 참석한 교황청 관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들이 사목현장과 괴리되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요한 23세는 소련동유럽의 의견도 청취하기 위해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1961년부터 대소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 이에 흐루쇼프가 호응하면서 흐루쇼프는 요한 23세의 팔순 생일을 축하하는 공식 축전을 보내왔고, 소련동유럽에서 35명의 주교들이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이중에서는 폴란드의 젊은 주교인 카롤 보이티와 주교도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명의 주교도 중국 밖을 나가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공의회의 토론을 거쳐 개정된 교령들과 확대된 위원회의 작업 결과는 대체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 공의회는 교황 요한 23세의 후임자 바오로 6세 때에도 매년 가을에 회기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계속되어 1965년 12월 8일에 폐회했는데,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문서 16개를 교령화했다.

3. 내용[편집]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개막 메시지

헌장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 거룩한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 인류의 빛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 하느님의 말씀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 기쁨과 희망

교령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 놀라운 기술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 동방 교회들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 일치의 재건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 주님이신 그리스도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 완전한 사랑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 온 교회의 열망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 사도직 활동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 만민에게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 사제품

선언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 - 교육의 중대성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 우리 시대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 인간 존엄성

폐막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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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각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은 평신도들이 미사에 더욱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미사 및 7성사 때 사용하는 내용 & 형식 & 언어에 생긴 중대한 변화를 만들기를 지시했다. 이 헌장의 성립으로 이제까지 라틴어로만 진행할 수 있었던 각종 성사들은 라틴어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있지만 해당 포교지역의 언어로 진행할 수 있게 되고, 전례서의 번역이 허용되는 등, 현지화를 융통성 있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로마 전례 양식을 제정, 발표했다. 현대 가톨릭 신자들이 접하는 가톨릭 의례는 1970년대 이후 제정된 것이다. 물론 로마 전례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조금씩 변해 왔지만, 공의회 직후에 전례가 대대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아예 버전이 다른 것으로 간주한다.

기존에는 전에 있던 전례서를 일부 수정하면 그만이었던 반면, 새 전례는 아예 전례서를 새로 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이전 전례서를 사용하고 싶어했다. 구판 전례서를 사용할 때에는 로마 미사 경본(Missale Romanum) 1962년판을 사용해야 하는데, 구판 중에서는 1962년판이 가장 최신(?)이기 때문이다. 새 전례를 정착시키고자 교황청에서는 구판 전례서를 사용하려면 해당 사제는 자기 상관인 주교에게 명시적으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정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가 '이미 공의회 이후 새로 제정한 전례가 완전히 정착했기 때문에 구판 전례를 자유로이 허용하여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하여, 신자들이 원하면 집전자는 상관 허락 없이 로마 미사 경본 1962년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했다. 로마 미사 경본 1962년판은 라틴어 외 언어로 번역하더라도 미사를 이해하기 위해서였으며, 모국어로 봉헌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자연스레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거행할 수가 없다. 이후 1962년판을 따르는 라틴어 미사가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의 경우 일선 사제가 트리엔트 전례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장상(교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1년 7월 자의교서 「전통의 수호자들」(Traditionis Custodes)을 발표하면서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는 또다시 교구장 주교의 허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교구장 주교 또한 교황청과 상의한 후에야 트리엔트 미사 봉헌을 허가해줄 수 있게 되었다.

  •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에는 교회의 성직위계 체제에 대해서는 주교들의 역할에 무게를 둠으로써 제1차 바티칸 공의회교황을 군주로 강조한 것과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주교들과 주교단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교황의 수위권과 그리스도교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권위를 통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주교들은 아무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전통적 교리 역시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을 그 단장으로 포함시켜 이해해야만 권한을 가지는 것이고, 목자(사제)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전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직책상으로 완전한 최상 전권을 가지며, 언제나 자유로이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교회 헌장 22항)
또한 평신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의 선교사명에 참여해야 할 근거를 제시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 순례자들로 묘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래 가톨릭 교회가 사상과 의식(儀式)면에서 지녀온 방어적이고 완고한 자세를 바꾸기 위한 신학적 명분을 제시했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교황 중심의 중앙집권 방식이 좀더 쌍방 유대적인 관계로 변화할 수 있었다.

  •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에서는 성경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경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은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변화들을 인정하고, 교회와 계시의 의미를 현대 문화의 필요 및 가치와 연관 지으려고 했다.

이 공의회는 그 외에도 주교들의 사목 의무, 에큐메니즘, 동방전례교회들, 사제들의 사목과 생활, 사제직에 대한 교육, 신앙생활, 교회의 선교활동, 평신도의 전도의무, 사회적인 교류방법 등에 관한 교령(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문서)을 공포했다.

더 나아가 종교의 자유, 비(非) 그리스도교 종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 그리스도교 교육에 관한 선언들(특정 논제에 관한 문서들)도 공포하였다. 특히 타 종파에 대한 이제까지의 경직된 태도를 허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로 보고 그들의 교회와 전통 중에서 진정하고 긍정적인 요소는 배우고 토의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또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로 돌아서게 한 초석이 되었다.

이 문서들은 교황 요한 23세가 즉위하기 수십 년 전부터 교회생활 여러 분야[5]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쇄신을 반영했다.

4. 주목할 만한 결과[편집]



  • 1517년 종교개혁으로 분리된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로 인정했다.[6]


  • 타 교파 영세자를 가톨릭 교회로 전입시키는 일치 예식에서 이단을 끊겠다는 서약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 다른 종교에도 배울 점은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종교관을 고백했다.[7]

  • 유대인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동안의 오랜 입장[8]을 수정하여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교회의 책임을 인정했다.[9]

  •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곧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인 책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 신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이 교회의 안위를 위한다는 이유로 나치 독일 등의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한 일이 영향을 준 것이다.

  • 현대 사회 문제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인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에서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양심의 동기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위한 법률을 인간답게 마련하여, 인간 공동체에 대한 다른 형태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5장> 중

  • 자기 탓 없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선하게 살 경우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하였다.[10] 왜냐하면 선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고, 최대한의 내적 양심의 명령을 따라 본인이 알고 있는 선에서라도 가능한 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은총을 간직하려고 노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외적인 비가톨릭 신자일지라도 본인의 고의적이지 않은 무지의 상황에서라면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다만, 이러한 공의회의 해설은 흔한 오해와는 달리, 기존에 없었는데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갑자기 뜬금포로 새로 생겨난 신학이 아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한참 전부터 가톨릭의 공식적인(혹은 주류적인) 신학 견해였던 것을 무류성으로서 재확인한 것일 뿐이다.[11][12] 개신교 교파 분리 이전의 표준 문서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면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가톨릭이 1960년대에 와서야 이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반면 개신교는 거의 400년 전인 1648년 공인한 것. 물론 선행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깨달을 수 없는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의 '자기 탓 없이'가 어느 정도까지 적용가능한지, 그리고 탓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가 적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공의회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는데, 사실 몇몇 비신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이 범위는 공의회 이전부터 비교적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상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참조.[13]

  • 교회 내 평신도의 역할을 더욱 강조했다. '직무 사제직'이 성직자에 국한된 것이라면 '보편 사제직'은 모든 신자가 세례로써 받게 되는 사제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며,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힘차게 증언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교회헌장 10항 참조)".

  • 파문 제재가 과거의 영구제명으로서의 의미에서 교정벌로서의 의미에 가까워졌다. 과거에는 파문도 대파문(영구제명, major excommunication. anathema라고도 함)[14]과 교정벌로서의 소파문(성사 참여 제한, minor excommunication)으로 나뉘었는데, 공의회 이후에는 사실상 파문의 개념 자체가 소파문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설명하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개신교 예배 참석 및 개신교 성경, 개신교 서적, 타종교 서적, 기타 이단 서적의 '허가 없는' 열람 및 소지 행위는 1917년판 구 교회법에 최대 파문까지 명시된 대죄였다.[15] 이것들 중 허락없는 타 종교 및 타 종파 서적 열람의 교회법상 처벌 규정이 해제된 것인데, 금서목록 제도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했던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외적인 강제규범으로서의 금서목록은 해제되었으나, 이는 여전히 가톨릭 신자들이 지켜야 할 양심법으로 남아있다"고 직접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고의로 정교회 성찬예배에 참석하거나, 때를 불문하고 고의로 개신교 예배 또는 성공회 감사성찬례에 고의적으로 참석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하고 있다.[16] 마찬가지로 타종파 신자의 영성체 참여 또한 개방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개신교를 비롯한 형제 교파와의 성경 공동번역 작업도 허용되었다.[17] 이 공의회 직후에 영미권 최초의 공동번역 성경인 RSV-CE가 1966년에 출간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개신교와의 협업을 통한 《공동번역성서》가 출간되었다.[18] 또한 개신교와 성공회 등 타 그리스도교 교파와의 공동(에큐메니컬) 기도회, 예배(미사와 같은 성찬예배, 일반예배)가 가능해졌다. 유의점으로는, 일치기도회 등의 행사는 가톨릭 교회 당국자들이 결정하는 것이지, 평신도가 그런 것도 아닌데 에큐메니컬에 편승하겠답시고 교구의 명령과 허락 없이 타 교파 예배에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의 젊은 가톨릭 신자들은 별 신경 안 쓰는 듯.[19]

  • 매년 1월 18일에서 25일 사이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등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가 이 시기부터 활성화되었다.

5. 평가와 영향[편집]


1970년대 초반 이 문서들과 공의회의 전반적인 토의 내용들이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심지어 공의회 교부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생겨났다. 또한, 이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서 당시 주교였던 성 요한 바오로 2세베네딕토 16세 등이 교황청에서 주목을 받고 중용되는 계기를 잡았다. 또한 기존의 교회 속에 잔존해있던, "우리는 현대(Modern)와 대화할 생각 없으니 가만히 내버려둬라"라는 극단파들을 완전히 손절했으며, 현대 사회로부터 '게토'를 쌓고 방어적으로 일관하던 태도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서 더이상 지지받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러한 공의회의 논조가 기존 가톨릭 신학에 없다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가령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만 하더라도, 보편공의회 차원에서의 지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처음이지만, 가톨릭 신학에 이미 존재하던 스탠스였으며, 일부 비주류 신학자들의 극단적인 진보 신학 같은 것도 아니었다. 19세기 가톨릭이 반대한 것은 무신론, 이신론적 세계관이지 민주정이 아니었으며, 가톨릭 국교화를 세속국가에 강요하지도 않았다.

19세기 교황인 레오 13세는 초기 10년 동안 정치권력의 기원에 관한 문제를 집중해서 다뤘는데,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을 떠받치는 근본 개념을 회칙 Diuturnum illud(1881)과 Immortale Dei(1885)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간접)민주정을 '본성적으로 백성에게서 유래하는 권력이 통치자에게 위임된 체제'로 이해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는 레오 13세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레오 13세는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정을 시민의 정치 참여 내지는 권력을 수행하는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는 레오 13세는 분명하게 민주주의자였다. "레오 13세가 백성의 의지 편에서 이루어지는 선출 형태에 대해 반대하거나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적절한 정치 참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20]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같은 방식으로 고유한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유사하며 또한 실천적인 삶에 있어서 평등하다. 이렇게 해서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며 어떠한 이념에 의해서도 다른 사람의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는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생각하고 어떤 사안에서든 자시의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대해 명령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 위에 기초한 사회에서 권력은 다름 아닌 민중의 원의로서, 민중은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며 자신에 대헤 명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기도 하다. 민중은 자신이 복종할 사람들을 선출한다. 그러나 대표자에게 명령하는 권리를 양도하는 것이 아니며 이 대표자는 민중의 이름으로 이 권리를 수행한다.[21]

... 이렇게 해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국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주인이자 통치자들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민중 그 자체가 모든 권리와 안전의 원천이며, 따라서 국가는 어떠한 의무로 인해서도 하느님 앞에서 강압적으로 판결하지 않는다. 국가는 공적으로 어떠한 종교도 서약하지 않으며 수많은 종교 가운데 참되고 유일한 것을 추구하지도 말아야 하며 그 종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선택하지 말고 원칙적으로 어느 한 종교를 위한 호의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이 모든 종교들로 인해 국가의 규율에 누가 되지 않도록 각 종교에게 모두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원칙들로부터 따라오는 것은, 종교적인 사안에 있어서 모든 것은 개별 사람들의 임의에 맡겨지며 각 개인은 자신이 선호하는 종교를 따르든지 아니면 그 가운데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모두를 거부함이 합당하다.[22]

-교황 레오 13세. 〈Immortale Dei〉(1885).[23]

이러한 권력 이해는 권력의 본질에 대해 교회 바깥과는 다른 전제를 깔고 있으나, 시민의 근대적 정치 참여, 대의제 민주주의 등에 대해서 유사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레오 13세는 시민은 참된 종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입장이었기에 현대 세속국가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종교적 자유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가톨릭이야말로 국가가 따를만한 유일하게 올바른 신앙이라는 믿음은 레오 13세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으며, 이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가톨릭 교회에서도 똑같다. 그러나 실천적인 결론에 있어서는, 국가가 여러 예배에 대해 관용을 보여야 함을 당연히 주장했다.(Diuturnum illud 18항)[24]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시선이,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화들짝 놀란 가톨릭 교계 안에 갑자기 뜬금없이 생겨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중세와 근대 초 신학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유서깊은 담론이다.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e, 1542-1621)와 수아레스(Francisco Suárez, 1548-1617)는 시민 통치자가 자신의 권력을 정치적 공동체로부터 직접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그들은, 모든 합법적 권위가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시민 통치자가 자신의 권위를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통치자의 권위는 공동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다.

... 정치적 주권은 신민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은 11세기 로텐바하의 마네골트(Manegold von Lautenbach)가 제안한 것이었다. 시민 통치자들에게는 이행할 신뢰가 있어야 하고, 만약 그가 습관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다면 그는 폐위되어야 한다는 확신은 12세기에 솔즈베리의 요한(John of Salisbury), 13세기의 아퀴나스(Thomas Aquinas), 그리고 14세기에 오컴(William of Ockham)에 의해 제시되었다. 벨라르미노, 수아레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정치적 주권은 신민에게서 온 것이라는 이론의 보다 형식적이고 명시적인 진술을 부여했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그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자료에 대한 반성에 크게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지 초기의 스콜라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계승했을 뿐이다. 스페인의 예수회 일원인 마리아나(Juan de Mariana, 1536-1624)가 정치적 억압에 대한 치유책으로 폭군살해가 필요하다고 한 그의 불운한 진술을 했을 때 (그의 언급의 일부는 프랑스의 앙리 3세의 암살에 대한 옹호로 해석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저서인 『왕과 왕실 기관』(De rege et regis institutione, 1599)이 프랑스 의회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의 원리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합법성의 원리에 다름 아니었다. 이 억압은 비록 마리아나의 결론이 오도되었기는 하지만 중세에서 통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시대의 스콜라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교회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공동체와 관련하여 다만 시민 통치자의 지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사회의 기원과 본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수아레스에 관한 한 분명한 것은 그가 정치적 사회를 본질적으로 동의나 합의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점이다. 신민들과의 계약에서부터 군주의 권력을 끌어내었던 마리아나는 정치적 사회의 기원을 정부에 선행하는 자연 상태를 따르는 것으로 보았다. 조직화된 국가와 정부를 향한 주요한 첫 걸음을 그는 사유재산의 제도 안에서 발견하였다. 자연의 상태라고 하는 마리아나의 가설에서 수아레스가 마리아나를 추종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그가 인간들 사이에서 국가와 같은 그러한 연합체가 시초부터 생겨났다는 점을 분명히 생각했더라도, 그는 적어도 종족들의 장들이 자발적 동의를 한 것이 국가의 기원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아레스가 이중 계약이론, 즉 하나는 종족들의 장들 사이의 계약, 다른 하나는 그렇게 형성된 사회와 그 사회의 통치자 또는 통치자들 사이의 계약을 주장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 정치적 사회는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것이고, 정부는 사회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와 정부는 순수하게 임의적인 것이거나 규약적인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다른 한편 비록 자연이 정치적 사회를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특정한 정치공동체의 형성은 통상 인간의 합의에 의거한다. 다시 말하면, 비록 모든 사회가 어떤 지배적인 원리를 가질 것을 자연이 요구한다 하더라도, 자연은 어떤 특정한 정부형태를 확정하지도 않았고 또한 특정한 개인을 통치자로 기획하지도 않았다. 어떤 사례들에서는 신은 통치자를 직접적으로 명시했다(예를 들면 사울이나 다윗). 그러나 보통의 경우 정부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공동체의 결정사항이다.

정치적 사회가 어떤 종류의 합의에 기초한다는 이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우리는 고대세계에서도 합의의 전조를 발견할 수 있다. 중세 시기 파리의 장(Jean de Paris)은 자신의 『왕권과 교황권』(Tractatus de potestate regia et papali, 1303년경)에서 자연의 상태를 전제하였고, 원시인들이 아마도 어떤 특정한 계약을 맺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더 합리적인 동료들로부터 공동의 법률 아래 함께 살 것을 권유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로마의 에지디오(Egidio Romano)는 13세기에 정치적 사회의 기초에 대한 가능한 설명들 중 하나로 계약이론을 제안하였다. 16세기에 마리아나(Juan de Mariana)와 함께 이 이론은 명료화되었다. 같은 세기에 도미니코회의 비토리아의 프란시스코(Francisco de Vitoria)는 계약이론을 암시하였으며, 예수회의 몰리나(Luis de Molina) 역시 그 이론의 대단히 명료한 진술을 하지는 못했지만 비토리아를 계승하였다. 그래서 사회계약이론의 전통은 점점 성장하였다.

-Frederick Charles Copleston 지음. 이남원·정용수 옮김. 《후기스콜라 철학과 르네상스 철학》 456-459쪽


물론 레오 13세와 수아레스 등의 태도가 공의회 전 가톨릭의 정치적 스탠스를 완전히 요약하는 것은 아니다. 당장 에스파냐 가톨릭과 프랑코 정권의 협력만 하더라도 공의회 전 가톨릭의 역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이 공의회 후로는 가톨릭 신학 내부에서 설 자리를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25]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물론 부족함은 있었다. 가령 꾸준히 하락하던 유럽 가톨릭 신자들의 종교의식 참여율을 역전시키기도 역부족이었다. 이탈리아에서도 전체 가톨릭 신자의 미사 참례율은 1956년 69%에서 12년 뒤에는 48%로 하락했다. 그러나 68 혁명 이후 유럽에서 종교의 쇠퇴 현상은 결코 가톨릭 신앙에만 국한되지는 않고 미국에선 오히려 가톨릭의 세가 왕성해졌기 때문에[26] 이를 근거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를 실패로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견해다.

사실 세속적 관점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거둔 진정한 성과는, 아니면 적어도 촉진하고 인정했던 바는 첫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보편공의회 차원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티칸의 이러한 조치는 스페인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생전에 교회와 정권 사이에 간격을 벌렸고, 결국 프랑코 사후 1978년 가톨릭 교회의 ‘국교 해제’를[27] 밀어붙이는 데 성공적으로 기여하여 스페인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구체제’와 연합했던 데에서 연유하는 몇 가지 곤란한 결과는 면하게 해 줄 수 있었다. 둘째는 교황에 대한 세계적 존경을 좀 더 높였다는 점이다.

이 결과에 반발하여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베트남의 응오 딘 툭 대주교[28]가 공의회에 반발하다가 교황공석주의자가 되었다. 성 요한 23세 이전 비오 12세 치하 동안 바티칸의 실세였던 파스칼리나 레네르트 수녀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한 개혁을 강하게 비판하였다.[29][3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세계 각지에서 성서 공동번역이 활발해졌다. 우선, 영미권에서는 RSV-CE와 예루살람 성경이 발간되었고, 대한민국에서는 공동번역 성서가 발간되었다. 미국 가톨릭에서는 Confraternity Bible를 대체하는 New American Bible이 발간되었다.

가톨릭 내 진보파 일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작일 뿐”이라며 제3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최를 주창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참고 하지만 자칫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성급히 개최했다간 의도와 달리 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다는 진보파 내부의 반론/비판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제도권 내 보수파와 진보파의 입장이 미묘하게 다른데, 일단 제도권 내 보수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의 공의회와 다르게 교리를 수정한 공의회가 아니라 단지 사목적인 목적의 공의회였다”고 보는 반면에[31], 진보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했던 진정한 개혁 정신을 적극 실천해야 한다”[32]고 주장한다. 일단 결론만 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삶을 쇄신(aggiornamento)하고자 한 사목 공의회였다. 따라서 많은 성직자들이 소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이유로 교회의 신앙과 규정과도 어긋난 다원주의나 전례 남용 등을 보이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33]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 계열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통과 모순된다거나[34] 무효한 공의회라거나 하는 주장은 올바른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공의회에서 말하는 모든 것을 무류화 시키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35] 가톨릭 내부에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오류를 시정[36]해야 한다는 주교들이 나오고 있다.[37][38]

신학자들과 교회 학문들의 다른 전문가들은 전통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속적인 연관성을 밝히도록 촉구된다.

5. 본인은 이미 일어난 상황에 직면하여 이 슬픈 사건으로 부각된 일부 측면을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본인의 의무라고 여기는 바이다.

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진한 운동의 결과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전통, 즉 통상적이든 예외적이든 교회의 교도권에 의하여 특별히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는 세계 공의회에서 정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교회의 전통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반성의 자극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반성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은 교리와 전례와 수행(修行)의 문제에 있어서 그릇된 해석과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적용을 배제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더욱더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는 한층 새롭고도 유효한 확신을 이끌어내야 한다.

특별히 주교들은 그 사목적 사명으로 인하여 어디서나 이러한 충실성이 수호될 수 있도록 충만한 사랑과 강인함으로 투철한 감독을 하여야 할 중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7)

그러나 모든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합법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만이 아니라 은사의 다양성과 영성의 전통 및 사도직의 다양성을 지닌 교회의 부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부요는 또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며, 지상의 교회가 성령의 충동을 받아 하늘로 들어높이는 저 조화된 “화음”의 아름다움이다.

나) 더 나아가, 본인은 신학자들을 비롯 여타 교회 학문의 전문가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응답의 촉구를 절감하여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참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 지닌 그 넓이와 깊이는 더욱 심오한 연구에 대한 새로운 투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로써 전통에 대한 공의회의 지속성이 특히 교리 문제에 있어서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어떤 교리 문제는 아마도 새로운 문제여서 교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현재의 상황에서 본인은 본인온 지금까지 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에 여러 모로 연계되어 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부적이고 형제적인 정으로 엄중하게 충심으로 호소하고자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운동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고, 가톨릭 교회의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일치하여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완수하기 바란다. 이교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대한 범죄이며 교회법으로 정해진 파문의 벌이 따른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명심하여야 한다.8)

라틴 전통의 전례와 수행에 있어서 이전의 일부 형태에 애착을 느끼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본인은 그들의 올바른 열망이 존중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그들의 교회적 친교를 촉진하려는 본인의 의지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본인은 주교들의 지지와 교회 사목직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요청하는 바이다.

요한 바오로 2세,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 1988.7.2., 5항, 『회보』 48호(1988),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4-25면, AAS 80(1998), 1497-1498면.


□논단•신앙의 현재 상황<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발견

요셉 라칭거 추기경[39]

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대치되는 양쪽의 잘못

대화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사건, 즉 1985년에 폐막 20주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2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년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훌륭한 문헌들이 가진 중요성과 풍요로움, 그 시의적절함과 필요불가결함을 놓고, 오늘날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치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교리성 장관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를 보고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은 몇몇 주석자들이 공공연히 이에 관한 의문을 던져 보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라칭거 추기경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결정들을 옹호한 발언들은 매우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말들을 강조하였다.

무수한 예 가운데 그가 1975년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즈음하여 작성한 논문을 하나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브릭센에서 나는 추기경에게 그 논문의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 주었다. 그는 그 논문에서 그가 가졌던 입장을 아직껏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가 있기 10년 전 그는 벌써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 황혼기에 서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쪽에서는 공의회를 완전히 한물간,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현대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지사로 다루고 있다. 그 반대로”, ‘보수’진영은 “공의회를 오늘날 가톨릭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화근으로 여기고 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의 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환원이나 거의 환원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했다.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먼저 들려주어야 할 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및 트리엔트 공의회와 동일한 권위에 의해, 즉 교황과 그에 결합된 주교단에 의해 지탱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주 엄격하게 앞선 두 공의회를 계승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점에서는 그들 공의회에서 쓰여진 단어까지 섞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라칭거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로는, “(가톨릭 신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찬성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반대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백히 표현하고 이해한 대로 이 공의회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톨릭 교회의 구속력 있는 전통(verbindliche Tradition), 특히 두 개의 지나간 공의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극단적인 형태의 이른바 ‘진보주의’에 해당한다. 둘째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찬성하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대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인하는 자는 그 두 공의회를 낳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두 공의회를 그 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극단적인 형태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전통주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것을 택하건,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만 유지해야 할 전체(결국 교회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면목

거의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문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 그리고 요셉 라칭거가 여기에 속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보기에는 공의회 이후 시대의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한, 문헌의 다양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공의회 이후의 시대에 대한 라칭거의 판단은 매우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로서는 지난 10년이 극도로 부정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공의회 이 후의 전개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에서 비롯된 모든 이의 기대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초대 교회의 말기 이래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더 소수파가 되어 있다.

추기경은 자신의 냉정한 판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는 대화 도중에도 이를 되풀이했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 하든 놀랄 일이 못된다. 그는 그것을 자주 강조했던 것이다.) “교황들과 공의회의 교부들이 기대했던 것은 가톨릭의 새로운 일치였는데 드러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ᅳ 바오로 6세 성하의 말씀을 빌리자면 ᅳ 자기 비판으로부터 자기 파괴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여요. 새로운 감격이 기대되었는데 너무 자주 권태와 의기소침에 빠져 버렸습니다. 일보 전진이 기대되었는데 드러난 것은 붕괴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자칭 ‘공의회의 정신’을 근거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럼으로써 공의회의 이름은 더 더욱 모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벌써 10년 전에 결론을 내렸다. “교회의 참된 개혁의 전제는 지금까지 의심할 바 없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잘못된 길로부터 깨끗이 결별하는 것임이 분명히 거론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라칭거는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은 공의회 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비판적인 성직자는 덧붙이기를, 그것은 설계도를 분실해 버려 각자 자기 생각대로 집을 짓는 공사장이라 했지요.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이나 그 정통적인 문서들에 있을 수 없고, 공의회 이후의 그러한 전개는 공의회 교부 들의 문헌에도 반하고, 정신에도 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되풀이하고자 했다.

추기경은 말했다. “저는 확신합니다만,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에 입은 각종 손해는‘참된’공의회에 탓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ᅳ 내부적으로는 ᅳ 잠재 해 있던 다원적이고 원심적인 여러 힘이 전면에 부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서방의 문화 혁명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데 그 까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견,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그의 요망은 정녕 “되돌아가자”가 아니고, “근원이 되는 공의회의 정통 문헌으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그는 반복한다. 그에게는 “오늘날 교회의 참된 전승의 옹호는 공의회의 옹호 입니다. 우리들이 가끔(‘우’로건 ‘좌’로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의 ‘단점’, 전승의 포기라고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예요. 있는 것은 연속성이요, 이 연속성은 과거로의 후퇴도 앞으로의 도피도, 시대 착오적인 향수도 터무니없는 초조함도 용납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오늘’에 충실히 머물려야만 하지 ‘어제’나 ‘내일’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교회의 오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이지요. 내용을 잘라내거나 독단적으로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은 그 문헌 말씀입니다.”

시대 역행에 대한 묘약

라칭거는 ‘좌경’에 비판적인가 하면, ‘우익’에 대해서도, 또 마르셀 르페부르 대주교로 상징되는 저 완벽한 전통주의에 대해서도 오해의 여지없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만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저는 그 비논리적인 자세에는 아무런 장래도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가는 출발점은 특히 비오 9세와 비오 10세의 가르침 ᅳ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교황 우위권에 대한 엄격한 충성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비오 12세까지만 있고 그 다음은 없는 것입니까? 성좌에 대한 충성은 시대에 따라 또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확신에 얼마나 가깝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로마가 ‘왼쪽’을 신경썼다면 아직 ‘오른쪽’에 대해서는 동일한 강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이에 대하여 추기경은 “몬시뇰 르페부르의 지지자들의 주장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 이야기는 공을 세운 노(老) 대주교에 대하여는 즉각 성직 정지라는 엄벌로 대응하면서, 다른 방향을 향한 온갖 탈선은 이해할 수 없이 참는다는 거예요. 저는 이 방향 또는 저 방향을 향한 크고 작은 논쟁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순의 두 유형은 완전히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사실 ‘왼쪽’으로의 일탈은 교회의 현재 사고와 행동의 광범한 흐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만 거의 어디서도 그 공통된, 제대로 파악할 만한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르페부르 대주교의 활동은 그에 반해 추정컨대 수적으로는 훨씬 적게 퍼져 있기는 해도 뚜렷히 구획된 교회법 기구와 신학교와 수도원 따위를 갖고 있습니다. 르페부르 몬시뇰이 화해에의 희망 속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행하지 않고 있는 주교 성성을 결심한다면 언제라도 있게 될 정식 ‘이교’(Schisma)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이 대화의 시점에서는 아직 주교 성성이 행해지지 않았었고, 그 후 르페부르 주교도 사망했음. ᅳ 옮긴이 주).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과거에는 막 생겨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의 자세가 없었다고 비판한다면,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물론 하나의 행동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온갖 기회를 활용해야만 합니다.” 라고 응답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르페부르는 사제를 서품했고 또 계속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법은 그 서품이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무효라고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미리 위법한 상태에서이긴 하지만 교회에 대하여는 ‘진정한’ 사제들인 이 젊은이들의 인간적인 측면도 염려해야만 합니다. 각 개인의 출발점과 방향은 확실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내부적인 상황에 매우 강력히 영향받아 그들의 결정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교회에 대한 환멸이 까닭이 되는데, 그 환멸은 그들을 비통함과 부정적 사고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교화의 정상적인 사목 활동 안에서 온전히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나라의 신학교에서 발생한 불만스런 상황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분열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화해를 희망하고 오직 이 희망으로 르페부르 주교의 사제단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르페부르 사건과 다른 시대 착오적인 반항에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그의 처방은 바오로 6세부터 현교황까지의 최근 교황들의 방침을 상기시킨다. “이와 유사한 황당무계한 상황들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공의회 이후의 많은 자의적이고 분별 없는 해석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공의회의 참된 얼굴을 내 보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로 등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그릇된 저항에 대한 원칙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의 정신

“그러나 ‘참 공의회’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추기경도 말씀하셨지만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신개선주의’의 사례들과는 별도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현상황이 어렵다는 데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진단도 그렇고 그 치료에 관해서도 의견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의 ‘진단’에 따르면 ‘위기 현상들은 성장기에 생기는 유일한 열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 현상들을 중병의 징후로 봅니다. ‘치료’로 보자면, 한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문헌을 넘어서라도 보다 포괄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적은 개혁과 변경을 주장합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합니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요?”

추기경은 답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제 진단은 이렇습니다. 치료받고 요양받아야 할 진짜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치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완전히 받아들여져야 할 현실이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사람들이 달려나가면서 멀어지는 출발점으로 볼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그 위에 쌓아 올려져야 할 받침으로 본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의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막 발견하고 있는 그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문헌은 그 선포 시점에서는 참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서감이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문화적인 혁명과 사회적인 변동을 맞게 되었습니다만, 공의회 교부들이 이를 결코 예견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들의 ᅳ 당시엔 시기적으로 빨랐던 ᅳ 답이 그 후세에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지를 혁명과 변동은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문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공의회의 문헌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와 제대로 맞설 바른 도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참된 공의회에 ‘힘입어’교회를 재건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계속하면서 그는 다음 내용을 상기시켰다. 이 참된 공의회는 “이미 공의회의 기간 중에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더 더욱,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로 받아들인 ‘공의회 정신’, 사실은 공의회에 ‘반대되는 정신’이지만, 이로 인해 반대받았습니다. 이 해로운 반 공의회 정신’(Konzils-Ungeist)에 따르면 무엇이나 ‘새로운’ 것은, 또는 보기에 새로운 것은 ᅳ 새로운 것이라 자칭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이 그간 얼굴을 드러냈는지 ᅳ 언제이건 그리고 어떤 경우이건 과거의 것보다 또는 현재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반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교회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단절이 아니라 연속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가 아주 예리해지기를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공의회 문헌은 가톨릭 정신의 연속성을 재확인할 뿐 어디서도 교회사를 공의회 ‘이전’ 과 ‘이후’로 분리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러한 도식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공의회 ‘이전’ 교회도 없고 공의회 ‘이후’ 교회도 없습니다. 당신 친히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보배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늘 보다 잘 이해하면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사에는 아무런 비약도 없고 아무런 단절도 없고 또 연속성의 아무런 중단도 없습니다. 결코 공의회는 교회를 시대적으로 양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석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는 다음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토론에 붙이는 것은 공의회를 시작한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충실히 이어받은 바오로 6세 교황의 의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두 분에게는 신앙의 유산이란 다툴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보증받은 것이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혹시 일부의 사람들이 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인 ‘사목적’인 측면을 강조하시려는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믿음을 ‘바꾸려고’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현재화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분명한 정체성의 토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 말할 것이 있고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황님들과 공의회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분들 중 일부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너무 무비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낙관론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현대 세계의 긍정적인 것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는 의견이셨다면, 그건 바로 그분들이 그 정체성, 그 믿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근년에 와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의, 그러니까 현대의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자제되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개방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앙 유산의 토대를 토론에 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겐 신앙의 유산이라는것이 더 이상 분명치도 않구요. 사실교회 밖에서발생하기는 했지만, — 정제되고 정돈되면 —사물의 교회적 시야에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들이 있지요. 근자에 들어 사람들은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만 이 두 현실이 서로 충돌 없이 만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교회도 세상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럼 추기경께서는 ‘세상에 대한 반대’라는 옛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시는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이 반대하는 것이지요. 죄와 은총이 기탄 없이 이야기되면 세상은 분노합니다. 무분별한 ‘자기 개방’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에 속하고, 가끔 인간의 심성에 당연한 것으로 그럴 듯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곧 신약성서가 ᅳ 확실히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로 ᅳ ‘세상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자임을 다시금 의식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비타협주의에의 용기를 재발견하고, 대결할 수 있는 능력, 주변 문화의 다양한 경향에 주의를 환기하고 동시에 증상은 안 좋은 데도 느낌은 좋은 공의회 이후의 연대를 단념할 역량을 재발견할 때에 이른 것입니다.”

회복?

이 시점에서 ᅳ 대화의 전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때도 역시 신학교의 뜰에 면한 방의 정적 속에 녹음기는 사각 사각 돌아가고 있었다 ᅳ 나는 라칭거 추기경한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그 답은 가장 활기있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은, 문제되는 낱말(‘회복’)에 감정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미숙함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그 낱말의 내용은 오래된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ᅳ 적어도 우리들의 견해로는 一 과거란 정녕코 되풀이할 수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물어 보았다. “장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교회의 고위층은 공의회 후 시대의 첫 단계를 종식시키려 한다고, 또 (비록 확실히 공의회 이전의 시대로의 회복은 아니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 문헌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교회 고위층은 일종의 ‘회복’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추기경의 답을 그대로 옮긴다. “’회복’이라는 말이 후퇴를 뜻한다면, 그러한 회복은 도무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찾아오실 주님을 앞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뒤로 돌아가다니요, 뒤로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역시 어떠한 ‘회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을 세상에 대한 갖가지 지나친 무분별한 개방 후의,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해석한 후에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그래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즉 가톨릭의 전체성 안에서 여러 방향과 가치의 균형을 새로 잡으려는 의미의 ‘회복’은 지극히 바람직스럽고 교회 안에서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첫 단계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얘기치 못한 결과들

추기경이 내게 말했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해준 것들을 볼 때 악화되었고, 그 행복감의 열매들이 이제 우리 앞에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시대의 징표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저 ‘현실론’을 취하도록 격려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람들이(비현실적으로)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화가 전혀 없었던 양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결과 중 많은 것은 공의회 교부들의 의향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분명 우리는 ‘공의회가 아예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회 사가요 위대한 학자, 영국 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헨리 뉴먼 추기경은 말씀하시기를, 공의회는 언제나 교회에게는 위험이며, 그러므로 소수의 사항만 다룰 것이요, 그렇게 오래 끌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시간과 인내와 위험 부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개혁은 위험하니 하지 말자’ 하는 것도 안될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믿는 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 공의회의 진정한 수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문서들은 피상적이거나 한마디로 부정확한 출판물의 홍수 속에 즉각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공의회 문헌의 ‘글자’를 읽어 보면, 그 참된 ‘정신’을 찾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정신이 사실대로 재발견된다면, 저 위대한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게 해 줄 것이요. 새로운 힘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오해함으로써 교회 안에 야기된 손실들을 명백히, 따라서 뼈아프게 바라보는 가톨릭 신자는 바로 그 제2차 공의회 안에서 재활의 가능성도 찾아야만 합니다. 공의회는 주님의 것이지,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길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공의회를 마치 ‘성직자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화석’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는 더 이상 관계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공의회가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Unicum(유일무이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긴박한 문제나 위기의 압력하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관련해서 보자면(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조용한 시점에서 소집된 사상 최초의 공의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적되었습니다. 위기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고,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들어왔습니다.(그런데 추기경께서 앞서 암시하신 것의 하나로 돌아가자면) 교회가 저 문화 혁명을 극복했어야 했다고, 그러니 공의회가 없었다면 교회의 구조가 더 경직되어 손실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공의회 이후의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유연한 교회 구조가, 비록 매사에 더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어쩌면 충격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추기경은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역사는, 특히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길에 따라 인도하시는 교회의 역사는 우리가 가정법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60년대 초기에는 2차 대전 후의 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미 재건된 세계를 만나, 그래서 뭔가 달리 참여를 위한, 일신을 위한 계기를 찾고 있는 전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에의 낙관론과 신뢰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그 밖에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앞으로 조용히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검사성(현 신앙교리성) 제 전임자 옷타비아니 추기경도 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 사업을 지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 공의회의 소집을 공고하신 후, 성청은 세계 주교들 중에서 특히 저명한 대표들과 함께 공의회 교부들이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교과서적이며, 사목적 성격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기각한 저 초안(Schemata)의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기각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동의하신 이 문서에 관한 신속하고 마찰 없는 표결을 기대하셨습니다. 명백히 그 내용 중 어느 것도 교의를 바꾸고자 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교의를 종합하는 것이었고, 기껏 해야 이제까지 분명히 정의되지 않았던 점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개였던 것입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이 이 문서들을 거부 했던 것도 그러한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표현 방식이라든가, 이제까지 없었고 지금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몇 가지 정의(定義)결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의회가 요한 23세 성하께서 기대하신 경과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전통주의와 로마에의 충성의 아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의회가 교회에게 앞으로의 비약이요 쇄신된 삶이며 하나의 새로운 일치를 뜻했으면 하는 요한23세 성하의 기도가 교회 전체로 보아 ᅳ 적어도 아직까지는 ᅳ 받아들여지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희망의 징표들

나는 불안해서 물었다. “그러면 공의회 이후 시대의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추기경님의 부정적인 시각은 얼마간의 긍정적인 요소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인지요?”

그는 대답한다. “역설적입니다만 확실하게 부정적인 것이 가장 먼저 긍정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신자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고, 이데올로기와의 타협주의의 결과를 체험했으며, 세상의 구원과 자유와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 믿음 없는 세상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론으로만 알았었지요. 이제는 그 실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실상의 공허 안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풍요로움, 믿음의 필수불가결함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힘겨운 정화 같은 것이었고 마치 불을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 과정이 하나의 깊은 믿음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입니다.”

추기경은 계속했습니다. “모든 공의회가 먼저 ‘상층부’의 개혁이고 그 다음에 저변의 신자들로 이행해야 함을 망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공의회가 결실을 가져오려면 어떤 공의회에나 거룩함의 물결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가 그러했었지요. 그래서 참된 개혁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 입니다. 거룩함은 교회의 경우 그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함이 교회 지도부의 명령에서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결과가 언젠가 교회사의 광채로운 시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공의회에 생명을 부여하도록 부르심 받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밀라노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를 기념하면서 말씀하셨듯이,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 새로운 개혁자도 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버티었다. “추기경께서는 그러므로 교회사의 이 시대에 ᅳ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말고는 ᅳ 다른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인정치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저야 긍정적인 것들을 물론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컨대 한국 교회와 같은 젊은 교회의 약진이라든가 박해받아 온 교회의 활력은 차치하도록 하겠어요. 이러한 것들은 바티칸 공의회에는 거의 직접 까닭을 돌릴 수 없고 또 위기 현상들을 직접 공의회 탓으로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교회 전체에 희망차게 울리는 것은 ᅳ 바로 서방에서는 교회가 위기인 마당에—아무도 계획하지 않았고 아무도 호소하지 않았던 바인데, 단순히 믿음의 내적 활력 자체에서 오는 새로운 움직임들의 태동입니다. 이러한 여러 움직임 안에는—더디기는 하지만 ᅳ 교회의 성신 강림의 순간과 같은 무엇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령 운동이라든가, 꾸르실료, 훠꼴라레, 성체와 자유(Communione e Liberazione) 등을 들고 싶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움직임은 여러 문제도 노정하고 있고, 그 안에 크건 작건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다 그러지요. 현재 저는 교회의 완전한 믿음을 갖추고 온전히 믿음에 살고자 하며 그 안에 커다란 선교적 활력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아리가 꾸준히 늘어 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 생활은 열심이지만 거기엔 내심에의 도피도 없고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도 없으며 있는 것은 단순히 충만한 나뉘지 않은 가톨릭적인 것뿐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신앙의 기쁨은 그 안에 널리 번지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의 새로운 성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떠한 사목적인 기획 부서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자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교회 당국은 ᅳ 당국이 아주 진취적이고 싶어한들 ᅳ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 당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들 현재의 모습에의 접함에 긴장은 있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교회의 교계 제도와의 긴장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하나의 새 세대가 부상하고 있어요. 저는 부푼 희망 속에 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강하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리 발휘되고 있어서 놀랍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쇄신은 완만하게, 그러나 효과 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모순과 부정의 취향에 사로잡혀 있던 낡은 형식은 사라지고 어언 새로운 모습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새로운 모습은 지배적인 관념들과의 대화에 아직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과제는— 교회의 교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과제는 ᅳ 이 새로운 모습에 문을 열어주는 것,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현재 아직 지배적인 경향은 실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직접적이고 종교적인 ‘기상 전망’을 바라보는 자라면 계속하여 신앙과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해야지요. 이러한 위기 상황에 편견 없이 맞설 때에만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목 170호, 121-132면.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전승과 ‘참된 교회’를 배반했다고 아무 근거도 일관성도 없이 주장하면서, 전례 개혁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합니다. 실제로 교회가 나아갈 길은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하는”(계시 헌장 8항) 교회 전승의 역동성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동성의 최근 단계는, 성령께 귀 기울이고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나아갈 길을 식별하고자 가톨릭 주교단이 한데 모였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공의회에 대하여 의혹을 품는다는 것은, 세계 공의회에서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에서(cum Petro et sub Petro) 장엄한 양식으로 합의체적 권력을 행사한 공의회 교부들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고,14)[40]

결국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1970년 전례 개혁 이전의 로마 전례 사용에 관한 자의 교서 「전통의 수호자들」(Traditionis Custodes)의 발표와 더불어 전 세계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권위

공의회가 폐막된 이래로, 16개의 문헌에서 지적되고 있는 수백 가지 요점들의 의미와 실현들을 논하는 엄청난 분량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어떤 것들은 제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전 공의회들 및 교회의 다른 장엄한 가르침들과 모순되고, 따라서 그 자체로 무효하다고 주장하는 비판의 목소리들을 담고 있다.

이 비판들에 대해서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들이 무엇이든 간에, 이전 공의회들과 모순된다는 것만큼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보편 공의회를 소집한 것은 교황이다. 그는 모여든 주교들의 작업을 일일이 보고 받았고, 그 주교들의 판단을 담고 있는 문헌들을 재가하였다. 그가 이렇게 할 때, 저 문헌들은 우리 신앙의 표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The First Vatican Council),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그리고 여타의 다른 모든 공의회를 유효하게 만드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한 공의회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모든 공의회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대로 어느 한 공의회를 배격하는 것은 그것들 모두를 배격하는 일이다. 우리는 결코 '공의회 선별주의'(pick-and-choose conciliarism)를 택할 수 없다.

『현대 가톨릭의 위기진단』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의 이단적 움직임은 내면의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전의 공의회들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장하는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공의회들의 진리를 보장하고 있다.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대해서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바티칸을 무시한 채 새로운 주교들 축성을 감행하였고, 바티칸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파문되었다.

『현대 가톨릭의 위기진단』

바오로 6세 교황은 1965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연구하거나 공의회 정신에 따르려는 가톨릭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새겨야 할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앙, 전통, 수덕(修德), 애덕의 실천, 희생 정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에로의 충성에 대하여 교회가 가르쳐 온 바를 완화한다고 해석하든지, 원리 원칙도 없고 초월적인 목적도 없이 나약하고 변덕스러우며 상대적인 세속적 사고방식에 대하여 관대하게 양보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든지, 이전보다 더 용이하고 덜 철저한 크리스천 신앙 형태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완전히 오해를 하는 것이다.

His Holiness Pope Paul VI, Sainte Colere, Paris: Editions de la Table Ronde, 1965

또한, 2007년 6월 29일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교회에 대한 교리의 일부 측면에 관한 몇 가지 물음에 대한 답변과 해설」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았고 그러한 의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발전, 심화시키고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였다”라고 답변하였다.

첫 번째 물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이전 교리를 바꾸었는가?

답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가톨릭 교리를 바꾸지 않았고 그러한 의도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발전, 심화시키고 더욱 완전하게 설명하였다.

이는 요한 23세께서 공의회를 시작하며 하신 연설에서 분명히 밝히신 것이다.1)[41]

바오로 6세께서는 이를 확인하셨고,2)[42] ‘교회 헌장’을 반포하시며 이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이러한 반포가 전통 교리에서 실제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라셨던 것을 우리도 바랍니다. 과거의 것이 지금도 여전합니다. 교회가 수 세기 동안 가르쳐 온 것을 우리도 가르칩니다. 한마디로, 추정되던 것이 이제 분명해졌고, 불확실하던 것이 이제 명쾌해졌으며, 숙고하고 토론하고 때로 논쟁하던 것이 이제 하나의 분명한 정식으로 종합되었습니다.”3)[43]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이러한 뜻을 여러 번 표명하였고 또한 실현하였다.4)[44]


첫 번째 물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에 관한 이전 교리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 물음은 앞에서 바오로 6세께서 말씀하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제시된 교회의 ‘새로운 면모’의 의미와 관련된다.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가르침에 근거한 답변은 매우 명료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이전에 갖고 있던 교회에 관한 교리를 바꾸려는 의도가 없었고 따라서 바꾸지 않았다. 공의회는 다만 이 교리를 깊이 있게 하고 더 유기적으로 설명하였다. 실제로 이는 바오로 6세께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을 공포하는 연설에서 밝히신 바 있다. 그 연설에서 교황께서는 ‘교회 헌장’이 교회에 관한 전통 교리를 바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정되던 것이 이제 분명해졌고, 불확실하던 것이 이제 명쾌해졌으며, 숙고하고 토론하고 때로 논쟁하던 것이 이제 하나의 분명한 정식으로 종합되었습니다.”2)[45]

라고 단언하셨다.

또한 그 이후에 공의회가 가르친 교리와 이 교리를 받아들여 심화한 교황청 문서들의 가르침 사이에는 일관성이 있어서, 그 자체로 어떤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를 들어,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선언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은 단지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의 가르침들을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재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이러한 분명한 천명에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본성에 관한 전통 가톨릭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고 지금도 계속 그러하다. 곧,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일종의 ‘획기적인 변혁’을 기대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측면들은 거의 제외하고 일부 측면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깊은 취지는 분명히 교회에 관한 담론을 하느님에 관한 담론 안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다루려는 것이었고, 따라서 참으로 신학적인 교회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공의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러한 측면이 가려져 왔다. 흔히 개별적인 교회론을 표명하기 위하여 이를 상대화하고, 또 흔히 이 동일한 공의회의 가르침에 대한 편파적이나 편중된 이해를 부추기는 특정 단어나 구절[46]

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교회 헌장’의 교회론과 관련하여, 일부 핵심 개념들은 교회의 인식 안에 자리를 잡게 된 것 같다. 곧,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 교황의 수위권과 더불어 주교 직무에 대한 재평가인 주교들의 단체성, 보편 교회 안의 개별 교회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교회 개념의 적용과 타종교들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에서 말하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subsistit in Ecclesia Catholica)는 정식으로 표현된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에 관한 문제가 그러하다.

이어지는 물음들에서, 이 문서는 이러한 개념들을 일부 검토하고 특히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과 이에 대한 이해가 교회 일치의 측면에서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고 있다.


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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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지어 교황권과 관련해서도, 공의회 전후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건 아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정의(定義)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무류성 선언을 할 수 있다"라는 구체적인 기술 메뉴얼이 아니라, 충만한 조건이 채워진다면 교황이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 향유하기를 원하신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론적인 선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무엇무엇이 무류한 교리인지는 가톨릭에서 확정된 목록이 없으며, 교황청 마저도 '무류성 교리 목록' 같은 것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단지 교황 무류성 정의 그 자체, 1854년의 성모 무염시태 선포, 1950년의 성모 몽소승천 선포 정도만이 모두가 동의하는 무류한 교리들일 뿐이다.[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논조는 이미 그 이전의 20세기 가톨릭 신학에 존재하던 논조이고, Henri de Lubac, Yves Congar, 하느님의 종 Hans Urs von Balthasar 등 공의회 스탠스를 대표하는 가톨릭 신학자들도 이미 공의회 전에 가톨릭 신학계에서 이름 높은 학자들이었다. 중요한 건 이들의 스탠스가 공의회의 이름으로 도장이 찍혔다는 것이지, 없던 신학을 공의회가 만들어낸 게 아니다.[3] 거칠게 요약하자면 "우리는 현대랑 서로 대화할 게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우린 우리대로 살겠다"는 입장.[4] 그때까지 순종했던 촌락 주민들의 지리적 이동과 사회 이동, 여성의 정치적 해방, 복지 국가 시대에 들어서 가톨릭 교회의 자선과 교구 학교의 중요성이 감소한 일 등.[5] 성서, 에큐메니즘, 전례, 평신도 선교 의무 등.[6] 아래 정교회와의 화해와 견주어 꽤나 큰 사건이었다. 물론 아직 개신교에 반감을 품거나 교회 일치 운동 등에 반대하는 보수 성향 신자들이 없지는 않으나, 더 이상 교회 차원에서 개신교를 이단 내지는 사이비라 매도하지는 않는다. 물론 개신교가 가톨릭에서 갈라진 '열교(裂敎)'라는 교리 자체는 여전하다. 현대의 가톨릭이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라 부르는 것은 교리 외적인 대외적 관계를 위한 사목적 배려 차원에 가깝다.[7]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가톨릭예수가 유일한 구세주이며 가톨릭 교리를 제대로 알게 되었으면서도 가톨릭을 고의적으로 거부한다면 사후에 지옥에 떨어진다는 교리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가톨릭 신자들은 죽어서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확신에 찬 사람이 드물다. 개신교회처럼 천국 혹은 지옥으로 나뉘지 않고, 그 중간 지대에 연옥이라는 곳이 있다고 믿기 때문.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연옥이 어떤 곳인지 나온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녔으나 완전 착하게 희생하고 살아서 천국에 갈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인 강도 등의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아서 지옥에 갈 것도 아닌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지옥보다는 그 강도가 덜하지만 역시 일정기간은 벌을 받고 회개해야 하는 중간감옥 정도인 연옥으로 간다고. 대다수 신자들이 자신들은 연옥에 가리라 생각하기에, 매년 위령성월(11월)이 되면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개신교의 구원관은 '구원에 확신을 가진 개인'을 강조하는 반면, 가톨릭의 구원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보편교회에 내려진 구원'을 강조하고, 죄가 씻겨져도 벌이 남아있기에 그 벌을 갚기 위해 선행을 하고 갚지 못한 벌은 연옥에서 씻게 된다고 생각한다.[8]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마태 27:24~26.)'를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오용해 왔었다.[9] 가톨릭 교회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시절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금지해왔었다.[10] 또한 하느님의 섭리는 자기 탓 없이 아직 하느님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하지 않으신다.(교회헌장 16)[11] 일부 전통주의 이단들은 이것을 보고 종교다원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전통주의자들이 존경하는 보수 교황 비오 9세는 공식문서(Singulari quadam, 1854)에서 처음으로 선의의 무지를 인정하였다. “사도적인 로마 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으며 … 그러나 불가피하게 참된 종교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느님 앞에 이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이치이다.”[12] 1950년대 이전의 성모몽소승천 교리라거나 19세기 이전의 성모무염시태 교리처럼.[13] 흔히 "이건 옛날 관점이고 지금은 달라진 거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가톨릭 교의신학에 대한 오해중 하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전 가톨릭 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것이 아님을 신앙교리성에서 공식 발표하였고, 애초에 이 공의회 자체는 교리를 바꾸는 공의회가 아니라(애초에 교황이나 공의회라도 이전 교황이나 공의회가 무류성으로 선포한 것은 변경이나 수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목적(교회생활적, 대외적) 요소를 개혁하는 공의회였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가톨릭의 교리는 단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14] 일반인에게 알려진 중세 가톨릭 파문의 이미지는 이쪽이다.[15]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아예 원천 금지되었던 건 아니다. 공의회 이전에도 고해신부나 주임신부, 또는 상위 성직자의 신중한 허가(관면)를 받았을 경우 학술적, 연구적 목적으로 타종파 서적을 열람 및 소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신자 본인이 가톨릭 교리에 해박하고 연구를 위한 경우에 한정하여 타 종파 단체에 참관 목적으로 어느 정도 머물 수도 있었다. 또한 결혼식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비종교적 목적으로 타종파 신자의 들러리를 서주거나 그냥 자리에만 앉아있는 식으로 수동적으로만 참가해도 교리적으로 죄까지는 안 되었다(출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윤형중 마태오 신부 저, 상해천주교요리, 중권 신덕 설명 중) 다만 완전한 우상숭배죄에 들어가는 행위, 예를 들면 굿(강신술) 참관이나 집전, 구경이나 점을 보는 행위 같은 것은 엄금되었고 이 규정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유효하다. 그래서 가톨릭 구마사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검은 사제들을 보면 중간에 무속인이 부마자를 상대로 굿을 하는데 이때 온 김윤석과 강동원이 맡은 신부들은 굿판이 벌어지는 방에 가지도, 보지도 않고 밖에 대기하고만 있는 장면이 있다. 이후 굿판이 무마되자 그제서야 간단한 대화 정도만 나눈다.[16] 단, 이것은 어느정도 이견은 있다. 물론 개신교로의 회심을 염두에 두거나 이중신앙생활 목적의 개신교 예배 참석은 당연히 죄가 되지만, 에큐메니컬 정신 차원에서 단회성 체험 목적 참석까지는 죄라고 보기 힘들다는 의견. 사실 1993년 교황청에서 발표한 교회 일치에 관한 지침을 보면 에큐메니컬 목적상 단회성 체험 목적 참석까지 죄라고 보기는 힘든 뉘앙스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펴낸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라는 책자의 내용도 마찬가지.[17] 이는 현행 교회법에도 규정되어 있다 (제825조).[18] 가톨릭 교회의 개신교 성경 사용에 대해서, 에큐메니컬 성향의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성경의 신학적 시각에 유념하며 보조적 용도로 활용한다면 상관 안 하지만, 보수적 성향의 신자는 금지에 가까운 권면을 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과거와 달리 단순히 개신교 성경을 열람했다고 해서 반드시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뿐이며, 가능한 한 가톨릭 성경을 보아야 할 양심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례용이나 신앙교육자료용으로는 반드시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만을 써야 하며, 개인통독용으로도 교회의 인가를 받은 번역본을 사용하는 것이 강력히 권고된다. 당연하지만 《공동번역성서》도 가톨릭 교회의 인가를 받은 정식 가톨릭 성경 중 하나다.[19] 출처: 천주교 대구대교구 김경식 보니파시오 몬시뇰 저, 《생활교리》.[20]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José Antonio Sayés) 지음. 윤주현 옮김. 《교회론》(''La Iglesia de Christo) 603쪽.[21] Eorum principiorum illud est maximum, onmes homines, quemadmodum genere naturaque similes intelliguntur, ita reapse esse in actione vitae inter se pares: unumquemque ita esse sui iuris, ut nullo modo sit alterius auctoritati obnosius: cogitare de re qualibet quae velit, agere quod lubeat, libere posse: imperandi aliis ius esse in nemine. His informata disciplinis societate, principatus non est nisi populi voluntas, qui, ut in sui ipsius unice est potestate, ita sibimet ipsi solus imperat: deligit autem, quibus se committat, ita tamen ut imperii non tam ius, quam munus in eos transferat, idque suo nomine esercendum.[22] Quo modo, ut perspicitur, est respublica nihil aliud nisi magistra et gubematrix sui multitudo: cumque populus omnium iurium omnisque potestatis fontem in se ipse continere dicatur, consequens erit, ut nulla ratione officii obligatam Deo se civitas putet ut religionem publice profiteatur nullam; nec debeat ex pluribus quae vera sola sit,quaerere, nec unam quamdam ceteris anteponere, nec uni maxime facere, sed singulis generibus aequabilitatem iuris tribuere ad eum finem, dum disciplina reipublicae ne quid ab illis detrimenti capiat. Consentaneum erit, iudicio singulorum permittere omnem de religione quaestionem; licere cuique aut sequi quam ipse malit, aut omnino nullam, si nullam probet. Hinc protecto illa nascuntur; ex lex unius cuiusque conscientiae iudicium; liberrimae de Deo colendo, de non colendo, sententiae; infinita tum cogitandi, tum cogitata publicandi licentia.[23] 한국어 번역은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의 《교회론》 한국어판에서 발췌. 라틴어 원문은 바티칸 홈페이지에서 발췌.[24] 오늘날 잉글랜드에서 성공회와 다른 종교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다른 종교에 대한 성공회의 원칙적 우위를 공인하되, 실천적 면에서의 관용을 보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25] 이러한 극단적 입장들은 공의회 후 교황과의 친교에서 이탈하였다. 즉 더 이상 가톨릭 제도권 내부에선 공개적으로 민주주의 부정을 외칠 수 없다는 것이다.[26] 그런데 사실은 가톨릭 문화권 출신 이민자(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히스패닉 등)의 급증 때문이긴 하다.[27] 정확히 말하면 '국교' 자체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 금지한 건 아니다. 아직도 몰타 등 일부 국가에서는 가톨릭이 국교이며, 가톨릭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잉글랜드 성공회가 있다.[28] 사족으로, 응오 딘 툭 대주교는 그 유명한 남베트남대통령응오딘지엠의 형이다.[29] 파스칼리나 수녀는 성 비오 10세회에 참여하거나 교황공석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바오로 6세 교황 시기 최고 교도권의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파스칼리나 수녀 외에도 가톨릭 교회 제도권 보수파 중에는 가톨릭 전통주의자들의 운동에 동정이나 심정적 공감을 표하면서도 전통 가톨릭 단체에는 끝내 참여하지 않는 인사가 적지 않았다.[30] 제2차 세계대전 후 가톨릭 교회의 파문은 대부분 허락 없이 주교를 성성했을 때 받거나, 이에 참석하거나, (2000년부터 본격화된 ‘여성사제 서품 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 평신도가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을 경우에 취해졌다. 그래서 주교 성성 권한이 없는 평신도·수도자·평사제가 단지 교황을 비판하거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비판하는 발언을 한다고 파문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관한 비판과는 정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진보적 가톨릭 교회 신학자 한스 큉도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 시기 최고 교도권에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가톨릭 기관 내 교육 금지같은 다른 제재를 받았지) 파문 제재를 받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비가노 대주교가 프란치스코 교황 행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심지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인하는 발언을 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파문 제재를 받지 않았다.[31] 이건 SSPX도 비슷한 입장이긴 하다. 하지만 MCSPX나 교황공석주의자들은 “2000년간 가톨릭 교회가 수호해왔던 전통 교리를 변개한 처사였다”고 본다.[3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미완의 개혁’이었다고 보는 생각이 암암리에 있다.[33]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이 주장을 견지한다.[34] 전통의 살아있는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교회의 보편적 교도권과 로마 교황과 상반되는 전통의 개념은 불완전하고 모순된 것이다.[35] 2012년 8월 2일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자신 전집의 서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논하였는데, 여기서 교황은 공의회 문헌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우리 시대」(Nostra Aetate)의 특정 내용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였다. 교황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교황 선언의 일부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결함은 ‘연속성의 해석학’을 통해 개선될 수 없다는 것이다. Guest Op-Ed - Bishop Schneider: The interpretation of Vatican II and its connection with the current crisis of the Church[36] 역사 속에서도 공의회의 잘못된 선언을 교황이 바로잡은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피렌체 공의회는 성품성사의 질료가 성작과 성반을 수여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반면에 더 확실하고 지속적인 전통은 주교의 안수로 충분하다고 가르치고 있었고,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이 이를 바로잡았다.[37] Bishop Schneider: We shouldn’t reject Vatican II, but save what is ‘truly good’[38] Archbishop Viganò on Vatican II: “It Is Preferable to Let the Whole Thing Drop and Be Forgotten”[39] 훗날에 베네딕토 16세로 등극한다.[4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1964.11.21., 23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3판), AAS 57(1965), 27면 참조.[41] 요한 23세, 1962년 10월 11일 연설: “…… 공의회는 …… 가톨릭 교리를 바꾸거나 벗어나는 일 없이 전체를 온전하게 전달하고자 합니다. …… 그러나 우리 시대의 상황에서, 아무것도 빼지 않은 온전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새로운 열정으로, 차분하면서도 충실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 그리스도교 신앙과 가톨릭 신앙과 사도 신앙에 충실한 모든 이가 강렬하게 바라는 대로 바로 이 교리를 더욱 널리, 더욱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 마땅히 신앙으로 따라야 하는 이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교리는 우리 시대의 요구에 맞게 연구하고 설명하여야 합니다. 동일한 근본 의미와 내용만 유지된다면, 신앙의 유산 자체와 존엄한 교리에 담긴 진리들과, 그것을 알리는 방식은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도좌 관보』(Acta Apostolicae Sedis: AAS), 54(1962), 791-792.[42] 바오로 6세, 1963년 9월 29일 연설, AAS 55(1963), 847-852 참조.[43] 바오로 6세, 1964년 11월 21일 연설, AAS 56(1964), 1009-1010.[44]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동일성을 표명하고자 했다. 이는 ‘일치 교령’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1964년 9월 23일, 일치 교령 의안은 ‘보고서’(Relatio)와 함께 공의회 회의장에 제출되었다(「공의회 회의록」[Act Syn.\] III/II 296-344). 1964년 11월 10일, 그리스도인일치사무국은 그동안 주교들이 내놓은 제안들에 응답하였다(「공의회 회의록」 III/VII 11-49). 「수정안 심의」(Expensio modorum)에서 이 첫 번째 물음에 관련이 있는 네 부분을 여기에 인용한다.
가) [교령 의안 1항(서론)에서: 「공의회 회의록」 III/II 296, 3-6\] “Pag. 5, lin. 3-6: Videtur etiam Ecclesiam catholicam inter illas Communiones comprehendi, quod falsum esset. R(espondetur): Hic tantum factum, prout ab omnibus conspicitur, describendum est. Postea clare affirmatur solam Ecclesiam catholicam esse veram Ecclesiam Christi” (「공의회 회의록」 III/VII 12). 나) [제1장 전체에서: 「공의회 회의록」 III/II 297-301\] “4 - Expressius dicatur unam solam esse veram Ecclesiam Christi; hanc esse Catholicam Apostolicam Romanam; omnes debere inquirere, ut eam cognoscant et ingrediantur ad salutem obtinendam……. R(espondetur): In toto textu sufficienter effertur, quod postulatur. Ex altera parte non est tacendum etiam in aliis communitatibus christianis inveniri veritates revelatas et elementa ecclesialia”(「공의회 회의록」 III/VII 15). 같은 곳 pt. 5 참조. 다) [제1장 전체에서: 「공의희 회의록」 III/II 296s\] “5 - Clarius dicendum esset veram Ecclesiam esse solam Ecclesiam catholicam romanam……. R(espondetur): Textus supponit doctrinam in constitutione ‘De Ecclesia’ expositam, ut pag. 5, lin. 24-25 affirmatur” (「공의회 회의록」 III/VII 15). 따라서 ‘일치 교령’에 대한 답변들을 평가할 임무가 있는 본 위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동일성과 일치를 분명하게 표현하였고, ‘교회 헌장’에서 이 교리를 찾아볼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라) [교령 의안 2항에서: 「공의회 회의록」 III/II 297s\]
“Pag. 6, lin. 1-24: Clarius exprimatur unicitas Ecclesiae. Non sufficit inculcare, ut in textu fit, unitatem Ecclesiae.
R(espondetur): a) Ex toto textu clare apparet identificatio Ecclesiae Christi cum Ecclesia catholica, quamvis, ut oportet, efferantur elementa ecclesialia aliarum communitatum”.
“Pag. 7, lin. 5: Ecclesia a successoribus Apostolorum cum Petri successore capite gubernata (cf. novum textum ad pag. 6, lin. 33-34), explicite dicitur ‘unicus Dei grex’(하느님의 하나인 양 떼) et lin. 13 ‘una et unica Dei Ecclesia’(하느님의 이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 (「공의회 회의록」 III/VII).
인용된 두 표현은 ‘일치 교령’ 2항과 3항에 나온다.
[45] 바오로 6세, 1964년 9월 21일 연설, AAS 56(1964), 1010.[46] 대표적으로, 양심적 삶과 자연법에 합당한 삶을 살았던 불가항력적 비가톨릭 신자의 구원 가능성을 논하는 구절을 마치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고의적 냉담자나 배교자도, 타종파인과 타종교인도, 무신론자도 전부 다 구원받는 개방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식으로 철저히 왜곡하는 사람들이 강경 반가톨릭 개신교인들부터 일부 극렬 전통 가톨릭 교인들, 세속적 자유주의자들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이는 명백히 악의적인 왜곡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가톨릭은 공의회 이전이나 이후나 고의적인 불신자, 대죄인의 사후 지옥벌을 부정하지 않으며, 엄밀히 말해 공의회 선언의 해당 구절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유물이 아닌, 이전부터 교리로서 믿어져오던 것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