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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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투표 아이콘(흰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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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2017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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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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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
21대
2020년 4월 15일
22대
2024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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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7대 · 8대 · 9대 · 10대 · 11대 · 12대 · 13대 · 14대 · 15대 · 16대 · 17대 · 18대 · 19대 · 20대 · 21대 · 22대

전국동시지방선거
7회
2018년 6월 13일
8회
2022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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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 1956 · 1960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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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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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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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대 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와 병행하지 않고 이시영 부통령의 사임에 의해 별도로 시행한 보궐선거이므로 편의상 보궐선거로 분류함.
**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MBC 예측조사 영상[1]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6석
6석
4석
37.50%
37.50%
25.00%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국민신당(대한민국)|
파일: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무소속
]]

84석
74석
29석
1석
44석
36.20%
31.89%
12.50%
0.43%
18.96%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광역의회의원 선거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무소속|
무소속
]]

303석
253석
95석
39석
43.91%
36.67%
13.77%
5.65%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기초의회의원 선거
3,489석[2][3]



파일:2회지선광역의원.png
광역의회 선거 결과

1. 개요[편집]


1998년 6월 4일 치러진 대한민국전국동시지방선거.

투표율은 52.6%로 당시로서는 전국단위선거 중 최저치를 기록하였다. 이후 지방선거로서는 3회 지선에서 최저치를 갱신하였고 전국단위선거 전체로 치면 2008년 총선에서 최저치를 한번 더 갱신하였다.

이 시기는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던 시기이므로 여야의 승패를 분석해보려면 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를 합산해서 봐야 한다.[4]

1960년 지방선거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미 38.8%의 투표율을 기록하긴 했지만[5] 동시지방선거가 아니었고, 게다가 이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은 고작 취임 4개월 후에 5.16 군사정변으로 모두 직을 잃었다(...). 또 1960년 지방선거는 광역단체장만 38.8%였고, 나머지 선거 투표율은 70%를 넘나들었다. 심지어 읍면동장 선거에서도 투표율이 60%를 넘었다. 따라서 이 선거는 최저 투표율이라고 할 수 없고, 사상 최저투표율은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의 46.1%가 공인된 기록이다.

이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는 지방자치단체장 및 의원들의 임기가 현행과 같은 4년이 되었다. 애초에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임기가 3년이었던 것이 국회의원 선거와 격년으로 교차해서 치르기 위해[6][7] 첫 회에 한정한 임기였기 때문이다. #

또한 이 선거부터 원내 교섭단체 정당에 고유 기호가 배정되고, 해당되는 정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을 때에는 해당 기호를 건너뛰게 되었다. 당시 정당 고유 기호는 국회 의석 순에 따라 1번이 한나라당, 2번이 새정치국민회의, 3번이 자유민주연합이었고, 국민신당은 후보를 낼 경우 고정적으로 4번을 배정 받았지만 원내 교섭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민신당 후보가 없을 경우 기타 정당 및 무소속 후보의 기호는 4번부터 시작되었다.


2. 상세[편집]



SBS 출구조사 결과 발표 영상[8]
김대중 정부 임기 초반에 열린 허니문 선거[9][10]였고 실제로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은 연합공천[11][12]을 통해 광역단체장 16곳 중 10곳을 확보했고, 한나라당은 6곳(영남 5곳+강원도)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그야말로 집권한 DJP연합의 위력과시라고 볼 수 있는 선거였는데, 지도상으로는 동서가 갈렸지만 실상은 한나라당이 수도권을 포함한 서부벨트 전역을 넘겨준 것.

수도권은 여당이 석권했는데, 새정치국민회의가 서울 고건, 경기 임창열을 당선시켰고 자유민주연합이 인천에서 현역인 최기선 전 시장을 내세워 승리했다. 한나라당에서는 서울에 최병렬, 경기에 손학규, 인천에 안상수를 공천하여 DJ의 초반 실책을 견제해달라는 구호를 외쳤으나 여당이 나라를 망쳐놓은 한나라당이라는 구호 하나로 50%대의 득표에 힘입어 완승.

새정치국민회의 서울시장 후보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좀 있었는데 당초에는 DJ의 최측근이었던 한광옥, 그리고 DJ를 비판하며 통합민주당에 남았다가 대선 직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한 노무현 전 부총재의 경선이 유력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차기 대권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인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정치인을 앉혀서 집권 초기부터 차기 대권주자를 급부상시키는 그림을 원치 않았고 두 후보의 지지율도 필승 수준이 아니었다. 그 결과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 고건 후보가 공천되었다.[13][14] 여담으로 한광옥, 노무현 전 부총재는 서울시장의 꿈을 접은 대신 국회의원 재보선에 공천되어 당선되는 형태로 보상을 받았는데 노무현은 1998년 7.21 재보선 서울 종로에서 당선되어 마침내 6년 만의 국회 복귀에 성공했고, 한광옥은 이듬해인 1999년 3월 재보선 서울 구로 을에서 당선된 뒤 그 해 12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인천과 경기는 더 복잡하게 돌아갔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당초 새정치국민회의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김대중 역시 상도동계[15]인 최 전 시장을 영입함으로써 유용한 선거 구호로 활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대신 임창열 전 부총리가 자민련 공천을 받아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는 것으로 양 여당 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전 총재가 돌연 임창열을 받지 않고 최기선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진통을 겪은 끝에 최기선의 자유민주연합행 및 임창열의 새정치국민회의행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임 전 부총리는 1년전 대선 정국 당시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설이 있었던 터라 새정치국민회의행이 순탄했지만, 최 전 시장의 경우 이념이 안 맞는 당에 가려니 난처하다느니, 탈당한 명분이 퇴색되었다느니 식으로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16] 그러나 결과는 두 후보 다 당선. 서울과 마찬가지로 IMF 사태에 대한 한나라당의 책임론이 여당 견제론을 압도한 덕분이었다.

충청 전역은 자유민주연합의 득표가 70%를 넘겼으며, 특히 충남의 심대평충남지사는 84.6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내며 깔끔하게 재선에 성공했다. 한나라당은 충남과 충북에서 각각 15.36%, 25.85% 득표율에 그치며 크게 패했을 뿐 아니라 대전에서는 아예 후보조차 내지 못했다. 이재환국회의원이 공천을 신청했고, 당에서도 공천을 승인했으나, 이 분이 정작 공천이 확정된 후에 어익후 이거 선거 나가봤자 털리겠네염이라며 공천 신청을 철회한 것(...). 결국 한나라당은 호남도 아닌 대전에서도 후보를 내지 못하는 굴욕을 겪는다.

한나라당은 부산시장마저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한 무소속 김기재 후보(전 시장, 43.45% 득표)에게 넘겨줄뻔 했지만 투표율 저조와 막판 바람몰이로 간신히 부산시장 자리를 지켰다. 김 후보가 탈당하자 한나라당 측에서 경선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섭외해서 후보로 올려놓은 안상영 후보가 경선에서 문정수 전 시장을 덜컥 이겨버리는 바람에[17] 본선 경쟁력에 대해 의구심이 컸고, 당시 투표자 조사 결과에선 김기재가 근소한 차이로 1위로 나왔고 개표 초반 김기재 후보에게 부산시장 자리가 넘어갈 듯 했으나 중반을 넘어가면서 앞서 나가기 시작한 안상영 후보가 45.14%를 득표하며 20,926표 차(1.69%p)로 당선되었다.

재미있게도 새정치국민회의 하일민 후보의 득표율이 11.40%(14만표)에 달한 게 매우 컸다. 여권에서는 걍 후보를 내지 말고 김기재 후보를 지원하자는 얘기가 나왔으나, 오히려 역풍이 불어 한나라당 지지표의 결집이 우려되었고, 설령 김기재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한나라당으로 복당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산대학교 교수였던 하일민 후보를 공천한 것.[18] 그런데 생각보다 부산광역시에서 여당표가 많이 나오면서 결과적으로는 한나라당이 이기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 선거에서의 안상영 후보의 득표율 45.14%는 현재까지 부산시장 당선인 가운데서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강원도지사의 경우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갈등과 옛 민주자유당의 민주계 출신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넘어와 국민회의 간판으로 출마를 준비하다 연합공천에 반발하며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상룡 후보(전 고용노동부장관)의 표 갈라먹기로 한나라당에게 넘어갔다. (김진선 39.27%, 자민련 한호선 33.84%, 이상룡 26.87%) 덕분에 한나라당은 "영남당"의 수모는 씻고 체면치례는 했다. 국민회의의 세력이 약한 강원도에서 어느 한 쪽을 밀기도 난처했던 정부 여당의 행보가 낳은 결과. 영동표가 한나라당에 몰빵된 반면 영서표는 자유민주연합과 무소속에게 갈린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광역시로 승격된 울산광역시에서는 심완구울산시장이 힘겨운(!) 재선을 했다.[19] 새정치국민회의가 아무도 출마하지 않았는데도 무소속 송철호 후보가 무려 15만표(39.44%)에 육박하는 표를 얻어 심완구 후보의 16만표(42.74%)를 몰아세운 것. 물론 보수정당들인 자유민주연합과 국민신당이 출마하여 각각 7.91%, 9.89%를 득표해서 표 분열을 일으킨 탓이 컸지만, 거꾸로 말해 당시 연립 여당이던 자유민주연합이 반한나라당 기치를 내걸고 송철호 후보를 몰아줬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여담으로 통일민주당 출신이던 심완구 전 시장은 이후 무슨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1998년 9월, 최고위원을 지내던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가버렸고, 이후 7년 임기를 마치고 재출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지난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심완구 전 시장은 송철호 후보가 울산광역시 남구 을 선거구무소속으로 출마하자 선거운동을 지원해주기도 했고, 4년 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송 후보를 지원했다. 그리고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는 송철호 후보가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되었다.

포항시에서도 한나라당 정장식 후보가 여야 1:1 대결에서 51.48%로 당선되었으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되었던 자유민주연합 박기환 전 시장이 48.5%를 득표하는 등의 박빙승부(6천표 차)가 벌어졌다. 이 당시에 포항 지역의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이 1995년의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사태로 돌고 돌아 자유민주연합으로 입당했다. 박태준 전 회장이 자유민주연합에 있는 등 포항 지역의 당시 분위기가 자민련에 우호적이었던 영향도 있다. 지금 포항에서 이름 있는 민주당 인사들 중에 자민련 당적이 없었던 사람들이라곤 오중기, 유성찬 정도이다(...).

제주도의 경우 숙명의 라이벌 관계인 신구범 전 도지사와 우근민 전 관선지사가 동시에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경선에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결국 신구범 전 도지사가 경선 패배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우근민 후보에게 30.78% 대 52.76%로 낙선했다. 나머지는 한나라당 현임종 후보가 차지.

전북지사와 전남지사는 국민회의 후보가 단독 출마해서 당선되었는데, 이유는 직전 대선 호남 전역에서 한 자릿수 %대에 머무는 몰표 패배 여파로 한나라당에서 후보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효 득표율은 전라북도: 93.6%, 전라남도: 88.1%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은 광주광역시장 선거에도 후보를 내지 않았으며, 전직 신한국당 출신의 이승채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이변 없이 새정치국민회의 고재유 후보의 낙승으로 끝났다. 또한 광주광역시의 3개 구청장(서구, 북구, 동구)이 집권 여당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단독 출마로 당선되었다.

여담으로,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 약산면, 청산면은 지방선거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기초의원들이 전원 무투표 당선된 사례로 남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군 전체지역이 기초의원들을 제외하고 모두 무투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후에 경상북도지사가 되는 구미시장 김관용 후보도 단독 출마 당선(실득표 90.4%). 청도군, 고령군, 칠곡군도 단독 출마 당선이며, 흥미롭게도 문경시에서는 자유민주연합 김학문 후보가 단독 출마 당선되었다. 실득표 88.1%.

당시 이인제가 이끌던 국민신당은 논산시장에 당선된 전일순 후보를 제외한 전 후보가 낙선했다. 이 때문에 얼마 안 되어 국민신당은 당을 전격 해체했고, 이인제는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게 된다.

3. 개표 결과[편집]


광역자치단체장 개표 결과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6
6
4
서울
광주
경기
전북
전남
제주
부산
대구
울산
강원
경북
경남
인천
대전
충북
충남
고건
고재유
임창열
유종근
허경만
우근민
안상영
문희갑
심완구
김진선
이의근
김혁규
최기선
홍선기
이원종
심대평

3.1. 광역자치단체장[편집]



3.1.1. 서울특별시장[편집]


{+1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최병렬(崔秉烈)
1,512,854
2위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43.99%
낙선
2
고건(高建)
1,838,348
1위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53.46%
당선
4
이병호(李丙昊)
87,495
3위

[[무소속|
무소속
]]

2.54%
낙선

선거인 수
7,377,751
투표율
47.13%
투표 수
3,477,105
무효표 수
38,408

여담으로 최병렬 후보[20]와 고건 후보는 모두 관선 서울특별시장 출신으로, 이로 인해 전직 서울특별시장간의 대결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허니문 효과와 IMF 사태로 인한 한나라당 심판 열기에 힘입어 고건 후보가 서초구와 강남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3.1.2. 부산광역시장[편집]


{+1 [[파일:부산광역시 휘장(1995-2023)_White.svg}}} 부산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안상영(安相英)
558,909
1위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45.14%
당선
2
하일민(河一民)
141,172
3위

11.40%
낙선
4
김기재(金杞載)
537,983
2위

43.45%
낙선

선거인 수
2,699,499
투표율
46.66%
투표 수
1,259,477
무효표 수
21,413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최대의 격전지. 한나라당에서는 경선을 통해 관선 시장 출신 안상영이 현직 시장 문정수를 누르고 본선에 진출했고, 한나라당 소속이던 김기재 전 의원이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두 후보가 선두 경쟁을 벌였다.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는 김기재 후보가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안상영 후보가 1.69%p 차이로 신승을 거뒀고, 개표 중반까지 두 후보 간 표차가 한 자리 수까지 떨어지는 치열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여담으로 당시 정가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하일민 후보가 김기재 후보의 표를 일부 잠식하면서 김기재 후보의 낙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3.1.3. 대구광역시장[편집]


{+1 [[파일:대구광역시 휘장_White.svg}}} 대구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문희갑(文熹甲)
570,167
1위

71.98%
당선
3
이의익(李義翊)
163,653
2위

20.66%
낙선
4
유성환(兪成煥)
58,243
3위

7.35%
낙선

선거인 수
1,716,312
투표율
46.81%
투표 수
803,363
무효표 수
11,300

3년 전 무소속으로 당선된 문희갑 후보는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해 재선에 도전했고, 직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가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인 만큼 무난하게 재선에 성공했다. 반면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13석 중 8석을 쓸어담았던 자유민주연합은 이번에는 대구광역시에서 별 힘을 쓰지 못했다.

3.1.4. 인천광역시장[편집]


{+1 [[파일:인천광역시 휘장_White.svg}}} 인천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안상수(安相洙)
238,708
2위

34.04%
낙선
3
최기선(崔箕善)
375,051
1위

53.49%
당선
4
김용모(金容模)
87,327
3위

12.45%
낙선

선거인 수
1,659,977
투표율
43.18%
투표 수
716,923
무효표 수
15,837

3.1.5. 광주광역시장[편집]


{+1 [[파일:광주광역시 휘장(1987~2000).svg}}} 광주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2
고재유(高在維)
261,578
1위

67.20%
당선
4
이승채(李承采)
127,626
2위

32.79%
낙선

선거인 수
877,868
투표율
45.07%
투표 수
395,629
무효표 수
6,425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고재유
이승채
[[광주광역시|

전체
]]
261,578
(67.20%)

127,626
(32.79%)

395,629
(45.07%)

표차 +133,952
34.41%p ▷
[[동구(광주광역시)|

동구
]]
29,742
(64.06%)

16,684
(35.93%)

47,360[1]
(49.00%)
표차 +13,058
28.13%p ▷
[[서구(광주광역시)|

서구
]]
45,966
(66.84%)

22,803
(33.15%)
69,937
(43.53%)
표차 +23,163
33.69%p ▷
[[남구(광주광역시)|

남구
]]
50,624
(66.32%)

25,700
(33.67%)
77,558
(47.48%)
표차 +24,924
32.65%p ▷
[[북구(광주광역시)|

북구
]]
81,024
(64.77%)

42,125
(33.67%)
125,080[2]
(40.98%)[3]
표차 +38,899[4]
31.10%p ▷
[[광산구|

광산구
]]
54,222
(72.74%)

20,314
(27.25%)
75,694
(49.76%)[5]
표차 +33,908
45.49%p[6]


새정치국민회의 고재유 후보가 67.20%의 득표율로 당선되긴 했지만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비해 새정치국민회의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지고 보수 성향 후보인 무소속 이승채 후보에게 32.79%의 득표율을 내주었다.

3.1.6. 대전광역시장[편집]


{+1 [[파일:대전광역시 휘장_White.svg}}} 대전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3
홍선기(洪善基)
286,255
1위

73.68%
당선
4
송천영(宋千永)
70,414
2위

18.12%
낙선
5
조명현(曺明鉉)
31,796
3위

8.18%
낙선

선거인 수
888,968
투표율
44.44%
투표 수
395,124
무효표 수
6,659

3.1.7. 울산광역시장[편집]


{+1 [[파일:울산광역시 휘장_White.svg}}} 울산광역시장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심완구(沈完求)
160,491
1위

42.74%
당선
3
차화준(車和俊)
29,725
4위

7.91%
낙선
4
강정호(姜正昊)
37,139
3위

9.89%
낙선
5
송철호(宋哲鎬)
148,126
2위

39.44%
낙선

선거인 수
659,965
투표율
57.58%
투표 수
380,019
무효표 수
4,538

울산광역시가 생긴 뒤 처음으로 치러진 지방선거로 처음부터 접전이 나왔다. 송철호 후보가 북구, 동구에서 압도적인 몰표를 받으며 심완구 후보를 추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10,000여표 차이로 심완구 후보가 근소하게 이겼다.

3.1.8. 경기도지사[편집]


파일:경기도 휘장(1995-2005)_White.svg 경기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손학규(孫鶴圭)
1,303,340
2위

45.69%
낙선
2
임창열(林昌烈)
1,549,189
1위

54.30%
당선

선거인 수
5,800,425
투표율
49.99%
투표 수
2,900,202
무효표 수
47,673

[경기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보기]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시군구별 개표 결과
정당


투표 수
(투표율)

후보
손학규
임창열
[[경기도|

전체
]]
1,303,340
(45.69%)

1,549,189
(54.30%)

2,900,202
(49.99%)
표차 +245,849
◁ 8.61%p
[[장안구|

수원시 장안구
]]
38,713
(47.06%)
43,536
(52.93%)

83,587
(46.93%)
표차 +4,823
◁ 5.87%p
[[권선구|

수원시 권선구
]]
40,442
(46.22%)
47,052
(53.77%)

89,106
(46.34%)
표차 +6,610
◁ 7.55%p
[[팔달구|

수원시 팔달구
]]
39,022
(48.97%)
40,661
(51.02%)

80,738
(44.03%)[1]
표차 +1,639
◁ 2.05%p
[[수정구|

성남시 수정구
]]
34,284
(38.38%)
55,040
(61.61%)

90,928
(49.76%)
표차 +20,756
◁ 23.23%p
[[중원구|

성남시 중원구
]]
35,211
(37.81%)
57,913
(62.18%)

94,722
(49.65%)
표차 +22,702
24.37%p[2]
[[분당구|

성남시 분당구
]]
71,273
(53.61%)

61,660
(46.38%)
134,304
(52.02%)
표차 -9,613[3]
7.23%p[4]
[[의정부시|

의정부시
]]
44,780
(44.63%)
55,540
(55.36%)

101,865
(47.55%)
표차 +10,760
◁ 10.73%p
[[만안구|

안양시 만안구
]]
36,659
(44.23%)
46,222
(55.76%)

83,976
(47.62%)
표차 +9,563
◁ 11.53%p
[[동안구|

안양시 동안구
]]
52,419
(48.16%)
56,402
(51.83%)

109,939
(49.71%)
표차 +3,983
◁ 3.67%p
[[원미구|

부천시 원미구
]]
47,488
(41.50%)
66,940
(58.49%)

115,840
(44.72%)
표차 +19,452
◁ 16.99%p
[[소사구|

부천시 소사구
]]
27,136
(42.89%)
36,128
(57.10%)

64,119
(45.64%)
표차 +8,992
◁ 14.21%p
[[오정구|

부천시 오정구
]]
20,588
(38.28%)
33,181
(61.71%)

54,584
(44.23%)
표차 +12,593
◁ 23.43%p
[[광명시|

광명시
]]
52,342
(46.39%)
60,473
(53.60%)

114,022
(48.74%)
표차 +8,131
◁ 7.21%p
[[평택시|

평택시
]]
51,358
(43.44%)
66,848
(56.55%)

120,914
(50.84%)
표차 +15,490
◁ 13.11%p
[[동두천시|

동두천시
]]
14,701
(47.64%)
16,152
(52.35%)

31,561
(60.17%)
표차 +1,451
◁ 4.71%p
[[양주시|

양주군
]]
17,552
(45.80%)
20,768
(54.19%)

39,126
(56.10%)
표차 +3,216
◁ 8.39%p
[[안산시|

안산시
]]
65,166
(42.49%)
88,198
(57.50%)

155,835[5]
(44.10%)
표차 +23,032[6]
◁ 15.01%p
[[덕양구|

고양시 덕양구
]]
48,895
(46.36%)
56,569
(53.63%)

106,806
(44.74%)
표차 +7,674
◁ 7.27%p
[[일산구|

고양시 일산구
]]
57,526
(50.19%)

57,077
(49.80%)
115,892
(45.30%)
표차 -449
0.39%p ▷
[[과천시|

과천시
]]
14,036
(52.12%)

12,889
(47.87%)
27,338
(56.20%)
표차 -1,147
4.25%p ▷
[[의왕시|

의왕시
]]
17,749
(45.36%)
21,372
(54.63%)

39,655
(52.00%)
표차 +3,623
◁ 9.27%p
[[구리시|

구리시
]]
25,333
(47.36%)
28,146
(52.63%)

54,245
(48.74%)
표차 +2,813
◁ 5.27%p
[[남양주시|

남양주시
]]
38,313
(43.08%)
50,612
(56.91%)

90,402
(45.58%)
표차 +12,299
◁ 13.83%p
[[오산시|

오산시
]]
12,176
(42.27%)
16,623
(57.72%)

29,437
(58.60%)
표차 +4,447
◁ 15.45%p
[[화성시|

화성군
]]
31,306
(42.49%)
42,359
(57.50%)

75,326
(59.62%)
표차 +11,053
◁ 15.01%p
[[시흥시|

시흥시
]]
30,089
(43.49%)
39,093
(56.50%)

70,206
(46.15%)
표차 +9,004
◁ 13.01%p
[[군포시|

군포시
]]
40,709
(47.00%)
45,904
(52.99%)

87,683
(49.83%)
표차 +5,195
◁ 5.99%p
[[하남시|

하남시
]]
20,753
(47.41%)
23,018
(52.58%)

44,386
(51.68%)
표차 +2,265
◁ 5.17%p
[[광주시|

광주군
]]
17,646
(44.11%)
22,354
(55.88%)

40,871
(53.42%)
표차 +4,708
◁ 11.77%p
[[여주시|

여주군
]]
19,026
(46.40%)
21,971
(53.59%)

42,111
(59.29%)
표차 +2,945
◁ 7.19%p
[[파주시|

파주시
]]
35,802
(50.72%)

34,784
(49.27%)
72,161
(56.80%)
표차 -1,018
1.45%p ▷
[[포천시|

포천군
]]
31,161
(52.98%)

27,647
(47.01%)
60,483
(60.92%)
표차 -3,514
5.97%p ▷
[[연천군|

연천군
]]
12,386
(47.58%)
13,642
(52.41%)

26,634[7]
(67.26%)
표차 +1,256
◁ 4.83%p
[[양평군|

양평군
]]
20,038
(50.82%)

19,391
(49.17%)
40,574
(68.20%)
표차 -647
1.65%p ▷
[[가평군|

가평군
]]
12,526
(43.79%)
16,074
(56.20%)

29,239
(71.21%)[8]
표차 +3,548
◁ 12.41%p
[[이천시|

이천시
]]
28,093
(45.76%)
33,289
(54.23%)

62,775
(53.37%)
표차 +5,196
◁ 8.47%p
[[용인시|

용인시
]]
52,585
(47.65%)
57,761
(52.34%)

112,338
(54.94%)
표차 +5,176
◁ 4.69%p
[[안성시|

안성시
]]
26,185
(45.52%)
31,336
(54.47%)

59,067
(64.52%)
표차 +5,151
◁ 8.95%p
[[김포시|

김포시
]]
21,873
(47.10%)
24,564
(52.89%)

47,407
(54.96%)
표차 +2,691
◁ 5.79%p


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0일만에 열린 허니문 선거였다. 야당이 된 한나라당에서는 문민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던 광명시 을 국회의원 손학규를 차출해 정권 견제론을 호소한 반면, 여당 새정치국민회의는 이전 정부 마지막 경제부총리로서 IMF 위기 당시 구제금융 협상을 주도했던 임창열을 영입해 국정 안정론을 전면에 내세웠다.[21]

선거 기간 도중 본래 연립 여당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할 예정이던 임창열 전 부총리가 김종필자유민주연합 총재의 반발로 새정치국민회의에 대신 입당하게 되었고, 한나라당은 임창열 전 부총리의 IMF 책임론을 강력하게 제시하는 등 잡음과 진통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문민정부와 한나라당을 경제 환란의 원인으로 보아 심판하자는 여론이 더 강했던 데다가 대통령 취임 초기의 허니문 효과까지 더해져 임창열 후보는 손학규 후보를 꺾고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이로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경기도지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민주당이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당선되기까지는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3.1.9. 강원도지사[편집]


{+1 [[파일:강원도 휘장_White.svg}}} 강원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진선(金振兟)
268,559
1위

39.27%
당선
3
한호선(韓灝鮮)
231,376
2위

33.84%
낙선
4
이상룡(李相龍)
183,775
3위

26.87%
낙선

선거인 수
1,087,113
투표율
64.27%
투표 수
698,705
무효표 수
14,995

3년 전보다 한나라당에 더 불리한 정국에서 치루어진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3년 전의 참패를 설욕하며 영남권 이외에 유일하게 광역자치단체장을 배출했다.

이러한 결과는 공동 여권 후보 단일화가 사실상 무산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자유민주연합 한호선 후보가 여권 단일 후보로 내정된 것에 반발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이상룡 전 노동부장관[22]이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감행하면서 영서 지역 표심이 둘로 갈라졌고, 그로 인하여 김진선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이 되었다.

3.1.10. 충청북도지사[편집]


{+1 [[파일:충청북도 휘장(1998-2023)_White.svg}}} 충청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주병덕(朱炳德)
157,459
2위

25.85%
낙선
3
이원종(李元鍾)
451,533
1위

74.14%
당선

선거인 수
1,025,022
투표율
60.91%
투표 수
624,298
무효표 수
15,306

3.1.11. 충청남도지사[편집]


{+1 [[파일:충청남도 휘장(1998-2012)_white.svg}}} 충청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한청수(韓淸洙)
119,216
2위

15.36%
낙선
3
심대평(沈大平)
656,795
1위

84.63%
당선

선거인 수
1,343,633
투표율
59.49%
투표 수
799,314
무효표 수
23,303


3.1.12. 전라북도지사[편집]


{+1 [[파일:전라북도 휘장(1997-2009)_White.svg}}} 전라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2
유종근(柳鍾根)
758,141
1위[주의]

100%
당선

선거인 수
1,400,419
투표율
57.78%
투표 수
809,167
무효표 수
51,026

3.1.13. 전라남도지사[편집]


{+1 [[파일:전라남도 휘장(~2000)_white.png}}} 전라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2
허경만(許京萬)
918,300
1위[주의]

100%
당선

선거인 수
1,527,489
투표율
68.22%
투표 수
1,042,005
무효표 수
123,705

3.1.14. 경상북도지사[편집]


{+1 [[파일:경상북도 휘장_White.svg}}} 경상북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이의근(李義根)
911,728
1위

71.96%
당선
3
이판석(李判石)
355,149
2위

28.03%
낙선

선거인 수
1,999,195
투표율
64.88%
투표 수
1,297,091
무효표 수
30,214

3.1.15. 경상남도지사[편집]


{+1 [[파일:경상남도 도기(1974-1999).svg}}} 경상남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김혁규(金爀珪)
939,358
1위

74.64%
당선
2
강신화(姜信和)
161,703
2위

12.84%
낙선
4
허문도(許文道)
157,337
3위

12.50%
낙선

선거인 수
2,109,058
투표율
61.08%
투표 수
1,288,171
무효표 수
29,773

3.1.16. 제주도지사[편집]


{+1 [[파일:제주도기(1966-2009).svg}}} 제주도지사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1
현임종(玄林鍾)
43,559
3위

16.45%
낙선
2
우근민(禹瑾敏)
139,695
1위

52.76%
당선
4
신구범(愼久範)
81,491
2위

30.78%
낙선

선거인 수
365,121
투표율
73.67%
투표 수
268,984
무효표 수
4,239

3.2. 정당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득표율[편집]


정당별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득표율
정당
득표수
당선인
득표율

6,784,348
6명
40.6%

5,768,126
6명
34.52%

2,549,537
4명
15.26%

1,355,629
-
8.11%

253,123
-
1.51%
선거인 수
32,537,815
투표율
52.73%
투표 수
17,155,577
무효표 수
444,814

3.3. 기초자치단체장[편집]




3.4. 광역의원[편집]


제5대 서울특별시의회
(총 재적 104석)




83석
20석
1석

제3대 부산광역시의회
(총 재적 49석)




46석
2석
1석

제3대 대구광역시의회
(총 재적 29석)



28석
1석

제3대 인천광역시의회
(총 재적 29석)





21석
5석
2석
1석

제3대 광주광역시의회
(총 재적 17석)



16석
1석

제3대 대전광역시의회
(총 재적 17석)



16석
1석

제2대 울산광역시의회
(총 재적 17석)




11석
1석
5석

제5대 경기도의회
(총 재적 97석)




66석
21석
10석

제5대 강원도의회
(총 재적 47석)





23석
14석
4석
6석

제6대 충청북도의회
(총 재적 27석)




19석
4석
4석

제6대 충청남도의회
(총 재적 36석)




32석
3석
1석

제6대 전라북도의회
(총 재적 38석)





34석
1석
1석
2석

제6대 전라남도의회
(총 재적 55석)





45석
2석
1석
7석

제6대 경상북도의회
(총 재적 60석)





48석
6석
1석
5석

제6대 경상남도의회
(총 재적 51석)




44석
2석
5석

제6대 제주도의회
(총 재적 17석)




10석
4석
3석

4. 개표 방송[편집]



당시 SBS 개표 방송. 방송시간은 밤 12시 너머로 추정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이 당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던 선거임을 미리 예견했는지 몰라도, MBCSBS는 무성의한 개표 방송 편성으로 욕을 먹었다. 특히 MBC는 개표가 시작할 즈음인 저녁 7시에 당시 잠실에서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 축구 대표팀의 출정식 경기인 중국과의 평가전을 생중계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당시 축구협회에서는 개표 방송을 의식해서 경기를 오후 3시로 당겨 여는거 어떻겠냐고 제안했으나, MBC에서 거부를 때렸다고.


5. 여담[편집]


아직까지는 이 지방선거에서만 당선된 광역단체장들 중 4년 임기 끝까지 사퇴나 사망, 실형선고 등의 궐위 등이 없었다.[23][24] 다만 임창열 경기지사가 임기 중 실형 선고로 구속되었지만 지사직을 끝까지 유지하여 궐위는 발생하지 않았다.[25][26]

부산광역시 금정구의회 부곡제1동 선거구에서는 어떠한 후보도 입후보하지 않아 당선자가 없었다. 이 때의 당선자는 1998년 11월 재보궐선거를 통해 선출하였다.[27]

경기도 용인시의회 원삼면 선거구에서 이우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1] MBC의 경우 부산시장 선거만 유일하게 예측조사 결과와 실제 당선인이 다르게 나왔다.[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회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3] 본래 3,490석을 선출할 예정이었으나 1석이 미선출되어 3,489석을 선출했다.[4] 두 정당 모두 공동여당이다.[5] 투표날에 한파가 밀어닥친게 원인이라고 한다.[6] 쉽게 말하면 1994년부터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을 짝수 해마다 격년으로 교차해서 치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계올림픽이 열리는 해(연도의 숫자가 4의 배수인 해)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고, 동계올림픽(+FIFA 월드컵, 하계 아시안 게임)이 열리는 해에는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린다.[7] 단, 대한민국에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던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인해 2020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되어 2021년에 개최되었다.[8] SBS는 경합지역의 경우 최소 득표율과 최대 득표율을 표시했다.[9] 정권 취임 극초기에 열려서 대선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어 표심에 작용한 선거를 일컫는 정치용어.[10] 이 당시 선거일이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 100일째였다.[11] 양당이 16곳의 광역단체장 후보를 정확히 8곳씩 나누어 공천했다. 새정치국민회의가 서울, 부산, 광주, 경기, 전남/전북, 경남, 제주에 후보를 냈고 자민련이 대구, 인천, 대전, 울산, 강원, 충남/충북, 경북에 후보를 냈다.[12] 정확히는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만 연합공천이 이루어졌다. 기초단체장 및 광역의회의원 선거에서는 연합공천이 무산되어 국민회의 후보와 자유민주연합 후보가 동시에 출마한 곳이 상당수 있었다.[13] 이 때 두 당사자는 극명히 엇갈리면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DJ의 가신 한광옥은 매우 격하게 반발한 반면 김대중에게 매우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던 노무현은 덤덤하게 출마를 포기한 것.[14] 노무현과 김대중이 가까워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서울특별시장 경선이 무산된 뒤 당직자들과의 회의 때 "정치는 노무현 부총재처럼 해야 한다."는 말을 했으며, 이후 해양수산부장관에도 임명하는 등 훗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작은 씨앗을 심어주게 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 수용으로 노무현이 DJ의 등에 칼을 제대로 꽂아 그 충격으로 DJ가 신장투석을 받는 일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후광을 간절히 바라던 새천년민주당을 외면하고 사실상 열린우리당에 힘을 실어주면서 사실상 노무현을 계속 지지해줬다. 그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전남에서 간신히 5석을 얻었고 광주와 전북은 죄다 열린우리당에 넘어갔다. 이후 노무현의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심정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아이러니하게도 한광옥은 2012년 이후 새누리당으로 넘어가는 것도 모자라 박근혜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다.[15] 원래 최기선은 정계 입문 당시 김대중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부인의 권유로 김영삼계 정치인이 되었다.[16] 결국 다음 지선을 앞두고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했으며, 게다가 불법자금 수수 논란까지 겪는 바람에 3선 도전을 포기한다. 이후에는 다다음 지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인천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여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5회 지선6회 지선에서는 송영길 후보를 적극 지원하는 등 민주당 계열과 계속해서 인연을 맺었다.[17] 문정수 전 시장이 한보 사태 관련해서 비리 혐의가 얽혀 있었던 게 치명타였다.[18]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이후 김기재 후보는 정식으로 국민회의에 입당하여 행정자치부장관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의원 및 최고위원을 지내게 된다. 2002년 대선 때는 이인제 캠프에 참여하여 상대편인 노무현 후보를 사사건건 흔들었으나, 이후 후보 단일화가 성사되자 부산 지역 선대본부장을 맡아 노무현을 적극 지원한다.[19] 3년 전인 1995년 선거에서 여권 후보 3강 구도(심완구, 고원준, 김명규)에서도 30% : 22%로 민주당 이규정 후보를 여유롭게 꺾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반전이었다.[20] 서울특별시 서초구 갑의 제15대 국회의원이었지만 서울특별시장 선거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21]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는 서울특별시장 후보로도 문민정부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를 선출했다. 사상 첫 정권교체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중도층에 호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전 정부 각료들을 영입한 셈. 선거 결과를 보면 국민들 역시 고건과 임창열에 대해 철새라 불신하기보다는 안정적인 관료 출신 단체장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22]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바 있다.[주의] A B 지금과는 공직선거법이 달랐기 때문에 자치단체장은 단독 출마라도 무투표 당선 될 수 없었다. 당시 공직선거법 제191조 2항에 따르면 단독 출마일 경우 득표수가 투표자 총수의 3분의 1이상에 달하여야 당선인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2010년 1월 25일 삭제되었다.[23] 민선 8기는 아직 없지만, 아직 1년차이기 때문에 조금 더 지켜봐야 할것 같다.[24] 궐위된 사례는 지금까지 이렇게 있었다. 1기-조순(서울), 이인제(경기)(둘다 15대 대선 출마로 사퇴), 3기-김혁규(경남, 17대 총선 출마로 사퇴), 안상영(부산), 박태영(전남)(둘다 사망), 우근민(제주, 허위사실 유포로 실형선고), 심대평(충남), 김태환(제주)(둘다 사퇴), 4기-이완구(충남, 세종시 수정안 반발로 사퇴), 5기-이광재(강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실형선고), 오세훈(서울, 서울시 무상급식 반대로 사퇴), 김두관(경남, 18대 대선 출마로 사퇴), 박맹우(울산, 사퇴), 6기-홍준표(경남, 19대 대선 출마로 사퇴), 이낙연(전남, 국무총리 내정으로 사퇴), 권선택(대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실형선고), 안희정(충남, 성폭력 문제로 사퇴), 7기-오거돈(부산, 성폭력 문제로 사퇴), 박원순(서울, 사망), 김경수(경남, 드루킹 사건으로 실형선고), 이재명(경기), 원희룡(제주)(둘다 20대 대선 출마로 사퇴). 2기만 유일하게 없다.[25] 당시 임창열 지사는 수감 중에도 옥중에서 대리결재를 하여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26] 20년 뒤인 민선 7기 때에도 김경수 경남지사가 임기 초반 구속되어 수감되었으나. 이때는 김경수 지사가 보석될 때까지 행정부지사 직무대행 체제로 도정을 운영하였다.[27]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