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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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코트
스노렛츠 ·

주경기장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 ·

패럴림픽
1998 나가노 동계패럴림픽 ·

개회 선언자
아키히토 ·

성화 점화자
이토 미도리
自然との共存
Coexistence with the Nature
자연과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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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제18회 동계올림픽 경기대회
第十八回オリンピック冬季競技大会
XVIII Olympic Winter Games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1998年長野オリンピック
Olympic Winter Games Nagano 1998

파일: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로고.svg
파일:external/img.yle.fi/1998_nagano_poster.jpg
대회기간
1998년 2월 7일 ~ 2월 22일
개최국
일본/나가노
슬로건
自然との共存
Coexistence with the Nature

(자연과의 공존)
마스코트
스노렛츠[1]
주제가
明日こそ、子供たちが…When Children Rule the World
참가국
73개국
참가선수
2,176명
(남자: 1,389명, 여자: 787명)
경기종목
14개 종목, 68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아키히토
일본 천황
선수 선서
오기와라 겐지
노르딕 복합
심판 선서
히라마츠 준코
피겨 스케이팅
성화점화
이토 미도리
개·폐회식장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2]

1. 개요
2. 유치
3. 경기 종목
4. 메달 집계
5. 후일담 및 이모저모



1. 개요[편집]


1998년 2월 7일부터 2월 22일까지 일본 나가노현 나가노시에서 개최된 18회 동계올림픽.

20세기에 열린 마지막 동계올림픽이다. 역대 동계올림픽 중 가장 남쪽(북위 36 ° 34')에서 열렸다.[3]

2. 유치[편집]


1991년 영국 버밍엄에서 있었던 IOC 총회 투표에서 미국솔트레이크시티와 4차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끝에 개최권을 가져오게 되었다. 물론 다들 아는대로 솔트레이크 시티는 다음 대회인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지만.[4]

당시 1차투표에서 이탈리아의 아오스타와 함께 4위였던 솔트레이크시티는 깜짝 2위를 한 스페인하카에 이어, 5수에 나선 스웨덴의 외스테르순드(Östersund)까지 가볍게 밀어내며 마지막 결선에서 46:42까지 따라 붙었다. 일본으로서는 그야말로 진땀 끝에 유치해낸 대회였던 셈.
1998년 올림픽 유치 투표 과정
국가
도시
1차투표
동점자투표
2차투표
3차투표
결선투표
결과
일본
나가노
21

30
36
46
유치 선정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15
59
27
29
42
탈락
스웨덴
외스테르순드
18

25
23

탈락
스페인
하카
19

5


탈락
이탈리아
아오스타
15
29



탈락

3. 경기 종목[편집]




4. 메달 집계[편집]


■ 1998 18회 나가노 동계올림픽 (1998 Winter Nagano Olympics)

파일:대한민국동계올림픽성적20.png


4.1.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성적[편집]


당시 쇼트트랙 A파이널 경기가 오후 9시대에 열렸기 때문에 KBS와 MBC는 자사의 메인 뉴스 시간에 나가노 현지를 연결하여 쇼트트랙 중계를 했다.


대한민국은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종합 9위의 성적을 거뒀다.

5. 후일담 및 이모저모[편집]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막식 장면이다. 이 개막식은 이후의 올림픽에서 화려하게 개막식을 연출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면서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거의 금지영상 같은 흑역사 취급을 받고 있다. 일본의 전통문화와 현대 문명의 조화라는 컨셉 자체는 괜찮았지만, 막상 개막식에서 어설퍼보이게 연출한데다가 올림픽에 거액의 예산이 책정된 것과 걸맞지 않게[5] 초라했던 것도 원인이다. 그래서 일본 내 주요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올림픽이 열릴때마다 이 개막식이 언급되면서 까이곤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3년 뒤, 이보다도 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물나오고 말았다. 개막식이 낮에 열린 마지막 올림픽 대회이기도 하다.[6] 폐막식 역시 퍼포먼스에서 싼티가 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축제분위기는 제대로 낸 편이었다. 때문에 축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기괴한 곡소리만 가득했던 도쿄의 폐막식 이후 재평가받는 중.
  • 북한이 6년만에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 케냐, 북마케도니아, 우루과이, 베네수엘라가 처음으로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였다.
  • 이 대회에서 비에른 델리(Bjørn Dæhlie, 노르웨이)는 크로스 컨트리에서 3개의 메달을 추가로 획득하여 역대 메달개수가 금 8개, 은 4개로 총 12개가 되어서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의 주인공이 된다. 이 기록은 2013년까지 깨지지 않고 있었으나, 이 대회에서 처음 금메달을 따낸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애슬론 선수이자 이름도 거의 비슷한 비에른달렌(Ole Bjørndalen)이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더 따며 총 13개로(금8 은4 동1) 최다 메달의 타이틀이 옮겨갔다.
  • 컬링이 1924년 이후 다시 정식종목이 되었으며, 스노보드(남녀 하프파이프/대회전)가 정식종목으로 추가되었다. 아이스하키의 여자부도 이 대회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
  • NHL의 적극적인 협조가 돋보이는데, 올림픽 시즌 동안은 정규 시즌을 잠시 중단하였고, 그 덕분에 NHL선수들이 참가가 가능해져서 대회의 질이 상승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각국이 NHL 스타를 대거 투입했는데, 정작 우승은 NHL 스타가 상대적으로 적은 체코가 우승했다.[7] 물론, 그 적은 스타 중에서 하키에서 가장 중요한 보직인 골리(골텐더)를 맡은 '도미네이터' 도미닉 하섹#이 미친듯이 활약했다는 점은 체코 우승에서 가장 큰 요인이었다. [8] 사실, 체코팀은 수비는 좋았지만 Jaromír가 중심이 된 공격진들의 득점력은 당시 상당히 빈곤한 편이었다. 한편, NHL의 본산 미국 팀이 토너먼트 1라운드 '광탈' 당한 것도 이색적이다. NHL 올림픽 브레이크의 최대 수혜자가 될 듯한 미국 팀이었지만, 예선리그부터 영 좋지않은 기량을 보이더니만,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이 '체코'와 격돌해 1대 4로 역전패했다. 이후로도 NHL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지만 미국은 그 이후로도 좀처럼 우승을 못하고 있다. 그나마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있는 솔트레이크와 밴쿠버에서만 좀 활약했을 뿐. 뭐 Big 7의 말석인데 뭘 더 바라겠어?
여담으로 아이스하키컬링을 제외한다면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관중 동원을 담당하는 거의 유일한 구기종목 팀스포츠이다.
  • 피겨 스케이팅에서 미국의 15세 타라 리핀스키는 이 대회에서 당시 랭크 1위였던 미셸 콴을 누름으로서 동계 올림픽 한정으로 일시적인 콩라인으로 분류되는 미셸 콴을[9] 2등 자리로 보내버리는데 일조를 하였다.
  • 타라 리핀스키는 15살 257일이란 나이로, 사실상 불멸로 남을 올림픽 여자 싱글 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다만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가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율리아 리프니츠카야가 15살 249일의 나이로, 가장 어린 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다만 리프니츠카야의 기록은 단체전 성적이며, 앞으로도 여자 싱글에서 리핀스키의 최연소 기록이 깨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한편 프랑스의 흑인 스케이터 수리야 보날리는 피겨계의 뿌리깊은 인종 차별[10]로 인해 늘 자신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차원에서, ISU공인대회에서는 금지된 기술인 백플립을 선보여 공개적으로 심사위원을 능욕했다. 이 대회는 그녀의 은퇴 무대였으며 직후 그녀는 프로로 전향, 아이스 쇼들을 돌며 백플립을 선보이고 있다.

3분 40초 주목.
  • 일본은 이 올림픽 유치를 위해 호쿠리쿠 신칸센을 계획 및 착공하였고[11], 1997년 10월 1일에 이 대회가 열리는 나가노까지 개통을 시켰다. 그리고 20년 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이 노선의 형제가 생기게 되었지.
  • 이 대회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스키점프 선수들의 이야기는 훗날 영화 국가대표의 모티브가 되었다.
  • 개최국 일본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등에 업고 금 5개, 은 1개, 동 4개로 종합 7위를 마크했다. 스피드 스케이팅이나 프리스타일 스키에서 약진도 돋보였지만 이 메달의 반은 스키점프에서 나온 것(금 2개, 은 1개, 동 1개)이라서 스키점프계의 다크호스로 급 부상 그러나 한국 대표팀들은...하는듯 했으나 결국 스키 길이에서 제재[12]를 받으면서 이후의 대회에서는 성적이 신통치 못하다.
  • 그나마 가능성이 보였던 스피드 스케이팅도 500m에서 금메달을 딴 시미즈 히로야스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는데 실패해서[13]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때는 은1개, 동1개만 땄으며[14]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는 피겨 스케이팅에서 딴 1개의 메달(금)이 유일한 메달이 될 정도로 쇠락해졌다. 홈경기 버프를 너무 심하게 받은 결과물
  •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종합 9위에 랭크되었다. 하지만 메달은 전부 쇼트트랙에서만 나왔다. 김동성전이경의 합작품. 이 때 전이경이 500m에서 딴 동메달은 결승전에서 선수 한 명이 실격되고 또 다른 선수가 레이스를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바람에 결승전에서 동메달을 받을 선수가 나오지 않아, 순위결정전에서 1위로 들어온 전이경이 동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 한국은 이 올림픽에 큰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에 있던 제갈성렬, 김윤만, 이규혁이 1990년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스피드 스케이팅 팀이 뭔가 일을 내서 쇼트트랙 편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갈성렬과 김윤만은 지는 해였고 이 때 이규혁은 아직 루키 수준이었다. 너무나 과도하게 쏟아진 관심을 자기가 극복하지 못 하고 무너졌던 셈.
  • 스노보드 남자 대회전 금메달리스트였으며 눈사태로 사망한 친구에게 금메달을 바친다는 인터뷰로 화제가 되었던 캐나다의 로스 리버글리애티도핑 적발로 금메달을 박탈당할 뻔한 적이 있다. 당초 금메달 박탈 결정까지 갔던 도핑 적발 사유는 대마초 양성반응.[15] 당연히 선수 본인과 캐나다 선수단은 대마초가 금지약물로 명시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CAS에 항소를 했고, CAS 또한 국제스키연맹과 IOC의 관련 규정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선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리버글리애티는 금메달을 가지고 귀국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한방을 먹은 뒤에 IOC는 대마초 또한 금지약물 리스트에 추가를 하기에 이른다.
  • 미국1994 릴레함메르와 같이 금메달 6개를 획득했으나 은메달, 동메달 성적이 부진해 1994 릴레함메르와 같이 1992 알베르빌에서 획득한 합계 11개 이후 최저 점수이다.[16]
  • 아시아 최초로 장애인 경기가 개최되었다.
  • 삼성전자에서 NEC N206의 OEM버전을 출시한적이 있다.
[1] 스키, 노키, 레키, 츠키의 앞글자[2] 2000년부터 야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3] 바로 직전 4년 전의 올림픽인 릴레함메르 올림픽이 가장 북쪽에서 올린 올림픽(61° 06' 53”, 동하계 포함)이었다.[4] 만일 1998 동계올림픽이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개최되었더라면 1998 동계올림픽 및 2002 동계올림픽 대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2002 동계올림픽 유치 현황으로 보아 핀란드스웨덴에서 개최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영문판 1998 동계올림픽 유치 현황 위키백과 문서영문판 2002 동계올림픽 유치 현황 위키백과 문서 참조.[5] 올림픽에 들인 예산 대다수는 신칸센이나 경기장 등 인프라 건설예산이기는 했고, 운영비용 자체는 그렇게까지 많이 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건설에다 지나치게 돈이 많이 들었던 것에 비해 수요가 없어서 사후 관리예산 때문에 여러모로 애를 먹고 있는 중이다. 떠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부채의 일부로써 취급되고 있으며 20년간 상당부분을 겨우 갚았는데 2020 도쿄 올림픽이 혹평을 받아버리는 바람에 일본의 경제가 부흥하기는 커녕 불황이 부활하여 레이와 시대에도 헤이세이 불황이 지속되는 것 아니냐는 평이 있었다.[6] 하계대회는 1988 서울 올림픽이 마지막이다.[7] 체코는 아이스하키의 세계구급 국가대표팀인 'Big 7' 중 하나로 명문팀이다. 실속만으로 본다면 NHL선수들이 즐비한 미국 이상이며 실제로도 예선 2위로 올라간 8강에서 반대편조 3위인 미국상대로 4-1로 완승을 거두었다.[8] 당장 당시 경기하이라이트를 보면 결정적인 찬스 횟수 자체는 양팀이 비슷했는데 체코는 그 위기를 하섹의 선방으로 틀어막았기 때문에 스코어가 다소 일방적이 된 것.[9] 미셸 콴은 지독히도 올림픽이랑은 인연이 없어서 올림픽에선 항상 콩라인이 된다. 자세한건 그녀의 항목 참조.[10] 그녀의 낮은 점수가 꼭 인종 차별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물론 없다고 할 순 없지만 체조 선수 출신답게 탄력이 좋았으나, 표현력과 스케이팅 스킬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은, 1994 세계선수권에서 사토 유카가 홈 그라운드빨로 받은 세계선수권 금메달의 원래 주인은 보날리여야 했다는 것이다.[11] 착공 자체는 선정되기 전인 1990년에 개시했고 이 당시에는 나가노 신칸센이라 불렀다.[12] 스키의 길이는 선수 몸의 1과 1/2를 넘어서는 안된다라는 규정이 이 대회 이후에 생겨났다. 일종의 견제[13] 시미즈 히로야스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선수인데다, FIFA 월드컵에서 34회 이상, 세계선수권에서 3번 이상 우승하고, 500m 세계신기록을 4번이나 경신하는 등 일본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의 전설이다. 2014년 현재 그의 뒤를 이을 만한 선수로는 가토 조지# 정도 밖에 없는데, 이 선수는 슬럼프가 길었는데다 기껏 슬럼프에서 벗어나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후로는 다시 성적이 하락세다...[14] 게다가 그것도 전대회 금메달리스트들이 딴거다. 스피드 500m(은)하고 프리스타일 모굴 여자부(동)...[15]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캐나다는 2017년에 대마초가 전면 합법화되기 이전부터 경찰조차도 눈을 감아주는 일이 많았을 정도로 대마초를 자주 피우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나라다. 이 때문에 리버글리애티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처럼 늘 하던 대로 대마초를 피웠었던 것. 여기에 당시에는 아직 대마초가 금지약물로 명시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보니 선수 본인과 선수단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 징계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16] 다만 1992 알베르빌에서 획득한 메달 종합 11개는 1968 그르노블 이후 24년만에 메달 종합 10개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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