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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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golpe de Estado en Argentina de 1976
(El 24 de marzo)

1. 개요
2. 배경
3. 쿠데타 발생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76년 3월 24일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쿠데타. 이 쿠데타로 페론 정권이 실각하고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2. 배경[편집]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집권했다가 페드로 아람부루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하여 해외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새롭게 들어선 군부는 후안 페론은 물론 페론주의자들의 출마를 금지한 것은 물론 이들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후안 페론은 군부에 맞서 좌파극우파들과 제휴하여 정치적 재기를 노렸고 군부의 무능으로 인해 복권의 기회를 잡게 되어 아르투로 프론디시(Arturo Frondizi)를 물밑에서 지원했다.

프론디시가 페론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을 풀면서 1962년 총선거에서 페론주의자들이 대거 당선되자 이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군부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프론디시를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당시 상원의장이었던 호세 마리아 기도(José María Guido)를 앉혔다. 하지만 신임 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많이 볼 수 밖에 없었고 그 군부도 1962년과 1963년 페론주의의 청산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민정 이양 이후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르투로 움베르토 일리아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일리아의 재임기간 동안 경기침체에 대한 불만이 이어졌고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1966년에 다시 쿠데타가 벌어졌지만 정작 쿠데타로 집권한 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의 군부도 경기 침체와 야당 탄압으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자들을 물밑에서 지원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했고 결국 페론주의자들의 출마 금지가 다시 풀렸다. 후안 페론은 1973년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었으나 이미 건강이 나빠져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결국 다음 해에 사망했다.

후안 페론의 부통령이었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이사벨 페론은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 정치력이 부족했다. 이사벨 페론의 재위기간 동안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고 석유 파동의 여파로 경기마저 침체되었다. 이런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틈타서 군부가 다시 정계에 나서기 시작했고 이사벨 페론은 입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3. 쿠데타 발생[편집]


1976년 3월 24일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육군 사령관이 미국 CIA의 지원을 등에 업고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Emilio Eduardo Massera) 해군 사령관, 오를란도 라몬 아고스티(Orlando Ramón Agosti) 공군 사령관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이사벨 페론을 축출했다. 삼군 사령관은 군사정권을 선언했고 의회와 정당을 해산하였다. 외부에서 직무를 수행하던 이사벨 페론은 쿠데타 움직임을 눈치채고 복귀하려고 했으나 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대통령직에서 해임되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페론주의자들에 대한 백색테러(더러운 전쟁)를 자행하였으며 이사벨 페론의 재위기간보다 경기가 더 침체되어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자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월드컵을 개최하고 온갖 무리수를 두어 자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반발이 완전히 무마된 것은 아니었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영국에게 패전하면서 군사정권은 큰 타격을 입고 점점 힘을 잃어갔다. 결국 국민의 반발, 국제 사회의 압력, 경기 침체 속에 1983년 군사정권이 민정 이양을 결정하면서 막을 내렸다.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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