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동독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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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Volksaufstand[1] vom 17. Juni 1953 / Volksaufstand in der DDR
영어: Uprising of 1953 in East German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75-14676%2C_Leipzig%2C_Reichsgericht%2C_russischer_Panzer.jpg
[2]

1. 개요
2. 내용
2.1. 배경
2.2. 진행
2.3. 결과
3. 여담


1. 개요[편집]


1953년 동독의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동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소요 사태. 1953년 6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간 지속되었으며, 소련군이 개입한 끝에 강제로 진압되었고, 이후 동독에서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안착된다.


2. 내용[편집]



2.1. 배경[편집]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딸랑이 발터 울브리히트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은 1952년에 동독 지역에서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시한다는 내용의 경제 계획을 발표한다. 하지만 2차대전의 상흔이 여전히 깊게 남은 당시 동독의 경제 상황에서 공산주의로의 신속한 이행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공산주의 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제일 먼저 큰 타격을 입게 될 자영농과 소상공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며[3] , 많은 수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회의를 느끼고는 서독으로 도피하는 바람에 인적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여기에 생필품 부족까지 겹쳤다. 생필품 부족을 타개하려면 경공업에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이 매우 기초적인 상식이겠지만, 소련의 1930년대 경제 개발 계획을 지도한 바 있던 스탈린은 중공업에 우선적으로 투자할 것을 지시했다. 여기에 냉전의 격화에 따른 군비 경쟁까지 겹치면서 동독은 나머지 경제적인 여력조차 군수산업에 탈탈 털어 넣어야만 했다. 이미 서독의 경우에는 콘라트 아데나워한국 전쟁을 근거로 "스탈린이 유럽에서도 도발할지 모른다."면서 연방군(Bundeswehr) 창립을 빠르게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에 응전하여 동독도 1956년 국가 인민군을 창설한다. 일단 수치상으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긴는 했지만 중공업에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면서 내수를 희생시킨 대가로 전후 5년이 넘어서도 생필품은 부족했고 실질 생활수준은 서독에게 심각하게 뒤쳐지게 되었기에 동독 시민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 간다. 당시 동독 사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발전량이 터무니 없이 모자라서 저녁만 되면 모든 도시가 암흑천지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공장까지.

이런 상황에서 동독의 윗선을 좌지우지하던 스탈린은 1953년 3월 급서한다. 스탈린의 뒤를 이어 아주 잠깐 권력을 손에 쥔 베리야는 냉전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유화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한다. 하지만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베리야의 유화적인 대외정책은 동유럽권 내의 반소련 감정이 터져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진행[편집]


6월 16일 동베를린의 건설 노동자들은 정부를 비판하며 파업을 결의한다. 파업의 소식은 삽시간에 동독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동독 전역의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100만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다. 동베를린에서만 4만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급기야 시위대들은 일시적으로 동베를린을 넘어서서 서베를린에 도달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베를린 내에서는 왕래가 자유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인들이 서베를린으로 망명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의 일. 다음날인 17일이 되면 시위는 한층 격화되어 단순한 파업을 넘어선 소요로 발전한다. 전날만 하더라도 노동 부담 완화라는 요구 조건에서 보여지듯 노동 쟁의의 요소가 강했으나, 이 날이 되면 발터 울브리히트를 비롯한 동독 지도부의 총사퇴를 시위대들이 요구했던 것. 위협을 느낀 동독 정부는 소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미 6월 초에 동독 내에서 반소련 움직임이 눈에 띄게 증가하자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동독 주요 인사들을 불러서 일처리를 똑바로 하라고 조인트를 깠다고 한다(...) 이 시점에 이미 소련군이 개입할 것은 분명했던 대목. T-34 탱크를 앞세운 2만명의 소련군이 8천여명의 동독 경찰과 함께 진압을 시작했고, 계획된 무장 봉기가 아니라 파업에서 촉발된 즉흥적인 민주화 시위였던 만큼 사태는 신속하게 진압된다. 동독 정권에서 밝힌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25명. 서구 측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사망자 수를 높게 잡는다. 사태 진압 이후 동독 정권에게 체포되어 사형 당한 희생자들까지 합치면 500명은 넘는다는 것이 냉전 기간 내내 서독 정부의 추측.


2.3. 결과[편집]


가장 큰 도전을 극복한 동독 내에서는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안착된다. 또한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와 달리, 동독은 정권 자체는 공산주의를 굳건히 지지했기 때문에 이후 1989년 동구권 혁명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남게 된다. 하지만 수면 밑에서는 반정부 운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이는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이어진다.

한편 서독 내에서는 입으로만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는 방관한다면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었다. 그렇지만 소련 당국의 무자비한 진압 탓에 다른 한편으로는 서독 내에서 반공주의 성향이 강화되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 집권 체제가 강화되는 결과를 일으키기도 했다.


3. 여담[편집]


  • 서독은 국가 차원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면서 1990년 통일 이전까지 봉기가 일어난 6월 17일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었다.
  • 여담이지만 이 당시 DFF의 악투엘 카메라가 관제성향의 논조를 지니게 된 계기를 마련했다. 의외로 방송초기에는 동독정부에게 상당히 비판적인 논조를 취했지만 정권으로부터 통제를 받지 않았고 동베를린 시위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때문에 시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문제가 되었다. 시위가 진압된 이후로 방송관계자들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했던것은 당연했고, 방송 내용 자체가 정권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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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 봉기라는 의미. 혹은 Arbeitersaufstand(노동자 봉기)라고 쓰기도 한다.[2] 첨언하자면, 이 사진은 베를린이 아니라, 라이프치히에서 찍은 것이다. 베를린에서 일어난 시위에 호응하여 라이프치히에서도 발발한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입한 소련군의 IS-2 중전차.[3] 비록 패망했지만 나치당이 공산당을 비판하며 들고나온 '국가 사회주의' 이념은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방침이었다. 물론 전쟁이 터지고 다 엎어졌지만, 적어도 전쟁 전에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