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덤프버전 :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제7회 올림픽 경기대회
Jeux de la VIIe olympiade
Spelen van de VIIe Olympiade
Jeux olympiques d'été de 1920
Olympische Zomerspelen van 1920
1920 안트베르펜 올림픽 경기대회
1920 VII Olympiade Anvers
Games of the VII Olympiad Antwerp 1920

파일:1920_olympics.png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_olympics_poster.jpg

대회기간
1920년 4월 20일 ~ 9월 12일
개최국
파일:벨기에 민간기.svg 벨기에 안트베르펀
참가국
29개국
참가선수
2,626명[2]
경기종목
22개 종목, 154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알베르 1세
벨기에 국왕
성화 점화
빅토르 부앙
개·폐회식장
올림피슈 스타디온

1. 소개
2. 특징
3. 메달 집계



1. 소개[편집]


1920년 4월 20일부터 9월 12일까지 벨기에 안트베르펀에서 개최된 제7회 하계올림픽. 제1차 세계 대전으로 1916 하계 올림픽이 불발되었기에 8년만에 열린 대회이다.[3] 안트베르펀은 영어식으로 읽은 앤트워프(Antwerp)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1920 앤트워프 올림픽"으로도 불린다. 안트베르펀(Antwerpen)은 네덜란드어식. 포스터에도 나왔듯이 프랑스어로는 앙베흐(Anvers)라고 읽는다. 참고로 벨기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세계 대전으로 인한 극심한 피해 속에서 첫 출전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29개국 2,543명(여자 64명)이 참가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맹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은 이 대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초청장을 받았으나 거부의사를 밝혔다.[4]


2. 특징[편집]


1차 대전 후 새롭게 재편된 세계 질서를 보여주는 대회. 1차 대전의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등은 출전자격을 얻지 못하였고 1917년 혁명 이후 출범한 소비에트 러시아는 '부르주아 스포츠 대회'를 비난하며 불참했으며 그 대신 '레드 스포츠 인터내셔널'을 조직하여 '부르주아 올림픽'에 맞서는 사회주의 체육대회를 도모했다. 서유럽 귀족들로 구성된 IOC도 소비에트 정권의 국가 체육 단위를 인정하지 않고 1910년 IOC 위원으로 선임된 제정 러시아의 귀족 레프 우루소프(Лев В. Урусов, 1877~1933) 공에게 위원 자격을 계속 부여했다.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야 올림픽에 참가했다. 한편 이 대회는 1차 대전 이후의 신생독립국들이 자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만찬장으로 적극 활용했는데,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에스토니아 등이 그 주인공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공식 보고서를 발간하지 못했으며 또한 선수촌을 별도로 만들지 못하고 학교 건물을 사용했다. 그나마도 여자 선수들은 비교적 쾌적한 대학 기숙사를 사용했지만, 일부 남자 선수들은 군용 천막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올림픽 선서와 오륜기가 최초로 채택되었다. 첫 올림픽 선서의 영광은 주최국의 펜싱선수 빅터 보잉에게 돌아갔다. 왼손에 국기를 쥐고 오른손은 하늘을 가르키며 읊는 내용은 현재까지 동일하게 유지된다.[5]

20세기 최고의 장거리 영웅인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가 올림픽에 데뷔한 무대이기도 하다.[6] 누르미는 이 대회를 시작으로 3차례 올림픽에 참가하여 10종목에서 7개의 금메달과 3개의 은메달을 따냈고 연속 7번 우승했다. 이때부터 그는 약 10년 동안 동시대의 많은 뛰어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1920년대 세계 육상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 대회에는 불굴의 기백으로 이 장거리의 황제를 격침시킨 인물이 있다. 누르미의 올림픽 첫 출전인 5,000m 결승이 있던 날 개최국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1세는 브뤼셀에서 앤트워프로 날아와 이 경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국왕의 관심은 누르미가 아니라 프랑스의 요셉 길모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참전중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에 폐를 심하게 다쳤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출전을 감행했다. 출발과 더불어 선두에 선 누르미의 뒤를 바짝 쫒은 길모는 결승선의 300m 앞두고 스퍼트를 시작, 누르미를 십여미터나 따돌리고 우승하여 자신을 성원하던 국왕과 벨기에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8년 만에 다시 나타난 지난 대회의 영웅 핀란드의 콜게마이넨은 이미 31세의 노장으로 떠오르는 샛별인 파보 누르미에게 영광을 이양하고 있었지만 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 32분 35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으로 우승하며 장거리 핀란드의 전통을 지킴과 동시에 자신의 위대했던 육상 인생을 감동적으로 마감했다.

그동안 오스트랄라시아라는 같은 팀으로 나왔던 호주뉴질랜드가 다른 나라로 나온 최초의 올림픽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동계종목이 하계올림픽과 같이 열린 해이며, 이번에는 아이스하키가 추가되었다. 이 대회 이후에 동계종목은 동계올림픽으로 분리되었다.

역도가 부활하였으나 한손역도(바벨)은 제외되었다. 또한 코프볼이라는 특이한 종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참고로 코프볼은 남녀 혼성으로 농구를 하며, 망 없는 골대에 공을 넣는 게임이다. 여자는 3점, 남자는 1점 획득가능하며 수십년 후 일본 만화 총몽에서 코프볼에서 영감을 얻은 모터볼이라는 가상 스포츠가 나왔으며 코프볼은 베네룩스 3국에서 2020년 지금까지도 꽤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또한 초기 올림픽이라 군인들도 출전했는데 사격 종목에서는 미군의 윌리스 아우구스투스 리 주니어 제독이 권총과 소총을 합해 무려 금메달 6개를 휩쓸었다.[7][8]


3. 메달 집계[편집]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순위
국가
메달
합계



1
[[미국|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 미국
41
27
27
95
2
[[스웨덴|

파일:스웨덴 국기.svg
]] 스웨덴
19
18
24
61
3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 영국
15
15
13
43
4
[[핀란드|

파일:핀란드 국기.svg
]] 핀란드
15
10
9
34
5
[[벨기에|

파일:벨기에 국기.svg
]] 벨기에
14
11
11
36
6
[[노르웨이|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 노르웨이
13
9
9
31
7
[[이탈리아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 이탈리아
13
5
5
23
8
[[프랑스 제3공화국|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 프랑스
9
19
13
41
9
[[네덜란드|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 네덜란드
4
2
5
11
10
[[덴마크|

파일:덴마크 국기.svg
]] 덴마크
3
9
1
13
11
[[남아프리카 연방|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 남아프리카 연방
3
4
3
10
12
[[캐나다 자치령|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868-1921).svg
]] 캐나다 자치령
3
3
3
9
13
[[스위스|

파일:스위스 국기.svg
]] 스위스
2
2
7
11
14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 에스토니아
1
2
0
3
15
[[브라질 제1공화국|

파일:브라질 국기(1889-1960).svg
]] 브라질
1
1
1
3
16
[[호주|

파일:호주 국기.svg
]] 호주 자치령
0
2
1
3
17
[[일본 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 일본
0
2
0
2
[[스페인 왕정 복고|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 에스파냐
0
2
0
2
19
[[그리스 왕국|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 그리스
0
1
0
1
[[룩셈부르크|

파일:룩셈부르크 국기.svg
]] 룩셈부르크
0
1
0
1
21
[[체코슬로바키아|

파일:체코 국기.svg
]] 체코슬로바키아
0
0
2
2
22
[[뉴질랜드|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 뉴질랜드 자치령
0
0
1
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5 16:42:45에 나무위키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공식 엠블럼으로 인정되진 않으나 인쇄물에 주로 사용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마크가 들어간 엠블럼이다.[2] 남자: 2,561명, 여자: 65명[3] 베를린에서는 기어이 1936년에 올림픽이 열렸는데, 이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주곡이 되었다.[4] 러시아에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지만 정식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된 것은 1922년 12월이다.[5] 나는 전 참가 선수를 대표해서 우리 선수단의 명예와 스포츠의 영광을 위해 참된 스포츠맨십으로 올림픽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여 경기에 임할 것을 선서합니다.[6] 당시 대회는 누르미의 모국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국 자격으로 참가한 첫 올림픽이기도 했다. 종전까지는 러시아의 깃발을 내걸고 독자 선수단을 출전시키는 것에 그쳤다.[7] 리 제독은 사격뿐만 아니라 레이더를 이용한 함포술에도 대단히 능했으며 이 덕분에 과달카날 해전에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번함 워싱턴을 타고 공고급 순양전함 키리시마를 격침하는 전공을 세웠다.[8] 사실 조지 패튼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수영과 펜싱은 문제없었지만 사격 종목에서는 경기용 탄환이 아닌 육군용 38구경탄을 무리하게 고집한 결과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