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9(야구)

덤프버전 :

1. 개요
2. 경기 전의 상황
3. 경기 내용
3.1. 1차전
3.2. 2차전
4. 결과
5. 여담


1. 개요[편집]



퍼시픽 리그 역사상 가장 길었던 1일 - 당시 경기를 다룬 테레비 아사히의 다큐멘터리 제목


1988년 10월 19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킨테츠 버팔로즈롯데 오리온즈더블헤더를 통칭하는 말. 경기 후에도 당사자들의 증언이 회자되고 저서로도 나오는 등 일본 프로야구 역사 상 최고의 명승부를 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는 경기다.


2. 경기 전의 상황[편집]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8년 퍼시픽리그 1~2위(10월 18일까지)
순위
구단
경기



승률
승차
1위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세이부 라이온즈
130
73
51
6
.589
-
2위
파일: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엠블럼.svg 킨테츠 버팔로즈
128
73
52
3
.584
0.5

1988년의 퍼시픽리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세이부 라이온즈의 독주였다. 그러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까지 세이부와 8게임 차 2위였던 킨테츠가 반전을 일으킨다. 대마초 소지 혐의로 구속된 용병 리처드 데이비스를 퇴출시키고,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영입한 랄프 브라이언트[1]불과 74경기만에 34개의 홈런을 치는 말도 안되는 활약을 보이면서 팀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고, 확고부동한 에이스로 자리잡은 1987년 신인왕 좌완 아와노 히데유키[2]를 중심으로 한 선발진, 구원으로 전업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요시이 마사토까지 분발하며 맹렬한 기세로 세이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세이부가 전 게임을 소화하고 킨테츠가 4게임을 남긴 10월 16일에는 승차가 불과 반 게임 차로 줄어들었다. 킨테츠는 4게임에서 3승을 기록하면 자력우승이 가능했으나,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10월 17일 경기에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128구 완투에도 불구하고 1-2로 패하며 롯데와의 3연전을 모두 이겨야 하는 벼랑 끝에 몰렸다. 일단 롯데와의 10월 18일 첫 경기에서 12-2로 승리하며 기사회생했고, 전설로 남을 10월 19일 마지막 더블헤더만이 남아 있었다.

당시 경우의 수는 간단했다. 킨테츠가 2전 전승하면 킨테츠가 8년 만의 리그 우승, 그 이외엔 세이부의 리그 4연패.

상대 팀 롯데 또한 킨테츠전 8연패[3]를 끊을 기회였기 때문에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상황. 그렇게 관중들 및 시청자들의 뜨거운 열기와 장엄한 분위기 속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3. 경기 내용[편집]



3.1. 1차전[편집]


1988.10.19(水) 15:00 | 카와사키 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킨테츠
오노 카즈요시
0
0
0
0
1
0
0
2
1
4
6
0
롯데
오가와 히로시
2
0
0
0
0
0
1
0
0
3
8
0
: 요시이 마사토 (10승 2패 24세이브)
: 우시지마 카즈히코 (1승 6패 25세이브)
세이브 : 아와노 히데유키 (14승 12패 1세이브)

롯데 선발은 잠수함 오가와 히로시[4], 킨테츠 선발은 좌완 오노 카즈요시.

롯데는 1회 공격에서 아이코 타케시[5]의 투런홈런으로 2점을 선취한다. 킨테츠는 5회 2사 후 스즈키 타카히사[6] 솔로홈런으로 1점을 만회했으나, 롯데는 7회 2사 1,3루에서 사토 켄이치의 2루타로 1점을 더 보태 1-3으로 승리를 굳히는 듯 했다.

그러나 킨테츠는 8회 1사 후 스즈키의 우전안타와 대타 가토 마사키의 볼넷으로 주자 1,2루를 만들었고, 여기서 두번째 대타 무라카미 타카유키가 좌측 펜스를 직격하는 2타점 적시타를 치며 3-3 동점을 만든다.[7] 그러나 계속된 2사 만루에서 브라이언트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역전에는 실패. 더블헤더 1차전은 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9회로 끝낸다는 룰이 있기 때문에 킨테츠는 9회초 공격에서 반드시 점수를 내야만 우승의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9회 초, 1아웃 후 베테랑 아와구치 켄지[8]가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치며 호투하던 오가와를 강판시켰다.[9] 롯데는 오가와를 대신해 마무리 우시지마 카즈히코를 등판시켰고, 킨테츠는 아와구치를 대주자 사토 준이치로 교체하며 승부수를 띄운다. 그러나 스즈키의 우전안타 때 2루 대주자 사토가 홈에서 런다운에 걸리며 투아웃.

여기서 킨테츠의 오기 아키라 감독은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은퇴를 선언한 베테랑 포수 나시다 마사타카[10]를 대타로 냈다. 나시다가 1볼 0스트라이크에서 짧은 중전안타를 쳤고, 2루주자 스즈키가 전력질주[11]로 홈에서 세이프되며 4대 3으로 천신만고 끝에 킨테츠가 역전에 성공했다.

킨테츠는 9회말 수비에서도 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마무리 요시이 마사토가 선두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다음 타자에게도 2-0으로 볼카운트가 몰리면서 위기에 빠진다. 이에 오기 감독은 요시이를 강판하고 이틀 전 128구 완투를 했던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를 등판시켰으나 아와노도 주자를 출루시키고 좌타자 아이코마저 데드볼로 출루시키면서 만루의 위기를 맞는다. 1점만 내주면 우승 가능성이 사라지는 상황. 그러나 아와노는 후속타자에게 극적인 헛스윙을 유도해내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를 승리로 이끌고 우승을 위해 한 발짝을 내딛었다.[12]그리고 롯데는 소리소문없이 킨테츠전 9연패


3.2. 2차전[편집]


1988.10.19(水) 18:44 | 카와사키 구장

선발
1
2
3
4
5
6
7
8
9
10
R
H
E
킨테츠
타카야나기 이즈미
0
0
0
0
0
1
2
1
0
0
4
9
0
롯데
소노카와 카즈미
0
1
0
0
0
0
2
1
0
0
4
11
2

2차전은 1차전이 종료된 지 23분 뒤인 18시 44분에 플레이볼했다. 롯데 선발은 소노카와 카즈미, 킨테츠 선발은 타카야나기 이즈미.

킨테츠는 2회 말 빌 매들록[13]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하면서 선취점을 내줬으나, 6회 초 2사 1,2루[14]에서 벤 오글리비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들었고, 7회 초에는 후키이시 도쿠이치[15]마키시 야스나가의 솔로홈런으로 2점을 달아나며 3-1로 리드, 우승을 확정짓는 듯 했다. 그러나 7회 말 수비에서 호투하던 다카야나기가 오카베 아키히로에게 솔로홈런을 얻어맞자 요시이 마사토를 조기투입했으나, 1차전의 볼질로 불안한 조짐을 보이던 요시이가 니시무라 노리후미에게 동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블론세이브를 기록, 다시 동점이 된다.

킨테츠는 8회 초 1사 후 브라이언트의 솔로홈런으로 다시 4-3으로 앞서갔고, 8회 말 1사 후 오기 감독은 승리를 확실하게 매조지기 위해서 1차전에 이어 에이스 아와노를 하루에 2경기를 투입하는 아와노야 우야노, 여까지 왔는데... 초 강수로 나왔다. 그러나 이 초 강수는 아와노가 다카자와 히데아키에게 솔로홈런을 맞으며 4-4 동점이 되는 것으로 실패했으며, 아와노는 직후의 기억을 잃을 정도의 충격을 받고 마운드 위에서 고개를 떨구었다.[16]

9회초 공격이 무위로 끝난 킨테츠는 9회 말 수비에서 아와노가 선두타자 후루카와에게 우전안타, 다음 타자 하카마타에게는 실책성 번트안타를 내주며 무사 1,2루의 끝내기 패배의 위기를 맞았으나, 2루주자 후루카와를 견제구로 잡아냈다. 그러자 후루카와와 아리토 미치요 롯데 감독이 2루심에게 주루방해라면서 무려 9분에 걸쳐서 시간끌기 항의를 했다. 다행히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킨테츠는 무실점으로 9회말 수비를 마쳤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퍼시픽리그는 9회말까지 동점인 경우 최대 12회까지 연장전을 실시했지만, 9회 이후 경기시간이 4시간을 경과하면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롯데 측의 9분간의 항의 때문에 9회말 종료시점에서 경기시간이 3시간 50분을 넘기는 바람에 10회 초 공격이 사실상 킨테츠의 마지막 공격기회이자 리그 우승 기회가 된 것이다.만약에 이 경기가 킨테츠와 세이부의 맞대결인데 이런 항의가 나왔으면 시간끌기를 이유로 퇴장당했을지도 모른다.[17][18]

그리고 운명의 연장 10회 초, 킨테츠는 선두 브라이언트가 2루수 니시무라의 실책으로 출루했으나 다음 타자 오글리비가 삼진으로 물러났고, 하타 코이치의 타구는 2루수 쪽으로 굴러갔으나 2루수 니시무라가 이번에는 정확하게 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병살을 성공시키며 득점에 실패했다. 이 시점에서 경기시간은 플레이볼로부터 3시간 57분이 경과, 새로운 이닝에 들어가려면 3분 내에 롯데의 공격을 끝내야했으나 클리닝타임을 빼면 실질적 시간은 단 1분에 불과해, 사실상 세이부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연장 10회 초가 끝난 지금, 4:4 동점인 채로..! 그렇다는 것은 킨테츠, 승리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세이부 라이온즈, 4년 연속(우승)으로 6번째 우승 결정입니다![19]


킨테츠, 기적의 역전 우승의 길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더블헤더 중계를 맡았던 아사히 방송 아나운서 아베 노리유키[20]

, 10회 초 킨테츠가 무득점에 그치자


그러나 킨테츠의 우승 가능성이 사라진 것과는 별개로 롯데의 10회말 공격을 마무리해야 경기가 끝났다.[21] 킨테츠 선수들은 슬픔을 억누르며 10회말 수비에 나섰고, 무실점으로 롯데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며 4-4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그렇게 킨테츠는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지 못하면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4. 결과[편집]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88년 퍼시픽리그 1~2위
순위
구단
경기



승률
승차
우승
파일:세이부 라이온즈 엠블럼.svg 세이부 라이온즈
130
73
51
6
.589
-
2위
파일: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엠블럼.svg 킨테츠 버팔로즈
130
74
52
4
.587
0.0

킨테츠는 불과 승률 2리 차이로 우승을 놓치고 말았고, 간신히 우승을 달성하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한 세이부 라이온즈센트럴 리그 우승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1패로 꺾으며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다.

5. 여담[편집]


  • 더블헤더 1차전 패전투수였던 우시지마 카즈히코는 후일 "원래는 1루가 비어 있어서 나시다 씨를 고의4구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생애 마지막 타석을 맞는 나시다 씨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정면승부 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 이 날은 경기 시작 전부터 퍼시픽 리그일본프로야구계에 상당히 이상한 기류가 감돌았다. 85년부터 87년까지 리그 3연패, 그 때까지 6년간 무려 5번의 리그 우승에 4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요미우리에 이어 일본의 야구팬들을 신물나게세이부 라이온즈의 우승 행진에 드디어 브레이크가 걸리는가라는 기대감이 감돌면서 퍼시픽 리그의 두 비인기팀의 대결임에도 일본 전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게다가 이날 저녁에는 이미 다이에로의 매각이 확정된 난카이 호크스에 이어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 매각된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지면서 야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22] 난카이의 경우는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성적, 인기가 모조리 떨어지며 지속적으로 적자가 쌓인 데다 적자 구단을 어찌저찌 지속한 결과 모기업 난카이 전기철도의 자금 사정도 악화되며 모기업 이사회, 노조 등이 틈만 나면 구단을 매각하라고 압력을 넣는 상황에서 구단주이자 난카이 전기철도 회장인 카와카츠 덴의 고집으로 겨우겨우 구단을 잡고 있던 와중에 카와카츠가 1988년 노환으로 별세를 했기 때문에 난카이가 곧바로 쓸모없는 짐짝이나 다름없는 구단을 처리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예상을 할 수 있었고, 실제로 1988년 시즌 중에 이미 구단 측에서 대놓고 50주년 기념이라고 매각 작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다이에로의 매각이 확정된 것 자체는 팬들에 주는 충격이 적었다. 사실 진짜로 충격적인 건 다이에가 오사카 연고 유지, 오사카 인근이자 다이에의 본사가 있었던 고베로의 연고이전도 아닌 후쿠오카로 간다는 결정을 한 것.
그러나 한큐의 경우에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게 물밑에서 매각작업이 추진이 되었고 모든 협상이 완료된 후에 갑작스럽게 이날 매각 결정이 발표되었기 때문에 팬들에게 주는 충격이 더욱 컸다. 비록 한큐도 팀의 저조한 인기 탓에 골머리를 앓았기에 매각을 추진해도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계속 비밀번호만 찍던 난카이와는 달리 한큐는 6~70년대에 리그 우승 8번, 1975~1977년 일본시리즈 3년 연속 제패에 불과 4년 전인 1984년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23] 줄곧 중상위권의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지라 아무도 한큐가 구단을 매각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튼 1950~60년대를 주름잡던 난카이와 1960년대 후반에 급성장한 신흥강호 한큐라는 간사이 지역 퍼시픽 리그의 대표 두 팀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해에 매각이 결정된 것 자체가 일본프로야구를 지탱한 비즈니스 모델 중에서 사철회사의 부수 사업으로서의 구단 운영이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함이 표면화 된 사건이며 철도와 신문회사에 의해 지탱된 일본프로야구의 한 시대에 종언을 고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후에 벌어진 더블헤더 1차전이 극적인 승부로 킨테츠의 승리로 끝나면서 킨테츠의 희망이 계속 살아난 상황이라 그날 하루 동안 해당 경기에 대한 관심도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 이 날은 퍼시픽리그 전 역사를 통틀어서도 상당히 기묘한 분위기의 하루였다. 이 더블헤더는 원래 TV 아사히 계열의 오사카 지역방송인 아사히 방송간사이 로컬 중계로 기획되었으나, 2차전에서 킨테츠가 역전을 해 8년 만의 우승 가능성이 열리자, 라디오를 듣고 있던 전국의 킨테츠 팬들이 TV 아사히로 전국중계를 해달라는 요청 전화를 어마어마하게 걸기 시작했다. 결국 TV 아사히는 방송 편성을 긴급 변경하여 사상 최초로 드라마를[24] 결방시키고 더블헤더 2차전을 전국 생중계로 돌렸고, 심지어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 스테이션마저 본래 예정되었던 특집을 전부 결방시키고 야구 중계에 할애했다.[25][26] 이날 중계된 더블헤더 2차전은 시청률 30.9%를 기록하면서 퍼시픽 리그 정규시즌 경기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27] 그야말로 1988년 10월 19일은 퍼시픽 리그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날이라 할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이 문서의 표제어인 10.19가 전설로서 인구에 회자되게 된 것이다.

  • 만약 킨테츠가 이 해에 우승을 했으면 퍼시픽 리그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전년도 최하위 팀이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울 뻔 했다. 일본 프로야구 전체로 따지면 4번째인데 그 전에는 1960년의 타이요 훼일즈, 1975년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6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기록했으며 이들은 모두 센트럴 리그 소속이었다. 퍼시픽 리그에서 전년도 최하위 팀이 굴욕을 딛고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최초의 기록은 이로부터 무려 13년 뒤인 2001년에야 나왔는데 그 기록을 세운 주인공이 바로 이 날의 비극의 주인공 킨테츠였다.[28] 이해 킨테츠는 팀 방어율이 4.98에 육박했던 빈약한 투수진을 무지막지한 장타력을 앞세워 들소같은 기세로 커버하면서 전년도 우승팀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세이부 라이온즈와 더불어 치열한 우승 경쟁을 전개한 끝에 매직넘버 1을 남겨둔 채 진행한 9월 26일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홈경기에서 키타가와 히로토시가 9회말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극적으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29] 그렇게 13년 전에 실패했던 기록을 세우며 구단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도전했지만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1승 4패로 패하면서 또 다시 눈물을 흘렸고, 그 이후 두번 다시 킨테츠에게 일본시리즈 우승의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30]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모기업 킨키 일본 철도는 버블경제의 후폭풍과 구단의 흥행 부진에 따른 막대한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구단을 오릭스 블루웨이브에 흡수합병하는 형태로 해산시키면서 극적인 승부를 여럿 남기며 일본프로야구에 족적을 남긴 킨테츠 버팔로즈의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다. 이로써 칸사이 지역의 프로야구를 지탱해 오던 한신, 한큐, 난카이, 킨테츠 등의 지역 대형 사철들은 한신 전기철도를 제외하면 모두 프로야구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 킨테츠는 이 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로 다음 해인 1989년 시즌 마침내 리그 우승에 성공하면서 세이부의 연속우승 행진에 제동을 걸었다. 이 해는 킨테츠와 세이부, 그리고 한큐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오릭스, 이 3팀이 시즌 마지막 까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승 경쟁이 펼쳐져서 프로야구 팬들을 열광시켰다. 킨테츠의 경우에는 시즌 초반 이날의 극적인 우승 실패의 충격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듯 하위권에서 비틀거렸으나 여름 무렵부터 전력을 정비해서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면서 리그의 판도를 혼돈으로 빠트렸다. 이 해 절정기에 다다른 주포 랄프 브라이언트의 홈런 공세와 10.19에서 무려 두 경기나 구원등판을 했음에도 결국 마지막 경기에 동점 홈런을 허용하면서 팀의 우승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쓴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살신성인 활약으로 우승에 성공했다.

  • 특히 89년 킨테츠 우승을 결정지은 것도 바로 더블헤더였는데, 공교롭게 또 10월에 열렸다. 10월 12일에 열린 세이부와의 더블헤더에서 킨테츠가 2경기 모두 역전승을 거두며 승기를 잡았다. 이 승부도 명승부인데, 더블헤더 1차전에서 세이부의 공세로 0-5로 지고 있었지만, 랄프 브라이언트가 무려 3타석 연속 홈런으로 혼자 6점(솔로 2개, 만루 1개)을 쓸어모으는 말도 안되는 활약[31]으로 6-5로 승리했으며, 2차전에서도 2-2로 맞선 3회, 역시나 랄프 브라이언트의 홈런을 필두로 리베라, 스즈키의 홈런이 폭발하면서 역전에 성공해 2경기를 모두 쓸어담았다. 시즌 결과는 2위인 오릭스와는 게임차가 없었고, 3위인 세이부와는 불과 0.5게임차였다. 시즌 막판까지 우승권에 있던 세 팀이 날마다 순위가 바뀌는 등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거의 매경기가 명승부라고 불릴만한 상황이 전개되었고, 그에 비례해서 야구팬들의 관심도도 고조되었다.
    • 특히 이 더블헤더에서의 우승은 1987년 데뷔 이후 탤런트 같은 용모로 라이벌인 닛폰햄의 니시자키 유키히로와 더불어 트렌디 에이스라는 칭호를 얻으며 퍼시픽 리그의 얼굴마담 역할을 한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활약은 전년도의 실패를 배경으로 깔면서 비장감마저도 느끼게 할만큼 극적이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을 극복해낸 킨테츠에게는 전년도의 실패의 설욕과 리그 우승이라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를 상대로 먼저 3연승을 해 놓고도 4연패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또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 여담으로 전년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팀의 의지가 너무도 강한 나머지 킨테츠는 시즌 막판에 상당한 무리수를 뒀고 그 결과는 완투경기 다음에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 2일 휴식후 구원 등판이라는 초강수를 두며 온 몸을 불사른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의 팔꿈치 부상이라는 혹독한 대가로 돌아왔다. 신인왕에 오른 1987년부터 이 해까지 3년간 무려 48승을 올리면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좌완 에이스는 이 해의 부상 때문에 그 다음해인 1990년 시즌 10승을 겨우 채운 것을 끝으로 두번 다시 두자리수 승수를 거두지 못했으며 결국 통산 100승도 거두지 못하고 요미우리요코하마를 떠돌다가 은퇴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팀으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결과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해의 드래프트에서 무려 8구단의 경합을 물리치고 추첨 끝에 획득한 초대형 괴물 신인 투수가 바로 다음 시즌부터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로서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아와노가 이 해 무리를 하지 않고 조금만 더 길게 활약을 하면서 그 투수와 선발 로테이션의 중심축을 형성할 수 있었으면 킨테츠의 일본시리즈 우승은 물론이요, 전성기는 상당기간 지속될 수 있었고, 그보다 투구폼 드립치면서 노모를 토사구팽하고, 아와노의 투수 생명을 아싸리 끊어놓은 초혼 양반이 더 문제이긴 하지만 다음 해부터 벌어진 세이부 라이온즈의 괴물같은 일본시리즈 3연패 및 리그 5연패의 기록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아와노는 당시 킨테츠의 투수 코치였던 곤도 히로시가 감독을 맡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중간계투로 반등하며 1998년 요코하마의 38년 만의 우승에 공헌했다.

  • 여담으로 이 해 킨테츠는 우승 실패 외에도 퍼시픽리그 개인 타이틀,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요시이 마사토의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 빼고 아무도 못 타는 불운도 겪어야 했다.[32]
  • 그리고 이로부터 26년 뒤 이 시즌과 흡사한 상황이 재현되고, 이로부터 또 8년 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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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브라이언트는 용병 슬롯 두 자리를 차지하던 게리 레시치(주전 1루수), 곽원치(궈위엔치, 대만인 마무리 투수)에 밀려 2군에 있었다.[2]주니치 드래곤즈 1군 코치.[3] 특이하게도 10월에만 7연패를 당했다.[4] 2004년 강도살인 사건을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있다.[5]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였던 일본 대표팀 멤버 중 한 명이다. 은퇴 후 안드로스텐다이온 복용을 시인했다.[6]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킨테츠의 중심타선의 일원으로써 통산 192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2000년 은퇴 후 킨테츠의 2군 타격 코치를 맡았으나 2004년 5월 17일 급성 기관지염으로 향년 40세로 사망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 해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역사상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7] 당시 무라카미는 주전이 아닌 덕아웃에서 분위기를 띄우는 무드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시즌 마지막에 제대로 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8] 본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전 외야수였던 선수로 신인 시절 요미우리의 9연패(1965~1973)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1986년 트레이드로 킨테츠에 이적한 후에도 준주전으로 활약을 이어가다 킨테츠가 3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한 1989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은퇴 후엔 요미우리 등에서 타격코치를 역임했다.[9] 당시 타구가 약 10cm 차이로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상단에 맞았다. 당시 경기가 열린 가와사키 구장은 옛 인천 도원야구장처럼 펜스와의 거리가 짧은 대신 담장높이가 높았다[10] 킨테츠의 최후의 감독이자 최후의 리그 우승 감독. 킨테츠 이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11] 당시 영상을 보면, 덩치가 있는 스즈키가 홈베이스에서 거의 묘기나 다름없는 다이빙을 선보인다.[12] 당시 아사히 방송 캐스터는 삼진을 잡자, "헛스윙 삼진! 킨테츠 승리! 우승을 향한 아주 큰 일보전진을 해냅니다!"라고 외쳤다.[13] 내셔널리그 타격왕을 4회 차지한 강타자 3루수로, 거물 용병으로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일본에 진출한 시점에 이미 37세였기 때문에 노쇠화로 기대만큼의 호성적은 거두지 못하고 1년만에 퇴단한다.[14] 선두타자 9번 마키시가 루킹 삼진을 당했는데, 이 때의 판정을 두고 나카니시 후토시 킨테츠 수석코치가 심판에게 격렬히 항의하다 퇴장당했다.[15] 본래 이 해 킨테츠의 주전 3루수는 재일교포 3세 내야수인 가네무라 요시아키(김의명)이었지만, 가네무라가 6일 전 골절을 당하는 바람에 노장 후키이시가 선발출전하게 되었다. 후키이시는 이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해 이 홈런이 현역 마지막 홈런이 되었다.[16] 이 순간에 대해서도 당사자들의 증언이 남아있다. 이와노는 포수의 직구 사인을 거부한 자기 탓이라고 자책했으며, 히데아키는 원래 우익수 쪽 방향을 노리고 직구를 기다리던 상황에서 스크류볼이 날아오자 방망이가 더 잘 돌았다고 회고했다.[17] 일정 시간을 넘긴 항의가 자동퇴장인 규칙 자체는 한참 뒤에 생겼지만 분위기상 심판이 직권으로 퇴장시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8] 실제로 경기 내에서 양 측 간 신경전이 오고 갔으며 감독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등 분위기가 상당히 심각했다.[19] 정확히는 통산 10번째였으나 앞의 4번은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 시대의 우승이라 세이부 이후로만 한정 시 6번째 우승이 된다.[20]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초창기 중계 음성을 맡기도 했던 유명 아나운서였다. 2017년 위암으로 향년 71세에 별세.[21] 리그 우승이 결정난 시점에서 이 경기를 보던 세이부 선수단에게 기자들이 몰려가자 감독이 아직 롯데의 공격이 남았다며 제지했다.[22] 다만 한큐는 훗날 한신 전기철도를 자회사로 인수하게 되면서 한신 타이거스까지 덤으로 인수하게 된다.[23] 위에서 얘기한 세이부의 6년간 5번의 리그 우승 중에서 유일하게 우승을 하지 못한 해가 이 해이다. 그러나 한큐는 그 해 일본시리즈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패배했다.[24] 이 때, 방송예정되어 있다가 결방된 드라마는 범죄 수사극 유랑 형사 여정편 2화였다.[25] 그 날 원래는 리크루트 사건 보도와 조에츠선 화물열차 탈선사고, 상술한 한큐 브레이브스의 오릭스 매각 소식, 1년 전의 검은 월요일 주식 대폭락 이후 미국 월 스트리트 주식시장을 현지 취재한 특집 보도가 예정되어 있었고, 당시 오늘내일하던 쇼와 덴노의 건강 상태도 매일 보도되었다고 한다. 하나하나가 빅 뉴스인데 이걸 축소 보도해야 할 정도로 더블헤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났다는 소리다.[26] 게다가 원래는 야구 중계를 10분만 하려고 했으나 결국 중계 연장이 결정되면서 진짜로 드라마를 결방시키고 뉴스 스테이션도 야구 중계에 할애했었다. 공수 교대 중에 뉴스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당시 메인 캐스터인 쿠메 히로시는 뉴스 오프닝에서 "오늘 전해야 할 뉴스가 많습니다만 (실은 퍼시픽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시합이 지금 9회초 2사 주자 1,2루에 있는 상황이라서) 여기서 야구 중계를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고 이후 9회초가 득점 없이 끝나자 "어떤 프로가 될지 오늘 밤은 모릅니다만, 전할 소식도 많고.. 살려주세요."라고 말할 정도였다.[27] 심지어 30.9%는 칸사이가 아닌 칸토 기준이었다. 킨테츠의 연고지 오사카와는 정반대에 있는 칸토에서도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것인데, 당시 똑같이 우승이 걸려있었던 세이부 팬들도 이 경기를 TV로 봤을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기록이다.[28] 공교롭게도 당시 감독이 더블헤더 1차전 승리를 결정지은 적시타를 날린 나시다 마사타카였다.[29]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팀 오릭스의 감독이 바로 이 10.19와 1989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오기 아키라였다. 오기는 2001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퇴임했다가 2005년 양팀의 합병으로 생긴 오릭스 버팔로즈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그 해 2년 연속 최하위를 찍은 오릭스를 4위로 올려놓는 업적을 이뤘지만 시즌 종료 후 폐암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30] 14년 뒤인 2015년에 야쿠르트는 사상 5번째로 전년도 최하위에서 리그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으나, 2015년 일본시리즈에서 이대호가 중심타자로 있었던 소프트뱅크에게 14년 전 자신들이 킨테츠를 이겼던 스코어인 1승 4패로 압살당했다.[31] 심지어 홈런을 쳐낸 투수는 궈타이위엔,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 세이부의 초특급 에이스들이었다.[32] 그나마도 오늘날처럼 세이브 수만 집계했다면 위의 1차전 패전투수인 우시지마 카즈히코에게 타이틀을 뺏길 판이었으나, 당시 최우수 구원투수 타이틀은 세이브 포인트가 가장 많은 투수한테 주는 제도였는지라 세이브가 우시지마보다 적은 대신 구원승이 우시지마보다 훨씬 더 많았던 요시이가 SP를 많이 얻어내며 타이틀을 수상할 수 있었다.